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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반민족행위관계사료집 ⅩⅤ
- 일제강점기 문예계의 친일협력 -
차 례
* 발간사··································································································································4
* 해제 : 문화예술계의 ‘일본국민’ 만들기··········································································19
Ⅰ. 전시하 일제의 문화정책과 문예계 상황
1. 문화 일반······················································································································35
1) 조선문화의 장래(좌담회) 35
2) 쓰다 가타시(津田剛), 국책과 문예 -문인협회의 역할에 대하여 44
3) 문화운동의 발족(사설) 46
4) 야나베(矢鍋) 문화부장을 중심으로 조선의 ‘문화문제’를 말한다(좌담회) 47
5) 새로운 ‘문화단체’의 움직임 -8단체 간부는 말한다(좌담) 55
6) 야나베 에이자부로(矢鍋永三郞), 반도문화의 신체제 62
7) 반도예술을 말한다(좌담회) 66
8) 가라시마 다케시(辛島驍), 문화정책에 희망한다 74
9) 야나베 에이자부로, 대동아전쟁과 문화생활 75
10) 다나카 하쓰오(田中初夫), 조선에서의 문화정책 78
11) 귀환용사와 문인(좌담회) 80
12) 가라시마 다케시, 웅대한 구상 -대동아전쟁과 반도 문화인의 사명 89
13) 야나베 에이자부로, 대동아와 문화 92
14) 쓰다 가타시,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구상 95
15) 문화와 선전(대담) 99
16) 지식인 총진군의 시기(사설) 106
17) 국민문화의 방향(좌담) 107
18) 데라모토 기이치(寺本喜一), 전쟁과 문화 -전쟁을 지도하는 어능위(御稜威)의 문화 114
2. 문학······························································································································119
1) 문인의 입장에서 기쿠치 간(菊池寬) 씨 등을 중심으로 반도문예를 말하는 좌담회 119
2) 가라시마 다케시, 결전문학의 확립 -싸우고 있는 의식 128
3) 전쟁과 문학(좌담) 129
4) 나가야 쇼사쿠(長屋尙作), 시사유감 -징병제·전국(戰局)·문학자 등 141
5) 쓰다 가타시,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출석하여 143
6) 다나카 스테히코(田中捨彦), 국어문학의 전진 146
7) 결전태세즉응 재조선문학자 총궐기대회록 147
3. 연극·영화··················································································································159
1) 다카시마 긴지(高島金次), '조선영화통제사'(1943) 159
2) 나카타 하루야스(中田晴康), 영화정책과 영화제작 269
3) 구라시게 슈조(倉茂周藏), 조선영화에의 희망 273
4) 가라시마 다케시, 조선과 영화 276
5) 야마베 민타로(山部珉太郞), 벽지에서 싸우는 연극 -조선이동연극 제1대를 살펴보다 278
6) 농촌문화를 위하여 -이동극단·이동영사대의 활동을 중심으로(좌담) 286
4. 음악·무용··················································································································296
1) 가라시마 다케시, 연예와 대중(2) -중국 신극운동의 경험 296
2) 히라마 분주(平間文壽), 문화에의 입찰(立札) -특히 음악가에게 바라는 말 299
3) 히라마 분주, 문화 -악단진어(樂壇贐語)(1) 300
4) 히라마 분주, 악계근시(樂界近時) 301
5) 나카조노 겐조(中園源藏), 반도교육 혁신론(4) -과학·음악교육을 진흥시켜라 302
6) 오바 유노스케(大場勇之助), 기원 2600년 축전음악을 말한다 312
7) 데라모토 유타카(寺本寬), 시국수상 -음악추방 315
8) 아메미야 후미(雨宮史), 승리하기 위한 후생음악 318
9) 다케하라 생(たけにら生), 음악도 군수품 319
5. 미술······························································································································319
1) 결전미술의 동향(좌담) 319
Ⅱ. 문예계의 친일협력 조직들
1.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329
1) 총력전의 문화부대(기사) 329
2) 문화익찬의 반도체제 -금후 문화부 활동을 중심하여 1~9(좌담) 329
2. 조선연예협회··············································································································340
1) 조선연예협회(기사) 340
2) 조선연예계 340
3. 조선문예회··················································································································340
1) 조선문예회 설립취의서 340
2) 요코야 다케오(橫矢武男), ‘조선문예회’에 대한 시시비비적 소감 342
4. 조선문인협회··············································································································345
1) 조선문인협회 금일 발기인회 개최(기사) 345
2) 일본정신을 발양! ‘문(文)의 내선일체’를 절규, 조선문인협회 결성대회 성황(기사) 345
3) 조선문인협회 창립 346
4) 이광수 등의 조선문인협회 창립에 대한 비난에 관한 건 348
5) 문예상(文藝賞)에 문인회관, ‘문예의 밤’과 시시(時時)로 지방도 순회,
반도문인협회 사업대강(기사) 350
6) 조선문인협회에 보낸다 -그 성과를 완수하라(사설) 351
7) 조선문인협회, 지식인에게 호소한다(상·중·하) 352
8) 폭풍인기 중에 개막되는 결전문화대강연회(기사) 356
9) 대동아문학자회의 반도측 5명 출발일정 결정(기사) 357
10) 가라시마 다케시, 조선문인협회의 개조에 즈음하여 357
5. 조선문인보국회··········································································································360
1) 반도문학 총력집결, 각종 단체통합, 조선문인보국회 결성식 성대(기사) 360
2) 문보(文報)의 페이지 362
3) 조선문인보국회 각 부회 역원 결정(기사) 364
4) 조선대표 6씨 결정, 대동아문학자대회에(기사) 366
5) 조선문인보국회 사무국, ‘문보의 페이지’ 중 8월 16일 기사 366
6) 문학자대회 대표 귀환보고 강연회 성황(기사) 367
7) ‘문보’ 기구개혁, 일부 역원도 개선 강화(기사) 368
8) 조선문인보국회 사무국, 반도문학자 총궐기 대회 369
9) 문화전선의 총공세, 17일, 적국(敵國) 항복 대강연(기사) 372
10) 남경에서 문학자대회, 조선대표 향산(香山), 금촌(金村) 양씨(기사) 372
11) 성과는 실로 다대,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서 귀환한 향산(香山) 씨 담(기사) 373
6. 조선연극문화협회·······································································································374
1) 1942년도 사업경과보고서 374
7. 조선연극협회··············································································································380
1) 조선연극협회 결성기념, 연극과 신체제 특집 380
2) 극단 총진군의 시기, 연극보국에 매진하라, 연극협회 통첩(기사) 381
8.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382
1)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개황 382
9. 조선영화인협회··········································································································390
1) 조선영화인협회 결성기념, 영화문화와 신체제 특집 390
10. 조선음악협회············································································································393
1) 조선음악협회 회칙 393
2) 악단신체제운동(기사) 396
3) 악단의 신발족(기사) 396
11. 경성후생실내악단······································································································397
1) 전시하 음악의 건전화, 경성후생실내악단 탄생(기사) 397
2) 경성후생실내악단(기사) 398
12. 야담·만담부대·········································································································398
1) 4명이 용약출발(勇躍出發), 작일 천정부(踐政府)서 제1성, 야담만담순회부대(기사) 398
2) 벽지맹산에서 성황 이룬 야담(기사) 398
3) 신정언(申鼎言), 징병취지 야담만담 행각(1~4) 399
4) 돌연히 나타난 진객(珍客)(기사) 401
5) 사천여 관중을 매료(기사) 401
6) 매신(每新) 교화선전대 함남 도처에서 호평(기사) 402
7) 청중책일(聽衆冊一) 일만을 돌파 벽촌에 계몽의 횃불(기사) 402
13. 조선미술가협회·········································································································403
1) 미술도 전력증강에, ‘조선미협’ 보도, 생산에 중점 제작(기사) 403
14. 단광회·······················································································································403
1) 신 양화(洋畵) 단체 단광회(丹光會) 탄생(기사) 403
2) 결전미술의 정수, 금일 단광회전 개막, 수상자 발표(기사) 404
3) ‘조선징병제실시’ 단광회전, 초일부터 인기 백열(기사) 404
4) 징병제실시기념 단광회 합작화, 군에 헌납(기사) 405
15. 전쟁선전전람회·········································································································405
1) 총후미술전람회, 반도화단을 총동원(기사) 405
2) 결전미술전람회 목록 405
Ⅲ. 문예계의 친일협력 논리와 선전
1. ‘국민문학’·‘국민문화’ 주창 ························································································415
1) 11월 중순 도쿄 대동아문학자대회에서 한 조선 쪽의 발언집 415
(1) 이광수(香山光郞), ‘동아정신의 수립’에 관하여 415
(2) 유진오(兪鎭午), 대동아정신의 강화와 보급에 관하여 416
(3) 박영희(芳村香道), ‘문학에 의한 대동아전 완수방법’에 관하여 417
2) 문화로 맺는 대동아, 각광받는 반도대표 결정 417
쓰다 가타시, 김용제, 이석훈, 최재서
3) 제2회 대동아문학자결전회의(1943.8.25~27) 419
(1) 최재서, 결전 조선의 급전환 -징병제의 시행과 문학활동 419
(2) 유진오, 거대한 융화 -결전문학의 이념 확립 421
(3) 김용제, 황민생활의 강화 422
4) 김용제(金龍濟, 金村龍濟) 423
(1) 조선문화운동의 당면 임무 -그 이론·구성·실천에 관한 각서 423
5) 김문집(金文輯) 430
(1) 문화표현의 국어적 추세 430
6) 김동인(金東仁) 433
(1) 국민문학과 제재(題材) 433
7) 김종한(金鐘漢) 434
(1) 단가문외관(短歌門外觀) 434
(2) 시집 '어머니의 노래'의 ‘맺는 말’ 435
8) 박영희(朴英熙, 芳村香道) 437
(1) 감격(수필) 437
(2) 신체제와 문학 439
(3) 다가서는 혼과 혼 440
(4) 국어에 대한 애정 -황민 완성 441
9) 백철(白鐵) 442
(1) 동아의 신문화와 ‘협동’에의 의지 442
10) 유진오(兪鎭午) 446
(1) 시국과 문화인의 임무 446
(2) 대동아정신의 기조 448
(3) 문화 또한 전쟁과 함께 449
11) 윤두헌(尹斗憲, 平沼文甫) 451
(1) 쳐들어가는 마음가짐 451
(2) 언어의 문제 452
(3) 추진이냐 편승이냐 453
(4) 사상적 전진 -국민문학에서 신민문학으로 456
(5) 새로운 인간과 윤리 458
(6) 피안(彼岸)의 경종이 아니다 462
12) 이광수(李光洙, 香山光郞) 464
(1) 조선문화의 장래 464
(2) 내선청년에게 보낸다 468
(3) 창씨와 나 470
13) 이무영(李無影) 471
(1) ‘국어보급은 강제가 아니라 애정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에 대한 답변 471
(2) 결전문학 수립을 위해 473
14) 이석훈(李石薰, 牧洋) 474
(1) 반도의 신문화라고 하는 것 474
(2) 문예총후운동 강연회를 듣다 476
(3) 국민문학의 제문제 480
(4) 사상전과 선전전 482
(5) ‘국어보급은 강제가 아니라 애정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에 대한 답변 483
15) 정비석(鄭飛石) 485
(1) 작가의 입장에서 485
16) 정인섭(鄭寅燮, 東原寅燮) 488
(1) 국책문학의 수립 488
17) 정인택(鄭人澤) 489
(1) 작가의 마음가짐·기타 489
18) 조우식(趙宇植, 白川榮二) 492
(1) 역사의 자각과 함께 492
(2) 사랑과 기도의 노래 494
19) 주영섭(朱永涉) 499
(1) 시의 원주 499
20) 주요한(朱燿翰, 松村紘一) 502
(1)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 502
21) 최재서(崔載瑞) 504
(1) 사상전의 첨병 504
(2) 조선문단의 혁신(권두언) 505
(3) 새로운 결의 506
2. ‘국민연극’·영화신체제 주창····················································································508
1) 김정혁(金正革) 508
(1) 조선영화 진흥의 목표 -진실한 영화정신의 수립을 위하여 508
2) 서광제(徐光霽) 512
(1) 조선영화계의 신질서 -‘영화령’과 ‘영화인협회’ 조직에 대하여 512
(2) 신체제와 영화 516
3) 안석주(安碩柱, 安田榮) 518
(1) 조선영화의 갈 길 -영화와 신체제 518
4) 오정민(吳禎民) 523
(1) 극작가의 희망 523
5) 유치진(柳致眞) 526
(1) 국민연극 수립에 대한 제언 526
6) 이서구(李瑞求, 牧山瑞求) 528
(1) 금후의 국민극 528
(2) 국어극의 현상 529
7) 주영섭(朱永涉) 531
(1) 국민연극의 수립 531
8) 주요한(朱燿翰, 松村紘一) 535
(1) ‘싸우는 연극’의 모습 -제2회 경연대회를 보고 535
9) 함대훈(咸大勳) 538
(1) 국민연극의 현단계 538
(2) 국민연극의 방향 542
3. ‘음악보국’·‘화필보국’ 선전 ·······················································································545
1) 싸우는 반도문화 소식 -음악 545
2) 계정식(桂貞植) 546
(1) 신동아음악의 건설, 대동양적 이상을 표현하여 546
(2) 음악보국의 의의 548
(3) 국민학교의 음감교육 문제 549
(4) 대중의 건전오락 희구, 다채한 11~12월 중의 음악회 552
(5) 가정과 음악 553
(6) 음악경연회를 앞두고 555
(7) 후생실내악단 제2회 공연평 556
(8) 개병의 노래 모집, 참된 사랑의 노래, 계정식 씨 담, 길이 빛날 군국의 노래로 557
(9) 후생실내악단을 듣고(음악월평) 557
3) 김관(金管) 559
(1) 동아의 신정세와 음악문화의 재출발 559
(2) 국가의 신체제와 신음악의 건설(1~3) 561
(3) 음악획기의 년(1~5) 563
(4) 국민·문화·음악(1~4) 568
(5) 음악시평 여러 가지(1~3) 571
(6) 예술은 격려되어야 한다(1~3) 574
4) 김생려(金生麗, 金山生麗) 576
(1) 반도에서 후생음악의 문제 576
5) 박경호(朴慶浩) 579
(1) 사은음악회의 의의 579
(2) 후생음악의 실제 580
(3) 후생실내악단의 공연 후감 581
(4) 악단의 행적(상·중·하) 582
(5) 송(送) 히라마 분주(平間文壽) 585
6) 심형구(沈亨求) 585
(1) 시국과 미술 585
(2) 현대미술문화정책과 기본개념 587
7) 임동혁(任東爀) 588
(1) 결전문화의 1년 -음악의 1년 588
(2) 시국과 음악 589
8) 현제명(玄濟明) 590
(1) 악단 1년, 경성후생악단의 연주활동 및 국민개창운동을 중심으로 590
9) 홍난파(洪蘭波) 591
(1) 사변 3주년과 반도문화의 여명, 지나사변과 음악 591
4. ‘내선일체론’과 ‘황민화론’ 지지 ·················································································592
1) 김문집(金文輯) 592
(1) 조선 문단인에게 -현실과 조선민족의 문제(1~5) 592
(2) '총동원' 권두언 597
합리적 발전적 (3) 귀환을 논하는 말, 씨 설정을 주제로, 반도풍습의 그 조국에로의 것 598
2) 김용제(金龍濟, 金村龍濟) 608
(1) 스승과 형에게 드리는 말(1~3) 608
3) 윤두헌(尹斗憲, 平沼文甫) 611
(1) 더욱 높이 더욱 멀리 611
4) 이석훈(李石薰, 牧洋) 612
(1) 새로운 결의 -성지참배로부터 돌아와서(상·중·하) 612
5) 장혁주(張赫宙) 615
(1) 황도조선의 완성 615
(2) 얽매이지 않는 기분 621
5. ‘총후적성’의 선전 ·······································································································622
1) 김기진·조용만·채만식, 작가·화가가 본 싸우는 증산 현지보고(좌담회) 622
2) 증산면과 문학자 628
(1) 이서구, 새로운 농촌문화를 위하여 628
(2) 조용만, 탄갱에서 돌아와 630
(3) 김기진, 생산과 문학 631
3) ‘조선군 보도반원의 수첩’ 중에서 632
(1) 이석훈, 행군 632
(2) 정비석, 사격 634
4) ‘조선군보도연습기’ 중에서 636
(1) 이석훈, 보도연습에 참가하여 636
(2) 이서구, 보도연습기 638
5) 안석주(安碩柱, 安田榮) 639
(1) 대동아전과 영화인의 임무 639
6) 윤두헌(尹斗憲, 平沼文甫) 640
(1) 들판은 전쟁터 -충남을 둘러보고 640
(2) 입술에 노래를 담고 643
7) 정비석(鄭飛石) 645
(1) 지식인 645
8) 조용만(趙容萬) 647
(1) 찻간에서 생긴 일 647
9) 조우식(趙宇植, 白川榮二) 648
(1) 보도연습보고 1 -연련일기초(演練日記抄) 648
(2) 부여 중견청년수련소 방문기(상·하) 653
(3) 선감학원(仙甘學園) 견학기 661
(4) 유성 농민도량을 보다 666
(5) 흙에 기도하고 단련하는 농민혼 -유성 농민도량 견학기 669
(6) 싸우는 항공창 676
10) 주영섭(朱永涉) 681
(1) 평양대화숙 681
11) 주요한(朱燿翰, 松村紘一) 683
(1) 출범의 정신 683
(2) 직장(職場)·도장(道場)·전장(戰場) -취직하는 지식청년에게 주노라 685
(3) 전 국민이 육탄으로 -먼저 지도자에 필요한 반성과 과단 687
12) 최정희(崔貞熙) 688
(1) 맑게 갠 푸른 하늘 688
6. 일제의 침략전쟁과 ‘대동아공영권’ 지지··································································689
1) 김기진·이무영, 대동아전쟁에 의해 무엇을 배우십니까? 689
2) 이무영·정비석·정인택·채만식, 간도성시찰작가단 보고(좌담회) 690
3) 계정식(桂貞植) 699
(1) 음악은 군수품이다(음악시평) 699
4) 김관(金管) 700
(1) 전쟁과 음악(1939) 700
(2) 전쟁과 음악(1~2, 1940) 701
5) 김동인(金東仁) 703
(1) 태평양송(太平洋頌) 703
6) 김동환(金東煥, 白山靑樹) 704
(1) 내외 동포에 호소함 704
7) 김문집(金文輯) 705
(1) 조국에 목숨 바친 최초의 반도 지원병, ‘축하해야 할 죽음!’,
피로 살다간 우리의 이인석 군 705
8) 박영희(朴英熙, 芳村香道) 710
(1) 전선을 순례하고 710
9) 신고송(申鼓頌) 711
(1) 성난 아시아 -연극인총궐기예능제 기(記) 711
10) 양훈(楊薰) 714
(1) 전쟁과 음악 714
11) 이무영(李無影) 719
(1) 이 날이 되어 719
12) 이석훈(李石薰, 牧洋) 720
(1) 전시하의 만주 720
13) 임학수(林學洙) 724
(1) 북지(北支)에 심부름을 하고(상·하) 724
14) 장혁주(張赫宙) 726
(1) 대동아전쟁에 즈음하여 726
(2) 역사에 불멸할 일순 -야마모토(山本) 원수 국장 참배기 727
15) 정인섭(鄭寅燮, 東原寅燮) 729
(1) 싱가폴 함락과 문화인의 감격 729
(2) 위대한 새벽 729
16) 정인택(鄭人澤) 730
(1) 다케야마 대위의 일들(1944.2) 730
(2) 다케야마 대위의 일들(1944.9) 732
17) 현제명(玄濟明) 734
(1) 싱가폴 함락 감상 734
18) 홍난파(洪蘭波) 735
(1) 사상전향에 관한 논문 735
7. 지원병·징병동원의 선전·선동···············································································736
1) 명사, 징병의 감격을 말하다 736
김동환, 김호영, 노창성, 모윤숙, 박영희, 서춘, 유진오, 장덕수, 조용만, 주요한, 최정희
2) 김동환(金東煥, 白山靑樹) 742
(1) 애국정신과 지원병 742
3) 김종한(金鐘漢) 748
(1) 병제(兵制)와 문학 748
4) 박영희(朴英熙, 芳村香道) 750
(1) 자만보다도 연성(鍊成) 750
5) 송영(宋影) 751
(1) 영원한 충성 751
6) 오정민(吳禎民) 751
(1) 징병제와 연극 751
7) 이석훈(李石薰, 牧洋) 754
(1) 징병·국어·일본정신 754
8) 장혁주(張赫宙) 756
(1) 입소일기 -육군병 특별 지원자 훈련소(상·하) 756
(2) 조선 징병제 실시(1·2) 759
(3) 지원병 훈련소 760
9) 조우식(趙宇植, 白川榮二) 761
(1) 떳떳한 마음에 부쳐 761
10) 주요한(朱燿翰, 松村紘一) 764
(1) 다섯 가지 사명 764
11) 최정희(崔貞熙) 769
(1) 어국(御國)의 아들의 어머니에게 769
12) 함대훈(咸大勳) 770
(1) 전시에 책무익다(責務益多) 770
* 찾아보기···························································································································771
해제 : 문화예술계의 ‘일본국민’ 만들기
윤대석(명지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1. 서론 -문예계의 협력
1940년 전반기에 이 땅에서 이루어진 식민지 협력 행위를 알기 위한 자료는 지금까지 여러 가지 이유로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웠다.
가장 큰 이유는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있는 형태로 간행된 서적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몇몇 자료들이 공간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이 시대의 자료 대부분은 도서관 서고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소수의 연구자에게만 독서를 허락했을 뿐이었다.
더군다나 식민지 협력 행위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일본어라는 언어적 특수성, 당대 특유의 맥락 등의 진입 장벽을 돌파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이 시대의 식민지 협력 행위에 대한 오해는 실체에 기반을 두지 않고 자기 증식을 통해 환상과 공상으로 발전해갔다.
이 자료집의 가장 큰 의의는 이와 관련되어 있다.
자료 자체의 소개가 식민지 협력 행위에 대한 오해를 어느 정도 불식시켜 줄 것이다.
이 책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편찬하는 자료집 15권으로서 문예계의 친일협력과 관련된글을 수록하고 있다.
문예계의 친일협력이라고 하지만, 15권은 작품을 수록하지 않고 문예인의 비평문,혹은 시평(時評) 등을 수록했다.
역시 문예계의 협력 행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작품일 것이다.
소설가는 소설로, 시인은 시로, 배우는 연극과 영화로, 화가는 미술작품으로, 음악가는 연주나 작곡으로 자기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자료집은 작품 자체는 싣지 않고 문예인이 쓴 비평문·시평 등을수록한다.
따라서 15권은 문예계의 친일협력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파악하는 보조 자료로서 의미를 지닌다.
이것이 이 자료집의 두 번째 의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조 자료라고 하지만, 이 자료집에 실린 글들에는 식민지 협력 행위의 핵심적인 면모들이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국민화’로 설명될 수 있는 것들이다.
1930년대 후반, 1940년대 초반은 일본제국에 큰 변화와 개조가 시도되던 시기였다.
1937년 중일전쟁과 그에 따른 고노에(近衛) 수상의 동아신질서 성명, 1940년 10월의 신체제, 1941년 12월의 태평양 전쟁 도발 등은 그것을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것은 일본 국내의 개조와 국외로의 확장으로 나눌 수 있다. 내적으로는 서양에 경사된 근대화를 반성하는 기운이 일어났고 , 외적으로는 전쟁을 통해 그러한 개조를 이룩하려는 시도가 생겼다.
이러한 가운데 일본과 조선의 관계는 예전과는 다른 맥락에 놓이게 되었다.
그것은 확장되고 있는 일본제국의 다른 지역과 조선을 비균질적인 공간으로 인식케 했다.
그에 따라 일본 본토와 조선의 균질화가 상대적으로 높은 단계로 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을 ‘국민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국민화’ 담론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동화 정책이라고 부르는 ‘내선일체’이다.
‘내선일체’의 핵심에는 ‘일본 국민 되기’가 놓여 있었고, 그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평행제휴론이고 또다른 하나는 동화일체론이었다.
전자가 조선과 일본의 다름을 전제하고 그것을 존중하는 방향이라면, 후자는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거나 말살하려는 방향이었다.
1930년대 후반에서 1941년 정도까지는 전자의 발언력이 상당했지만, 전쟁이 확대되면서 후자 쪽으로 기울어간다.
또한 ‘내선일체’ 담론에는 넓게 보아 동양문화론이, 좁게 보면 일본문화론이 포함된다.
동양문화, 일본문화의 우수성을 찬미하는 글들이 여기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는 조선문화를 강조하는 글도 이 부류에 포함된다는 견해도존재한다.
‘내선일체’ 담론이 힘을 가지는 것은 일본 제국의 여타 지역과의 차별성에서였다.
만주나 동남아시아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면 할수록 일본 본토와의 차별성은 사라지기에 거꾸로 일본 본토와의 차별성을 은폐하기 위해 만주나 동남아시아를 타자화했다고도 할 수 있다.
각종 진출, 혹은 개척, 만주담론은 ‘내선일체’의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국민화’ 담론의 또 다른 하나는 총동원 담론이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 취해진 황국 신민서사 제정(1937.10), 국가총동원법 시행(1938.4), 육군지원병령(1938.4) 등은 모두 이러한 총동원 체제를 조선에까지 확산시키려는 조선총독부의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당면한 전쟁에 조선인과 조선에 존재하는 물자가 동원된다는 물리적 차원을 넘어서 정신적인 영역에까지 이르게 된다.
식민지인인 조선인의 정신을 개조하여 일본인으로 만든다는 이데올로기 개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일제말기의 문화예술은 이러한 이데올로기 혹은 사상 개조라는 정신 동원 운동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이제 문화예술은 정신 동원의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정신 동원의 차원과 더불어 고려해야 할 것은 문화 개조다.
이때의 문화란 인간의 정신적 산물이라는 좁은 내포를 가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활양식을 전반적으로 지칭한다.
이러한 총동원의 중심에는 전쟁이 놓여 있다.
이제 일상생활이 전쟁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하나는 직접 전쟁과 관련된 담론으로서 전쟁을 신성화하고 군인의 규율을 예찬하는 담론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전쟁을 후방에서 지원하면서 후방을 전쟁과 동일한 차원에서 규율하는 담론이다.
근대전이 총력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하지만, 이 두 담론은 군인적규율과 그것의 사회적 확산으로 나눌 수 있다. 전쟁·군인 담론, 총후 담론과 더불어 생각해야 할 것은 여성의 동원이다.
근대 사회에서 타자로 놓여 있던 여성마저 적극적으로 주체화/종속화시키는 것이 ‘국민화’ 담론의 특징이라면 1940년대 전반기의 ‘국민화’ 담론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목격된다.
이 글(해제)에서는 자료집 15권에 실린 글들을 위와 같은 기준에 의해 나누고 설명한다.
그것을 바라보는 큰 틀이 ‘국민화’이고 그 하위 틀은 ‘내선일체’와 ‘총동원’이다. ‘내선일체’는 다시 ‘일본국민되기’와
‘동양문화론/일본문화론’, ‘만주 담론’으로 나누고, ‘총동원’은 ‘전쟁’과 ‘총후’, ‘여성동원’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문예인이 쓴 협력의 글들을, 문학·음악·영화 등의 장르가 아니라, 담론의 성격 위주로 나누고 설명하는 이유는 여기에 실린 글들이 작품이 아니라서 장르적 차이가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자료집에 실린 글들은 작품이 아니라 비평이나 시평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 문학예술인의 사상을 핵심적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보조 자료로서의 성격밖에 가지지 못한다.
문학예술인에게 비평이나 시평은 잡글에 지나지 않고 본령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문학예술이 지닌 깊이를 이러한 글들이 지니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이 자료집을 읽을 필요가 있다.
2. 국민동원 담론
1) 전쟁 찬양과 군인 담론
1940년대 전반기의 식민지 협력 행위가 전쟁을 계기로 하여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전쟁 담론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조선문단의 첫 협력행위인 황군위문 조선문단 사절단 파견(1939.4.15~5.15)이 이루어진 것도, 이를 계기로 하여 조선문단의 협력 단체인 조선문인협회가 결성(1939.10)되는 것도 중일전쟁이 직접적인 계기였다.
황군위문 조선문단 사절단은 김동인, 임학수, 박영희였는데 그들은 조선으로 돌아온 후 각각 보고문 및 문학작품을쓰게된다.
그중요한문헌은박영희의'전선기행'(박문서관, 1939), 임학수의'전선시집'(인문사, 1939)이다.
이 두 문헌은 이 자료집에는 실려 있지 않지만, 한국어로 쓰인 것이기에 일독을 권한다.
이 자료집에는 그 대신 임학수의 「북지에 심부름을 하고」와 박영희의 「전선을 순례하고」를 실었다.
이 글들에서는 공통적으로 전쟁의 필연성을 주장하고 있는데, 그 논법은 일본군에 의한 중국 인민의 해방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비판 대상은 중국을 식민화하고 있는 서양세력과 이와 결탁해 중국 인민을 착취하는 중국의 위정자다.
그러나 중국 인민에게 일본군도 그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자각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또한 이 글들에서 중국에서의 조선인이 어떤 상황에 있는가를 솔직하게 토로하고 있어 흥미롭다.
그 다음으로 전쟁에 관한 담론은 1941년 12월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에 따른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등장하게 된다.
김동인의 「태평양송」이 대표적이다.
그는 “태평양은 내 바다다. 인류에게 향하여 큰 소리로 능히 이렇게 부르짖고 이 권리를 주장할 지위와 실력을 가진 자는 오직 우리 일본밖에 없다”라고하며 서양을 이기는 것을 긍지로 삼았다.
이 자료집에는 당시의 글들이 많이 실려있지 않지만, 정인섭의 「위대한 새벽」에서처럼 매년 12월이면 태평양 전쟁의 발발을 소재로 한 글들이 많이 발표되고, 김기진의 회고처럼 전향의 계기가 진주만 공격이었다는 점('김팔봉전집 2', 277쪽)을 생각하면 진주만 공격으로 상징되는 동서양 대결사관이 문화예술인에게 가진 사상적 의의는 과소평가될 수 없다.
그에 비하면 1942년 2월의 싱가포르 함락은 이벤트에 불과했다.
'매일신보'에 연재된 「싱가포르 함락과 문화인의 감격」에서는 “싱가포르 강에 가득찬 무수한 정크선도 미소를 띠우면서 남국의 보배를싣고 올 날도 머지 않을 것이다”
(정인섭)처럼 자원 획득의 의미로 다가오거나, 안석영의 「동양문화의 빛날 때」나 “그동안 미영이 비인도적인 온갖 수간을 농하여 동양을 침략하고 동양인을 멸시하고 착취한 죄는 우리 황군의 신검에 의해 벌을 받았다”
(현제명)처럼 진주만 공습에서 촉발된 동서양 대결사관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총독부 당국도 싱가포르 함락을 기념하여 각 국민학교에 고무공을 나눠주는 이벤트로 전쟁 동원을 독려했고, 문화예술인들의 호들갑도 이 범주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1942년 5월의 징병제 실시 결정과 1943년 8월의 징병제 실시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문화예술인들은 이 사건에 촉발되어 다양한 글을 썼다.
그것은 장혁주의 「조선 징병제 실시」에서 보듯이 “조선의 황도화가 인정되는” 것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신체의 개조, 생활의 개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군인의 규율을 기준으로 한 이러한 자기 개조가 바로 ‘국민’이 됨을 의미했다.
'국민문학' 1942년5·6월 합병호의 「명사, 징병의 감격을 말하다」에 실린 주요한, 서춘, 유진오, 최정희, 모윤숙 등의 글이나 김종한의 「병제와 문학」, 박영희의 「자만보다도 연성」등은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 실시가 가진 의미를 이 두 가지로 서술하고 있다.
징병제 실시에 대한 감상의 연장선상에서 쓰인 글이 입소 체험이다. 군인 체험이나 입소 체험을 다룬 글에서 가장 중점을 두고 서술하는 것은 바로 징병제 실시에서 찬양했던 이러한 신체와 정신의 개조이다.
이석훈의 「보도연습에 참가하여」, 장혁주의 「입소일기」, 「지원병 훈련소」등은 군인의 규율을 찬양하고, 그것이 일본 국민이 되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군인 규율의 찬양은 일본 군인과 전사한 조선 지원병의 찬양을 통해 모범적인 군인상을 만들어가는 방향으로도 전개된다. 장혁주의 「야마모토(山本) 원사 국장참배기」, 정인택의 「다케야마(武山) 대위의 일들」등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2) 총후의 동원과 직역봉공
세계 제1차 대전 이후 근대 전쟁은 전방과 후방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총력전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에게는 조선인을 군인으로 동원하는 것 못지않게 후방에 대한 통제가 긴요했다.
1937년 8월의‘국민정신총동원 요강’의 제정을 시작으로 국민정신총동원 운동을 벌였고 같은 해 10월에는 국민정신총
동원 중앙연맹이 결성되었다. 또한 1938년 4월에는 ‘국가총동원법’이 성립되어 이 운동을 법률적으로 뒷받침했다.
조선에서는 1938년 7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 결성되고 1940년 10월 신체제 운동의 시작과 더불어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바뀐다.
조선의 문화예술인에게 후방의 동원은, 전쟁의 동원이 그랬듯이 단순히 전쟁에 참가한다는 의미를넘어선 것이었다.
그것은 자기를 개조하고 사회를 개조하여 ‘국민’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총후의 동원이 ‘국민화’의 기제라는 것은 그것을 의미한다. 전쟁과 총후 동원은 국민이 되는 중요한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윤두헌의 「새로운 인간과 윤리」에서처럼 새로운 인간을, 즉 국민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계기였던 것이다.
총후의 마음가짐을 군인의 규율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은 직역봉공이라는 말로 대변된다.
자기가 맡은 곳에서 전쟁에 도움이 되도록 모범적인 활동을 하는 것을 직역봉공이라 한다면, 이 또한 단순한 전쟁에의 도움보다 자기 개조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주요한의 「직장·도장·전장」에서처럼 직장이란 자신을 연성하는 도장이며, 나아가 전장이다.
조우식의 「선감학원 견학기」, 「유성농민도량을 보다」,「싸우는 항공창」,
김기진 등의 「작가 화가가 본 싸우는 증산」, '국민문학' 1944년 7월호의 「증산면과문학자」,
윤두헌의 「들판은 전쟁터」등 각종 생산현장 방문기는 생산 증강을 통한 전력 향상을 꾀하는것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인간 개조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문화예술인에게 직역봉공은 무엇보다 자신이 속한 직역, 즉 문화예술의 창작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음악도 군수품”이라고 하는
양훈의 「전쟁과 음악, 군국조 가요 이야기」에서처럼 수단과 도구로서의 예술이 주장되고 있다.
양훈의 글에서와 마찬가지로 계정식의 「음악은 군수품이다」에서도 동일한 주장이 반복되고 있듯이 대중적 호소력이 강한 즉물적인 장르의 예술에서 이러한 주장이두드러진다.
이 경우 오락적인 경향의 예술에 대한 자기 반성과 국민성의 형성, 그리고 국민 정신의 고취, 전쟁에의 참가 독려 등이 글의주된 논지가 된다.
이러한 경향은 심형구의「시국과 미술」등 미술에서뿐만 아니라, 연극, 영화에서도 나타난다.
특히 야마베 민타로(山部珉太郞)의 「벽지에서 싸우는 연극」나 신정언의 「징병취지야담만담행각」등에서처럼 공연예술계에서는 지방 순회 공연에 대한 보고서가 많이씌여졌다.
또한 직역봉공을 위해 조선문인보국회나 조선연예협회, 조선문예회, 조선연극문화협회,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조선영화인 협회, 조선음악협회, 조선미술가 협회 등 다양한 단체가 성립되었는데, 이들 단체의 성립 배경이나 취지, 창립문, 활동내역 등이 이 자료집에 수록되었다.
이 자료집에서 가장 비중있게 소개된 것은 그 가운데에서도 다카시마 긴지(高島金次)의 '조선영화통제사'이다.
일본인으로서 조선 영화계에 깊이 관계해온 다나카가 기록한 조선 영화에 대한 서술은 당시의 정책 수립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참고 문헌이 될 것이다. 많은 자본과 뛰어난 기술을 필요로하기에 권력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지 않을 수 없었던 영화계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이 책은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자료집의 가장 큰 성과 가운데 하나가 이 책에 대한 번역일 것이다.
(3) 여성의 동원
이 자료집에는 주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지 않지만, 여성의 동원도 국민 동원 담론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여성 동원은 총후 동원의 일종이긴 하지만, 직업이 아닌 일상 생활의 동원은 여성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고, 또한 전쟁 동원의 한 기제가 모성 동원으로 드러난다.
어떤 측면에서는 김종한이 자신의 시집 제목을 “어머니의 노래”라고 붙였듯이('어머니의 노래' 후기) 조선 전체를 어머니, 혹은 여성으로 형상화하는 담론마저 가능했다.
이 자료집에서는 여성작가인 모윤숙과 최정희의 글을 통해 여성 동원의 일단을 엿볼 수도 있고 또한 각종 징병 관계 글들에서 어머니의 인내와 뒷받침을 통해 아들에 대한 전쟁 독려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살펴볼 수도 있다.
이에 대해 자세히 보고 싶다면 이 자료집에 수록되지는 않았지만, 최정희의 소설「야국초」나 정인택의 소설 「돌아보지 않으리」를 읽으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직접적으로는 이 자료집에 실려 있는 최정희의 「황국의 아들의 어머니에게」에서 그것을 잘 볼 수 있다.
이 글의 배경이 되는 1942년 5월은 조선에 징병제가 실시되는 것이 일본 각의에서 결정된 때이다.
최정희는 그 “감격과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이 이유 때문이었다.
이제까지의 저는 아이들에게 전쟁에 가서 죽어도 좋으냐고 물었을 때, 아들이 죽는 것을 두려워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돈이 없어도 아버지가 없어도 군인이 될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아들이 불쌍해서 어두운 얼굴을 한 것은 아닙니다.
아들이 갖는 희망이 이루어질지 어쩔지, 그것이 저는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잠자코 나라를 위하는 여인이 되겠습니다. 나라의 역사를 만드는 아들의 어머니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겠습니다.(「황국의 아들의 어머니에게」)
아들이 전쟁에서 죽을지 모른다는 주저와, 돈과 아버지(조선민족)를 넘어설 강한 주체(군인)로 아들을 키울 수 있다는 확신 사이에서 후자를 선택하고 그것을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해가는 과정을 이 글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들의 죽음을 담보로 했다는 점에서 사이비 모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 내선일체 담론
(1) 일본인되기
‘내선일체’의 문제는 전쟁의 문제와 조금 구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론 내선일체의 중요한 계기와 동력이 전쟁에서 나온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일합방 당시부터 일제는 ‘일시동인(一視同仁)’이라는 동화정책을 내세웠고, 동화란 식민지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점에서 보면 국민동원과 논리적으로 구분될 수 있다.
1910년대 한일합방의 이론적인 뒷받침 가운데 하나는 일선동조론이었다.
「한국병합조서」에서 밝힌“조선은 천황의 충량한 신민”이라고 하는 일시동인이 식민지 정책의 기조였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소 조선의 문화적 독립성을 인정하는 정책을 취해왔지만, 1930년대 후반이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일본의 범위가 커지면 커질수록 새로운 정체성 논리가 필요해지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정체성이란 미리결정된 어떤 것이 아니라 정치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을 가지고 그것과 연동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선일체’ 담론이 새 장을 맞게 되는 것은 일본의 확장이라는 정치적 사태와 연동하는 것이다.
내선일체 운동은 우선 1938년 4월부터 실시된 제3차 조선교육령을 불러왔다.
조선교육령 개정은 그 목표를 ‘내선인’, 즉 조선인과 일본인의 공학(共學)에 두었다.
1935년 가을에 이미 공학 논의가 있었지만 이것은 조선인의 강력한 반대로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났고, 1937년 가을에 다시 공학 논의가 일어났을 때는 조선인의 반대가 표면화되기 어려웠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였기 때문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공학에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첫째가 학제의 일치였다.
학령도 다르고 학교명칭도 다르던 것이 제3차 조선교육령을 통해 조선인의 그것과 일본인의 그것이 일치하게 되었다. 둘째는 조선어의 수의(隨意)과목화였다. 수의과목화란 조선인 학교에서 필수과목이었던 조선어를 선택과목으로 바꾼다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공학의 최대 걸림돌 가운데 하나였다.
즉 공학이 되더라도 일본인은 조선어를 선택하지 않으면 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논의는 이에 그치지 않아 실질적으로 조선어 폐지로 이어졌다.
조선교육령이 조선 문화예술계에, 특히 문학계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1938년 10월장혁주 각색, 무라야마 도모요시(村山知義) 연출의 일본어 연극 '춘향전'을 경성에서 공연하는 것을 계기로 조선인 문학자와 일본인 문학자들이 모여 좌담회를 열었을 때(「조선문화의 장래」) 단연 화제는 언어 사용 문제였다.
일본인 작가들은 조선인 작가들이 일본어를 사용할 것을 주장했고, 조선인 작가들은 일본어로 쓰면 표현하지 못할 것이 반드시 남는다고 하여 조선어 사용을 주장했다.
이러한 좌담회에서는 논전은 1939년 7월에서 8월에 걸친 언어사용논쟁(김용제, 한효, 임화)으로 첨예화되었다.
언어문제는 이에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문제시되었다.
1942년까지 조선어는 문학의 언어로서 인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조선문단의 유일한 문학잡지인 '국민문학'이 처음에는 1년에 조선어 8회, 일본어 4회로 발행될 예정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조선인 징병제가 결정되는 1942년 5월, 그러니까 이와 병행하여 실시된 국어(일본어) 전해운동이 시작될 때 '국민문학'은 일본어 전용으로 전환된다. 문학계에서 내선일체에 일단락이 지어지는 것은 이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몇 달 후 예의 조선어학회 사건(1942.10)이 일어난다.
이 자료집에 수록된 국어(일본어)와 조선어에 관계된 글들은 대부분 1942년 5월 이후에 씌여진 것들이다.
박영희의 「국어에 대한 애정」이나, 윤두헌의 「언어의 문제」, 이무영·이석훈의 「국어문제회담」등은 이미 조선어를 폐지하고 국어(일본어)를 전용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그것을 잘하기 위한 방법을 설명하거나 국어 전용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것에 머물고 있다.
일본어 사용에 대한 논란을 보기 위해서는 앞에서 말한 좌담회 「조선문화의 장래」나, 이 자료집에 수록되지 않은 김용제, 한효, 임화의 '경성일보' 논쟁을 살펴보는 것이 좋다.
문학에서의 일본인되기, 혹은 일본문학되기가 언어를 매개로 하고 있다면, 사상에서 중요한 것은 창씨개명과 내선동조동근론이었다.
이 문제를 주로 다룬 것은 김문집과 김용제였다. 김문집에게 일본인이 된다는 것은 “조선민족의 집대강화”(「조선문단인에게」)를 의미했다.
세계사적으로 보아 일본이 웅비하는 시점에서 조선인이 일본 국민이 되어야지 조선 민족이 살아남고 번영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이광수나 김용제에게도 이어진다. 말하자면 “조선을 위해 친일했다”라는 논리가 그것이다.
강한 민족에 대한 선망이 친일을 가져왔다는 역설을 조관자는 ‘친일 내셔널리스트’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그 표현이 정확하게 들어맞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일본국민화를 이야기하기 위해 조선민족의 복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모순에 놓여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창씨개명의 논리적 근거는 내선 동조동근론에 있었다.
김문집의 「씨설정을 주제로」에서는 원래 일본과 조선은 하나였고, 그 사례가 고대의 이름이었다.
고대에는 일본식 이름밖에 없었고, 이후에 중국 문화가 들어와 중국식 이름이 탄생했다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조선인이 일본인이 되는 것은 근원으로 귀환하는 것을 의미했고, 여전히 옛 것을 지키고 있는 일본은 형이 되고, 외래 사상에 물든 조선은 아우가 되는 것이다(김용제, 「스승에의 말, 형에의 말」).
또한 일본인되기의 최종적인 귀착점은 천황에의 귀일(歸一)이었다.
이석훈의 「새로운 결의」는 그러한 감상을 일본의 각종 신사와 신궁을 방문한 후 토로한 기록이다.
장혁주의 「황도조선의 완성」에서는 일본인되기란 “대어심으로 귀일하는”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반도문화정책의 근본은 일본문화의 반도에의 이식과 배양에 있”는 것이다.
이 자료집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지만, 최재서의 「받드는 문학」(1944)은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달은 후 씌여진 평론이라고 할 수 있다.
최재서가 일본인되기란 천황을 모시는 것임을 깨달은 이후 창씨개명을 한 것을 보면 일본인되기 창씨개명 〓〓천황숭배가 논리적 연관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상적인 측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해당하는 것이고 일반적인 경우에는 달리 파악되어야 한다.
창씨개명이 사상적 의미를 띠지 않고 제도의 변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다.
법률을 전공한 유진오가 창씨개명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2) 동양문화론과 일본문화론
내선일체의 사상적 기반 가운데 하나는 일본문화론, 나아가 동양문화론이었다.
동서양 대결사관이 일본문화, 나아가 동양문화의 우월성을 찬양하게 한 것이다.
일본문화에 대한 찬양은 천황의 만세일계(萬世一系), 팔굉일우(八紘一宇) 사상에 집중된다.
만세일계란 동양의 대표적인 정신을 천황가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고대로부터 이어왔다는 사상이고, 팔굉일우란 이러한 정신으로 세계를 통치한다는 이념이다.
이러한 사상은 일본의 고대문헌인 '고사기', '일본서기', '만엽집'의 해석과 일본의 국학자인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장황하게 전개된다.
조우식의 「부여중견청년수련소 방문기」가 그러한 일본문화론을 대표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사상의 영역을 벗어난 것, 즉 종교의 영역에 속한다.
일본의 국가종교인 신도(神道)가 그것이다.
최재서가 ‘받드는 문학’을 주장하면서 논리로서 도저히 돌파할 수 없는 부분을 천황에 의귀일로써돌파하고자한것도그때문이다.
논리가이를수있는최대한은앞에서본고대문화론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조선인으로서 일본문화론, 그러니까 천황의 사상인 신도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필자의 공부가 짧아서, 혹은 필자가 신도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러한지모르나,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신도를 타민족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천황에 대한 언급과 찬양이 계속되는 것은 어떠한 이유일까?
그것은 당대의 상투구였거나 자기 기만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 둘 다 문화예술인의 감각에는 어울리지 않는 정치인의 감각이라 할 수 있다.
동양문화론, 일본문화론의 또 다른 형태는 각 예술장르의 개혁으로서의 국민문화론이다.
계정식의「신동아음악의 건설」은 신동아음악을 “서양음악이론 기초 위에서 시대가 요구하는 과학적으로 된 서양음악을 사용하되 동양의 정서를 강하게 표출하기 위하여서는 동양악기를 쓸 수 있도록 작곡하면 미래에 발전성 있는 동양적 음악을 가질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라고 하여 동양과 서양의 종합을 새로운 국민문화로 제시하였다.
이처럼 국민문화는 서양적인 개인주의적, 형식적 문화를 넘어 일본 정신에 기반을 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김관의 「국가의 신체제와 신음악의 건설」에서처럼 “일본정신에 입각한 독창적인 것”이라고 말하지만, 일본 정신의 실체는 명확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적인 것의 배척이라는 네거티브한 방식으로만 일본 정신을 이야기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일본에서조차 일본 정신이나 일본 국민문화가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는 이유가 가장 크다.
그러나 나아가 그것은 국민문화를 아직 미정형의 것, 새롭게 수립되어야 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관의 「동아의 신정세와 음악문화의 재출발」에서처럼 그것은 “적극적으로 건설적으로 국민생활의 체제를 구축하는 일조건”인 것이다.
이러한 점은 국민문화를 미래의 것, 즉 앞으로 조선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질 구성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최재서에게서 가장 잘 드러난다(졸저, '식민지 국민문학론' 참조).
1944년 1월 이전의 최재서에게 일본인이란 현존하는 일본민족이 아니었고, 일본문화란 현존하는 일본문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이나 만주 등도 포함된 일본 제국의 재편된 문화를 의미했던 것이다.
최재서가 아니더라도 국민문화를 미정의 미래형으로 묘사하는 것에는 이러한 욕망이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어떤 측면에서는 국민문화란 현존하는 일본의 문화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고, 따라서 일본 정신을 파악하려는 노력도 이어졌다.
그러나 그것도 현재의 일본, 그러니까 서양에 물든 일본이 아니라, 서양이나 중국 문화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일본 정신을 보여주는 일본 고대의 문화를 전범으로 삼고자 했다.
이석훈의 「국민문학의 제문제」는 '만엽집'을 근거로 ‘간소미’를 일본적 미로 도출해냈다.
조우식의 「사랑과 기도의 노래」도 또한 고대 일본의 문헌을 바탕으로 일본적 미(美)를 도출해내고자 했으나, 그것은 일본적인 것이라기보다 서양과의 대립에서 도출된 동양적인 것 일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체성이란 이처럼 대립에 의해서만 의미를 가지는 정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인이 일본인이 되는 것은 일본의 문화를 흡수함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자를 만들어냄으로써 가능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만주’라는 타자를 매개로 하여 내선일체를 도모하는 것이었다.
(3) 만주 및 아시아라는 타자
정체성이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형성되고 유지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1930년대 후반기에는조선-일본이라는 관계에 덧붙여 만주와 중국이라는 제3의 존재가 등장함으로써 조선-일본의 관계에 변화가 온다.
일본의 만주 개발이 본격화되고, 이것이 중일전쟁과 맞물리는 상황은 식민지-식민지 본국이라는 관계에 또 다른 식민지가 등장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 속에서 조선은 구조적으로 피압박 민족이면서도 압박 민족인 중간적 존재가 되었다.
조선이 내선일체를 추구하고, 또한 전쟁에 참여하는 주요한 근거 가운데 하나는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에서의 조선의 위치 상승이었다.
조선이 일본이 됨으로써 식민지에서 식민지 본국으로 위치가 급상승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허위의식이거나 환상에 불과했지만, 당대의 일부 지식인에게는 상당한 기대감으로 다가갔다.
김문집의 “조선민족의 집대강화”(「조선문단인에게」)라는 말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조선민족의 행복의 길은 이제는 두 가지밖에 남아있지 않다.
외국으로부터 아무런 위협과 침해와 간섭을 받지 않는 완전한 독립국을 세우는 것이 그중 하나이며, 민족의 일원화를 마지막 단계로 하는 내선일체에의 길이 또 다른 하나인 것이다.(「조선문단인에게」)
이러한 발언은 일본의 확대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싱가포르 함락에서 느끼는 조선의 문화예술인의 감정은 “아시아의 새로운 문화수립을 하는 데 아시아의 건설전사로서의 각오와 자부심”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새로운 역사의 주체로서의 사명감이다.
일본의 확장, 새로운 일본 제국의 건설에 스스로 참여하고 있다는 착각이 이러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의사 제국주의라고 - 할 수 있는데, 스스로의 입장을 확장과 침략의 대상이 되는 지역과 차별화함으로써 일본과 동질감을 느끼는 대타적인 정체성 확립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임학수와 박영희가 중국전선에서 활약하고 있는 조선인의 현상을 보고하는 것에서도 그러한 대타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중국을 야만으로 그림으로써 일본의 중국 침략을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조선인의 활약도 정당화할 수있었던 것이다.
만주를 중국인의 땅이 아니라 무주지로서, 즉 개척의 관점에서 묘사한 각종 만주 시찰기와 만주 개척기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이 자료집에서는 그 가운데 하나인 「간도성 시찰작가단 보고」를 통해 그 현황을 잘 살펴볼 수 있다.
4. 결론
이상으로 자료집 15권에 실린 문화예술인들의 시평과 평론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는 말은 해제의 분량이 적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필자가 1940년대 전반기의 담론을 바라보는 관점이 일정한 한계를 지님을 의미한다.
필자는 필자의 안경을 끼고 자료집 15권을 살펴보았을 뿐이다.
이 자료집을 대하는 독자들은 또 다른 안경을 끼고 이 자료집을 살펴볼 것이다.
그것은 이 시기의 담론이 현재 쟁점이 되어 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 글에서는 최대한 자료의 소개의 머물고자 했지만, 그것도 최소한의 분류와 시각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마지막으로 필자의 안경이 아닌 다른 사람의 안경을 소개함으로써 글을 맺기로 한다.
그것은 1940년대 전반기, 특히 ‘친일문학’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각을 제시함으로써 이 해제가 갖는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해제가 문제 삼는 일제말기(1939~1945.8.15)의 담론은 여전히 논란 속에 놓여 있다.
한국사회에서‘친일’ 청산이 이루어진 적이 없기 때문에 지금 혹은 앞으로 ‘친일’을 청산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것이
현재적·미래적 문제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제말기의 담론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하며, 어떤것을 계승하고 어떤 것을 청산할 것인가 하는 것 자체가, 우리가 어떤 사회를 지향해야 하는가 하는 가치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현재적·미래적인 과제인 것이다.
이 시기의 담론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각과 입장은 대상을 규정하는 개념에서부터 충돌하고 있다.
우선 ‘친일’이라고 규정하는 입장은 민족주의와 제3세계주의에 입각해 각각 ‘친일/반일’, ‘저항/협력’의이분법으로 이 시기 담론을 규정한다.
민족주의적 입장은 1990년대 이전의 연구에서 주류적 위치에 있었으며 임종국의 '친일문학론'(1966)으로 대표된다.
이 입장에서 보면 식민지 시기의 과제는 민족어·민족문화·민족정신의 건설과 수호에 있었고, 그것의 반대편에 서 있던 것이 일제말기의 ‘친일’인 것이다.
이러한 담론적 고발과 단죄는, 일제 식민지를 지탱하던 조선인 상층부를 그대로 지배계급으로 하여 성립되고 유지된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것이기도 했기에 도덕적 정당성마저 띠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화와 경제적 성취를 통해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위치가 격상됨에 따라 1990년대 이후에는‘친일’을 배제함으로써 순정한 민족문화를 이루려는 민족주의적 입장이 저항으로서의 의미를 잃고 배타적 국수주의로 빠질 위험에 처하게 된다.
민족담론이 동아시아담론으로 확장됨으로써 계속 저항적 담론일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친일’론은 민족주의를 확장한 제3세계주의에 입각함으로써 저항의 거점을 갱신하고자 했다.
그것을 대표하는 것이 김재용의 논리('저항과 협력', 2004)이다.
그가 ‘친일문학’의 청산을 통해 보호하려고 하는 것은 민족사적 정의가 아니라 세계사적 정의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문학의 논리 자체는 긍정함으로써 ‘친일문학’을 배제하고 민족문학을 수립하려 했던 임종국과는 달리, 그는 제3세계론에 입각해 세계사 속에서 일본의 제국주의 논리를 비판하고 그것에 협력한 식민지인들을 비판할 수 있는 객관적 근거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나 제3세계론이 그러하듯이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은 여전히 민족주의를 주요 동력으로 하여 전개되기 때문에 그것은 임종국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아 ‘확장된 민족주의’, 혹은 ‘동일성에 의한 재영토화’로 비판되기도 한다.
임종국에 비해 민족주의적 기준을 훨씬 유연하게 적용하지만 그가 ‘저항/협력’의 이분법과 그 경계 설정에 여전히 집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제말기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시각은 '문학속의 파시즘'(김철 외, 2001)에 의해 제시된다.
이 입장은 ‘파시즘’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그것이 입각하고 있는 것은 탈근대론·탈민족론(포스트콜로니얼리즘)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친일’은 그렇게 쉽사리 청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친일’은 의식·행위·정신의 문제가 아니라 무의식·구조·신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입장에서는 ‘친일’보다는 근대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식민주의가 부각된다.
식민주의는 근대의 앎과 제도가 형성한 것이기에 식민지 주체 또한 거기서 자유롭기 힘들다.
그에 따르면 오히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앎과 삶의 원리가 되었던 민족주의 자체가 식민주의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입장은 앎과 문학의 명백하고 의식적인 일본 제국주의와의 근친성(친일)보다 무의식적·구조적 근친성을 더욱 문제 삼는다.
이 입장은 1990년대 이후의 한국사회가 독재정권의 폭력적 지배에서 동의·자발에 근거한 관리적 지배로 이행하고 있다는 진단에 근거를 두고 있다.
‘친일’론 자체가 그러한 관리사회의 이데올로기로 전화되고 있기에 그에 대한 명백한 거부를 표하고, 일제말기의 담론에서 보아야 할 것도 의식적·폭력적 지배(친일)가 아니라 무의식적·관리적 지배라고 한다.
그 기원이 일제말기 총력전 체제에 있기 때문이다.
반면 ‘파시즘’론의 이러한 문제 설정은 일제말기의 담론을 근대담론으로 환원(근대의 외부는 없다)시키거나 식민지 주체의 담론을 제국주의의 담론으로 환원(주체〓종속)시킴으로써 반제국주의적 저항의 가능성을 봉쇄했다는 비판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시즘’론 이후의 일제말기 문학에 대한 연구는 ‘친일’론이 제기했던 고정된 저항축과 ‘파시즘’론이 제기했던 저항의 불가능성을 모두 비판하고 저항과 협력축의 복수화를 꾀한다.
이 관점은 민족주의적 저항이라는 이름하에 가려졌던 다양한 계층과 계급에 주목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젠더와 서발턴(subaltern)의 문제이다.
과연 여성과 하위계층에게 남성부르주아의 전유물인 민족주의적 저항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또한 일제말기의 경험을 민족사로 환원시키지 않고 세계사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시각을 김재용과는 다른 방식으로 제시하려 한다.
식민주의 협력행위에 대한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책임 추궁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이 해제는 일제말기의 담론을 마지막 관점에 입각해 고찰했다. 마지막 관점이라고 해도 연구자마다 제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일괄해서 말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친일’론과 ‘파시즘’론의 입장도 한데 엉켜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기에 객관적 입장에 서기가 힘들다는 점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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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제에서 사용하고 있는 개념이나 일부 내용은 본 위원회의 취지와 다를 수 있음.
Ⅰ. 전시하 일제의 문화정책과 문예계 상황
1. 문화 일반
1) 조선문화의 장래(좌담회)
참석자
아키타 우자쿠(秋田雨雀), 하야시 후사오(林房雄), 무라야마 도모요시(村山知義), 장혁주(張赫宙), 가라시마 다케시(辛島驍, 경성제대 교수), 후루카와 가네히테(古川兼秀, 총독부 도서과장)정지용(鄭芝鎔, 시인), 임화(林和, 평론가), 유진오(兪鎭午, 보성전문학교 교수), 김문집(金文輯, 평론가), 이태준(李泰俊, 소설가), 유치진(柳致眞, 극작가)
조선의 잡지
하야시 : 오늘 좌담회는 ‘조선문화의 장래와 현재’ 혹은 ‘문화에서의 내선일체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하는 제목으로 얘기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저는 일전에 만주와 북중국을 돌아볼 목적으로, 조선은 그냥 지나칠 생각으로 일본을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관부연락선 안에서 우연히 같은 방에 있던 노인이 “댁도 조선은 돌아보지 않을 겁니까? 일본 내지에서 만주나 북중국을 시찰하러 가시는 분은 대개 조선을 그냥 지나치고 만주나 북중국만 머릿속에 있는 모양입니다만, 그건 잘못 생각하는 겁니다”라는 말을 하더군요.
그때는 “그렇습니까” 하고 흘려들었습니다만, 부산에서 경성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전 총독 우가키(宇垣) 씨의 조선에 관한 연설집을 읽으면서 문득 창 너머 경치를 구경했습니다.
그런데 우가키 씨의 연설집에 조선을 보려는 이는 이 경부연선의 풍경만 봐서는 아무것도 알수 없고, 이 철도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혹은 군사에 필요에 가장 편리한 곳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이 연선은 조선에서 가장 빈곤하고 생산이 적은, 또 정치적으로 보더라도 이조시대의 주구(誅求)에 고통을 받아 보수적으로 되었고, 생산력도 생각하는 힘도 전부 잃어버린 곳에 있기 때문에 이 연선만을 바라보고 조선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연설이 실려 있어서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지금 보고있는 연선의 풍경은 당시와는 전혀 달라서 산은 푸르고 곳곳이 경작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마침 수확기였던 모양인데, 들판에는 남자도 여자도 전부 나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보고 조선에는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어떤 것이 이미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경성에 가서 총독부 사람과도 만나고 또 조선의 청년들과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오늘밤 여기에 모인 여러분과 만나도 일본 내지와 가장 가까운 곳은 조선인데, 가장 가까운 곳을 모르면서 먼 만주나 북중국을 알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런 말을 해서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번에 우리 여비는 사실은 만주에서 받았기 때문에 경성에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사정이 그런데도 오늘로 5일이나 머물고 있다는 것도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오늘좋은 기회를 얻어 이런 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부디 여러분도 부담 없이 얘기를 나누길 바랍니다.
주로 저는 질문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의문이 있으면 질문하도록 하세요. 조선의 작가는 모두 의문을 갖고 있겠지만, 부디 부담 갖지 마시고 질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밤에는 여기에 바쁘신 와중에도 불구하고 후루카와(古川) 도서과장님도 오셨습니다.
과장님도 의견이 좀 있으신 모양인데, 그 의견은 조금 뒤 들어보도록 하죠(박수).
이는 조선에서 이런 형태의 모임은 처음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가장 먼저 묻고 싶은 것은 조선에는 어떤 작가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일본 내지에서는 조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반도를 지나갔다는 것만으로 그걸로 끝났다고 생각하는 이가 많습니다.
조선에는 어떤 잡지가 있는지, 어떤 사람이 무엇을 쓰고 있는지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우선 잡지와 사람에 대한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김문집 : 이전에는 여러 가지 잡지가 있었습니다만, 요즘에는 줄었습니다. 월간 신문도, 아시는 것처럼 마라톤으로 유명한 손기정의 일장기 문제로 정간되었고, 작년 6, 7월경 허용된 '동아일보'가 있지만 '중앙일보'는 없어졌습니다.
잡지도 이전에는 상당수 있었지만 종이 값이 오르면서, 또 총독부에서 별로 조선 잡지를 장려하지 않으려는 경향도 있고 숫자도 줄어서 우리 밥그릇이 줄었습니다.
그렇지만 '조선일보'에는 출판부가 있어서 거기서 세 종류, 즉 하나는 일반적인 것, 그리고 부인들을 위한 것, 또 하나는 소년들을 위한 읽을거리가 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해공론(四海公論)'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건 임화 씨가 주간으로 있었는데, 사장과 싸운 뒤 나왔습니다.
그리고 '삼천리(三千里)'라는 잡지가 있습니다.
이 잡지는 역사도 오래되었고 7,800부나 팔립니다.
그 밖에 작은 잡지는 많이 있습니다만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잡지에는 종종 비평도 있지만 그리 대단한 잡지는 아
닙니다.
하야시 : 비평이요.
김문집 : 그렇습니다만…… 비평이라기보다 일종의 사기(가짜 : インチキ) 잡지가 많습니다, 조선에는.
하야시 : 작가는 그 잡지에 투고하고 있습니까? 또 그걸로 충분합니까?
임화 : 그것만으로는 먹고 살 수 없습니다.
하야시 : 그럼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임화 : 작가로 먹고 사는 이는 한 명도 없어서 모두 다른 일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일이 없는 이는 어쩔 수 없이 허기를 참을 수밖에 없어요(웃음).
하야시 : 그렇게 먹고 살기도 힘들어하는 사람을 세상 사람들이 인정을 해줍니까? 작가로서…….
임화 : 인정을 받지 못해도 어쩔 수 없죠. 그래서 모두 난처해하고 있습니다.
하야시 : 어느 정도 있습니까? 그런 작가들은…….
임화 : 글쎄요, 80명 정도 될까요. 하지만 작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50명 정도 되려나.
하야시 : 일본에서 문학자라 불리는 사람은 2천 명 정도 있는데, 그 중에서 그걸로 생활하고 있는 사람은, 글쎄요, 2백 명 정도일 겁니다.
임화 : 옛날 작가라고 할까요, 인기 있는 작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실패하기 때문에 신문기자라도 하지않으면 먹고 살 수 없어요. 인기는 5, 6년이죠. 10년은 없어요.
무라야마(村山) (출석)
조선의 연극
무라야마 : 연극에 관한 얘기를 하자면, 조선에는 일본의 구극(舊劇)에 해당하는 것은 없고 신파(新派)와 신극(新劇)이 있는데, 현 상황을 조금 얘기해 주시겠습니까?
유치진 : 그런 것은 시골에도 있지만, 주로 경성에 있습니다. 조선의 신극은 극연좌(劇硏座), 중앙무대(中央舞臺) 등 4개 정도 있습니다.
신파에는 경성에 동양극장(東洋劇場)이라는 상설 간이소극장이있고, 거기에 호화선(豪華船), 청춘좌(靑春座)라는 두 극단이 반년씩 교대로 출연하여, 하나가 거기에 출연하고 있을 때는 다른 하나는 지방을 순회합니다. 언제나 만원이죠.
무라야마 : 신파극도 신극과 마찬가지로 일본 연극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까?
유치진 : 그렇습니다. 신파도 일본 영향을 받았습니다.
무라야마 : 그런 신파 이외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유치진 : 연예장(寄席) 같은 것과 옛 창극, 무용과 가면극이 있습니다.
무라야마 : 연극을 위한 독립적인 극장은 없습니까?
유치진 : 간이소극장 같은 것은 있었지만, 그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런 데서 하는 것은 연극이라 해도즉흥적인 연극으로, 지금도 있습니다.
무라야마 : 그 각본이 문자로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까?
유치진 : 일부는 있지만 대체로 그런 옛 조선의 문화, 특히 연극은 중국 영향을 받은 겁니다.
최근에는 일본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만.
하야시 : 일본은 옛날에 조선의 영향을 받았죠.
아키타 : 덴가쿠(田樂) 등도 주로 조선의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조선에도 일본의 덴가쿠나 가부키(歌舞伎) 같은 것은 없습니까?
임화 : 시골에는 덴가쿠 같은 것이 있습니다.
작은 북을 치면서 춤추는 겁니다. 여기서 약 20리 떨어진곳에 있습니다.
아키타 : 보고 싶군요.
임화 : 춤이 재미있는데, 그 모습을 보면 손을 흔드는 형태나 발 움직임이 마치 보리를 수확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라야마 : 제가 가장 의문스럽게 생각하는 점은, 조선의 춤과 노래에는 거의 대부분 다른 데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애절함이 있다는 겁니다. 군악도 마치 장례식 음악 같지 않습니까.
임화 : 춤에 인형과 탈을 사용하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그건 막을 치고 하는 겁니다.
유치진 : 그건 가면극으로 춤과 노래에 대사가 들어가 있습니다.
무라야마 : 탈은 저도 갖고 있는데, 참 독특해요.
아키타 : 나무로 된 탈도 있습니까?
임화 : 조잡한 것이지만 있습니다.
무라야마 : 바가지(일종의 호박. 껍질을 말려 물을 넣는 그릇 등으로 사용한다)로 된 것도 있고, 종이로 된 것도 있어요.
하야시 : 그런 것은 다른 도회지에 있습니까?
유치진 : 평양에도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런 가면극은 신라시대의 기록에 남아 있는데, 가면을 사용해 춤을 추기 때문에 일본의 시시오도리(獅子踊り-사자춤) 같은 겁니다. 봉산에는 유명한 가면극이 있는데, 이를 최승희(崔承喜)가 멋진 춤으로 만들었죠.
그 유장(悠長)한 몸동작은 봉산 가면극의 특징입니다.
고고학자의 말에 따르면 대체로 고려시대까지 있었다고 합니다만, 이조시대가 되면서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이조시대에는 유교가 번성하면서 그런 것을 금지하는 방침을 정한 거죠.
연극이라는 것을 매우 저급한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런 예술적으로 뛰어난 것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취했습니다.
지금도 그런 습관은 남아 있어요. 그래서 이런 민족적인 것을 하려고 하면 조정에서 처벌을 받기 때문에 숨어버렸어요. 다시 말해 가정에서나 춘 것이죠. 공개적으로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사정으로 중단된것으로 보입니다.
무라야마 : 아악 이외에 그런 음악, 민요적인 것은 하나도 보호하지 않았습니까?
임화 : 관기(官妓)가 있을 뿐입니다.
정지용 : 이조에 들어와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조선의 문화, 극, 무용, 음악 등이 시들어버리고 말았죠.
즉 유교 정치가 그런 것을 매우 경멸했기 때문에 봉산의 가면극 등도 중단되고 말았고, 조선에는음악이나 극문학 등 지금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무용 쪽에는 요즘 다소 극적(劇的) 요소가 들어가 있지만.
무라야마 : 시간이 별로 없어서 연극에 관해서 자세히 물어볼 수는 없지만, 현재에 이르러서도 조선에서 연극이 어떤 이유로 발달하지 않았는지 알고 싶군요. 이 문제는 잘 몰라서…….
유진오 : 극문(劇文)이 어째서 발달하지도 충실하지도 않았는가 하는 문제는 조선의 정치에 비해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다는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무라야마 : 이는 매우 중대한 문제입니다. 조선 문화의 장래는 현재 어째서 그런 상태인지, 그 점을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발달할 수 없어요. 문학에 관해서는 나중에 상세히 논하기로 하고, 지금 이 점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조치를 우리가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봅니다.
'춘향전'의 번역
장혁주 : '춘향전'을 문제 삼으면 얘기가 구체적으로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임화 : 그 번역은 괜찮은 걸까? '춘향전'은 제대로 번역되어 있습니까? 그 말이 지닌 맛을 번역한다는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텐데.
장혁주 : 임화 씨, 과거의 조선과 현재의 조선을 소재로 한 희곡을 일본의 극계(劇界)에서 상연하는 것과, 또 하나 조선어로 된 것을 일본어로 번역하거나 각색하여 일본인에게 소개한다는, 이 두 가지일은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조선(어로 하는) 극단이 조선어 연극을 일본에서 하는 것도 좋겠지만, 미치게 될 영향은 극히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어로 쓴 '춘향전'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도 성공했다고 봅니다.
유진오 : 그게 어려워요.
하야시 : 번역문이기 때문입니까?
임화 : 그렇습니다.
김문집 : 번역을 하면 서푼의 가치도 없어요.
임화 : 그것이 지닌 독특한 맛이 없어져요.
김문집 : 일본어로 번역하면 '춘향전'이 달라집니다.
하야시 : 그럼 번역 불가능론이라는 말이군요. 번역에는 번역의 사명이 있습니다.
가라시마 :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조선어로 된 것은 많이 판매할 수가 없어요. 때문에 많이 팔기위해서는 아무래도 일본어로 해야 합니다.
그런 생활의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만 일본어, 즉 번역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하야시 :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조선어로 하면 됩니다.
임화 : 그러나 '춘향전'의 성격은 일본어로는 도저히…….
장혁주 : 그걸 일본어로 표현하는 것은 매우 어려워요.
정지용 : '춘향전'을 소개할 경우 번역으로는 의미가 없어요.
무라야마 : 조선쪽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겠죠. '만엽집(萬葉集)'이 영어로 번역되더라도,우리는 그걸 '만엽집'이라고는 받아들이기 어렵지요.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더 많은 번역이 나오는 것을 환영합니다.
'춘향전'을 일본에서 공연했을 때 일본인들 호응도 좋았고, 또 일본에 와 있던조선 사람들도 울고 웃으면서 크게 기뻐했습니다. 일본인이 모두 조선어를 배울 수 없는 이상, 번역된 '춘향전'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김문집 : 일본에서 좋은 호응을 얻어도 경성에서는 어떨까요? 무라야마 선생님, '춘향전'은 결코 느낌이 살아나지 않을 겁니다.
정지용 : '춘향전' 그 자체의 느낌은 말이죠…….
김문집 : 일본인에게 느낌은 있어도…….
유진오 : 도쿄에서는 '춘향전'을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그걸 물어보고 싶어요.
무라야마 : 언어가 지닌 재미는 모른다 하더라도 '춘향전'의 에스프리는 전해졌다고 봅니다.
김문집 : 그건 시국과 관련 있다고 봅니다만.
하야시 : 그렇지는 않아요. 춘향이 몽룡을 그리워하며 정절을 지켜내는 것은 매우 훌륭한 것이었고, 저도 도쿄에서 봤는데 그건 만인을 움직인 훌륭한 정신으로 사람을 감동시킨 겁니다.
정지용 : '춘향전'의 장점은 가령 유교정치의 시대에 그런 것이 나왔다는 점입니다.
하야시 : 거기에 조선이라는 모습이 있고, 이를 예술화한 점이 매우 좋았어요.
정지용 : 조선의 것은 조선어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무라야마 선생님이 그걸 도쿄에서 조선인들이 보고 좋다고 말했다는데, 그렇다고 한다면 감사할 일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받아들일지 어떨지 물론 의문입니다…….
장혁주 : 신극 방면에서는 일본과 조선의 장래를 어떻게 하면 될지에 관해서 좀 더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무라야마 : 세 가지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조선인의 조선어 연극을 활발하게 하는 것. 일본의 극단이 좀 더 조선을 다룬 희곡, 조선의 고전을 번역, 각색하여 상연하는 것.
종종 일본의 극단이 조선에 와서 공연하고, 또 반대로 조선 극단이 일본에서 공연하는 것.
임화 : 우리도 가능하면 그런 식으로 도쿄와 오사카에서 할 수 있는 극단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쪽 신극(단)도 열심히 할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에는 좋은 후원자가 없어요. 우리는 조선의 좋은 극을 북중국이나 도쿄와 오사카에서 하고 싶습니다.
그건 단지 조선을 소개한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새로운 예술을 소개하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꼭 그런 기회를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김문집 : 그건 저도 찬성입니다. 하지만 '춘향전'이 도쿄에서 호응을 얻은 것은 시국 때문이라 생각해요. '경성일보'가 <애국조선박람회>를 다카시마야(高島屋)에서 했을 때, 모인 사람들이 조선은 이런 곳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본 사람들이 많았던 것처럼…….
하야시 : 이제 '춘향전' 얘기는 이 정도로 해 둡시다.
아키타 : 조선의 '춘향전'은 실제로 보러 갔던 조선인뿐만 아니라 제 옆에 있던 60살 정도의 사람도울고 있었습니다.
그 연극의 매력은 때와 장소를 뛰어넘어 통하는 휴머니즘에 있어요.
가령 언어라는 면에서 결점이 있어도 이같은 휴먼이라는 요소를 충분히 접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조선 문화 속에는 수많은 예술이 있어서, 그걸 넓히기 위해서 일본어로 번역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또 그와 동시에 일본의 것을 조선어로 번역하고, 조선어로든 일본어로든 상관없이 창작을 계속해나간다면 좋겠습니다.
무라야마 : 지금까지 조선에는 있지만 일본에는 없는 것을 무대 예술로 만들 수 있을 터이고, 이를 신극이 하고 있다는 인식을 갖기를 바랍니다.
하야시 : 지금까지 마치 '춘향전'의 선전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다음으로…….
김문집 : 이 '춘향전'이 만약 10년 전에 사회에 나왔다고 한다면…….
장혁주 : 일본에서는 조선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조선어 문학
이태준 : 잠깐 아키타 선생님께 여쭙고 싶은데요.
방금 조선어로 쓰든 일본어로 쓰든 상관없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우리 입장에서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본론과는 다른 내용이지만 질문하겠습니다.
일본의 선배분들은 우리 조선 작가들에게 조선어로 쓸 것을 진심으로 희망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이상으로 일본어로 쓸 것을 희망하고 있습니까?
아키타 : 우리 작가의 요망, 그리고 대중의 요망으로서, 즉 독자 또는 대상을 대중에 두는 작가로서는일본어가 좋겠지요.
무라야마 : 조선의 문학을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바라고 반향을 얻기 위해서 조선어로 쓴다고 해도 독자가 적기 때문에 반향이 적을 겁니다. 아무래도 조선에서도 실제로는 국어(일본어)가 보급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알게 하기 위해서는 일본어로 쓰는 편이 널리 읽힐 것이고,결국 일본어가 좋겠죠.
아키타 : 일본어로 써서 널리 읽히고 일부를 조선어로 번역하면 되겠죠.
정지용 : 두 쪽을 다 써도 좋겠죠.
하야시 : 국어 문제가 나왔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로서는 조선의 여러분께 말씀 드리겠는데, 작품은 모두 일본어로 하길 바랍니다.
아키타 : 일본어가 자유롭지 않다면 조선어로 쓴 것을 번역하면 될 테고요.
임화 : 이는 우리 작가로서 큰 문제입니다.
무라야마 : 조선어로 쓰면 표현할 수 있지만 일본어로 쓰면 표현할 수 없다는 조선어의 독특한 것이 있다면, 그걸 잃게 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그렇지 않는 한 여기까지 온 지금의 문제로는 일본어로 써도 거의 지장이 없는 듯 합니다. 조선어로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정치문제 이외에는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을 것으로 봅니다.
이태준 : 사물을 표현할 경우에 일본어로 적확하게 그 내용을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우리 독자적인 문화를 표현할 경우의 맛은 조선어가 아니면 불가능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일본어로 표현하면 그 내용이 일본적인 것으로 변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진짜 그렇습니다.
그러면 조선의 독자적인 문화가 사라질 것입니다.
하야시 : 그건 번역을 하면 됩니다.
무라야마 : 우리는 일본의 독자적인 가부키나 인형연극을 보존하는 데 찬성입니다. 과거의 것이라도 세계적으로 독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존재해야만 합니다. 그와 같이 조선의 고전적인 예술은 반드시 존재해야 합니다.
그런 것은 정부로서도 보호를 해야 할 것입니다.
임화 : 그런 박물관적인 것이 아니라…….
유진오 : 문제가 큽니다만, 일본어로 지장이 없는 것은 써도 되지만 쓸 수 없는 것이 있어요. 번역 가능하고, 게다가 일본인들이 즐거워하는, 매우 의미 있는 것은 우리도 가능한 한 하겠지만, 조선의 문학은 조선의 문자를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문학의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무라야마 : 그건 물론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좀 더 크게 생각하는 게 좋을 겁니다. 조선어로 쓰는 것이 좋다고 처음부터 정하지 말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다는 점에 눈을 돌렸으면 합니다.
임화 : 시를 쓸 경우 그 말에 담겨 있는 감정, 즉 문자가 번역된다면 그 의의가 사라집니다.
번역시는 아무래도 와 닿는 부분이 없어요. 이는 정치적 입장을 떠나 순수하게 예술적으로 바라보고, 문화적으로 이해해야 할 겁니다.
하야시 : 영국이 아일랜드에 취한 정책은 어땠습니까? 그래도 아일랜드 문학은 있어요.
이제 우리는 이렇게 여러분과 좌담회를 열어도 의미가 통하게 되었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앉아 있는 지금, 조선어가 아니면 안 된다든가, 일본어에 저항한다든가 하는 것은― 오늘날 일본의 영향에서 벗어난 예술은없을 텐데요.
김문집 : 그런 식으로 가는 게 자연스런 경향이긴 하지요.
임화 : 언어의 예술이라 아무래도…….
하야시 : 아일랜드어를 사용한 문학이 있는 것처럼, 결코 조선문학도 사라지지는 않을 테니 그렇게 고집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일본어가 좋다는 것뿐입니다.
정지용 : 그런 점에서 보자면 유망합니다.
김문집 : 아키타 선생님은 좀 더 큰 정치적인 의미를 갖고 계시겠죠.
무라야마 : 여러분이 작품을 내고 무엇을 원합니까? 많은 반향을 기대하고 있을 겁니다. 또 작가로서의 개인적인 문제에서 보더라도 작가는 문학으로 수입을 얻어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현재 조선어로쓰면 거의 생활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더라도 작가는 일본어로 쓰는 편이 행복할겁니다.
(무라야마 퇴장. ―무라야마가 말하길, “오늘은 마침 신협극단(新協劇團)의 조선 공연 전날이고, 부민관(府民館)에서 연극 강연회가 있어서 저와 아키타 씨와 장혁주 씨는 강연 도중에 잠깐 시간을 내어 출석하였다.
때문에 이런 언어 문제에 대해서도, 또 그 밖에 대해서도 제대로 논의하지 못한 점,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훗날 상세히 논할 기회가 있겠지”라고 했다.)
유치진 : 연극에서 마치 조선 한복을 입고 일본어로 말한다는 것은…….
하야시 : 일본의 연극 역시 그래요. 양복을 입고 일본어로 한 것이 20, 30년이 지난 지금은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게다가 전부 번역한 것들뿐이고…….
유치진 : 그건 번역한 극이죠.
하야시 : 일본은 주로 번역극입니다. 연극 초기에는 전부 그랬어요.
그러니 여러분은 일본어로 작품을 많이 만들어 보내주길 바랍니다.
후루카와 : 저는 문학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물론 맞지 않는 부분도 많겠지만, 옆에서 지켜보면서 늘 느끼고 있던 점은, 예술 쪽에서 보건대 조선의 문예 방면의 일부분은 매우 좋아지긴 했지만, 이를일본과 비교하면 상당히 낮은 수준으로 보입니다. 이에 대해 관민 모두 부흥시키겠다는 의사가 없어요. 어쨌거나 모두 중단되어 버렸고, 지금은 일본과는 비교도 안 되는데도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있지 않아요.
저는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생각합니다. 앞서 김문집 씨가 정치적 특수사정 운운하셨는데, 이 방면에서 언어 문제, 혹은 교육 정도가 낮고 구매력이 없고 민도(民度)가 낮다는 등의 이유로 말입니다.
사람들에게 그런 힘이 없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독립된 훌륭한 사회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신문과 잡지는 오늘날 가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문예가들이 경시한 결과이기도 합니다만, 그런 것에 대해 현재 조선에서 돈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이런 예술적인 방면에 별 관심이 없는 등, 결국 그런 여러 요인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유식자는 각성을 하고 적극적으로 그런 목적을 위하여 상당한 기관을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기운이 점점 커져서 하나의 일이 일반적으로 일어나게 된다는 것은 기대할 만한 것이지요.
대개 문장, 예술은 중국의 영향이남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인정과 풍속에 중국색이 있어요. 게다가 일본과의 관계는 최근의 일이라서 일본적인 부분은 매우 적고 빈약합니다.
그래서 비교적 일본식으로 진전된 방면을 여러분이 소재로 삼은 경우에도, 또 사물을 받아들일 때도 그런 점을 잘 이해하고 하지 않으면 우리 입장에서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또한 영화나 레코드를 보더라도 요즘 매우 발달한 일본의 영향을받음으로써 특수한 것이 적은 조선의 문화를 살릴 수 있다고 봅니다.
영화에서도 전체적으로 통제된 발달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령 큰 협회 같은 것을 만들어, 거기서 가능한 한 원조를 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촉진운동도 고려하고 있습니다만, 빨리 그런 기관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레코드 제작을 보더라도 일본의 문예 전체, 신문·잡지, 레코드·영화 등과 비교하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낮은 수준입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좋은 방법이 있으면 장래를 위해 참고할 생각이니, 느낀 점을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김문집 : 조선의 문예부흥에는 아무런 기관도 없어요. 돈이 있는 사람도 학교 등에는 돈을 내지만, 문예방면에는 돈을 내는 이가 없어요.
하야시 : 바로 그 점입니다. 앞으로는 여러분이 작품을 일본어로 많이 썼으면 합니다. 그 반향은 반드시있어요.
이태준 : 그것은 일본문화를 위해서입니까, 조선문화를 위해서입니까?
하야시 : 세계문화를 위한 것입니다.
유진오 :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조선어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봐요. 거기에 의견 차이가 있습니다.
하야시 : 이제 조선어는 학교에서도 없어졌지 않습니까?
유진오 : 그렇습니다만, 조선어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점차 희미해지겠지만…….
하야시 : 그건 별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러니 이제 조선 작가들은 일본어로 쓰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써도 독자가 없어요. 독자가 없으면 먹고 살 수가 없어요…….
문학의 단속
하야시 : 이제 이런 얘기는 그만하고, 여러분이 이번 사변에 조선인 문사들이 종군할 수 있도록 총독부에 한 번 건의해 보는 것은 어때요?
유진오 : 그건 좋은 생각입니다. 대찬성입니다.
하야시 : 그럼 총독부에 건의해 보도록 합시다(박수). 그리고 여기에 후루카와 도서과장님이 나오셨으니, 아무 질문이라도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평소의 불만이라도…….
임화 : 사무적인 일입니다만, 검열을 좀 더 원활하고 빨리 할 수 없을까요?
후루카와 : 되도록 빨리 처리하려고 합니다만, 요즘은 빠르지 않습니까?
임화 : 도청을 통해 낸 검열은 한 달이나 걸립니다. 예컨대 제가 황해도에서 낸 것도.
후루카와 : 총독부에 오면 빨리 하겠습니다.
유진오 : 어떤 것이 걸립니까? 우리가 보기에 그렇게 나쁘다고 할 수 없는 것도…….
후루카와 : 반사회적인 것, 반일적인 것은 단호히 단속합니다. 그 외의 순문학적인 입장에서 본 것은대체로 관대하게 처리하고 있습니다.
유진오 : 결론까지 보지 않고 압수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후루카와 : 공산주의 방식을 길게 쓰고 마지막 5,6행에서 “그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옳지 않다”라는 것도 얼핏 결론이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걸립니다.
유진오 : 중간 단계가 나빠도 결론이 좋으면 상관없지 않을까요?
후루카와 : 그렇지 않습니다. 도중이 나쁘다고 지금 말한 것처럼…….
하야시 : 이제 이 정도로 합시다. 한 잔 하면서 계속 얘기 나누도록 하죠.
이 좌담회는 일본의 '문학계'에 게재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일본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할 생각입니다(박수).
그럼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완)
[주] 이 좌담회는 10월 하순 하야시 후사오 씨가 만주로 가던 도중에 경성에서 계획된 것이다.
입수한 원고는 출석자 교열을 거치지 않았고, 또 시간 관계상 다시 조선에 보낼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도쿄에 있는 무라야마 씨 부분을 제외하고는 가필을 부탁할 수 없었고, 때문에 다소 부족한 점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출석자와 독자 여러분의 이해를 바란다.
<출전 : 「朝鮮文化の將來(座談會)」, '文學界' 제6권 제1호, 1939년 1월>
2) 쓰다 가타시(津田剛), 국책과 문예 -문인협회의 역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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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세계의 대세가 국가가 총력을 기울여 나아가는 식으로 바뀐 이후부터는 ‘국책’이라는 말이 지닌의미가 종래와는 현저히 다른 울림을 갖게 되었다. 종합국력을 발휘하는 것이 현대 국가의 가장 확실한 특징이 된 오늘날, 그 국가의 방침 곧 국책은 모든 국민의 생활 부분에까지 관계를 갖고 있고 또 이를 규정하게 되었다.
따라서 모든 문화현상은 예민하게 이에 반응했다. 그래서 문화와 국책이라는 델리케이트 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문예 또한 문화의 한 분야를 차지하는 것이므로 당연히 어떤 영향이 있을 터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 문인이라는 자는 대개 국책이라는 무겁고 딱딱한 것과 자신들과는 인연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근대적인 자연주의의 발흥으로부터 다이쇼(大正) 시대를 거쳐 쇼와(昭和) 시대에 들어선 동안의 수십 년, 대개 문예는 이러한 국책이라는 선과는 떨어진 곳을걷고 있었다.
지금 나는 그 좋고 나쁨을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만약 현대에 대해 건정한 상식을 갖고 있다면 누구나 여러 문화는, 따라서 문예 또한 반드시 국책의 선에 따라 나아가야 하는 시대가 오고 있음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현대에서는 문예가 국책에 따른다는 표현방식은 아직 제각각이어서 국민이 지닌 문예적인 힘 자체가 이미 종합국력을 구성하는 유력한 한 영역을 형성한다.
그것이 현대 문화현상의 대략적인 본질이자 경향이다.
이를 깨닫지 못한 모든 문화는 현대사회에서 쓸모없는 것이거나 사회의 전진을 저해하는 것으로서 무력화되거나 배제되어야 할 운명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문예가 국책의 도구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종합국력으로 구성되어야 할 현대의 국가사회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문화를 국책의 도구로 보는 것이다.
만약 문예가 국책의 도구가 되어버리면 거기에는 이제 페인트를 칠하는 인간과 광고쟁이가 존재할뿐, 진정한 문예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현대에서 진정으로 문예를 전진시키는 길은 스스로 종합국력의 일환을 형성하는 것처럼 문예를 전개하는 데 있다. 자신을 도구로 보는 것과 같은 근시안적 부류를 배제하는 동시에 사회의 진전 방향을 알지 못하는 구래의 보수자 그리고 이에 반대하는 반동자를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여기에 진정한 새로운 문예의 길이 있다.
2
우리 반도에서는 이와는 또 다른 사정이 있다. 그것은 반도가 예부터 특수한 역사를 갖고 있던 지역이고, 일본 문화권과 교류가 시작된 지 아직 비교적 역사가 짧기 때문에 생기는 여러 문제가 있다.
문예에서도 국문1)에 의한 것과 언문에 의한 것이라는 두 분야가 있다.
게다가 둘 다 일본 내지와 비교해서 그 사회적인 특수한 사정으로 인해 현저히 계몽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도에 살고 있는 문인이 자각하건 하지 않건 간에, 또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건 간에 반도에서의 문예에는 그 자체가 지닌 예술적 가치의 문제와 동시에 지도적·교육적인 사회적 역할이 부여되어 있다.
여기에 반도의 문인들에게 부여된 특수한 이중성이 있다.
반도에 살고 있는 일부 문인들이 설령 이 일을 자각하지 못하고 또 이러한 역할을 좋아하지 않아도 그것과는 무관하게 사회는 당연한 일로서 문인들을 예술가 외에 어떤 의미에서의 교육자이기를 요구한다.
따라서 반도에서의 문예의 진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종합국력의 일환을 구성하며 전개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국민적 교양에 대한 계몽적 역할을 하며 전진해야 한다.
후자는 어쩌면 문예 그자체에서 보자면 별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를 넓고 높은 입장에서 본다면두 작용은 문인에게 부여된 큰 역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3
이상의 반도에서 문예의 전진로에 대해 획기적인 사명을 띠고 조선문인협회가 탄생했다. 새로 탄생한 문인협회는 출발점에서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점을 가장 잘 인식한 반도 문예사상 한 시대의 획을긋는 문인 집단이다. 당 협회는 반도 출신, 일본 내지 출신의 문인들 200명을 회원으로 삼고 큰 희망을갖고 탄생했다.
원래 이러한 집단은 많은 다른 의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대부분은 목적 없는 간친회가 되기 쉽고, 또 무책임하고 수미일관하지 않은 구락부 같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는 이번에 탄생한 문인협회는 드물게 보는, 목적이 분명한 출발을 갖고 결합했다.
반드시 유종의 미를 거두리라 확신한다.
그렇지만 물론 앞서 말한 바와 같은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회원의 자각과 시국의 진전이 이를 강하게 밀고나갈 것으로 본다.
문인협회는 발회식에서 새로운 국민의 문학을 제창했다. 국문이든 언문이든 모두 순진한 국민으로서
1) 일본어.
의 문학이 되어야 함을 논했다 .
이를 다소 이론적으로 말한다면 본론 1과 2에서 논한 것 같이 될 수도있다.
어쨌거나 문인협회의 탄생은 이러한 의미에서 반도의 문예계를 올바른 방향으로 한 걸음, 두 걸음 전진시킨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려는 사명을 갖고 있는 만큼 임무는 무겁다.
그와 동시에 이 협회가 이룬 큰 역할 가운데 또 다른 하나로는 협회의 성립을 통해 그동안 별개였던 일본 내지와 조선의 문인들을 하나로 결합한 일이다.
대부분의 문인들은 초면 혹은 다소 면식은 있지만 함께 일하는 것은 거의 처음인 사람들이었다.
예컨대 간부 박영희(朴英熙) 씨의 시나리오인 <지원병(志願兵)>이라는 영화의 주제가 작사가로 같은 간부인 데라다 아키라(寺田瑛) 씨와 스기모토 나가오(杉本長夫) 씨 등이 맡기로 한 것은 훈훈한 에피소드이다.
아무튼 반도는 지금 모든 방면에서 격렬한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문예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문예를 올바르고 강하게 진전시켜야 한다.
<출전 : 津田剛, 「國策と文藝」, '朝鮮' 제296호, 1940년 1월, 63~66쪽>
3) 문화운동의 발족(사설)
단지 지나사변2)뿐만 아니라 내외의 여러 정세가 오늘날과 같이 긴박해질수록 국민의 생활에 풍요를 제공할 필요가 생긴다.
물론 이 풍요란 사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건강성이 깃든 문화를 가리킨다.
총력운동이 놀라운 실천 영역으로 진군하면 할수록 문화 측면의 보조는 활발해져야 한다.
국민총력조선연맹에 새롭게 설치된 문화부도 이처럼 드디어 그 실천의 일보를 내딛기 시작했는데,지도 방침으로서 거론되고 있는 “고도국방국가체제의 완수를 목표로 하여 건전한 국민문화의 종합적발전을 기하”기 위해 과학 사상의 보급, 국민교화의 철저, 예술 오락의 정화, 출판문화의 쇄신, 생활문화의 질실(質實), 실천요강의 구현을 내세우고 있는 것도 일단 납득할 만한 항목이다.
이를 하나하나 나누어 고찰하면, 과학 사상의 보급에는 먼저 기획 협조에 완전함을 기하고 일본적이자 실용적인 방면에서 출발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이를테면 상아탑에 갇혀 있는 대학 교수들도 직접가두에 진출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국민교화의 철저는 결국 일본정신의 체득이고, 이를 위해서는 족출(簇出)하는 각종 교화단체를 통합하는 일도 운동 이념을 귀일(歸一)하게끔 하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될것이다.
예술 오락의 정화는 곧 각 예술분야를 담당하는 자가 총력정신을 각자의 직역(職域)에서 표현함으로써 대중들이 따라야 할 방도를 알게끔 하는 것을 근본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특수사정에있는 조선에서는 번역이라는 사업도 당연히 고려해야 하는 동시에 그에 앞서 ‘국어’3)의 보급이 급선무이다.
출판문화는 신문이든 잡지든 일반 도서를 불문하고 이를 통해 지도정신을 보급하는 부문인 만큼 여
2) 중일전쟁을 뜻함.
3) 일본어.
기서도 언어의 문제를 새롭게 거론할 필요성이 있다.
생활문화의 질실은 결국 각자의 일생생활의 반성문제에 달려 있고 간소한 생활미라는 것을 깨닫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실천요강의 구현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총력운동 문화부의 실천의 근본은 무엇보다 ‘국어’의 보급이고 내선일체(內鮮一體), 총력, 총궐기, 총대비의 결실은 바로 여기에 배태되어야 함을 고려해 함부로 지엽말절(枝葉末節)에 구애받지 말고 학무당국의 시조(施措)와 맞물려 한뜻으로 ‘국어’보급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소문에 따르면 근래 몇 년 동안 대만의 ‘국어’ 보급률은 56%에 달했다고 한다.
이를 반도의 현재 정세와 비교하면 우리는 아직도 여전히 요원하기에 분기를 다짐하지 않을 수 없다.
즉 문화운동 개개의 문제를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그 근저를 ‘국어’보급에 두어야 한다는 이념을 역설·강조하는 바이다.
<출전 : 「文化運動の發足」(社說)」, '京城日報', 1941년 2월 25일>
4) 야나베(矢鍋) 문화부장을 중심으로 조선의 ‘문화문제’를 말한다(좌담회)
일시 : 2월 중순
장소 : 반도호텔
출석자
국민총력연맹 문화부장 야나베 에이자부로(矢鍋永三郞)
경성제국대학 교수 가라시마 다케시(辛島驍)
문화부위원 김억(金億)
경성일보 학예부장 데라다 아키라(寺田瑛)
문화부 다나카 가즈오(田中和夫)
문화부위원 마쓰다 레이코(松田黎光)
보성전문 교수 유진오(兪鎭午)
영화협회 이사장 안전진웅(安田辰雄)
연극협회장 목산서구(牧山瑞求, 마키야마)4)
삼천리 사장 김동환(金東煥)
매일신보 상무 김동진(金東進)
매신 학예부장 백철(白鐵)
4) 이서구(李瑞求)의 창씨명.
1
매일신보사 금본(金本)5) 상무 : 이번에 국민총력연맹에 문화부가 새로 설치되어 야나베 선생님이 문화부장에 취임하셨다는 사실은 이미 신문에 보도된 바와 같습니다. 참으로 감사하는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일반 국민들도 이 문화부에 대해서는 매우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우리 신문을 비롯한 모든 문화단체도 총력연맹의 문화부가 짊어지고 있는 사명의 일익을 분담해야 하는 책임감을 한층
더 강하게 느끼고 있는 바입니다.
부디 오늘은 기탄없는 의견을 말씀해 주셔서 앞으로 우리 조선문화정책의 향방에 대하여 많은 시사점을 제시해 주시길 바랍니다.
백철 매신 학예부장 : 가장 먼저 말씀해 주십사 하는 것은 문화부 그 자체에 대해서입니다.
일반 국민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새로 탄생한 문화부의 존재가 다소 막연하고 그 일의 한계 또는 일의 성질이 분명치 않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이는 일반 대중들뿐만 아니라 문화부에 참여하고 있는 문화인들도 문화부의 일이 매우 막연하다는 느낌을 받고 있는 모양입니다.
아니, 이는 조선에서뿐만 아니라 일본 내지의 익찬회(翼贊會)의 문화부에 대해서도 일반 문화인들의 비평은 막연합니다.
그래서 문화부가 어떠한 주안점을 갖고 있는지, 또 문화부의 의의와 사명 등 문화부의 전면적 활동범위와 한편으로 점차 중대성을 띠고 있는 시국을 맞이해 문화부로서 어떠한 각오를 갖게 되는지,그런 점 등을 일반 국민들의 눈앞에 제시하는 것이 문화부의 급선무라고 봅니다.
야나베 문화부장부디…….
야나베 국민총력 문화부장 : 국민총력연맹 문화부가 대개 어떤 일을 할지, 또 어떻게 해나갈지에 대해다소 막연하지만, 그것을 먼저 명확히 하라는 것이 일반 국민들의 희망이라는 말씀이신데, 그것은 아직 문화부의 준비라든가 방침이 완전히 정비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명확한 점에 대해서는 여러분의 양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문화부를 앞으로 어떻게 전진시킬지는 문화부에 종사하는 여러분과 종종 문화부 회의라는회합을 열어 대강의 항목을 심의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 심의의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는 각 방면의의견을 충분히 들을 필요가 있다고 보고 일전에 문화위원회를 설치하여 각 방면의 문화인들을 망라해서 문화부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이 문화부위원은 앞으로 구체적인 일을 하는 데 있어서, 한 예를 들자면 음악에 관해서는 음악가, 영화에 관해서는 영화인, 문예에 관해서는 문인 등 각각 그 전문적인 방면에 맡기고 깊은 이해를 갖고 있는 분들에게 연락회를 여는 등 각각 전문 부문을 거쳐 협의해 나간다는 의미에서 68명이라는 위원을 선출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문화부의 움직임이 좀 더 명확히 세상 사람들에게 제시되기 위해서는 시일이 걸립니다.
그리고 문화부에서는 어떤 방침으로 나아갈지는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만, 총력연맹 본부에서 그 실천요강을 정확히 정해 두었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나아갈 생각입니다.
여러분도 부디 이런 방침에 따라 협력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각 방면에서 어떠한 형태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 나갈 것인지, 또 그 조직이나 준비와 방법 등은 차차 결정하기로 하고, 여기에 계신 여러분은 자신의 일을 이 실천요강에 따르는 한편,
5) 김동진(金東進)의 창씨명.
일반 국민들을 지도 혹은 감화해야 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으신 분들이므로 영화, 연극, 미술, 문학,음악 등 각 방면이 힘을 합쳐 같은 목표, 같은 마음가짐으로 일반 국민들에게 호소한다면 일억일심(一億一心) 분산하지 않고 이 사명을 완전하게 완수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또 각 부문에 계시는 여러분이 국책에 따라, 즉 오늘날 국가가 요구하는 방면으로 국민들을 이끌어가는 데 있어서 만약 어려운 점이 있다면 문화부가 언제든 함께 협의할 생각입니다.
요컨대 문화부가 문화인을 이끌어 간다든가 끌고 간다기보다 여러분 자신이 자발적으로 오늘날의 국책에 따르는 문화인을 창조해야 할 것입니다.
2
백철 학예부장 : 가라시마 선생님, 하실 말씀 없으신지요?
가라시마 경성제국대학 교수 : 글쎄요, 어떤 점에 중점을 두고 말해야 할지 다소 막연합니다만, 문화부의 일이라 하면 문화부장의 배려 속에서 우리는 그저 일을 돕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달리 할 말은없습니다.
김동환 : 야나베 선생님께 이 기회에 평소 제가 생각한 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문화부는 앞으로 어떤 국민층에 중점을 두고 활동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이는 매우 절박한 중대한 사항이라봅니다.
그래서 조선의 현 상황을 보건대 반도에는 80만 정도의 일본 내지인이 있습니다만, 이들은 평소 높은 교양을 받고 또 실제로 관청이나 은행, 화시 등의 직장에서 전시하의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서의 직무를 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 조선인 측을 보면, 지식층이라 할 만한 것은 오늘날 소학교에서 대학까지의 학생 수가150만 명이고, 학교를 졸업한 사회인을 그 두 배라고 간주하면 약 300만 명 정도는 대체로 지식계급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머지 2천 만 명은 거의 지식이 없는 문맹계급입니다.
참으로 곤혹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래서 문화부가 앞으로 가장 역점을 두어야 할 국민층은 80만 명의 내지인도 아니고 300만의 반도 지식층도 아닌, 그야말로 가장 먼저 이들 2천 만 문맹계급이 되어야 할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올해 지원병 숫자를 보면 13만 명 이상에 달한다고 합니다.
13만 명이라면 거의 한 가구 당 한 명 꼴입니다. 실로 13만 가정이 움직이고 13만 명의 어머니들이 움직인 셈입니다.
그리고 현재 지원병은 도회지보다 대부분 농어촌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또 이 지원병들의 어머니들은 문자와 별로 인연이 없는 사람들뿐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 20세 전후의 청년이 있는 가정의 어머니들의 나이는 40세 이상, 50세에 달하는데,일한병합 이후 이제 30년이기 때문에 그 어머니들은 합병 전에 태어난 여성들로 학문을 받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앞으로 10년 동안은 아마 이런 현상에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10년 이후부터는 지원병들의 어머니들도 소학교나 고등여학교 출신자가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성급히 이런 어머니들을 학교에 데려가 교육을 시킬 수도 없습니다.
만약 이 어머니들이 교양 있는 부인이었다면 올해도 두 배, 세 배의 응모자가 나왔을 것임에 분명합니다.
물론 문화운동이 지원병 양성에만 중점을 두어서는 안 되겠지만, 우리는 아무래도 이러한 시국하에서 지원병 어머니들을 가장 먼저 생각하고 싶습니다.
요컨대 문화 혜택을 받지 못한 이러한 2천만 문맹층을 교화시켜야 할 텐데, 이를 위해서는 ‘국어’보급운동 같은 계몽운동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더 필요한 일은 눈과 귀로 가르치는 연극, 영화, 소설같은 문화운동을 일으키는 것이 중요하리라 봅니다.
따라서 문화부의 일의 중점은 반드시 이런 점에 두고 나아가길 바랍니다.
야나베 문화부장 : 김동환 씨가 정말 좋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문화부에서도 ‘농촌생활문화운동’이라 할수 있는, 이러한 농어촌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적절히 이끌어 갈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시국의 인식을 높이는 연극이나 영화, 야담 혹은 기타 여러 방법으로 가령 종이연극 등으로 농촌에 적합한 방법을 지금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각 방면의 여러분들의 협력을 얻어 진행하고자 합니다.
목산 연극협회장 : 우리는 조선연극협회라는 것을 결성했는데, 아직 결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별다른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봄이 되면 방금 김동환 삼천리 사장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은 그런 방면의 일을 하고자 합니다.
즉 농촌위안연극을 통해 농촌 사람들의 교양도 되고 오락도 되는 한편,지원병에 응모하는 각오라고 할까요, 어쨌거나 국민으로서 알아야 할 것을 인식시키고자 지금 준비하고 있는 중입니다. 각 지방의 극장, 또 극장이 없는 곳에서는 소학교 대강당을 빌려 10명 내외의 단원이 지방순회를 해볼 생각입니다.
일본 내지나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는 이미 그런 일을 실시해서 큰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을 가라시마 선생님으로부터 들었고, 중국과 스페인 등에서도 전쟁터에 나가는 용사들에게 그런 식으로 연극을 보게 한답니다.
아무튼 의미 있는 일이라고 봅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지금 당면한 문제는 대본의 필요인데, 이는 우리와 연극협회에서 그 선택에 노력은하고 있지만 문화부에서도 부디 노력을 기울여 주십시오. 현상모집 등도 해주길 바랍니다.
다나카 문화부원 : 그렇지만 그런 것은 실시 과정이 어려워요.
목산 연극협회장 : 그건 그렇습니다.
다나카 문화부원 : 건전한 오락으로서 향토극(鄕土劇)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습니까? 일본 내지에서는 그런 것을 왕성하게 하고 있는데……
목산 연극협회장 : 물론 필요합니다. 지금 당장은 실시할 수 없겠지만 언젠가 할 작정입니다.
우선 농촌과 각 부락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해서 하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다나카 문화부원 : 또 하나는 연출자과 연기자의 양성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목산 연극협회장 : 물론 필요하죠. 도저히 지금 상태로는 어려워요.
다나카 문화부원 : 연극협회도 그런 점에 대해서는 특별히 주의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 가지로 바쁘시겠지만.
목산 연극협회장 : 네, 바쁩니다. 그런 일까지 함께 해야 하니 말이죠. 또 하나의 방법으로서는 자주 연극을 해서 연기자 자신이 국책에 부응하도록 하는 일입니다.
다나카 문화부원 : 요컨대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것이 이를테면 건설적 의의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직접 그 효과가 민중들 속에 깊이 침투해서 국민들이 거기에 동화하면 좋겠습니다.
목산 연극협회장 : 정말 그래요. 그 일에 대해서는 그 효과를 낼 수 있을 정도의 대본을 다나카 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그런 이념 하에 선택하고 싶군요.
다나카 문화부원 :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생활 일부분이 직접 문화 속으로 잠입하도록 노력해 주십시오.
백철 본사 학예부장 : 뭐든 그렇겠죠. 소설이든 음악이든 영화든 전부 그렇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데라다 경성일보 학예부장 :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금 나오는 이야기와는 다른 것인데, 제가 경성일보 학예부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은 1938년 1월이었습니다. 그때까지 경성일보는 학예면뿐만 아니라 가정면을 비롯한 모든 것을 일본 내지의 신문을 그대로 이식했기 때문에 조선적인 노력이 없었습니다.
그저 내지에서 보내오는 통신을 그대로 제목을 붙여 내보낼 뿐이었죠. 사실은 조선에서 발행하는 신문을 일본화 할 필요가 있는데도 말이죠. 그래서 조선 ‘로컬’ 신문으로서 발전하지 않으면 국민과 친밀해질 수 없고 동시에 판매성적도 나쁘기 때문에 과거의 경성일보와는 완전히 다른 상상도하지 못한, 조선부인 기자를 입사시켜 먼저 가정방문을 하거나 음식 담그는 법이나 조선의복 만드는법을 게재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게다가 ‘국어’6) 신문입니다. 그 신문이 ‘국어’의 일반 보급과 병행해서 상당히 조선인 민간에 확산된 것입니다. 특히 학예란에서는 일본 내지 문사들의 집필을 되도록 피하고 조선 거주 문화인들의 원고를 게재하기로 하고, 처음에는 경성제국대학의 선생님,다음에는 의전(醫專), 법전(法專), 고상(高商) 선생님들의 보조를 받았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제 교제가 넓어지면서 조선 문사들에게도 원조를 받고 있는 것이 현 상황입니다.
이처럼 일본 내지인과도 조선인과도 친밀해지는 것이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일조가 되리라 봅니다.
특히 지나사변이 시작된 이래 그런 생각이 더 깊어지고, 현재 일본 내지의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나 조선의 총력운동과 비교해보면 앞으로의 진로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총력연맹으로부터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말을 듣기 전에 솔선해서 국책에 부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그 한 예로 저희 신문업계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원고를 받았다 해도 한 번은 반드시 건설적인지를 확인한 뒤 그 원고를 다루어야 합니다.
앞으로는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일반 국민들의 교양 기관으로서 만전을 기하고 그 담당자로서의 책임을 충분히 발휘하고자 합니다.
백철 본사 학예부장 : 지금 데라다 씨의 말씀은 신문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것이 오늘날 문화를 통해 내선일체가 심화하는 문제에 있어서 매우 좋은 참고가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화제를 바꿔서 앞으로 문화부가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어떤 기본방침이 있으리라 보는데,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이에 대해 문화부가 나아가야 할 길이 두 가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요즘 같이 미국이나 외국과의 시국 관계가 절박한 시기에서 조선의 경우에는 비교적 영미문화를 숭배해온 경향도 있었기 때문에 그런 점으로 고려해 영미문화를 비판하는 측면과 내부에서 국민문화를 건설하는 측면이라는 두 가
6) 일본어.
지 측면이 있는데, 그 점에 대해서 문화부장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3
야나베 문화부장 : 글쎄요, 이것은 제 편견입니다만, 일본의 그동안의 문화가 진화해온 과정을 보면 우리나라는 외래문화를 흡수하는 데 비교적 뛰어난 힘을 갖고 있다는 점이 자칫 일본인은 흉내를 잘낸다든가 혹은 창조력이 없다는 식으로 오해를 받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때로 문화가 진보하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모든 사물을 흉내 내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것이 축적되면서 다른 뛰어난 창조적인 어떤 것이 나온다는 저는 생각합니다.
또 모방이란 어떤 우수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타인의 것이라고 해서 채용하지 않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고, 모방도 사실은 아무나 할 수 있는것이 아니고 비난해야 할 사안이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우리 인간이 소학교에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단지 가르침을 받고 흉내는 내고, 그리고 그 뒤 점차 자신을 보존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이와 거의 같은 것이라 봅니다.
즉 일본의 문화는 지금 모방시대와 창작시대의 경계선에 있기 때문에 머지않아 그 진가를 발휘하리라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래에 동아공영권(東亞共榮圈)이 성립하면 태국, 네덜란드령 동인도 등 여러 나라의 문화를 흡수하고 확대해 참신한 문화를 만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외래문화에 대해 경도되지 않도록 주의하고, 일본 문화의 독자적인 것을 동아공영권의 민중들에게 인식시켜 새로운 문화를 수립하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요망하고, 또 앞으로 우리나라에 부여된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백철 매일신보 학예부장 : 유진오 씨 하실 말씀은…….
유진오 보성전문 교수 : 현재 조선에는 일본 내지 문화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하는 인사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내지의 독특한 문화를 이해하는 힘이 부족하다는 사실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물론 이에 대한 원인은 내지의 학자나 사상가 또는 일류 철학자들 역시 외국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어렵게 도쿄까지 유학을 가서도 내지 문화에 대해 존경이나 인식하는 점에 있어서 다소 소홀했던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일본 문화는 비약적으로 전진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관념은 머지않아 시정되리라 봅니다. 가령 그동안 니시다(西田)7) 철학이 큰 관심을 끌었고 우리 학도들도 열심히 이를 연구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런 경향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조선 사람들 중에는 ‘국어’에 능통한 사람들은 ‘국어’를 통해 내지문학이나 구미 각국의 문화에 익숙하겠지만 ‘국어’를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이 일은 문인협회가 해야 할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일본의 우수한 작품을 조선어로 번역해서 가능한 일본 내지의 작품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리라 봅니다.
종래에 그에 상응하는 번역물도 있었고 뛰어난 문사들에게 의뢰해도 원고료가 맞지 않아 뜻대로 되지 않은 감도 있었는데, 이런 점도 문인협회와 문화부가 협력해서 더 왕성하게 했으면 합니다.
그런 예로는 일전에 히노 아시헤이(火野葦平) 씨의'보리와 병사(麥と兵隊)'을 번역한 일이 있는데, 아주 좋았습니다. 이 정도라도 일본 내지의 작품을
7)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 1870~1945)는 ‘니시다 철학’이라 부리는 철학체계를 만든 인물로 일본을 대표하는
철학자이고 이른바 교토학파(京都學派)의 창시자이다.
번역해서 읽는 것도 매우 효과적이라 생각합니다.
백철 매일신보 학예부장 : 마쓰다 씨, 화가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쓰다 문화부원 : 특별히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다나카 문화부원 : 원래 우리나라에서는 중국과 조선으로부터도 문화를 받아들여 일본적인 사상이라든가 풍류를 가미한 고대문학을 인식시키면 좋으리라 봅니다.
백철 매일신보 학예부장 : 가라시마 교수님, 중국 문학이 일본에 들어와 어떤 식으로 소화되었습니까?
가라시마 경성제대 교수 : 글쎄요, 단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일본 문화의 지속성이랄까요, 즉 유교 같은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는데, 유교는 본고장인 중국보다 오히려 그 진가가 일본 내지나 조선에서 발휘되었고, 중국에서는 형식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 현 상황입니다.
그 전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앞서 농어촌 또는 광산 방면의 문화문제에서 김동환 씨가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 방면에 연극, 영화 등으로 문화를 발전시키려는 것은 대찬성입니다.
다만 잊어서는 안 되는것은 지식계급입니다.
현재 문화부나 문화인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도리어 지식층보다 그 지식층의 통합여부가 가장 큰 문제라고 봅니다.
여기에는 우리 문화부 내부 사람들이 종종 그런 기회를 만들어 그런 방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인지 건설적으로 협력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백철 매일신보 학예부장 : 김억 씨, 조선의 시인층에 대해서 협력 지도 입장에서 한 마디 하실 말씀은없으신지?
김억 문화부위원 : 앞서 유 교수님께서 번역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실제로 번역만큼은 문화인 누구나 관심을 갖고 있을 겁니다. 저도 번역에 관해서 한 마디 하고 싶군요. 어떤 문화라 해도 그 문화에 진정한 친근감을 갖는다고 한다면 번역물 정도로는 그 윤곽은 파악할 수 있겠지만, 그 진의와 독특한 미각 등은 도저히 접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문맹인에게는 “마흔부터 공부를 시작한다”라고 하는것처럼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으니 ‘국어’ 보급에 극력 노력해서 쉬운 내용을 시작으로 점차 읽히는 것이 적당하리라 보고, 또 그것이 내선일체에 있어서도 상당한 효과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백철 매일신보 학예부장 : 앞서 다나카 씨가 국민생활의 일부분이 직접 문화 속으로 침입하도록 노력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은 결국 우리가 갖고 있는 직능을 충분히 발휘해서 국민 대중을 문화에 접근시키는 의미가 아닐까 하고 저는 추측합니다만, 그런 의미에서 야스다 씨, 영화 방면에 관해 한마디 의견을…….
야스다 영화협회 이사장 :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조선에서 다루고 있는 영화는 대부분 일본내지나 외국물입니다. 그동안조선 영화도몇몇 작품을내기는 했지만구성이나 기술적으로매우 빈약합니다.
일반국민을지도하는입장에서역행하는것이종종있어서곤혹스럽습니다.
이에대해국민총력연맹 문화부는 영화 방면을 어떻게 지도할 생각인지, 야나베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군요.
야나베 문화부장 : 이런 갑자기 그런 어려운 문제를 제시하셔서……. 제 의견으로는 지금 조선에는 배우는 나중으로 미루고 일반 국민을 지도할 정도의 인물이 별로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먼저 그런방면의 인물을 양성하는 것 외에 방법은 없지 않을까요.
목산 연극협회장 : 조선 영화의 빈약함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원인 중 하나는 기성 영화를 충분히 소화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조선 전체에 별로 없는 영화극장의 상영만으로는 1만 원이나 2만 원 정도의 비용이라면 그렇지 않겠지만, 10만 원이나 드는 제작물일 경우에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요. 그것이 일본 내지나 외국으로 수출할 정도의 작품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것도 쉽지않고, 그래서 지금까지 답보상태에 있습니다. 두 번째 원인은 10만이나 20만 원의 거금을 기꺼이 내
놓는 독지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자금 부족으로 촬영기나 기타 물건들을 일본 내지 쪽에서 사용한 낡은 것을 사용하기 때문에 좋은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가라시마 경성제대 교수 : 게다가 또 우수한 각본가와 연출가가 없는 것도 원인이 아닐까요?
하지만 앞으로는 조직을 개선해서 크게 비약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유진오 보성전문 교수 : 일전에 <집 없는 천사> 시사회에 갔는데, 조선 영화가 그 정도까지 발전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듣기로는 ‘수업료’도 좋았다고 하더군요.
<집 없는 천사>도 근래 드문작품이라 봅니다만 영화기술도 크게 발전했습니다.
다나카 문화부원 : 네, <집 없는 천사>는 좋았습니다. 저는 두 번이나 봤어요. 촬영기술도 연출도 전례를 볼 수 없는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일본 내지 영화 수준을 따라잡을 겁니다.
목산 연극협회장 : 빈약한 설비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의 작품을 내놓은 그 내면의 고심을 알아주셨으면합니다.
다나카 문화부원 : 자본도 모든 설비도 부족하겠지만, 장래를 대비해 큰 활약을 해주길 바랍니다.
하지만 한 가지 어려운 문제는 조선 영화에 대한 국민 심리입니다.
외국 영화를 보고 있던 그들이 재래의 조선 영화에 친근감을 갖지 못하는 것은 무리도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지도 않고 하나에서 열까지 악평하는 짓만큼은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불란서가 전쟁에 패한 이후에도 여전히 우수한 영화를 만들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그 국민 심리가 어떠한지를 엿볼 수 있을 겁니다.
백철 : 문화 영화는 어떻습니까?
야스다 영화협회 이사장 : 최근 일본 내지의 문화 영화는 물론 당국의 원조도 있겠지만, 상당히 빠른템포로 발전하고 있고, 영화사상 특필할 만한 것이라 봅니다. 조선은 아직 빈약하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촬영기도 망원 ‘렌즈’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일본 내지 쪽에서 빌려서 하고 있는 상태이고, 그 외에도 불비한 점이 많아서 그 방면의 활약은 장래에 맡기는 것 외에 방법이 없습니다.
목산 연극협회장 : 영화의 매력은 상당히 큽니다. 도회지는 물론이지만 영화관이 없는 농촌에서도 ‘막사(barrack)’나 광장에서 영사하는 것이 큰 인기라고 합니다.
가라시마 경성제대 교수 : 당국에서도 농촌 영화에 대해서는 열의를 갖고 협력해 주실 겁니다. 그 방면에 좀 더 노력하길 바랍니다.
유진오 보성전문 교수 : 정말 그러길 바랍니다. 그리고 농촌에서는 영화를 영사할 때 설명을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출전 : 「矢鍋文化部長を圍んて朝鮮の‘文化問題’を語る(座談會)」,'三千里' 제13권 제3호, 1941년 3월, 40~48쪽>
5) 새로운 ‘문화단체’의 움직임 -8단체 간부는 말한다(좌담)
일시 3월 25일, 경성 금천대(金千代)회관 홀에서
조선문인협회 간사장 박영희(朴英熙, 芳村香道) 씨
조선영화협회장 안종화(安鍾和, 安田辰雄) 씨
조선연극협회장 이서구(李瑞求, 牧山瑞求) 씨
조선음악협회 간사 김재훈(金載勳) 씨
조선연예협회장 이철(李哲, 靑山哲) 씨
극작가동호회장 유치진(柳致眞) 씨
조선미술가협회 간사 심형구(沈亨求) 씨
국민연극연구소장 함대훈(咸大勳) 씨
새로운 정열과 신체제의 이념에 따라, 이제야 우리 반도의 새로운 문화운동은 각 부문의 조직을 각각 마치고, 바야흐로 발족하고자 하는 자세가 되었습니다. 당사에서는 이러한 각 단체 간부로부터, 그 포부를 여쭙는 좌담회를 열었으나, 시간과 준비가 불충분했기 때문에, 충분한 성과를 얻지 못했으나,이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제2차, 제3차 좌담회를 열고, 이것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참고로 독일문화원의 조직을 살펴보면,
1, 독일국 도서국
2, 독일국 신문잡지국
3, 독일국 라디오국
4, 독일국 연극국
5, 독일국 음악국
6, 독일국 미술국
7, 독일국 영화국
지방문화진흥에 대한 구체안
본사 측(김동환〓白山靑樹) : 바쁘신 가운데 이렇게 빠짐없이 출석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늘저녁에는, 지금부터 만들고자 하는 각 단체의 사업플랜이나 포부 같은 것을 듣고자 초청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과 같이 신체제이념 아래서, 문화 각 방면에서 각각 새로운 단체가 결성된 것은 아마도 병합 이래, 처음 있는 장관(壯觀)으로서, ‘신체제문화와 국민오락’의 건설이, 한창 창도(唱導)되고 있는 오늘날, 민중은 여러분의 활동에 대단한 기대를 걸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바로 이야기를여쭙기로 하겠으나, 다만 단체의 간부라는 입장이 아니더라도, 개인입장에서 이야기하셔도 괜찮겠습니다.
먼저 전시 하에서의 우리 반도에서는 어떤 문화활동을 통하여, 어느 층에 어떠한 식으로 작용해야 할까요, 너무어려운이론은빼고실제사실에맞는정책이나, 계획같은……그구체안을여쭙고싶은데.
박영희(문인협회) : 그러면 간단하게 이야기 해 봅시다. 문인협회가 결성된 것이, 재작년 겨울이었습니다만, 그동안 우리는 이러한 일을 했습니다. 먼저 문화를 통하여 신체제이념을 넓히고자 생각해서, 내선문인이 전부 일어나, 전 조선 24개 도시에 두 번이나 강연활동에 나섰습니다.
인텔리 청중 4,5만의 공명은 얻은 것 같습니다.
또 ‘국가문화건설’의 입장에서, 제도(帝都)의 유명한 군사전문가를 초청하여 강연을 듣기도 하고 지원병훈련소나 부대에 입영과 견학, 그리고 내선일체의 발상지인 부여(夫餘)로 근로봉사대를 보내는 등의 일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일이지만 협회원 2백여 명은 애써 시가(詩歌)나 소설 등의 창작을 통하여 항상 국방사상을 보급하고 내선일체의 정신 고취에 노력해 왔습니다.
이후도 이와 같은 작업을 끊임없이 계속하고자 합니다. 가까운 시일 안에 내지에도 연락을 해서, 전시출판물의 발행 및 그 전람회 등을 개최하고 또 ‘문학의 저녁’도 개최할 작정입니다.
본사 측 :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만, 곁들여 농산어촌의 대중을 상대로 무엇인가 문학적으로 계획하는바는 없을까요.
박영희 : 그것은 ‘종이와 자본’만 허락한다면, 알기 쉬운 팜플렛이나 ‘그림이 들어간 문고본’ 같은 것의 출판물을 만들어서, 널리 보내고 싶습니다. 조선은 아무튼 이후 10년 뒤인 1950년도가 아니면 의무교육제가 보급되지 않으며, 지금도 문맹층이 7, 8백만이나 있음으로, 학교교육을 보충할 필요에서도 간이 교화운동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한편 국어보급을 철저히 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만, 상세한 것은 또 다른 기회에 말하겠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문필인들이기 때문에, 문학을 통하여 위대한 국민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싶은
것입니다.
본사 측 : 잘 알았습니다. 문학도 그러합니다. 지금 총독부나 연맹 쪽에서는, 농산어촌에 ‘건전한 오락’을 보내도록 대단한 열의를 표시하고 있으나, 무엇인가 연예협회 쪽에서도 그런 계획이 없을까요.
이철(연예협회) : 네. 지금 ‘이동 연예대’를 편성하는 중입니다. 저희 쪽에서는 이미 사변 이래“황군장병의 위문”에 전력을 다 하고, 지금까지 북지, 중지, 북만으로 몇 차례나 위문연예에 나갔었습니다.
그래서 북쪽은 신경, 가목사(佳木斯), 목단강으로부터 남쪽은 북경, 제남, 청도, 석가장 등 16, 17개소를 돌았고, 내지에도 도쿄, 오사카 등과 같이 ‘백의용사’에게 약간의 위안을 주었으며, 이후에도 물론 제일선 장병에게 봉사를 하겠으나, 또 한편 농산어촌의 가난한 대중에게 건전한 오락을 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아무튼 조선은 넓어서 면만도 2천여 개가 있음으로 이러한 곳에 전부 보낼 수는 물론없겠습니다만, 먼저 한 부대에 7, 8명에서 12, 13명씩을 편성하여, 약 10부대쯤을 중요지점에 보내고싶습니다.
즉 몇 천, 몇 백 명과 함께 있는 광산부락이거나, 멸치어부들이 모여 있는 어촌이나 그러한 집단부락에 보내고 싶습니다.
본사 측 : 어떤 모습으로 편성하겠습니까. 또 경비에 관한 것은.
이철 : 연예협회에는 가극이 있으며, 무용도 있고, 만담이 있으며, 교향악단이나, 인형극도 있어서, 개략적으로 연예라는 이름이 붙는 모든 오락단체 17개가 결성되어 있음으로, 이러한 가무나 마술에서부터, 간단한 연극(芝居) 등을 섞어서 만들어 갑니다. 물론 신체제이념을 골격으로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웃으면서 시국인식을 심어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경비가 문제지만, 내지의 사례를 보면,익찬회(翼贊會) 생활지도부에서 하고 있는 것은, 돈을 물 쓰듯이 하고 있었으며, 그렇지 않으면 ‘도호(東寶)’와 같이, 1년에 몇 만 엔을 국가봉사비로 책정하여, 처음부터 써 버릴 셈으로, 희생적이라
할 만큼 활동을 하고 있지만, 조선에서 우리 같은 입장의 것은 몇 만 엔을 실제로 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큰 결손이 없이 이것을 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예를 들면 평양, 대구 등의 대도시에서는 순전히 ‘흥행’을 하고, 이익을 올려서, 그 돈으로 멀리 있는 벽지로 나섭니다. 요는 주재소나 면이나 연맹지부에서, 장소라든지 청중을 잘 모아주면, 이일은 반드시 성공하리라고 생각합
니다.
본사 측 : 영화 쪽은 어떻습니까. 내지의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 쪽에서는, 이미 16밀리 영사기를 이용하는 순회영화반을 만들어서, 전국에 70개반을 파견하고 있다고 합니다.
장래에는 6백개반을 만들어서 연속해서 돌린다고 하는데, 조선에도 아쉬운 대로 1, 2백개반은 돌리고 싶습니다.
안종화(영화협회) : 지금 조선에는 영화관이 설치된 도시가 약 30군데 쯤 있고, 나머지는 1년에 한두번, 소학교라거나 면사무소의 홀을 빌려서 관청영화를 상영할 정도가 아닐까요.
아무튼 국민교화의 도구로는, 무솔리니도 이야기한 바 영화가 최강의 무기이지요, 독일에서도 나치스당 선거전에, 군비
확충에, 반영(反英)사상 선전에, 참으로 위대한 활약상을 보이고 있으나, 과거 조선에서의 영화라고하면, 너무나도 상업적이고 저속한 영화만이 발호(跋扈)했지요. 최근에 와서 겨우 내지에서 <흙과군대>라든지 <5인의 척후대>와 같은 이른바 국책적인 영화가 수입 되었으며, 반도에서 만들어진 것도 <수업료>, <지원병>, <집 없는 천사>, <승리의 뜰> 등이 나오게 되어서, 매우 마음 든든하게 생각하는 바이지만요.
이 농산어촌에 “좋은 영화를 보내자”고 행동을 시작했더니, 첫째 좋은 작품이 드문 것입니다. 도쿄로부터 배급되는 내지 영화는 언어나 습관상 조선농촌용으로는 맞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관청영화는딱딱하며…… 그럼으로 우리가 할 일은 연극과는 조금 다른 입장에서, 우선 농촌용 영화를 만들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 같은, 군소영화회사의 난립으로는 자본으로도 그렇고 기술적으로도 잘진행이 되지 않습니다.
다행히 금년 7월까지 영화사의 통합이 있을 것 같고, 그렇게 되면 우수한 영화가 계속해서 나올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전에도 ‘문화영화’나 단편영화의 제작을 바랄 수 있겠지만, 역시 재미가 있는 줄거리와 우수한 기술에 의한 좋은 영화를 만들어 주지 않으면, 아무리 오락에 굶주린 농민일지라도 달가워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렇게 되지 않으면, 전 국민의 모든 계급과 지역으로 빈틈없이 선전과 교화의 책임을 다 할 수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본사 측 : 대체로 영화의 관객은 전 조선에 얼마만큼 있을까요.
안종화 : 글쎄요, 확실한 통계는 손에 쥐고 있지 않으나, 연인원 1천 7, 8백만 명 정도겠지요.
더욱이 해마다 2백만 명 정도로 영화관객은 급속히 늘고 있다고 합니다.
본사 측 : 조선 내에 있는 제작소와 자본투자액은 어떻습니까.
안종화 : 년래 영화사업이 2, 3 , 더욱 더 번성해져, 제작 본(작품)수는 11개, 70여 권, 거기에다가 관청쪽의 것까지 넣으면 20본을 넘겠지요. 그리고 오늘날까지 제작된 “조선영화”의 총 본수는, 나운규(羅雲奎)의 <아리랑> 이후, 2백본을 넘겠지요. 현재 투입되고 있는 각 회사의 총자본은 백만 엔이 넘으며 제작소는 조선영화, 고려영화 등 9군데에 이르고 있습니다.
본사 측 : 연극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함대훈(국민연극연구소) : 현재의 경우 선결문제는 불건전한 도회문화를 그대로 보낸다고 해서, 해는있어도 이익이 없고 오히려 ‘지방문화진흥’의 과제와는 서로 반대되는 결과를 낳는다는 데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럼으로 먼저, 진정으로 국민문화를 담당하기에 충분한 연출자와 배우양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생산사업에 더 한층 열심히 하고, 근로 민중에게 농촌오락을 제공한다고 해도, 외설적이고 저속한 가무연극을 제공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라고 말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그럼으로 제 연구소에서는 먼저 연극인을 양성할 작정으로, 4월부터 3개월간 단기강습회를 열어 약 30명 정도의 신인을 양성하겠습니다. 강사로는 군부, 본부(本府), 연맹을 비롯하여 폭넓은 문화 분야의 여러 선생께 부탁하여 그야말로 착실한 새로운 지도자를 양성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신체제적, 연극 실천의 전면적인 전개는 그 때부터라고 생각합니다.
유치진(극작가동호회) : 물론 그렇습니다. 새로운 각본에, 새로운 연출자와 배우 -먼저 이것을 얻지 않으면 예술적인 실천은 가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연극운동은 자연히 두 갈래로 나누어져서, 하나는 도회의 교양이 높은 인텔리 층에,(이것은 고정극장을 가지며) 또 하나는 순회식이동연극의 형태로 일반대중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안 되기 때문에, 먼저 우리는 ‘현대극장’이라고 하는 신극운동단체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수많은 상업주의극장이 아닌, 그야말로 진짜 국민극 수립의 요람답게 하는 것이나, 현재는 농산어촌의 연극이야기로, 이것을 먼저 이쪽부터 보내는 것도 좋겠지만 수천이라고 하는 부락으로 빠짐없이보급하는 것은 도저히 바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각각 향토적인 아마추어 연극 육성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지방에 따라서는 그 지방 독특한 민요와 전설이 있는 것처럼, 지방풍토에 맞는연극이 있을 것이므로, 이러한 것을 취급하며 좋은 지도자 손으로, 재조직하여 그들 자신의 연극으로 만들었으면 합니다. 흙냄새와 햇빛에 가득 찬 소박한 연극이야말로 농민노동자의 양식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우리 쪽에서는 나라에 봉사하는 셈으로, 20개 정도의 이동연극반을 조직해서 전선(全鮮)에 순회시키고 싶은데, 반 한 개에 연 1만 엔씩 쓰면 가능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경비에 관해서는 지금 고려 중에 있습니다. 20반을 순회시키면, 3천 정도 있는 각 부락에 연1회 정도는 순회시킬 수 있을 예정인데요.
함대훈(국민연극연구소) : 그리고 또 하나, 시기를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향토문화와 동떨어진 연극을 보내봤자 쓸모가 없는 것처럼, 또 그들이 원하지 않는 시기에 보내봤자 아무것도 안 됩니다.
이동연극대는 모내기가 끝난 때라든지 수확이이 끝난 후라든지 때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김재훈(음악협회 간사-경성음악학원장) : 저는 오랫동안 독일에 살아서 잘 아는데, 나치스는 위대하지요, 극장에 국립, 시립, 주립이 있으며, 전국에 2백 3십 개나 있었지요. 사립극장은 불과 5십 몇 개,연극과 같이 유효한 교화기관을 개인에게 맡기는 것은 국가의 손실이라고 생각하지요. 마치 우리가‘학교’의 필요성을 보는 것 같아요.
이 밖에 농민극장 13개, 방언무대와 저(남부)지방 독일어 방언을 존중하는 무대가 서른 몇 개, 여름에는 야외극장 30개가 있으며, 큰 것은 2만 5천명도 수용하고 있었습니다. 이 연극대는 끊임없이 조국애를 불러 넣지요. 그리하여 해마다 ‘독일연극제 주간’을 대대적으로 개최하지요. 그러나 현재의 조선의 경우, 제 생각으로는 연극은 독자적으로가 아니라, 음악부문과 서로 제휴하여 서지 않으면효과를 거두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에는 다행히 민요가 왕성합니다.
남쪽에 가면 <육자배기>, <성주풀이> 북쪽으로 가면 <수심가> 등등 황당무계한 줄거리는 개작하고, 야비한 가사는 새로 만들어, 리듬을 존중하면서 그와 같은 소박한 민요를 간단한 악기에 맞추어 연주하면서 순회하고싶습니다.
그것도 단오, 추석, 칠석, 설이라거나 그런 때에 전국적인 연극, 음악의 제전을 가졌으면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1년에 수십만 장이 팔린다고 하는 현재의 유행가를 정화했으면 합니다.
가정에서 안심하고 자녀에게 부르게 할 정도로 정화했으면 합니다. 지금 같은 것은 완전히 극도로 비천하여 신체제에 역행하는 노래가 거리에 범람하고 있지요.
그리고 저희 협회에서 이번에 ‘음악보급주간’을 설치했습니다.
그것은 즉 신체제에 맞추어 전선적으로 음악운동을 일으키게 되어, 처음으로제1회 음악보국주간을 6월 1일부터 1주간 실시하고, 이 기간에 경성부민관에서 조선음악, 일본음악,교육음악, 경음악, 양악 등 5개 부문이, 각각 가장 잘 하는 것을 연주하기로 되어 있다.
그 마지막날은 애국가를 소리 높이 부르는 날로 정하여, 경성운동장에서 경성의 전 중등학교 생도를 모아서,애국가를 소리높이 부르도록 각 학교당국과 교섭을 진행하고 있다.
이 이외에도 이것과 병행하여6월 4일에서 8일까지 경성 미쓰코시(三越)에서 음악 관련 문헌, 악기, 사진 등의 음악전람회를 개최합니다.
이서구(연극협회) : 지금의 수확(추수)제라거나, 중양절(重陽節) 같은 날에, 음악을 넣은 연극을 널리 보급하는 것은, 조선의 현실에 알맞은 생각이라고 봅니다.
또 하나 민중 자신의 전래의 춤이나 연극이있지요.
황해도의 <봉산 탈춤>이나 <산태도감>, 춘향전, 심청전 같은 것 말입니다.
이러한 것을 조금 손을 보아 넓혀 나가고 싶습니다.
제 협회 측에서는, 지금 9개의 연극단체로 결성되어 있는데, 우선 이동연극대로 3개 반을 만들어서,남선, 북선, 서선을 중점적으로 순회하도록 지금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이것과는 별도로 성지(聖地)의 부여 말인데요, 거기에 신궁봉납(神宮奉納)의 ‘연극대’도 보내고자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 몇 천, 몇 만이라고 하는 근로봉사대가 부여로 밀려들고 있지만, 내선일체의 지나간 과거의 사실(史實)에 제목을 붙인, 엄숙한 연극을 여기에 보내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든 이제 조선은 연극이 매우 잘 수용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신체제를 입으로 설명하기보다, 서책을 주는 것보다 영화와 연극을 통하여 보이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지요.
다만 오늘날까지의 조선영화연극은, 영리주의 위주로 발달해 왔기 때문에, 사상 선도라거나 건전오락의 공급이라는 문
제가 걸리면, 여간 확실한 지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심형구(미술가협회) : 그 점이라면 연극, 영화, 음악과는 달리, 미술쪽은 대중용으로는 만들어지지 않고있습니다 선전 이 금년으로 . (鮮展) 20년 계속되고 있으나,
이것은 주로 경성의 예이며, 그 밖에서는,지금까지 기껏 미술전람회를 열 정도였다. 지금부터 우리는, 본부나 연맹이 군부의 선전용 포스터도 그리고 싶으며, 전쟁터에 화가를 보내서 용감한 싸움의 모습도 그리며, 후방 국민정신을 끌어올리고 싶은 오늘까지에도, 화신이나 미쓰코시의 갤러리에서 종군화가의 전람회를 했지만, 이후에도 더욱더 왕성하게 하고 싶습니다.
다른 이야기지만, 우리는 협회결성기념일 가까이에 전람회를 엽니다. 소 작품을 모으고 있는데 매각대금은 협회의 기본금에 충당할 작정입니다. 또 작품의 일부분은 국경지역의 위문용으로 헌납할 작정입니다.
본사 측 : 각 협회마다 모두 각각 ‘지방문화진흥’ 안을 잘 들었으나, 이제부터는 기후도 좋아지고 민심도 일신하는 계절이기 때문에, 올봄부터 왕성하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다만 서로 연락을 하면서, 연극과 음악을 짝짓거나 강연과 영화를 짝짓거나 혹은 남선에 영화협회가 순회할 때, 서선에는 음악협회, 북선에는 연극협회와 같이 지역적으로, 협조가 있었으면 합니다만, 이러한 일은 아무래도 연맹의 문화부 같은 데서 조절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내선문화의 교류에 관하여
본사 측 : 다음으로 ‘내선문화의 교류’라고 하는 관점에서, 도쿄, 오사카 같은 곳과 어떤 교섭을 가졌으면 합니까.
박영희(문인협회) : 작년에 키쿠치 간(菊地寬), 구메 마사오(久米正雄) 등 여러분이 조선을 방문했을 즈음에도, 이러한 화제가 나왔습니다. 가능한 일이라면 문인협회의 손으로 도쿄, 오사카 등 주요도시에서 조선 문화강연회와 도서 전람회 같은 것을 열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더 항구적인 것으로 근본에 입각하여 국어로 문학잡지를 내고 싶은 것입니다.
안종화(영화협회) : 영화 쪽에서는 참으로 수많이 실천하고 있습니다. <친구들>은 시미즈(淸水)감독의 손에 의하여 만들어진 아름다운 제목입니다. <여인 전신(轉身)>이라거나, 가깝게는 “수업료”의 주연으로 우스다(薄田) 씨를 초빙했습니다. 향후는 배우와 연출자의 교환도, 초빙도 많게 되겠지요.
무엇보다 조선영화는 밖으로부터 배울 곳을 많이 가졌으므로, 기술 등을 향후 도쿄 방면과 밀접한 연계를 취하고자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서구(연극협회) : 이 문제는, 국어라고 하는 언어 방면에서 해결하면서 착수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영화에서도 자막에 일문어판을 넣을 정도 가지고는 아직도 조선영화가 본연의 모습 그대로 내지인에게 환영 받지 못하지요. 연극은 순전히 대화로 시작하며 끝나기 때문에, 조선말인 채로 도쿄나 오사카 시장에 내 보낼 수 없습니다. 우리도 빨리 국어극을 할 수 있도록 되었으면 합니다.
이철(연예협회) : 그 점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습니다. 우리는 전선 장병의 위문연예 때는, 서투르지만 국어로 일관되게 했습니다. 또 도쿄 대학에 가서도 특별한 것을 빼고, 국어로 노래하고, 국어로 예(藝)를 하면서 호평을 받았습니다. 조선인들은 어학적으로 뛰어나며 재능을 갖고 있어서 수련을 거듭하면 잘 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저는일극(日劇)과제휴하여, 흥행물을양쪽에서서로내며, 도쿄무대에내기로하였습니다.
또 연예를 통하여 ‘국어’8)보급에 관한 것을 생각할 때, 아무래도 ‘국어극’이 필요해지고 있습니다.
연맹이나 당국에 드리는 말
본사 측 : 경성만의 예를 들면, 하나의 흥행물로 어느 정도의 관객이 모입니까.
김재훈(음악협회) : 고급 인텔리 층의 음악 팬이 1천명은 있습니다. 부민관 같은 곳에서 음악회를 하면1천명은 모입니다. 입장료를 1엔 이상을 받고 말입니다.
유치진(현대극장) : <마의태자>극을이번에상연했는데, 약3만명은관람했지요. 1엔의입장료였었는데.
이철(연예협회) : 우리 쪽에서는 악극단이면, 5만 명은 쉽게 모입니다. 입장료는 1엔 5십전 이상을 해서…… 물론 흥행물이 뛰어난 것이 아니면 안 되지만.
안종화(영화협회) : 93만 명이나 살고 있는 경성이니까, 영화 쪽은 더 많이 있습니다. “민족제전” 같은때는 수십만을 헤아렸지요. 외화가 아니고 조선영화의 예를 든다면 “수업료”나 “집 없는 천사” “여로”등에는 5, 6만은 확실하게 되었겠지요.
본사 측 : 네, 잘 알았습니다. 그러면 현재 각 협회에는 어느 정도의 자금이 있습니까.
함대훈(국민연극연구소) : 현대극장과 저희 연구소와 합쳐서, 3만 엔은 만들어졌습니다.
이서구(연극협회) : 저희 쪽은 1만 정도의 자금은 있습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상당한 자금을 만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만.
안종화(영화협회) : 저희 쪽은 지금은 겨우 천 엔 정도이지만, 곧 상당액을 모을 작정입니다.
본사측 : 문화운동을 추진해나가는데있어서, 당국이나 연맹에게로무엇인가를부탁할 일은없습니까.
함대훈(국민연극연구소) : 많이 있습니다만 무엇보다도 대도회지에 연극전문의 극장 건립이 욕심납니다.
경성을 보아도, 영화관은 열이 넘지만 연극 전문관은 없습니다. 겨우 부민관을 빌려서 급한 불은 끄고 있으나, 이래서야 기대하고 있는 신극운동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본은 민간에서 얼마든지 낼 사람이 있으므로, 극장허가를 내어 주든지, 아니면 이미 설치되어 있는 영화관 중에 하나나 둘을 극 전문 쪽으로 돌려주었으면 합니다. 이것은 긴급한 일이므로 당국에서 꼭 고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본사 측 : 독일에서는 에밀 야닝스(Emil Jannings) 같은 배우를 칙임대우를 하고, 또 군사영화촬영자는 영관급에 임명한다든지, 철저하게 법적으로 대우를 보장하고 있습니다만, 총독부에 대하여 무엇인가, 지위나 신분보장을 바라는 것은 없습니까. 예를 들면 연금이라든지 상금제도의 실시 같은 거.
안종화(영화협회) : 직접 총독부의 관리대우가 아니더라도 좋으니까, 관공리의 여러분이 우리의 일을충분히 이해하고 협력해 주셨으면 합니다.
박영희(문인협회) : 문학상 제도를 설정할 것을 바랍니다. 한 사람의 국민시인, 한 사람의 천재적인 소설가가 나타나는 것은, 그만큼 국가의 정신적인 부(富)를 증가시키는 것이 되고, 정부는 그를 위해
8) 일본어.
충분한 기회와 보호를 꼭 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사 측 : 그러면, 이정도로……
붙임 : 국어속기에 익숙지 못한 탓으로, 몹시 서툰 필체가 되었습니다. 문책(文責)은 기자에게 있습니다. 관용을 바랍니다.
-어느 일 기자-
<출전 : 「新らしき‘文化團體’の動き-八團體幹部は語る」,'三千里' 제13권 제4호, 1941년 4월, 64~74쪽>
6) 야나베 에이자부로(矢鍋永三郞), 반도문화의 신체제
문화라는 말이 사용된 지 이미 오래되었고, 또 문화라는 말의 내용도 거의 하나의 범위로 사용되고있는 듯하므로 새삼 문화라는 단어의 의미가 무엇이냐에 관한 천착은 필요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 문화라는 말이 문화만두(文化饅頭)나 문화전병(文化煎餠) 따위의 형용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경박한 사용에 대하여 일단은 반성해 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또한 문화생활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그동안 근대 서양풍의 생활양식을 흉내 내는 것의 의미로 쓰여졌다고 생각된다.
이 역시재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문화라는 말은 그러한 의미의 말이 아니라고 본다. 문화라는 것은 적어도 인간이 어떤 하나의 목적을 갖고 생활이나 학문이나 예술 등을 탄생시키려는 데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본다. 요즘에 과학한다든가 예술한다는 등 이전에는 없었던 말을 사용하곤 하는데, 이러한 말이 사용되는 것은 그 뒤에 문화라는 것의 의미가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한 과학하고 예술하는 과정 속에 문화라는 것이 나타나 있다고 본다. 따라서 문화생활이라는 말의 의미도 그런 의미에서의 문화적인 생활을 추구하는 점에 문화생활의 진정한 의미가 있다.
어떤 식으로 해나가는지가 문화에 있어서 중요한 일이다. 노래를 부르는 것도 그림을 그리는 것도우리 행위의 하나이지만, 그것이 문화 그 자체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부르고 어떻게 그리는가 하는 점에 문화의 큰 의미가 있다.
저속한 유행가를 부르는 것도, 청신하고 순아(醇雅)한 가요를부르는 것도 모두 노래를 부르는 것이지만, 어느 쪽이 문화적이냐고 한다면 후자의 손을 들어주지 않을수 없다.
그것은 어떻게 노래를 부르는가 하는 점에서 후자가 더 뛰어나기 때문이다.
무엇을 위해 노래하고 무엇을 부르고 어떻게 부르는가 하는 점에서 후자는 적어도 전자보다 더 뛰어나다.
문화라는 것은그런 것이다.
음악이라고 하면 그것이 곧바로 문화적인 것이 되는가 하는 점은 일단 재고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문화만두가 되거나 문화비누가 되기도 한다.
아침에 빵과 수프를 먹는 서양식 양식만이 문화가 아니고, 우리 생활에 가장 적합하고 영양가가 뛰어나고 위생적인 식사가 우리에게는 분명문화적일 것이다.
우리 먼 조상들의 식사는 오늘날의 찰밥이었다. 그래서 '만엽집(萬葉集)'9) 시대에는
9) 만요슈. 현존하는 일본 최고(最古)의 시가집. 나라(奈良) 시대 말기에 완성되었다. 전 20권. 400년경에서 759
여행을 떠날 때면 밥을 메밀잣밤나무 잎에 싸서 먹었다. 하긴 그렇게 해도 식사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딱딱한 찰밥에서 부드러운 오늘날의 흰 쌀밥으로 바뀌었다. 그릇에 담게 되었다.
이렇게 하는 편이 소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고 보기에도 아름답고 또 분명 편리하다. 이는 식사의 진보이자 문화적 발전이다.
문화라는 것은 하나의 과정인데, 그것이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문화적인 것이라 부르고 문화의 관련범위라고 생각한다. 가령 학문, 종교, 도덕, 과학, 예술 등은 문화와 관련된 것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거기에 뜻을 품는 것이 그런 분야에서 뛰어난 것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며 문화적인 노력인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 자체는 우리 생활의 전부 혹은 일부와 관련되어 있는 일이다.
우리는 생활 속에 종교적인 부분을 갖고 있고 도덕적인 부분도 갖고 있으며, 과학적, 예술적인 여러 부분을 갖고있다.
그런 부분들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뛰어난 생활을 하고 싶어서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객실의 벽자도 엉터리로 걸 수는 없으므로 역시 거기에 자신의 느낌에 맞는 좋은 것을 걸게 된다.
이처럼 우리는 생활에서 문화적인 생활에 주의하고 있으며 우리 생활에 문화는 떨어질 수 없는 깊은 관련이 있다. 아니, 오히려 생활 그 자체가 문화의 추구이다.
이렇게 생각해볼 때 우리 생활이 뛰어난지 그렇지 않은지는 곧바로 문화적이냐 문화적이 아니냐는셈이 된다.
이를 한 단계 더 높여 국민생활이라는 점에 대하여 살펴보더라도 마찬가지다.
국민생활이 뛰어나다는 것은 문화생활이 고도(高度)라는 의미이다.
문화도가 높은 생활을 하는 국민이 뛰어난 국가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셈이 된다.
국가 역시 문화의 소산이고, 국민이 문화적인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국가도 뛰어난 국가가 되는데, 국가 자체가 그러한 동시에 국민생활의 문화적인 향상이 국가를 높이는 큰 원인이 된다.
국민생활이 문화적으로 향상하는 것은 우리 일상생활을 높여가는 데서 시작되는데, 그동안 이러한 일은 매우 자유롭게, 이를테면 방임된 형태였다.
대체로 문화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아마 독일의 문화철학이 들어온 이후로 보인다.
문화적인 것은 물론 태고 적부터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런 것을 문화라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 또 문화 그 자체의 입장에서 고찰하는 것 등은 비교적 근래의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더군다나 그것은 개개인이 자유롭게 제멋대로 고찰하여 완전히 방임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자유주의적인 시대에 국가의 전체적인 입장을 떠나 제멋대로 논의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래서는안 되게 되었다. 오늘날의 세계정세는 그러한 자유주의적인 사색으로는 국가의 존립에 기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문화에 대한 사고방식도 국가적인 입장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일찍이 학자는 소위 상아탑에 틀어박혀 세상과 아무런 교섭을 하지 않아도 무방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예술가도, 자기 자신만이 만족하는 소위 예술가형 생활이나 행동이 세상에 통용되지 않게 된것이다.
모두가 하나의 국민이며 이 중대한 시국을 짊어진 국민으로서 함께 국가를 위해 일해야 하는 사태에 직면하여 엄숙하게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행동하게 된 것이다. 문화 자체에 있어서 기존의 세계주의적, 순수주의적인 것은 통용하지 않게 되었으며, 우선 국가적이고 국민적인 사고방식 아래 재고할 필요가 생겼다.
하나의 방향은 분명하게 부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현실을 이해하고 문화가년에 이르는 약 350년간에 걸친, 약 4500수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나아가야 할 길을 올바르게 파악하여 그 재편성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문화의 개개 분야에 대해 말하는 동시에 문화의 종합적인 표현이기도 한 국민의 생활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문화가 기존의 자유주의적이고 서구적인 것에서 국민적이고 일본적인 것으로 방향을 변경했다는 것은 일지사변(日支事變)10)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일부에서는 감지되고 있었다. 그런데 일지사변이 장기화하고 국제간의 동향이 점차 그 모습을 드러냄에 따라 선진국이자 문화적으로 높다고 여겨지던 나라들이 실은 우리의 적성국이었던 것이고 자유주의적이고 서구적인 문화의식이 그 나라들에 기대는 바가 컸던 만큼 국민적이고 일본적인 방향으로 재검토하는 것이 중시되었다. 물론 전체주의국가인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동향에 자극받고 있다는 점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메이지(明治) 이래의 서구적 경향에 대한 깊은 반성이라는 점도 주의해야 한다.
이와 같이 지금 우리나라의 문화는 이제야 자신의 세계를 되찾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는데, 따라서 그 침로는 자연히 국민적인 것, 일본적인 것임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일본적인 문화란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를 살펴봐야 한다. 일본적이라는 것은 두 가지 방향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시간적으로, 다른 하나는 장소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시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일본적인 것은 역사적·전통적인 문화가 그 대상이 될 것이다.
회화에서의 고전적인 수법에 대한 시도, 문학에서의 고전주의 등의 예술적인 것에서부터 교양에서의 유교적, 무사도적인 경향, 고대정신으로의 복귀라는 점에까지 광범위한 세계에 걸쳐 전통의 재인식 존중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그러한 과거의 문화적 소산에 착안해서 회고하는 것은 더 나아가 새로운 다음의 비약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단지 회고에만 머물 경우에는, 물론 그것은 분명 일본문화일 수는 있지만, 과거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제라는 역사의 온상 위에 새롭게 피는 꽃이야말로 희구해야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건설적이고 발전적인 새로운 문화의 창조라는 것이 전통으로의 복귀와 동시에 고려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완전히 성질을 달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는 과거로,다른 하나는 미래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일본적이고 국민적인 문화의 존재방식이다.
장소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도 시간적인 측면과 마찬가지로 두 가지 경향이 있다. 즉 국내적인 고유문화에 입각해 생각할 경우와 국제적으로 발전하는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고유문화뿐만 아니라 외국문화를 섭취하고 포함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가령 학문에서의 이론이나 기술에서 현재의 우리나라는 후자의 입장 서는 것 이외에 발전 방법이 적다는 점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 두 가지 측면도 요컨대 두 가지 상반되는 방향이 문화 자체에 내포되어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데,전통적인 고유문화라는 것과 발전하는 현대 일본의 국제성을 기초로 한 일본문화의 국제성이라는 것이우리가 직면한 오늘날의 문화에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이율배반이 이미 이론적으로는 통합·지양되어 국제성을 지닌다 해도 그 기조가 전통을 벗어나서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 아니 전통안에 국제적 발전성을 내재하고 상호 의존하는 관계에 있음을 우리는 철학자로부터 배웠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 이는 상당히 중대한 문제이다. 구체적인 문제를 예로 들어 생각한다면 동아공
10) 중일전쟁.
영권(東亞共榮圈) 건설의 대사업을 앞두고 지도 세력인 일본이 단지 군사상의 지도세력에 그친다는 것은 무의미하며 당연히 문화적인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이는 매우 당연한 말이지만, 그렇다면 어떠한 입장에서 일본문화는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그 해답은 언제나 두 가지가 마련되어 있다.
하나는 고유한 일본문화의 입장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문화의 국제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어디에 중점을 두는가 하는 차이가 종종 논란을 일으키는 근원이 된다.
어쨌거나 이를 일방적으로 결정해서 생각하는 경우가 흔히 있는데, 이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오늘날의 일본문화는 국제적으로 중대한 국가의 지위에 있어서, 국내의 문화와 문명의 고도성은 그리 간단히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 고유문화로 추진하는 데서 우리는 참으로 민족적인 바람직함을 느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생활적인 방면에서는 일본의 풍토를 조건으로 발생하고 육성된 문화는 일본의 풍토와 다른 조건을 가진 땅에는 적응하기 어렵든가 변형을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음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동아라 할지라도 온대에서 열대로 향해 확산된 지역에서는 협의의 일본 고유문화라는 것은 그대로 적용시킬 수 없다.
다음으로 일본문화가 지닌 국제성에 관점을 둘 경우 종종 외래적인 것이 이를 대체할우려가 있다. 가령 어느 지방의 특수성에 적합하다는 점에만 중점을 둘 경우 본래의 일본문화가 지닌정신을 왜곡하는 일이 종종 생기는데, 이는 국제적 통용성이 빠지기 쉬운 점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해답은 적당히 상호 참조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의 일본문화는 단순한 고유문화만의 고양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국제적인 진출성을 유지한, 상당히 광범위하고 복잡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명확하다. 분수도 모르고 자신을 과시해서도 안 되겠지만 함부로 외국추종을 해서도 안 된다. 여기에 국민문화의 큰 성격을 생각할 수 있고, 국민생활의 문화면의 의의가 명확히 드러난다.
반도의 문화도 이러한 선에 따라 생각해야 한다. 이 선 안에 반도의 특수사정이 반영된다.
반도 문화는 일본의 국민문화 건설에 기여하는 것이다. 이는 움직일 수 없는 숙명이다.
반도에는 일본문화와는 다른 오래되고 고유한 특수한 문화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정확하게는 일본문화라고는 할 수 없다. 지역적으로는 우리 국내에 있지만 옛 모습 그대로는 일본문화가
아니다.
하지만 한국병합 이후 일본문화로서 재출발하게 된 것이다. 일본문화의 일익으로서 일본문화의 발전에 익찬(翼贊)하게 된 것이다. 이 협력이 이루어지는 곳에 반도 문화의 존재의의가 있다.
이 협력이 없는 곳에는 일본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일찍이 민족주의적인 경향을 갖거나 공산주의적인 경향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잘못이라는 사실은 이미 밝혀졌고, 만주사변 이후에는 반도 전체에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적극적으로 일본문화 건설에 협력하고 있다. 특수성을 지닌 반도 문화도 일본문화 건설에 대한협력 아래 비로소 일본의 국민문화가 될 수 있었다. 문학도 음악도 미술도 내선일체의 황국신민 의식아래에서 비로소 일본문화로서 출발할 수 있었다. 이 출발점의 중대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재래의 반도 문화는 적어도 고유한 일본문화가 아니다.
그러나 이 협력이 이루어질 때 일본문화는 그만큼 내포를 증대시키고 풍부한 내용을 갖게 된다.
이는 일본문화의 진보이다. 동아공영권의 건설에 필요한 문화 내용의 충실을 기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동아공영권의 다른 영역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것이다.
반도의 문화는 그런 의미에서 고려해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체제가 반도의 문화면에 시행되어야 하는지 지금 성급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문화 방면으로서 학술, 교화, 종교, 예술, 오락, 도서, 생활문화 등을 생각할 수 있는데, 이러한 각 방면들에는 다양한 낡은 체제와 인습이라는 것이 있다. 이를 파타하고 재편성하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를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물러설 수 없는 시기가 온 것이다. 학술, 교화, 종교 등의 부문은 국민정신문화의 진흥, 과학 사상의 보급, 국민교양의 향상 등에서 활약해야 한다.
예술 오락 방면에서는 아직 수준이 낮은 상황을 고급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동시에, 대중 보급을 도모하고 후생적인임무를 맡아야 한다.
도서 등은 ‘국어’11) 문화의 건설에 기여할 필요가 있고 생활도 국어생활로의 필연적인 발전을 해야 한다.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에서는 이런 점에 대하여 그 방안을 목하 신중하게 검토하는 중이다.
지도방침은 이미 발표된 바와 같고 고도국방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건전한 국민문화의 건설에 매진할 것이다.
나아가 이 방침에 대하여 실천방안을 고려하고 있는데, 조만간 기구의 정비와 더불어 여러 활동을개시할 것이다.
<출전 : 矢鍋永三郞, 「半島文化の新體制」, '朝鮮' 제311호, 1941년 4월, 1~9쪽>
7) 반도예술을 말한다(좌담회)
출석자
청산철(靑山哲,12) 조선연예협회장), 향촌실(香村實,13) 조선교향관현악단 지휘자), 가라시마 다케시(辛島驍), 국민총력조선연맹문화부 참사), 함대훈(咸大勳, 국민연극연구소장), 심형구(沈亨求, 조선미술가협회 이사), 복천원(福川元,14) 대일본무용연맹 이사), 목산서구(牧山瑞求,15) 조선연극협회장), 안전진웅(安田辰雄,16) 조선영화인협회장), 사회 쓰다 가타시(津田剛)
쓰다
동아공영권 건설의 커다란 움직임과 함께 조선17)이 가진 사명에도 새로운 단계로의 큰 비약이 이루어졌고 이에 즉응해 문화 각 방면의 움직임도 신체제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조선의 예술계도
11) 일본어.
12) 이철(李哲)의 창씨명.
13) 박경호의 창씨명.
14) 조택원의 창씨명.
15) 이서구의 창씨명.
16) 안종화의 창씨명.
17) 이 글의 원문에서는 ‘반도’로 표기되었다. 이 글은 ‘반도’를 조선으로, ‘내지’를 일본으로 번역했음을 밝힌다.
단, 원제목, 소제목 등에 나왔을 때, 기타 문맥상 필요한 경우는 원문 그대로 옮겼다.최근 각 분야에서 발랄한 움직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해 새로운 전망을 추가하고 여러분의 고견을 듣고 싶어 이 좌담회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누가 진행자라는 의미가 아니고 여러 가지를 탁 터놓고 진행해 갔으면 합니다.
목산 씨 연달아서 있으니까 먼저 말씀해 주십시오. (웃음 소리)
새로운 반도예술의 입각점
목산 : 감사합니다…… 조선에서 예술 부흥운동이랄까, 예술이 신단계로 각 부분에서 새로운 전개를 보이고 있습니다만, 특히 여러 부문에 일관되어 있는 것은 우리들이 진실로 일본인이 되려고 하는 노력입니다.
지금까지 진정한 일본인으로서 귀중한 역사를 계속해온 일본인조차도 이 시국에는 새롭게 국체 관념을 명징하게 하고 신민으로서의 이념을 강조하고 있는 오늘날, 일본인이 되어 30년밖에되지 않는 -자기 자신이 일본인으로서 확실한 신념을 가지기까지 이르지 못한 사람이 적지 않은 이 조선에 새로운 예술운동을 일으키는 것은 실로 어려운 것입니다.
예술의 근간은 사랑에서 일어납니다.
그최고조가즉애국심입니다. 여기에서지않고서는새로운예술은불가능합니다.
유감스럽게도일반에서황국신민으로서의자각이아직부족하다고생각되는것입니다. 이것은자기자신에게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만, 그것은 황국신민이라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예술 운동은 예술 그자체 안에서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당당하게 해야 합니다.
이러한 정신적인 자각이 조선 예술계의 새로운 단계의 근본 원동력이 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점입니다.
쓰다 : 예술가라고 하면 프랑스의 것만 생각하기 때문이죠.
목산 : 예를 들어 정오 묵도를 할 때 ‘네가 그렇게 하면 나도 그렇게 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을 먼저 타파해야 합니다. 묵도를 하려는 기분은 있다.
이것은 바르다. 이 기분이 있는 것을어떻게 바르게 나타낼까가 중요한 것입니다.
새로운 예술 운동의 출발점은 여기서부터입니다.
부여회상곡에 대해서
쓰다 : 오늘은 「부여회상곡」에 관계가 있는 분이 택산(澤山) 씨가 계십니다만, 그것은 조선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시험으로서 그 감상을 말씀해 주십시오.
복천 : 감상이라기보다 직접 참여한 사람으로서의 실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확실하게 말하면 그런 연주회가 가능할지 불가능할지를 처음에 무척 걱정했습니다. 첫째로 그것만을 무대에 올리는 것만으로는 조선에서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이 적어서 무용은 물론입니다만 그 외에 여러 방면에서 조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부족했습니다.
쓰다 : 청산 씨가 아주 변하셨네요.
목산 : 청산 씨는 총사령관이었으니까…….
청산 : 이번에는 완전히 이것을 착상한 목산씨와 중심이 되어주신 조택원씨의 덕분입니다.
처음에 내가 일독했을 때에 무척 그것의 좋은 점을 느낌과 동시에 그 속에 깃들여 있는 작자의 정신이 불문곡직하고 가슴을 찔렀습니다 .
나는 이 귀중한 노작을 정말로 잘 만들어야만 한다고 통감하고, 여기저기로 뛰어다녔고 정리하려고 노력하는데 지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것은 스케일이 무척 큰 것이었기때문에 오케스트라도, 무용도 훨씬 종합적으로 엄밀한 수련을 거친다면 저 부민관에 올린 효과보다 수배의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 가지 조건 때문에 충분하게까지 할 수는 없었던것이 유감입니다만, 조선 자체의 실력 문제입니다만 앞으로 어떤 하나의 힌트, 전망을 할 수 있다는것에는 작자나 기획자 한 사람으로 가장 유쾌하다고 느끼는 점입니다.
복천 : 「부여회상곡」을 할 때, 왜 우리들이 이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이것을 어떻게든 성공시켜야만 하는데 그러한 의도가 중심 스탭 이외를 빼고 어느 정도 있었습니까? 그 정신이 무엇보다 철저해진다면, 더욱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거기에 코러스를 모으려 해도 모두 취직해 있었고, 근무처의 사정으로 어떻게든 시간을 지켜서 참가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연습의 부족, 그래서 겨우이 정도까지인 것입니다.
청산 : 그것을 하기 위해 백 수 십 명의 예술가의 마음을 하나로 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힘들었죠. 그리고 마침내 뚜껑을 열자 출연자도, 일반도 ‘과연’이라고 알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에 가까워지자 점점상황이 좋아지게 되었습니다.
예약자보다도 배가 넘었다는 것은 그 인식이 일반화되었다는 것이겠지요.
쓰다 : 이번의 부여회상곡은 두 가지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당국과 합작이었다는 것과 또 하나는 일본쪽에서 이시이 고로(石井五郞) 씨와 그 외 관계자들이 와서 내선의 교류가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이 관청과 합작이라는 것은 영업 정책이라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생각해 관민일체로 성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목산 : 관민일체. 내선협력의 모습이군요.
복천 : 나는 이 「부여회상곡」의 비평을 듣고 싶습니다. 가라시마 선생, 말씀해 주십시오. 도쿄였다면 그 다음날 신문에 이미 나왔을 테지만, 이쪽은 그것이 없으니까요.
청산 : 도쿄였다면 나쁘게 말했을 테죠. (웃음소리)
목산 : 내가말하면, 의상에금을붙인듯해요. (웃음소리) 그래서청산씨가큰손해를입었죠. (웃음소리)
감동의 장의 문제
가라시마 : 그에 대해 무척 감사한 일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여러분에게 진정으로 감사합니다.
나는 무대에서도 관객 쪽을 주의해서 봤습니다만, 박수가 많았던 장면은 공교롭게 여러분들이 열의를 쏟아넣고 있던 곳보다도, 추락한 마을 사람들의 무용이었습니다. 도대체 이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이점을 가장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복천 : 전체의 흐름이 템포가 더뎠기 때문에 이러저러한 장면을 음악을 빠르게 하고 그곳에서 퇴폐한 장면을 연출하고, 남녀가 어울려서 난무하는 형태가 된 것입니다. 나는 여기저기서 박수칠 때를 보고 관객의 저급함에 놀랐습니다. 실로 이상한 느낌이었습니다. 싫증을 느낄 정도로 했는데도 거꾸로 박수를 쳤었기 때문이지요.
가라시마 : 퇴폐가 관객의 감정에 가장 어필했다는 것은 조선의 문화가 당면하고 있는 중대한 문제를시사한다고 생각합니다.
쓰다 : 이데올로기를 가진 것을 저렇게 긴 시간 상영하는 것은 지나친 게 아니었을까요?
목산 : 지나치지 않습니다.
복천 : 보통 1시간 20분 정도니까요. 서양에서도 40분에서 50분 정도 하는데, 일본을 주제로 한 것은처음이었습니다.
쓰다 : 그것만을 잘 유지하는 것도 커다란 건설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라시마 : 그렇습니다. 조금 길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성공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새롭게 일어나는 예술은 향락퇴폐적인 것을 극복하고, 생산 건설적인 정신을 기를 것을 주장하고, 대중을 고무해야만 하는 것인데, 그를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연주자가 철저하게 시대정신을 체득하고, 강한 박력을 가지고 연주해감과 함께, 한편으로는 관객 자체가 급속하게 훈련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결국 국민예술의 전개도 역시 총력으로 행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안전 : 「부여회상곡」을 국민총력연맹이 해 준 것에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금이 너무 비싸지않았을까요? 조선에서는 생활에 별로 여유가 없기 때문에 2원 이상은 무리여서, 보다 싼 요금으로 대중에게 보여주었으면 하는데요.
복천 : 나는 거꾸로 생각합니다. 최승희씨 등이 4원에서 5원으로 해도 가득 찹니다. 일반에게 「부여회상곡」에 대해 열의가 없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가라시마 : 조선무용이 세련되게 들어가 있었지만 그것이 가공된 것이어서 그러한 형태로 나타난 것으로 예술의 하나의 새로운 갈 길을 시사했다고 하는 듯한 느낌입니다.
심 : 그 점은 저도 역시 동감입니다.
바른 비판정신을 세운다
쓰다 : 함대훈 씨는 이번 현대극장에서 국민연극연구소를 열어 새로운 출발을 했는데 그 사업에 대해한 말씀해 주십시오.
함 : 조선의 일반 대중은 진실로 예술을 알 수 있고 비평할 수 있는 사람이 적습니다.
「부여회상곡」에 대해서도 무용 비평가는 한 사람도 없구요. 연극에 대해서도 흥행극 따위의 저속한 것에 박수하는관객이 많다는 것이죠. 이러한 것이 좋다. 그 쪽이 나쁘다, 확실히 알 수 있는 비판정신을 일반에게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선결 과제죠. 우리들이 이번 현대극장을 만들어 연극 실천을 통해 극문화의 향상을 도모하고 또 일반인의 연극 교육을 실시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고, 또 현대극장 내에 국민연극연구소를 만들어 연극인 교육을 세트로 하는 것도 실제로는 그 목적 때문입니다.
이 연구소의 목적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장래 연극인의 인격 및 품성의 도야, 둘째, 신체제하일본정신을 가르치고, 셋째, 연극인이 되고 나서 필요한 연극 이론과 실천을 알려주는 것이 목적인데, 모두는 무척 열심입니다.
나는 지원병훈련소를 봤습니다. 그곳은 4개월로, 소학교밖에 나오지 않아도 그 사이에 확실하게 단련이 되는데, 우리 쪽은 모두 중등학교를 나왔고, 그 가운데에는 전문학교를 나온 사람도 있습니다.
때문에 짧아도 4개월, 철저히 한다면 반드시 훌륭한 연극인이 나올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들도 또 모두 훌륭한 연극을 하려고 하는 열정에 불타고 있기 때문이지요.
쓰다 : 졸업생이 모두 현대극장에서 일하나요?
함 : 학생은 연구생과 청강생으로 나누고, 연구생은 이미 현대극장에 들어왔고, 청강생은 강의를 들을 뿐입니다. 실천방면을 가르치기 위해 이번에 하는 「흑룡강」에는 엑스트라로 그 연구생이 나옵니다.
쓰다 : 안전 씨, 영화 쪽의 최근 움직임은?
안전 : 조선영화제작소는 빈곤하다고 항상 말해져왔던 것이고, 그것도 중요합니다만, 조금 전 목산씨가 말한 대로 조선 예술가들이 진정으로 일본정신을 체득해야만 하는 때, 그 쪽이 한층 중요합니다.
황도학회에서 일본 정신의 강습회가 열렸을 때 영화인협회에서도 그 연구에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단지 영화인이 그러한 곳에 가는 것보다도, 우리들 자신이 스스로 무엇보다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러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쓰다 : 그림 쪽은 어떻습니까?
지도기관을 원한다
심 : 올해에 조선미술전람회는 20회가 되었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쭉 보았었는데요, 이 4, 5년 이후 한층 진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에는 소학생의 입선이 신문의 특종이 되었습니다만, 요즘에는 중학생이 되어 온 것 같습니다.
특히 올해는 예년의 심사원 여러분의 명작도 출품되었고, 일반 출품도 전문가가 중심이 된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같은 발달과 함께 전람회 자체도 개혁되어야 하는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만, 조선 예술을 위해 지도기관이 없다는 것이 식자 가운데에서도 유감으로 생각하는 듯합니다.
3년 전에 총독부에서 2백만 원의 예산으로 공예미술학교를 설립하는 것이 입안되었었습니다만, 상세한 것은 알지 못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도 있는 듯해서 아직 실현을 보지 못했습니다 -결국 지도기관이 급무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정말로 선전(鮮展)의 목적은 달성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쓰다 : 시국과 화단의 동향은 어떻습니까?
심 : 화가가 어려운 것은 모두 자기 혼자 뛰어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좀처럼 하나로 정리되지 않는것입니다만, 금년 2월 22일 오후 2시, 2자만 붙은 때에 조선미술가협회가 생겨 140~150명이 모여 처음으로 국가총력 하에 결속했습니다. 그 후 미쓰코시(三越)에서 색지의 전람회를 개최하고 회의 자금 및 황군 위문으로 보냈습니다만, 각별히 이렇다 할 만한 사업도 하고 있지 않으나 앞으로 많이해가려고 합니다.
향촌 : 음악 쪽은 화단보다 한층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원인은 있습니다만 우선 첫째로 음악가 자신의 내적 문제, 그것과 악단과 민중에 대한 지도적 문제입니다. 조선에서는 이 내부적문제조차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음악가는 신경이 과민하고 게다가 타인의 생활을 잘 알지 못합니다.
국가를 위한 예술보다도 예술을 위한 예술을 생각합니다. 완전히 개인주의여서 신체제는 바로 거기서부터 고쳐져야만 합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가능하지는 않습니다. 때문에 내부적으로 어려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공동의 음악회를 하려고 해도 좀처럼 곤란합니다. 개인 개인의 이유로 협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번 음악가협회가 생기면서 무척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모두 시국적 정신을가지고 크게 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청산 : 향촌 선생이 미국으로 가기 전이었지요. 지금부터 20년 전 아직 우리들이 학생 시절 때였는데,향촌선생이 중앙관현악단을 15~16명으로 시작해 나중에 27명 정도로 YMCA에서 만들었는데, 방송도하고 조선의 악단으로서는 커다란 공적이라고 말해졌습니다. 향촌 선생이 미국으로 부임한 뒤로 이번 북경에 가 있는 부스 부인을 중심으로 했지만, 우리들이 학교를 나오고 나서 그 후 자연 소멸되었고, 10년 정도가 지났습니다. 어떻게든 정리해 훌륭한 음악단체다운 것을 조선에서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거기에는 개인주의적인 프라이드 문제 등이 방해가 되고 십인십색의 주의 주장 때문에 좀처럼 정리할 수 없었는데, 마침 미국에서 돌아온 향촌 선생에게 꼭 도와주실 것을 부탁했을때 ‘좋아, 도와주지’라고 흔쾌히 승낙해주셔서 시작된 것입니다. 「부여회상곡」은 34, 35명, 코러스가40명 정도 모였습니다.
이때부터 열심히 해서 신향(新響)과 중향(中響)에 비해 질은 떨어지지만, 잘한다면 조선이 가질 수 있는 맛은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의 어둠을 단속하라
청산 : 예술에서는 민중을 향해가는 곳을 포착해 그 관심을 향해 가는 방면과 힘 그 자체를 가지고 지도해 가는 이 두 가지 면이 있습니다. 아까 가라시마 선생은 예술가가 예술의 힘 그 자체를 가지고 민중에게 호소하고 거기부터 감명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이것은 무척 생각해야할 점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예술을 상업적으로 하려고 한다면 결과가 대부분 ‘물건 파는 가게’라는 것이 됩니다. 물건 파는 가게라는 것은 예술의 저하를 의미합니다.
어째서 그런가하면 그것은각 단체의 행동이 자유주의이기 때문입니다.
각 단체는 먹고 살아야 합니다.
어디까지나 지도 한 가지만을 고집하는 연극이든 영화든 파탄이 됩니다.
이것은 지도하는 입장에서도 진정으로 생각해야 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라시마 :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예술부문의 어둠을 단속하는 외에는 없습니다.
대중에게 아양을 떨어 이윤만을 추구하는 것을 방지하고 시국에 따라 진정으로 하게 하는 것을 정말로 바르게 펼쳐가야 할 것입니다. 한쪽에서는 진정으로 시국을 이해한 것을 하는데도 다른 쪽에서는 대중에게 심하게 아양을 떱니다.
결과는 새로운 것 쪽을 하는 것이 나쁩니다. 이래서는 모처럼 일어나고있는 것도 경제적으로 파탄되고 용기도 없어지고 맙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단속과 보호가 필요하죠. 가능하다면 그것을 자율적으로 하고 싶습니다.
목산 : 내가 인솔하고 있는 연극 21단체 가운데 8할까지는 상업극입니다. 그것을 개혁하는 제일보는 각본을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경성에 있는 우리는 원작자도 있고, 지도자 밑에 있기 때문에 예술성을 잘 지킵니다.
그런데 지방을 순회하면 지방의 관중에게 잘 받아들여진 것처럼 돌아오고 말아서, 한사람이 무엇을 하면 다른 사람도 그에 따라서 제멋대로 하게 됩니다. 이미 경성으로 돌아온 때는엉망진창이 되어 버리죠.
가라시마 : 신시대의 예술은 관중의 문화를 끌어올려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곤란한 문제도 있습니다만, 각 조직 모두 그러한 방향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실제로 그러한 식으로노력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목산 : 연극은 이번 조선어 대본으로 교열하기를 원했습니다만, 지금까지는 국어 대본에 말하는 것은 조선어이기 때문에 연기자가 마음대로 바꾸어 버립니다. 이번에는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함 : 관중에게 국책을 알려주는 길은 국책의 이치를 이해시키는 것보다도 예술 그 자체가 국책이어야합니다.
예술에서 받은 감명이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갑니다. 연극 부문에서는 무엇보다도 좋은 무대장치와 좋은 배우, 그리고 좋은 극작가를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거기에는 우선 국가에서 건설한 국민연극의 극장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하숙하는 사람은 다른 것처럼, 작은 집을 가진다면 모두 정원도 만들고 집도 장식하고 매우 침착하게 연극을 해 갈 겁니다.
오락을 통한 내선일체
가라시마 : 나는 오락의 내선일체라는 것을 생각합니다. 내선일체를 생활 속에서 진정한 일체로 하기 위해서는 오락을 통해서 하나가 되는 것도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내선인이 섞여 사는 애국반에서는때때로 함께 권유해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같은 것을 입고, 웃을 때에는 함께 웃고, 눈물을 흘릴때에는 함께 눈물을 흘리는 것이 자주 반복돼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민 극장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와 함께 조선의 예술가를 일본인의 예술가로 하고, 일본의예술가를 조선 사람으로, 자신들의 예술가로 하는 그런 분위기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일본인의 생활과 감정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일본의 신극 등을 가지고 가는 것을 생각하면어떨까요?
회화와 문학 등 보다 더욱 생생하게 가정의 생활이 그대로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해를깊게 하는 것이 무척 많다고 생각합니다만.
쓰다 : 만주에는 자주 갔었기 때문에, 만주와 연락해서 여기서도 불러오는 것이 좋을 거예요.
청산 : 만주에서는 통제회사다운 만주연예협회가 있기 때문에 1년에 수회 초대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을 통하지 않는 기선으로 대련에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조선의 현상이 이것을 불러오기까지 하나로 잘 정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요?
목산 : 여기서도 각 협회가 연합해서 초대해도 좋을 것 같은데요.
함 : 예산이 없다면 민간에서 내는 것도 가능하겠죠.
복천 : 나는 이시이 선생 밑에서 오랫동안 신세를 지며 숙식을 함께했고, 걸레질 청소를 하면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때문에 내선일체 등 그러한 기분은 확실히 초월해서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춘향전을 도쿄에서 공연했을 때 객석에서 여자 아이가 무척 울었는데 조선이라는 다른 토지의 것을 취급한 것만으로도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라면, 이것을 조선에 가서도 반드시 성공한다고 믿고 조선에 온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무라야마 도모요시(村山知義) 씨로부터 들었습니다.
청산 : 그것은 이쪽에서 공개했을 때도 감옥 장면에서는 일본인 쪽도 울었죠. 나도 참을 수 없어서 울고 말았어요.
복천 : 우리들은 서양 영화에 대해서도 또 연극에 대해서도 그쪽 것은 무척 좋은 것이 있다고 해도 무엇인가 간격이 있어서 우는 것까지는 좀처럼 가지 않습니다. 우는 것이라고 해도 눈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본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같은 감정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써 열심히 해도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가장 정리되지 않은 곳에서 박수를 칩니다. 이러한 대중을 어떻게 지도해야할까요?
가라시마 : 국민 전체의 생각이 움직여 가는 것과 함께 점차 해결되어 간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예술부문 관계자가 참아 견디는 노력을 해가는 이외에는 여러 부문에서 같은 노력을방심하지 않고 계속해야만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법은 반드시 바뀌어야 합니다.
확신을 가지고 전진해야지 않겠습니까? 만주의 문단에서는 작가가 감동하는 장면이 이미 점차로 바뀌어왔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국민적 가동의 장소를 예술가가 우선 스스로 발견해 그것을 거침없이 표현해 가는 속에서 뒤떨어진 대중도 역시 공감하고 일체가 되어 간다고 나는 굳게 믿
고 있습니다.
쓰다 : 조선에서는 예술부문에 한정되지 않고 여러 문화의 지도적 부문이 방치되어 있습니다.
이제부터 그 새로운 것을 서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함 : 예술가의 세계관을 바꾸는 곳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복천 : 여기서 하는 것은 무척 어렵습니다. 그것은 아마 열의가 없는 것입니다. 일본에서도 개인의식은상당히 강해졌지만 어느 하나의 일을 하려고 한다면 모두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이쪽 사람은 자신들의 팬만을 생각하지 않는, 그런 열의가 없는 것이 무엇보다도 안 되는 것입니다.
청산 : 결국은 전쟁입니다.
가라시마 : 동의합니다. 옛날의 자기와의 전쟁이고, 구사회와의 싸움이고, 구세계관과의 전쟁입니다.
예술가는 지금 새로운 건설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복천 : 새로운 조선의 예술을 수립해야 하는 때이지 않습니까? 때문에 크게 하게 해주어서.
가라시마 : 합시다. 모두 신일본 문화를 만들어 가는 동지니까요. 반드시 생각한 것은 서로 이야기하고 내선이 하나가 되기 위해 매진해야지 않겠습니까? 어려운 일도 함께하고 성공도 함께입니다.
어쨌든 서로 동지적인 연결을 가지고 함께 나아가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청산 : 불문곡직하고, 숙명적으로도 그렇게 갈 것이기 때문에.
복천 : 문화부가 생긴 이상, 이 조직으로 서로 현명하게 합시다.
가라시마 : 만사에 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곤란은 있겠습니다만 그것을 진심으로 타파해가야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 보면 달리는 사람이 달리지 않는 사람의 팔을 끌어 모두 함께 기차를 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비난도 일어나겠지만 진심은 언젠가 알게 되니까요.
쓰다 : 시국 때문이라는 것은 아니고 조선이 지금 크게 다음 단계로 이동하고 있는 거기서 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지금까지 것의 탈피가 필요한 것입니다. 서로 열심히 합시다.
<출전 : 「半島の藝術を語る(座談會)」, '綠旗' 1941년 7월호, 62~71쪽>
8) 가라시마 다케시(辛島驍), 문화정책에 희망한다
나 자신은 지금 반도에서 취해야 할 문화정책에 대해서는 굳이 목소리를 높여 이런저런 희망을 외치지 않아도 직접 당국자에게 나의 의견이나 희망을 개진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
또 이러한 시기에는 가능한 솔직하게 나의 신념이나 생각을 당국자 앞에 피력하고 그 시책의 참고가 되도록 하여 실현을
기대하는 일이 내가 짊어진 당면 책임이라고 믿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는 오히려 이 땅의 문화정책의 실천에 관련해서 일반 지식문화층에 대한 희망이라는 특별한 의미에 한정시켜 서술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문화정책에 대한 나의 의견을 어떤 이유가 있어서 뛰어난 비판자들 앞에 일부러 감추려고 하는 의도는 결코 아니다. 요즘과 같은 시대에 독선적인 사고나 은밀한 행동이 매우 유해하다는 것은 익히 잘 알고 있다. 도리어 요즘 나는 매일 같이 반도의 지식인들의 의견을 듣고있으며, 또 나 자신이 믿고 있는 바를 말해서 되도록 오류가 없는 생각에 도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다만 확신이 섰을 때는 조속히 그것을 실현하도록 나 자신을 움직이고 있다.
어쨌거나 이 땅에 수립되어야 할 문화정책에 관해 지식층에 대한 희망으로서는 그 적극적인 협력을 가장 바람직한 일의 첫 번째로 꼽고 싶다.
말할 것도 없이 반도의 지식층은 이미 협력의 결실을 보이고 있다. 일전에 열린 제1회 문화위원회에서의 유진오(兪鎭午), 동원인섭(東原寅燮)18), 백산청수(白山靑樹)19) 씨 등의 경청할 만한 의견 발표와 같은 것이 그 유력한 표현이고, 기타 각 방면의 좌담회에서의 솔직한 말이나 신문과 잡지 등에 보이는 각종 의견 발표 등은 모두 협력정신의 발로라고 확신하고 있다.
또한 그러한 언론에서뿐만 아니라 예술 부분에서의 각종 신조직의 결성이나 새로운 행동 등도 진취협력의 표현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오늘날에 있어서 일반 지식층의 적극적인 참가와 협력이 더 있기를 바란다.
한강의 인도교를 건널 때마다 저 아름다운 다리의 설계가 반도 출신의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혼자서 조용히 감사하곤 하는데, 저 훌륭한 다리를 설계한 사람이 있는 한 문화정책의 설계에서도 그 못지않은 사람이 나타날 만하다고 본다. 고도국방국가 체제의 수립에는 온갖 높은 지능이 남김없이 동원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런 때에 지식은 각자의 직능에서 최고의 협력을 보여주어야한다.
연맹에 문화부가 탄생해 임원과 60명의 문화위원들이 결정되자 문화정책에 관한 일은 그들끼리 결정하면 될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그것은 큰 잘못이지 않겠는가.
이러한 조직이 과오가 없는 정책을 수립하도록 하는 책임은 임원이나 위원들이 짊어지고 있는 동시에 일반 지식인층
각자의 어깨에 달려 있다고 본다. 임원이나 위원들도 숫자에 자연히 제한이 있고 당연히 참가했으면하는 사람이 빠져 있는 경우도 있으며, 또 위원이 되지 않은 사람이 위원이 된 사람보다 지능이 낮은
18) 정인섭(鄭寅燮)의 창씨명.
19) 김동환(金東煥)의 창씨명.
사람일 리도 없다.
실로 신문화 건설의 책임은 모든 지능의 인사들에게 평등하게 부과되어 있는 것이다.
지식인은 이럴 때 조금이라도 회피하는 일 없이 용감하게 각자의 의견을 국가가 현재 목표로 삼고있는 방향에 도움이 되도록 적극적이고 활발히 발표해야 할 것이다. 뛰어난 의견을 갖고 있으면서 일부러 침묵을 지키는 것은 이러한 비상시국 하의 국민으로서 결코 올바른 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이 오로지 언론을 활성화시키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국가 목표에 입각한 언론이 활발히 전개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긴 하지만, 단순히 언론만 성대해져서는 안 된다. 수송차에 만세를 외치고 일장기를 흔든 뒤 찢어진 종이 일장기를 밟고 지나가는 사람과 정성스럽게 주워서 주머니에 넣어가는 사람 중에 어느 쪽이 참된 일본인으로서의 태도일까?
나는 후자와 같은 마음가짐을지닌 문화인의 문화정책에 대한 협력과 참가를 칭송하고 싶다.
화려하게 깃발을 흔들며 외치는 일은 오히려 쉽다.
서양의 문화사를 말하고 많은 인명과 어려운 어휘로 당당한 논진을 펼치는 것보다 나는 오히려 자신의 직장에서의 일편보국(一片報國)의 적성(赤誠) 쪽에 머리를 숙이고 싶다.
반도의 지식층이 이러한 마음가짐을 근저로 삼고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다면 이 땅의 문화의 장래는반드시 빛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노파심 같은 희망을 말한다면, 이 시대에 문화 부문에서 다소 지도적인 지위에 있는사람이 자신을 무슨 시대의 영웅적인 존재이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어떤조직 안에서 지도적인 책임을 갖는다는 것은 이러한 시대에서는 아주 많은 노고와 수많은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나 자신은 늘 그러한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존경과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있다.
선구자는 역시 자기희생을 통해서 비로소 선구자가 될 수 있는 것이며, 자신을 시대의 영웅으로 착각한 순간부터 그 사람의 지도력은 점차 잃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와 동시에 각각 여러 이유로 지도적인 지위에 오른 사람들에 대해 그 희생적인 측면을 보지 않고도리어 이를 곁눈질하면서 질투하는 태도도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다. 세상에 완전한 인간은 없으며 각자 뭔가 결점을 갖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오늘날은 그 결함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시대가 아니라 서로 부족한 점을 보완해 나가야 하는 시대이자 총 친화야말로 절대로 필요한 시대이다.
반성과 협력이야말로 오늘날의 진정한 일본신민으로서의 길이다.
반도의 문화는 바야흐로 비약적인 진전 단계에 들어섰다. 우리는 장식적 공론을 주장하기보다 진지한 보국의 정신에 불타는 행동을 통해 진정한 문화의 추진에 노력해 나가고자 한다.
<출전 : 辛島驍, 「文化政策に希望す」, '春秋' 제2권 제7호, 1941년 8월, 119~1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