「2023년 인간과 문학 봄호 권두언, 뉴욕신문 2024.1.17게재 」
김애자
구학산은 산세가 우람하고 골이 깊다. 1963년 나는 그 산의 중턱에 옹색하게 들어앉은 요사채 뒷방에서 겨울을 보냈다. 대전 문창동에 있는 메디칼 센터에서 처방해준 결핵약을 싸들고 산으로 잠적한 건 62년 4월이다. 바위틈과 소나무 아래로 진달래와 생강나무 꽃숭어리가 수채화 물감을 풀어놓은 듯 한창 번지던 초봄에 들어가 새해를 맞았고, 2월로 접어들었으니 10개월을 암자에서 보낸 셈이다.
산중의 겨울은 유독 춥고 해가 짧았다. 어둠의 시간이 길었고, 길은 만큼 적막도 깊었다. 그때 숨어 있던 고통이 나에게 들려준 건 인내가 아니었다. 저 깊은 밤의 고요함과 쓸쓸함을 자신을 위한 시간으로 만들어 보라는 권고였다. 그러지 않고선 이 광활한 우주를 집어 삼킨 거대한 어둠과 적막의 무게를 무슨 수로 감당할 것이며, 폐에서 토해 놓은 고통의 흔적을 네 홀로 어찌 감당해 낼 수 있겠냐며 채근했던 것이다.
내면에서 울려오는 독백들이 점차 우울로 얼룩진 자신을 일으켜 세웠다. 절벽과도 같았던 산중의 적막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밤이면 밖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면 어둠이 짙을수록 별빛은 명징하게 빛났고, 은하수 언저리를 둘러싸고 있는 성운은 안개처럼 자욱하였다. 그런 걸 볼 적마다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것들은 하나 같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품을 수 없는 것일수록 더 애틋하고 소중한 것과도 같았다.
점자 적막한 시간들이 내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달이 뜨면 달빛에 나를 맡겼다. 산중의 달은 희었고, 흰 달빛은 사물을 보듬어 그림자를 땅으로 내렸다. 땅으로 내려온 그림자를 밟고 마당 가운데 서 있으면 달은 머리위에서 머물렀다. 봄이나 여름처럼 계곡의 물소리도 소란스럽지 않았다. 물줄기가 얼음으로 고체화되어 바위 틈새로 조잘거리며 흘러가던 속도가 둔중하게 울렸고, 그 둔중한 울림은 내 혈관 속으로 스며들었다. 세상과 철저하게 단절되었으나 단절된 만큼 나는 그 무엇에도 간섭받지 않았다.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자유가 나를 둘러싸고 있음에 나는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처음 산으로 들어왔을 땐 밤마다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울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는 일도 지레 서글펐고, 침구며 먹는 것 모두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스스로의 선택에 하루에도 몇 번씩 후회했다. 구학산 암자로 들어가기 2년 전에도 나는 비구니들이 사는 암자에서 한동안 머물렀던 경험이 있어 절집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질서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요령을 터득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곳은 암자라고 해도 스님이 상주하지 않았다. 다만 보살 두 분이 불심 하나로 부처님을 모셨고, 행사 땐 떠돌이 대처승을 불러다 수고비를 주고 운영하는 곳이라 절집 고유한 질서가 없었다.
암자엔 아홉 살 먹은 소년과 소녀가 두 보살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시신경이 마비된 작은 보살이 잔심부름을 시키기 위해 거두었다고 했다. 나이에 비해 몸집이 작았고 영양실조로 얼굴에는 마른버짐이 피었으며 피부도 가무잡잡했다.
그 아이들은 나를 학생아가씨로 불렀고 저녁이면 종종 내 방으로 들어와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특히 소년은 곁에 앉기만 하면 내 손을 만졌고, 손가락으로 옷자락을 감아쥐고 곁에서 잠이 들기도 했다. 두 살 때 엄마를 여의고 아빠가 혼자 일곱 살까지 키우다 힘에 부쳐 절에 맡겨진 아이였다. 소녀도 가난하여 밥이라도 얻어먹으라고 절집으로 보내졌다고 했다. 두 아이들은 눈만 뜨면 밥값을 치르기 위해 마른 솔방울과 갈비를 주어다 불쏘시개를 댔고, 여름엔 밭에서 해종일 풀을 뽑았다.
절집 보살들은 불법에 대해 무지했고, 학교에도 보내지 않았다. 그래도 소년은 저녁을 먹고 나면 법당으로 올라가 냉수를 떠다 까치발을 들어 부처님께 공양으로 올렸다. 법당 안 부처님도 아이 몸집만큼 작았다. 어느 장인이 흙을 구어 조성한 불상이었다. 아이는 제 몸집만 한 부처님 앞에서 커다란 목탁을 들고 탕탕 두들겨 대는 뒷모습이 나를 슬프게 했다. 목탁을 치며 외는 천수경은 행사 때 모셔온 대처승들로부터 귀동냥으로 암기한 것이라 음절도 내용도 엉터리였다. 법당 지붕 위로 별들이 들꽃처럼 피어났고, 뜻 없이 치는 소년의 목탁 소리와 염불 소리는 허공으로 흩어졌다.
어느 날 저녁, 허공으로 흩어지던 염불과 목탁 소리가 죽비가 되어 내 등짝을 후려치면서 일갈했다. ‘네가 자살을 하겠다고 이 산중으로 들어온 물건이 아니더냐고’,
나는 고개를 숙였다. 암자로 들어오기 전, 약방 열 곳에서 세코날 50알을 사 모았다. 그리고 산으로 들어와 겨울이 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눈이 내리는 날, 산속 깊이 들어가 그 약으로 목숨을 끊고 말리라던 결심이 소년이 치는 목탁 소리와 염불이 죽비가 되어 나를 후려쳤던 것이다. 동시에 호강에 겨운 감정의 사치란 각성이 내 심장을 관통했다. 나는 방으로 들어와 가방 속에 감추어 두었던 약병을 꺼내 들고 계곡으로 내려가 물과 숲을 향해 알약 50알을 모두 던져 버렸다. 그리곤 이어 겨울이 돌아왔다.
산중의 겨울은 평화로웠다. 아이들이 노동에 시달리지 않아서 좋았고, 두 아이들이 눈을 뭉쳐들고 눈싸움을 하면서 산골짜기가 울리도록 깔깔대는 모습은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 집에서 보내주는 하숙비로 절집 식구들이 양식 걱정을 하지 않는 것 또한 다행한 일이었다.
나는 육체의 고통이 내게 들려주었던 지혜서대로 적막 속에 들어 있는 자유를 아꼈고, 산중의 밤을 사랑했으며, 산과 골짜기를 홀로 건너가는 달과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을 사랑했다. 창문에 덧댄 문풍지가 밤바람에 파르르 공명하는 것도, 뒷산에서 들려오는 소나무의 그윽한 울림까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인간이란 완전히 개체다. 가족이 있어도 육체의 고통이나 죽음은 오로지 혼자만이 겪는 일인칭의 존재다. 나는 일인칭의 존재로 자연의 큰 품으로 들어가 자연의 순리에 나를 맡기고 적막한 자유를 명상과 책 읽기로 이용했다. 사촌 오빠와 올케처럼 결핵균에게 살과 피를 다 먹혀 가죽만 붙은 참혹한 몰골로 죽어나가지 않았다.
시간은 태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을 껴안고 흘러간다. 그 유구한 흐름을 타고 나는 강 하류에 정박했다. 내 옷자락을 손가락으로 거머쥐고 잠들었던 소년도 독학으로 예불과 기존의 상식을 터득하고 20세에 암자에서 뛰쳐나와 양산 통도사로 들어갔다. 타고난 손재주와 성실한 성품을 인정받아 강원의 강사선생으로부터 사랑을 독차지 했고, 그 분의 문하생으로 10여 년간 수학하고 돌아와 절을 키우고 주지로 안착했다.
지금은 2월 중순이다. 그해 겨울을 구학산에서 보내고 이맘때 내려와 세상 속으로 합류해 살아온 세월이 60년이다. 그동안 살아보니 행복과 불행, 실과 득, 내면과 외면, 밝음과 어둠이란 상대성 원리와 함께 돌아가는 거대한 순환의 구조는 임계점을 같이했다. 다만 자신이 만든 프로그램의 변수에 따라 결과와 삶의 가치가 달랐다. 이제는 그 모두를 내려놓았다. 묵상만을 위한 시간이 필요할 때이다.
첫댓글 "자신이 만든 프로그램의 변수에 따라 결과와 삶의 가치가 달랐다"
60년 전 구학산 암자에서 죽음과 같은 고통을 인내하셔서
이런 훌륭한 작품이 탄생했네요.
어둠과 적막의 무게를 작품으로 승화시키신 인간 승리에 박수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