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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714
3월29일 [성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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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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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BI3q9oqkq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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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반드시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무한 리필 에너지 충전소같은 집이 있었으니, 베타니아에 위치한 절친 라자로의 집이었습니다.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 15스타디온(약 2.8킬로미터) 떨어진 곳, 올리브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오르내리실 때 마다 자주 라자로의 집에 들르셔서 숙식을 해결하곤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종종 벌어진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의 껄끄럽고 날선 대화로 끝내신 예수님께서는 지친 몸을 이끌고 베타니아로 내려오셔서 휴식을 취하셨습니다. 그런 날 밤에는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와 마주 앉아 밤늦도록 포도주잔도 기울이셨을 것입니다.
손님 맞이의 총 책임자는 언제나 마르타였습니다. 그녀는 엄청나게 먹고 마셔대는 제자들을 위해 빵을 굽고 또 구웠습니다. 하루 온 종일 지지고 볶았습니다. 그들이 떠나고 나면 사흘씩 앓아 누울 정도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본당 성모회장으로 적격인 인물이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힘들고 굳은 일은 도맡아 하는 사람, 이웃의 필요성에 언제나 즉각적으로 응하는 사람이 마르타였습니다. 성격은? 착하고 성실했습니다. 그러나 때로 과격하기도 하고 쉽게 흥분도 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과 일행들 식사 준비에 바빠 죽겠는데, 동생 마리아를 아무리 찾아도 없었습니다. 나중에야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는 마리아를 발견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마르타는 주저없이 예수님께 따집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 복음 10장 40절)
마르타는 예수님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힘들 때면 힘들다고 솔직하게 그분께 털어놓을 수 있는 용기를 지녔습니다. 그만큼 그녀는 예수님과 절친했습니다. 친한 오빠처럼 예수님을 각별히 신뢰했습니다.
그럼 마리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동생을 향한 언니 마르타의 까칠하고 날선 발언을 통해 마리아의 성격을 대충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돌아가는 분위기 파악에 더딘 사람이었습니다. 살짝 ‘공주과’라고나 할까요?
산더미 같은 일감 앞에 언니가 쩔쩔 매고 있으면,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도와주는 것이 당연할텐데, 동생에게는 그런 ‘촉’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리아는 종종 존재 자체로 마르타에게 스트레스를 안겨주곤 했습니다.
마리아가 그렇게 된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과의 운명적인 만남 이후 모든 것이 180도 바뀌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버리셨습니다. 이제 그녀에게 있어 예수님은 삶의 유일한 의미가 되어버렸습니다.
마리아는 이제나 저제나 예수님을 목빠지게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시기만 하면 만사 제쳐놓고 쪼르르 예수님께로 달려갔습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그분을 바라봤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수난을 앞둔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방문하셨을 때, 예수님을 향해 보여준 마리아의 흠모의 정은 절정에 도달했습니다.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나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요한 복음 12장 3절)
마리아는 자신의 긴 머리를 풀었습니다. 그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렸습니다. 이는 당시 그야말로 ‘내밀한’ 관계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가장 극진한 애정의 표현이었습니다.
주변사람들 오해사기 딱 좋을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개의치 않습니다. 이제 곧 떠나가실 예수님, 그리도 흠모했던 주님, 참 사랑이 무엇인지 깨우쳐주신 예수님의 큰 사랑 앞에 자신이 기울일 수 있는 모든 정성을 다합니다.
돌아보니 저 역시 하느님으로부터 참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보여준 마리아의 행동을 바라보니 참으로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떠나가실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 재산, 마음, 정신, 목숨, 에너지, 삶 전체를 다 바치는 마리아입니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반드시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되겠지요. 정성과 진심이 담긴 행동으로 말입니다.
성주간은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 죄인들을 향한 크신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시기입니다. 이제 골고타 언덕을 향해 올라가실 예수님을 향해 우리의 정성과 마음을 표현하는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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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t80bX4liQ-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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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없는 사랑은 기름 없는 자동차, 실이 없는 바늘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수난을 앞두시고 베타니아의 마리아로부터 비싼 향유로 발씻김을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준 것에 대한 제자들 감사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비록 제자들이 씻어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분께 죄의 씻김을 받은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키우시는 목적은 당신처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기 전까지 제자들은 사랑할 능력을 갖추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감사함 없이는 참다운 사랑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감사 없이 사랑하려는 시도는 기름 없는 자동차를 운전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와 같은 어리석은 이를 대표하는 제자가 가리옷 유다입니다. 그는 마리아의 행위를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장정만도 5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다 먹일 수 있는 빵이 2백 데나리온이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향유 한 병에 3백 데나리온이라면 그 가치가 얼마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어쨌건 겸손한 봉헌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은 감사 없이 이웃사랑만 강조하는 가리옷 유다의 정체를 밝힙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남들이 들으면 가리옷 유다가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주는 것처럼 들리지만, 하느님께 받은 사랑에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사랑하려 해도 도둑밖에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 삶 안에서는 이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까? 부부 사이에 사랑만 강조하며 감사는 잊고 살지 않습니까?
호랑이 남편과 아내 소의 이야기입니다. 호랑이 남편은 소 아내를 극진히 사랑합니다. 그래서 귀한 고기를 잡아 옵니다. 하지만 채식주의자인 소 아내는 남편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호랑이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고기를 잡아 와도 식탁에 오르는 것은 항상 채소입니다. 자기를 토끼로 여기는 것 같아 기분이 상합니다.
상대에게 감사를 찾아내려 하기보다는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만 하려 했던 이 둘은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혼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감사 없는 사랑은 실이 없는 바늘과 같습니다.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꿰매는 것은 없고 상처만 남습니다. 감사 없는 사랑은 기름 없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려 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감사가 일어나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사랑이 충만한 이로부터 사랑을 받아 감사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감사하면 남편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성당에 나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도 내 향유 옥합을 깨뜨릴 수 없다면 누구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좀 지난 이야기이지만, 요즘 같이 어려울 때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과 좋은 영향을 미쳤던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홍대 철인 7호 치킨집 사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부모를 여의고 몸이 아픈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던 두 형제는 치킨이 먹고 싶어 5천 원을 들고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여러 치킨집에서 퇴짜를 맞은 상태였습니다.
그날 철인 7호 치킨집 사장도 코로나 여파 때문인지 그날 치킨을 한 마리도 팔지 못했고 그래서 월세도 밀려 시름에 잠겨있던 차였습니다. 바람이라도 쐬려고 뒷문을 열고 나가니 골목에서 이 두 형제가 대화하는 것을 듣습니다. 동생은 연신 “치킨, 치킨!”이라고 외쳐댔고 형은 5천 원을 꼭 쥔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치킨집 사장은 아이들에게 가게에서 가장 잘 팔리는 치킨 요리를 먹도록 해주었고 돈을 받지 않고 오히려 사탕을 주어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배고플 땐 언제라도 찾아오라는 말도 해주었습니다. 동생은 그 이후에도 여러 번 치킨집을 찾아왔고 사장은 동생을 예뻐해 주며 미용실에서 이발도 시켜주었습니다. 이 사정을 안 미용실 사장님도 돈을 받지 않고 아이 머리를 깎아주었습니다.
거의 1년이 흐른 뒤 고등학생인 형이 이 사연을 편지에 빼곡히 적어 가맹점 대표에게 보냈고 그래서 이 사연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가맹점 대표는 1년간의 월세와 천만 원의 물품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돈쭐’을 내줘야 한다며 먹지도 않으면서 치킨을 시켜 돈을 기부하는 등 엄청난 돈 폭격을 가했습니다.
이에 박재휘 사장은 잠시 가게를 닫는다는 말을 하고 그동안 도와주신 것들에 자신도 더 보태서 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6백만 원을 기부했습니다. 자신이 한 것에 비해 너무 많이 받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는 “현재 많은 관심으로 인해 주문 폭주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밀려드는 주문을 다 받자니 100% 품질을 보장할 수 없어 영업을 잠시 중단합니다. 이른 시간 안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라고 글을 남겼습니다.
가맹점 대표에게 편지를 보냈던 형은 그 편지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저도 사장님처럼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며 사는 멋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형은 아무리 사랑을 하려 해도 세상은 불공평한 곳이란 믿음 때문에 사랑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아가 강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치킨집 사장님의 사랑을 받고는 그와 같은 사랑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는 자신의 향유 옥합을 깨뜨려 편지로 그 감사를 전했습니다. 이렇게 누구에겐가 나의 향유 옥합을 깨뜨릴 사람이 없다면 그런 상태로는 어떤 진정한 사랑도 나올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인물은 셋입니다. 이 셋의 사랑의 단계는 이렇습니다.
첫째. 모기인 상태인 가리옷 유다입니다. 그는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사랑에 감사가 필요 없다고 여기는 이입니다. 모기는 항상 배고파서 감사의 마음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둘째. 아기로 사랑하는 마리아의 단계입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위해 향유를 깨뜨립니다. 이런 마음이라면 곧 이웃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리아처럼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놓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그분의 사랑에 감동하고 감사의 마음을 키워야 합니다.
셋째. 하느님 자녀인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는 이웃에게 감사의 마음이 솟아나게 만들어서 귀한 향유 옥합을 봉헌하게 만드십니다. 사랑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랑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철인 7초 치킨 사장님처럼 감사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느 단계에 있는지요? 감사의 마음이 솟아나지 않는 사람에게는 사랑이 불가능함을 명심하고 나도 이웃도 사랑이 솟아나게 합시다. 이를 위해 십자가를 지셔야 하겠지만 오늘 복음은 십자가를 통해 오는 부활의 행복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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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2,1-11 :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하였다.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1절) 베타니아로 가신 것은 유대인들이 미리 준비하여 열 나흗날까지 보관하던 파스카 양처럼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죄를 없애실 흠 없는 어린 양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래서 파스카 축제 닷새 전에 예루살렘으로 가실 생각이었다. 라자로와의 식사는 유대인들의 관습이었다. 파스카 양을 준비하기 전에 잠시 흥겨운 시간을 가졌는데, 양을 마련한 후에는 축제 때까지 단식이나 정화하는 데 마음을 쏟았기 때문이다. 이 식사는 또한 예수님의 권능을 상기시켜 주는 식사이다.
마르타는 정성스럽게 식사 준비를 하고 온 마음 다해 그리스도께 시중을 들었다. 라자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하는 영예를 가지고 식사를 한다. 그리고 마리아는 비싼 나르드 향유를 가져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족들의 시중드는 것을 흐뭇해 하시면서 받아주신다. 마리아는 여기서도 시중을 들지 않고 제자로서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다. 이는 우리의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는 것이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3절) 이렇게 향유를 부어 그 향기가 가득 차게 하는 것은 그 행위가 하느님 때문에 그리고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행은 좋은 냄새를 풍기는 향유이다. 자선을 베풀고, 병자를 찾아가고, 낯선 이들을 맞아들이는 일과 겸손,친절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것이다. 이 향유가 온 집안 즉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내로 가득 채우는 값진 향유가 될 것이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5절) 유다는 열 두 사도 중의 하나였고, 돈주머니를 관리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돈 때문에 배반하지 않도록 그 일을 맡기신 것 같다. 믿음이 없고 사악한 유다는 자신을 믿어준 사람들을 잊어버리고, 자신이 맡고 있던 돈주머니에서 훔치는 것은 물론 자신을 믿어준 주님을 배반하고 만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7절) 여기서 보면 유다가 순수하게 말하고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행동에 담신 신비를 설명해 주는 것 같다. 이것은 당신께서 곧 돌아가실 것이며 향료와 향유로 당신의 장례가 치러질 것임을 알려주신다.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8절) 사실 제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할 시간은 많이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을 떠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다를 꾸짖으시면서 향유를 부은 마리아를 두둔해 주셨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그분이 살려주신 라자로를 보려고 몰려 왔다. 그러니까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려고 결의하였다고 한다. 생명을 다시 얻어 살아난 사람을 죽이려 하는 것은 참으로 눈먼 자의 눈먼 생각이 아니겠는가?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분이 당신을 죽이더라도 당신은 다시 살아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셨다. 우리도 보면 이런 눈먼 자들의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 죽은 이들이 생명으로 돌아오고 죄를 용서받아 되살아나는 것을 보고 그들을 시샘하며 그들이 다시 죽기를 바라고 죽이고 싶어 하는지도 우리자신을 살펴야 한다. 예수님께로 가는 것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
유대 지도자들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막으려고 살해에 또 살해를 저지를 생각을 한다. 라자로를 죽이면 그 기적의 힘도 지울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러면 나는 선행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는 삶을 살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며 부활을 준비하고 있는지 성찰하면서 주님을 따르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도록 기도하면서 이 성주간을 지내도록 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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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오랫동안 알던 분의 건강이 많이 좋지 않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하느님 곁으로 가실 시간이 가까워졌다는 소식도 함께 말입니다. 급한 마음으로 차를 몰아 병원에 도착하여 그분을 보았습니다. 활달하고 활기찼던 모습은 사라진 채, 야위고 안쓰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는 그분께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손잡고 함께 기도하고 생의 마지막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이마와 손에 기름을 발라 주는 것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고는 일주일 뒤에 부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분의 안식을 위하여,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죽음을 준비하십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을 기념하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 ‘순명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베타니아’에 있는 라자로와 마르타, 마리아의 집에서 열린 잔치에 참여하십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아 드리는 일은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다가올 두려움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유다 이스카리옷은 오직 자신의 돈주머니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향하여 한 발짝 더 내딛으실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여러분은 어떤 역할을 맡으시겠습니까? 마리아입니까? 아니면 유다 이스카리옷입니까? 죽음의 길을 함께 걸어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 길을 걷는 것 자체도 어렵겠지만 그 길의 끝이 헤어짐이라는 사실은 우리를 더 아프고 힘들게 합니다.
이제 마리아처럼 우리도 그 길을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죽음을 향하여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에 우리도 한 발짝 더 다가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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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다>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요한 12,1-3)
이 이야기 앞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이야기가 있습니다.(요한 11,38-44) 그래서 베타니아에서 베풀어진 잔치는,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것에 대해서 감사드리고, 동시에 라자로가 다시 살아난 것을 축하하기 위한 잔치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향유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린 일은, 오빠를 다시 살려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일 때문에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했고, 수배했다는 이야기도 앞에 있습니다.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요한 11,53)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계신 곳을 알면 신고하라는 명령을 내려 두었다."(요한 11,57) (최고의회는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공개적으로 지명수배 했습니다.) <마리아도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했다는 것과 또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공개적으로 지명수배 했음을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죽음의 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그런 상황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또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떻든 비싼 향유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은 일은 자기 나름대로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존경심과 사랑을 최대한으로 표시한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요한 12,4-6)
복음서 저자는 유다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에” 마리아의 행동을 비난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설명은 유다가 ‘돈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설명입니다. 유다는 마리아의 행동을 ‘쓸데없는 일에 돈을 낭비하는 행동’으로 생각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안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신앙인들의 신심 행위를 “쓸데없는 일에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유다가 돈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은, 돈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뜻인데, 아마도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 일에 대해서도, 또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공개적으로 지명수배한 일에 대해서도 관심 갖지 않고 돈에만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오직 예수님만 생각하고 있었고, 예수님에게만 온 마음을 쏟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리아가 예수님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가난한 이들에 대해서도 관심 갖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만일에 마리아가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고 자기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옹호해 주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복음서 저자의 설명은, “마리아가 한 일은 향유 가격으로 판단할 일이 아니다. 그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것을 강조하는 설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요한 12,7-8)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더라도, 예수님의 장례를 의식하고서 향유를 준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즉 장례를 미리 치른다는 생각을 하고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행동을 예수님께서 당신의 장례에 연결해서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 입장에서 ‘해석’하신 것입니다. (마리아의 의도를 대신 설명하신 것이 아니라.)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는 “마리아를 비난하지 마라.”입니다.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라는 말씀에는, “마리아의 행동은 내 장례를 상징한다.”라는 뜻과 “내 장례 때에 마리아의 행동을 기억하여라.” 라는 뜻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향유를 이미 전부 다 예수님의 발에 부었기 때문에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라는 말씀은, 글자 그대로 기름을 간직하라는 뜻이 아니라, 마리아의 행동을 기억하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유다는 마리아의 행동을 ‘쓸데없는 일에 돈을 낭비하는 행동’으로 생각하고 비난했지만, 예수님께서는 ‘훌륭하고 거룩한 행동’이라고 옹호하셨습니다.)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이라는 말씀은,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은 평소에 늘 해야 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을 마리아가 평소에 늘 잘하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의 ‘하느님 사랑 실천’과 ‘이웃 사랑 실천’은 하나로 일치되어 있어야 합니다. 마리아는 그렇게 두 사랑의 실천이 일치되어 있는 참된 신앙인이었을 것입니다.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특별한 상황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우이웃 돕기’를 중단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 특별하고 예외적인 비상 상황이니까 특별한 지출이 필요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지금은 나의 수난과 죽음에 더욱 집중해야 할 때이고, 동참해야 할 때이다.”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나를’, 또 ‘우리 모두를’ 살리기 위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더욱 깊이 묵상하고, 그 일에 동참하는 것은 ‘내가’, 또 ‘우리 모두가’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함께’ 해야 하는 일입니다. ‘가난한 이들’과 ‘가난하지 않은 이들’을 구분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것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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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얀마에서 군부 쿠데타가 발생했습니다. 군사독재를 바라지 않는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서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군부는 같은 국민의 가슴에 총을 겨누었고,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습니다. 교황님께서도 폭력사태를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대화로 문제를 해결 하도록 촉구하였습니다. 국제사회도 한 목소리로 폭력사용 중지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젊은 학생들이 대한민국 대사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도와달라고 외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대한민국은 군사독재 정권을 국민의 힘으로 끌어내렸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역시 민주주의의 제단에 희생의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386세대인 저도 거리에서 최루탄 냄새를 맡았습니다. 백골단에 의해서 매 맞고 잡혀가는 학생들을 보았습니다. 광주의 참혹한 모습을 영상으로 보았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미얀마에 더 이상의 희생이 생기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미얀마에 민주주의의 봄이 오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성주간 월요일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두 개의 깃발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무고한 사람을 죽이려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수석 사제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 라자로를 죽이기로 결의합니다.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미얀마의 군사 정권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국민의 힘으로 선출된 국회의원들을 감금했습니다. 비폭력으로 저항하는 시민들에게 총을 겨누었습니다. 41년 전에 한국에서도 무고한 시민들에게 발포명령을 한 집단이 있었습니다. 민주주의를 외친 사람들을 폭도로 몰아 잡아가고 고문한 집단이 있었습니다. 2,000년 전에도 있었습니다. 복음을 선포하였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집단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전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죽는 것이 예언이라고 말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서 무고한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희생과 죽음까지도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의 깃발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얼마 전에 작고하신 고 백기완 선생님은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민중을 위해서 평생 고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민주주의를 위해서 투쟁하였습니다. 그분의 글에 곡을 붙인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입니다. 장소는 달라도 독재와 폭력에 저항하는 곳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도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피와 땀을 닦아드린 베로니카도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에 있었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성주간을 시작합니다. 우리는 어느 깃발 아래에 있어야 할까요?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어느 깃발 아래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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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이홍일 토마스 신부님]
얼마 전이었다. 스물여섯 살 청년이 하늘나라로 갔다. 본당에서 초등부 교리교사를 열심히 하던 청년이었는데 암 선고를 받고 투병을 하다가 결국 하느님 품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곳에 온 지 이제 두 달. 본당에 대해 제대로 알기도 전에 죽음이 가까웠다는 연락을 받고 병원을 방문했다. 청년은 자신의 생명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모른 채 그저 병이 낫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말하기가 두렵다고 하면서 그저 기도만 할 뿐이라고 했다. 그런데 의사들한테서 목숨이 다한 사람인데 아직 살아 있다는 말을 들을 때 너무 속상하다며 울었다.
청년은 결국 내가 찾아간 지 4일 만에 하늘로 갔다. 그의 부모는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에 그가 한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꿈에 예수님이 오셔서 같이 가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죽는 거야?”라고 물어봤다고 한다. 청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부모에게 손을 흔들고 잠이 들었는데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마지막 가는 길, 난 어떻게 준비를 하고 있는가?’ 생각해 본다. 남들처럼 열심히 살았던가? 아니면 기도라도 열심히 했던가? 내가 죽으면 울어줄 사람은 있을까? 내가 신앙인으로 진정 사랑한 사람이 있던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우리 모두 그렇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늘 부족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 과연 이 청년처럼 나의 마지막에도 예수께서 오실까? 아니면 다른 모습으로 마지막을 보게 될 것인가? 내 삶의 마지막 순간에 예수께서 오시리라 믿으며 그분의 자비에 나를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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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강동진 알로이시오 신부님]
<봉헌>
예수께서 라자로의 집을 방문하셨을 때 라자로의 누이 마리아는 값진 순 나르드 향유 한 근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드립니다. 이를 본 유다는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하지요. 그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유다의 말대로 3백 데나리온이나 하는 향유는 매우 비싼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값진 것을 예수님을 위해 아낌없이 바치려고 하는 마리아의 마음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선물의 값어치가 주는 사람의 애정과 항상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일수록 값지고 귀한 것을 주고 싶어하는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수님께 그토록 값비싼 향유를 사용하였다면 그만큼 예수님을 사랑하였다는 말이 되겠죠.
그러므로 교회가 주님께 값나가는 것을 바치는 것을 너무 나쁘게만 볼 것은 아닙니다. 웅장한 성전을 지어 봉헌하고, 화려한 장식으로 성전을 꾸미고, 많은 돈을 들여 성상을 조각하는 등의 행위는 그 동기만 순수하다면 주님을 그만큼 사랑한다는 우리들 마음의 표현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께 어떤 값진 것을 바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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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김유철 요한보스코 신부님]
<잘 봅시다>
사람은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시각을 이용해 사물을 보는 눈과 또 하나는 마음으로부터 보는 눈이라고 합니다. 시각을 통해 사물을 볼 때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책이구나, 저것은 자전거구나’ 하고 구분할 뿐입니다.
이러한 단계가 끝나면 마음의 눈이 작동을 합니다. ‘책은 싫어! 머리 아파, 자전거 타기는 좋아해! 마을 밖 공터에서 신나게 달려야지.’ 이어서 행동이 나타납니다. 책을 뒤로 하고 자전거를 끌고 나가는 것이지요. 이를 누군가가 막으면 평화는 사라지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타니아에서 다시 살린 라자로와 함께 식사를 하십니다.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셨다는 것은 생명의 주관자라는 것을 알리는 사건으로 이분이 바로 구약에서부터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아, 그리스도임을 명백히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수석사제들과 그 무리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이유로 예수님을 미워하게 되고 급기야는 살인을 통해 그분의 업적을 지우려 합니다.
욕심과 미움으로 물든 마음의 눈이 악을 행하도록 몸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살인은 십계명을 어기는 큰 죄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죽이기로 결의를 합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마음의 눈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그 완전한 방법은 전능하신 하느님을 참으로 열심히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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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배타니아의 라자로와 마리아와 마르타 집에서 벌어졌던 잔치 중에 있었던 일을 전해줍니다.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렸습니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냄새가 가득하였습니다.”(요한 12,3)
그렇습니다. 오늘도 내가 있는 우리 집, 우리 공동체 안에는 내 형제인 마리아가 부은 사랑의 향유가 가득합니다. 그런데 막상, 온 몸을 던져 헌신하고 있는 형제들의 사랑을 나는 왜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왜 이 숨 가쁜 사랑의 숨결을 듣지 못하는 것일까? 형제들 가슴속 깊게 흐르는 사랑의 마음을 듣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왜, 그 사랑의 향기를 맡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왜, 공동체에 파고 든 그 향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내 온몸을 적시고 흐르는 그 사랑의 향기를 왜, 알지 못하는 것일까? - 그것은 내게 사랑이 없어, 사랑의 마음을 듣지 못하는 까닭이 아닐까?
오늘도 내 형제들은 예수님을 섬기며 발을 닦아드리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그런데 막상, 나는 왜 아직도 형제들의 땀과 눈물을 닦아주지 못하는 것일까? - 그것은 결코 닦아드릴 머리카락이 없어서가 아니라, 머리를 수구려 발까지 자신을 낮출 줄 모르는 까닭이 아닐까?
오늘도 마리아인 내 형제들은 자신을 부수고 향유를 내뿜으며, 성체 앞에 머리 숙여 조아리건만, 나는 왜 이 아름다운 향기를 맡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 그것은 아직도 나를 치장하기 위한 향유를 필요로 하고 있는 까닭은 아닐까? 아직도 자신을 감추어 둔 채, 다 부수지 않은 까닭이 아닐까? 값비싼 것을 소모하고 낭비할 수 없다면서, 오히려 물질에 애착하고 있는 까닭은 아닐까?
사실, 오늘도 옥함을 깨뜨려 향유를 쏟아 붓듯 내 발에 사랑이 쏟아지는데 나는 왜, 이 사랑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 - 그것은 재치기로 코를 풀어내야만하듯, 내 영혼의 옥함에 불순물이 너무도 많은 까닭이 아닐까? 아직도 구린내를 담고 있는 나를 깨부수지 못한 까닭이 아닐까? 아직도 자신을 깨부수지 못한 나는,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까닭이 아닐까?
이토록 눈멀고 귀먹고 마음마저 굳어져버린 나는, 오늘도 자신과 물질을 버려서 예수님을 차지하는 마리아가 되기보다, 자신과 물질을 차지하여서 예수님을 버려버리는 유다가 되곤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온 집안, 온 공동체를 사랑의 향유로 가득 채워주십니다. 이제 나는 온 집안에 가득 퍼진 이 감미로운 사랑의 향기에 종일토록 취할 것입니다. 내내 토록 찬미할 것입니다. 그 향기 내 온 몸에 묻혀, 바다소라처럼 향 내음 되어 날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향내 온통 베인, 이 집안을 사랑할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여러분! 오늘 하루 그리스도의 향기에 흠뻑 취하셰요. 그리고 향기가 되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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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요한 12,3)
주님!
옥함을 깨뜨리듯 제 자신을 부수고, 부서질수록 사랑의 향기 짙어가게 하소서.
향유를 쏟아 붓듯, 내 발에 쏟아지는 사랑을 보게 하소서.
제 영혼에 새겨진, 사랑의 숨 가쁜 소리를 듣게 하소서.
온 집안에 가득한, 감미로운 사랑의 향기에 취하게 하소서. 내내 토록 취하게 하소서.
당신의 숨결이 온통 베인, 이 집안을 사랑하게 하소서.
집안에 가득 퍼진, 그 향기 뿜어대는 당신 마음 닮아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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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요한12,3)
<거룩한 낭비!>
마리아가 예수님께 한 이 행위를 보고,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요한12,5)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돈을 가로채는 도둑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드린 마리아의 도유 행위와 발씻김 행위는 예수님께 대한 극진하고 헌신적인 사랑의 표현입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마리아의 이 행위를 '쓸모없는 낭비'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행위를 당신의 장례와 연결시키셨고, 당신의 장례를 준비하는 '거룩한 행위', '거룩한 낭비'로 보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역시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쓸모없는 낭비로 보이겠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우리의 구원과 직결된 '거룩한 행위', '거룩한 낭비'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나의 구원과 직결되어 있고, 주님께서 보시기에 기뻐하실 나의 거룩한 행위, 거룩한 낭비는 무엇이어야 할까?
그것은 바로 이런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곧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들에게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를 따뜻하게 맞아들이고,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고, 병든 이들을 돌보아 주고, 감옥에 있는 이들을 찾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마태9,13)
낮은 곳을 바라보고, 낮은 곳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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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밥은 먹고 가렴>
요한 12,1-11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다, 유다인들이 라자로까지 죽이기로 결의하다)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많은 유다인들의 무리가 몰려왔다. 예수님 때문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도 보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밥은 먹고 가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아들이
주섬주섬 짐을 챙깁니다
군경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유혈이 낭자한 시위현장으로
떠나기 위함입니다
다소 어두운 표정으로
말없이 짐을 싸고 있는
아들 곁에 엄마가 있습니다
아들을 말리지 않습니다 다만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따뜻한 집밥을 차리며 말합니다
밥은 먹고 가렴
많이 먹고 힘내렴
네가 돌아오든 돌아오지 않든
엄마는 네가 자랑스럽단다
언젠가 반드시
어느 누구도 어느 무엇도
결코 갈라놓을 수 없는
감격스러운 만남으로 이어질
가슴 미어지게 아름다운 헤어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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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참 신기하죠. 내 고민엔 갈피를 못 잡고 허우적대면서 남의 고민을 들으면 해답이 너무도 선명히 보이고, 내 집 대청소를 할 땐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한데 남의 집 정리하는 거 도와주러 가면 너는 어떻게 그렇게 정리를 잘하냐는 소리를 들으니 말이에요.’(이석원, ‘우리가 보낸 가장 긴 밤’ 중에서)
언젠가 읽은 책의 한 구절입니다. 이 책의 내용처럼,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보지 못하면서 남은 너무나 잘 보는 것 같습니다. 내 눈이 나를 향해 있지 않고 남을 향해 있어서 그럴까요? 그래서 얼마나 많은 비판을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자신의 비판을 가지고 남을 설득하려고도 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분야에서 전문가들이 예측을 쏟아냅니다. 이 말대로 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이 전문가의 예측은 실제로 50%도 맞지 않는다는 조사 결과가 있습니다. 전문가의 말도 정확한 예측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전문가도 이런데 하물며 비전문가인 나의 말은 얼마나 맞을까요?
비판적인 시각이 이 세상을 발전시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비판적인 시각이 행복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다. 자기를 먼저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먼저 필요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향한 부정적인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습니다. 이는 그의 겸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먼저 머리에 향유를 붓지 않고 겸손하게 시중을 든 다음에야 그렇게 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런 겸손에서 주님께서 받으실 고통과 시련을 위한 준비가 나오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향유를 붓는 마리아의 모습에 유다는 신심을 가장하여, 자신이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때 그분 목숨에 매긴 값보다 향유를 더 값진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비판적인 시각으로 주님과 향유를 붓는 마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리아의 사랑 행위는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는 일과 대립하는 행동으로 볼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자체로, 곧 그들 곁에 오래 계시지 않을 주님을 영광스럽게 한 행위로 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는 일을 사랑의 실천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이를 제쳐 놓아서는 절대로 안 되기 때문에 섬기는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선 마리아에게 당신의 몸을 맡기실 수 있었습니다.
부정적인 시각을 갖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특히 주님의 일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보다, 주님을 섬기는 데 최선을 다하는 마음으로 다가서야 합니다. 마리아처럼 주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시간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용기있게 앞으로 전진하며, 식별을 통해 하나가 되고,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꿈을 찾아내 실행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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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진 덕분에….>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 아이다 미츠오의 ‘넘어진 덕분에’라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넘어지고 쓰러진 덕분에 사물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실수와 실패를 반복한 덕분에 조금씩이지만 사람이 하는 일을 따뜻한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몇 번이나 궁지에 몰린 덕분에 인간으로서 연약함과 칠칠치 못함을 진저리가 날 만큼 알게 되었습니다.
속고, 배반당한 덕분에 바보처럼 정직하고 친절한 인간의 따뜻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마주할 때마다 인생의 덧없음과 지금 여기 살아 있다는 사실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맛보게 되었습니다.
넘어진 것도, 쓰러진 것도, 속은 것도, 배반당한 것도 절대 유쾌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부정적으로만 생각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부정적인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측면을 발견하는 사람만이 새로운 삶을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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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섬김의 지도자>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좋은 사람, 아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에게는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 주고도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모두를 줄 수 없다면 아직 사랑이 무르익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마리아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3키로그램)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하였습니다.(요한12,3)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 자기의 아주 소중한 것을 바쳐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냄새가 가득했다는 것은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집안에 가득한 것을 나타냅니다. 이럴 때는 냄새가 아니라 향기라고 해야 하는데……
어찌 되었든 향유를 발에 부었습니다.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공식적인 지도자임을 상징하고 일반적으로는 머리에 받게 되는 데 예수님께서는 머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발에 기름부음을 받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통치가 아래에서 위로 향할 것임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지도자들은 위로부터 아래로 내리누르는 권력을 추구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섬김으로써 권위를 가지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을 곱지 않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어지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지 않는가?”(요한12,5) 하며 향유의 값어치를 계산하였습니다.
향유를 붓는 행위를 존경과 사랑, 믿음의 표현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간적으로 계산하였습니다. ‘부처 눈에는 부처가, 돼지의 눈에는 돼지가’ 보이는 법입니다. 유다의 눈에는 돈이 보일 뿐이었습니다. 돈주머니를 관리하면서 돈을 가로채던 유다에게는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자기 배를 채우는 수단으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지금 나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님께 바쳐드려야 함을 알지만 아는 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큽니다. 나의 시간과 능력, 재물, 공간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에 기꺼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죽었던 라자로를 살리심으로써 부활의 생명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수석사제들은 라자로를 죽이기로 결의하였습니다.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들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요한12,11)
‘좋은 일에는 항상 마가 낀다.’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일일수록 드러내지 않아야 합니다. 생색내기는 정치꾼들이 합니다. 요즘 보세요. 정치꾼들을!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인 양 기뻐해서야 되겠습니까?
살리는 일을 하시는 예수님 곁에서 죽음의 어둠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 곳에 기쁨이 넘쳐나야 하는 데 유다의 모습도 있고, 수석 사제들의 모습도 있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생명의 문화’와 더불어 ‘죽음의 문화’가 함께 있습니다. 살리는 일에, 생명의 문화에 우리의 마음이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시기와 질투, 미움, 분노, 적개심, 두려움, 기득권을 누리려는 곳에 어둠의 그림자가 밀려옵니다.
그러나 사랑의 마음이 있는 곳에 모두를 주고도 더 주고 싶은 마음이 커집니다. 나보다는 너를 위한 배려를 통해 예수님을 위로해 드리고 마리아처럼 존경과 사랑으로 모두를 바칠 수 있는 한 주간 되시길 바랍니다. 지금은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할 때입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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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종>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
새벽 성무일도 시편 한 구절이 감미롭게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주님, 당신의 종 위에 당신의 얼굴을 빛내어 주시고, 자비로우심으로 나를 구하옵소서.”(시편31,17).
그대로 세상의 종이 아닌 주님의 종인 우리에게 선사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엊그제 ‘법의 날’에 교황청 법정에서 일하는 법관들에게 하신 교황님의 한 말씀도 신선했습니다.
“참 정의를 위해 하늘을 바라보라.”(Look to heaven for true justice)
자주 하늘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며 실행해야 할 주님의 종인 우리들입니다.
‘주님의 종’이란 말이 참 친근하게 와닿습니다. 무엇보다 감동적인 고백은 마리아의 다음 고백일 것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마리아뿐 아니라 참으로 믿는 이들의 신원은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의 종의 원조는, 전형적 모범은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종하면 연관되어 떠오르는 단어가 섬김입니다.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은 같은 어원이라 섬김의 종으로 정의할 수도 있겠습니다.
종과 섬김하면 떠오르는 생생한 일화가 있습니다. 수십년이 지나도 여전히 기억에 생생한, 강론에도 누차 인용했던 일화입니다. 수도원 초창기 90년대 초반쯤될 것입니다. 한밤중에 피정신청 전화를 받았다가 퉁명스런 제 전화 답변에 분노한 신자분에게 사과하며 무마한 후 순간 깨달았던 진리입니다.
“아, 나는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는 수도자구나! 섬김의 직무, 서비스업이다. 서비스업은 3개 요건을 갖춰야 되겠구나. 첫째, 사람이 좋고 친절해야 하고, 둘째, 실력이 있어 유능해야 하고, 셋째, 내외적 환경이 좋아야 하겠구나!”
하는 자각에 우리의 영성이 있다면,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이 있을 뿐이라고 강조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러니 넓고 깊게 보면 우리 믿는 이들은 모두 섬김의 직무인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해야 할 것입니다. 음식점, 병원의 서비스업을 보면 담박 드러나는 서비스업의 세개 요건, ‘좋은 사람, 좋은 실력, 좋은 환경’이요, 저는 이런 세개의 잣대로 우리 수도원을 점검해보곤 했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종의 모범은, 종과 섬김의 영성의 모범은 예수님이십니다. 복음에서도 누차 강조되는 이런 주님의 면모입니다. 마르코 복음중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종과 섬김의 영성이 요약된 고백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로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10,44-45)
이런 예수님의 ‘종과 섬김의 영성’의 모범이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은 성목요일 만찬 미사때 보게 될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제자들의 발을 씻겨 드리는 장면일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의 주님의 종으로서 신원의식에 오늘 제1독서의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가 결정적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 주님의 종으로 살고자 하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 나의 영을 준 이다.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꺽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지치지도 않고 기가 꺾이는 일이 없이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얼마나 매력적인 주님의 종인지요, 섬세하고 자비로우며 겸손하고 온유하며 존중과 배려, 공감의 인물이며 한결같이 성실한, 결코 약한 모습이 아닌 외유내강의 모습입니다. 그대로 본받고 싶은 예수님에 대한 묘사처럼 생각됩니다. 당신의 종들을 파견하시는 하느님의 모습도 우리에게는 감동적입니다.
“하늘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펼치신 분, 땅과 거기에서 자라는 온갖 것들을 펴신 분, 그곳에 사는 백성에게 목숨을, 그 위를 걸어다니는 사람들에게 숨을 불어 넣어 주신 분,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참으로 이런 하느님을 몰라 무지와 교만에 눈먼 사람들이요, 이런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참된 용기와 힘의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종의 묘사도 고무적이고 감동적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주님의 종들인 우리 모두에 대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어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주기 위함이다.”
주님의 빛과 해방의 일꾼으로 세상에 파견되는 주님의 종들인 우리의 신원을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누구보다 이런 주님의 종의 결정적 실현이자 모범은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예수님께 감격한 오늘 복음의 마리아의 처신이 우리에게 끝없는 영감과 감동을 줍니다. 파스카 축제를 앞두고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베풀고 예수님을 환대하는 베타니아의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 삼남매의 모습도 참 아름답습니다.
여기서 극단적 대조를 이루는 마리아와 유다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깊이 사랑했던 주님의 종, 환대와 섬김의 사랑의 관상가 마리아요, 영적으로 눈먼 물질주의자 유다입니다. 누가 진정 주님의 종인지 담박 드러납니다. 다음 마리아에 대한 묘사는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고 향기롭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그대로 마리아의 사랑의 향기, 영혼의 향기, 봉헌의 향기를 상징합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온몸과 온맘으로 사랑의 환대, 사랑의 섬김에 올인하는 마리아입니다. 이 또한 우리에게 기막힌 회개의 표지가 됩니다. 문득 여기에서 영감을 받아 제자들의 발을 씻겨 드린 예수님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다음 유다와는 얼마나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지요!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대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마리아에 대한 변호가 참 기민하고 지혜롭습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 않을 것이다.”
새삼 사랑은 분별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결정적 사랑과 섬김의 순간에 예수님을 온몸과 온맘으로 환대한 주님의 종, 마리아요 이를 인정하신 주님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주님의 종으로 섬김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외로움이나 그리움은 흔적없이 사라지고 주님의 현존감에서 오는 편안함, 충만함이 우리를 가득 채울 것입니다.
새삼 외로움이나 그리움에 대한 근원적이며 본질적 대책은 주님의 종으로서 섬김의 삶뿐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종,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온몸과 온맘으로 환대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종이 되어 한결같이 섬김의 삶에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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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나르드 향유로 도유되신 일화에 담긴 다양한 의미를 전달하십니다.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요한 12,3)
어제 우리가 들은 마르코 복음사가의 도유 기사를 기억해 보면, 어제의 복음에서는 어떤 여자가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지요.(마르 14,3) 그런데 오늘 베타니아의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습니다. 둘 다 매우 값비싼 순 나르드 향유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요.
두 도유 사건 모두 당신의 장례를 준비하는 예식이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밝히셨습니다. 마르코 복음의 여인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고, 요한 복음의 마리아는 발에 부음으로써 본래 시신의 온 몸에 바르는 향유 예식을 저마다의 신학 안에서 상징하고 있지요.
베타니아의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리면서, 이로써 자신의 겸손과 사랑의 심정을 극대화해 드러낸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임금님이 잔칫상에 계시는 동안 나의 나르드는 향기를 피우네."(아가 2,12)
나르드는 인도에서 나는 값비싼 향유로서 사랑의 매혹제로도 쓰인다고 합니다. 그토록 값진 향유를 고른 마리아에게서 예수님께 최고의 예를 갖추려는 애틋한 마음과 함께, 아가 신부의 뜨거운 사랑의 심경까지 느껴집니다.
제1독서는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를 들려 줍니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이사 42,1)
하느님께서 주님의 종인 메시아, 곧 그리스도에게 영을 부어 주십니다. 영은 기름부음으로 주어지지요. "사무엘은 ...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러자 주님의 영이 다윗에게 들이닥쳐 그날부터 줄곧 그에게 머물렀다."(1사무 16,13)는 다윗의 도유 기사에서 보여지듯, 예수님도 주님께서 움직이신 한 여인의 행위를 통해 메시아의 결정적 사명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가신 것입니다.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이사 42,6)
주님의 종은 하느님의 영을 받아 구원자로서의 사명을 펼칩니다. 예수님도 백성을 위한 "새 계약"이 되셨으며, 모든 민족을 비추는 "빛"이 되십니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옵니다.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요한 12,3)
향기가 풍겨내는 냄새는 공기를 타고 경계를 넘어 집 안의 온 공간마다 스며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맺으신 "새 계약"도 세상이 구획 지어 놓은 모든 구분의 경계를 넘어서지요. 민족과 인종과 성별과 문화를 넘어 그리스도의 향기로 퍼져 나갑니다.
그리고 "빛" 또한 독점하거나 꽁꽁 감추어 둘 수 없는 특성을 지닙니다. 빛은 어느 틈엔가로 새어들어 와서 결국 모든 이에게 보여집니다. 점점 전달되고 퍼져나가 어둠을 물리치지요. 우리가 고대하는 부활의 빛 또한 그러합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해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요한 12,7)
예수님은 사랑 앞에서는, 사랑을 가로막는 인간의 이성과 논리와 합리성을 유예하라고 명하십니다. 다만 장례날까지라도 말이죠.
예수님이 잘 나가고 명성을 떨치며 승승장구할 때 곁을 지키며 과시하던 애정은 진정한 사랑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음을 우리는 수난기를 통해 절감했지요. 예수님을 향한 뜨겁고 애절한 진짜 사랑은, 처절한 실패와 죽음의 현장에 이르기까지, 또 맥없이 숨을 놓아버린 가련하게 창백한 시신에게까지 간직되고 베풀어져야 하는 진정성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동반하는 이 성주간에 더욱 뜨겁게 그분께 사랑을 바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행여라도 사랑 아닌 것을 사랑인 척 포장하지 않기를, 사랑이 시키는 일을 가로막지 말기를, 사랑이 원하시는 일에 충심을 다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이 무겁고 어둡고 슬픈 시간이 사랑으로 위로받을 수 있기를 빌어 봅니다.
성주간 월요일, 오늘은 그동안 간직해 온 벗님만의 귀한 사랑의 향유를 주님께 아낌없이 부어드리는 낭비의 날이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라면 여러분의 사랑을 그분만 아시도록 살짝 '플렉스(flex,과시)'해도 된답니다! 베타니아의 마리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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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원죄의 결과로 고통은 예수님의 도구사업에 참여하는 일
병자는 그리스도의 수난이 더욱 가까이 결합시키는 힘과 은혜를 받는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46)-예수님은 고통에도 성부께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고 한다.
♣부활은 고통이 끝이 아니라 사랑의 하느님과 하나 되기 위한 과정이다. 고통이 없이는 부활도 없는 것이다. 믿음이 필요하다. “일러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라고 나병환자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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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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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DmVU_-pdmz0&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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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요한 12, 7)
사랑으로
빚어진
우리들이다.
가장 힘든
순간이
가장 큰
은총의
순간이 된다.
어둠을
향기롭게 하는
빛같은 향유가
있다.
사랑은
고통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에
함께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사랑이
있는지를
다시금 묻는
십자가의
시간이다.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은
우리의
약함까지
기쁘게
나누는
것이다.
슬픔과
약함을
함께 나누는
은총의
성주간이다.
만남과
헤어짐 사이에
우리가
살고있다.
삶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람의
존재이유또한
사랑에 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
소중한 향유를
부어야 할
때가 있고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아드려야 할
때가 있다.
사랑하기에
슬프고
사랑하기에
아픈 것이다.
고통 속에서도
함께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우리를
살게 해주는
모든 것이다.
사랑은
끝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인생을
향기롭게
하는 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의 실천이다.
사랑은
이론이 아닌
실천이다.
하느님의
고통에
동참하는
사랑이다.
사랑과 고통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사랑을 위한
최선의 길은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논쟁을 멈추고
사랑하는
예수님과
함께하려는
마음이 더더욱
필요한
성주간이다.
참된 사랑은
향기롭고
참된 사랑은
허물까지
닦아준다.
회개의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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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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