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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99809
동양철학은 ‘지구-내-존재’라는 사유를 벗어나지 않았다
이우진·조성환 교수 서평에 답하다 ① 기후변화 시대, 동양철학의 비전은 있는가?
지난 1월 3일자 <교수신문>에, 이우진(공주교대 교수·교육철학)·조성환(원광대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교수·한국철학) 두 교수가 최재목 영남대 교수(철학과)의 『비교양명학: 한중일 삼국의 시야에서』(2022년, 상해 고적출판사 간행)를 읽고 서평을 실었다. 서평 마무리 부분에서 두 교수는 저자에게 세 가지를 질문했다. “후학으로서 선학인 저자에게 정중히 그리고 또렷이 묻고 싶다”라고 한 제안에 최재목 교수가 답변을 보내왔다.
이우진·조성환 교수의 세 가지 질문은 이렇다.
①전통 동양철학의 현재적 의미 : 생태위기와 기후변화로 지구에서의 거주가능성 자체가 문제 되고 있는 오늘날, 유학은 인류에게 어떤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가?
②한국에서 인문학 하는 태도 문제 : 한국의 인문학은 여전히 ‘유럽중심주의’라는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철학의 중심은 항상 ‘서양’이고, 비서구지역의 철학은 ‘주변’에 밀려나 있는 인상이다. 이 ‘기울어진 철학’의 현장을 우리는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는가?
③한국철학의 위상과 과제 : 오늘날 한국철학 연구자들은 과연 얼마나 수준 높은 연구를 학계에 제공하고 있는가? 여전히 한문 번역 중심의 경학적 연구가 중심이 아닌가? 그래서 대중들에게 외면 받는 것이 아닌가?
기후변화 시대에 동양철학의 비전은 세계사적 과제에 실천적으로 동참 가능한 길을 찾는 데서 저절로 드러날 것이다.
낡은 언어를 새로 다듬고, 무기력한 추상적 사유를 과감히 실천적 지혜로 재구축하는 일이다.
먼저 졸저를 높이 평가하고 정중하게 질문을 해주신 이우진·조성환 두 분의 교수께 감사를 드린다. ‘후생가외’라는 말을 실감하며, 학문하는 길의 선배로서 귀한 질문에 성의 있게 답변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이 <교수신문> 지면을 통해서 본인의 의견을 밝히고자 한다. 이후 이 지면에서 두 교수의 추가적인 견해도 듣고 싶다.
먼저 첫 번째 질문은 ‘전통 동양철학의 현재적 의미’를 묻는 것으로, 간단히 말하면 ‘생태위기, 기후변화를 맞이한 오늘날 유학은 인류에게 어떤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가?’이다. “인류세 지구 생활자의 인문적 철학적 전환”에 대한 지구적 차원의 거대 질문이다. 지구를 살아가고 있는 인류가 ‘죽느냐, 사는냐?’의 기로에 서서 숙고해야 할 심각한 물음이다.
최근 인류세에 대한 인문적 철학적 담론이 국내외, 동서양에 걸쳐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 유행은 일시적인 ‘호들갑’이나 ‘지적 사기’가 아니라 실제 상황임을 현재 지구의 상황과 과학자들의 증언이 잘 말해주고 있다. 지구 온도가 1℃, 1.5℃, 2℃ 이상으로 온난화가 진행될 경우 초래될 지구적 차원의 재앙은 인류의 지속가능한 ‘생존 조건’을 위협할 최악의 요인이다. 이것은 동양 혹은 서양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지구적 차원의 사유와 실천을 닦달하고 있는 것이다.
기후변화는 사실 과학적 판단에 근거해야 하면서도 인간의 라이프스타일과 경제, 정치에 관련되는 지구 전반의 문제이다. 당연히 동양철학에서도 응답할 의무가 있다.
<교수신문> 1월 2일자 5면에 실린 이우진, 조성진 교수의 서평
인류세-기후변화라는 위기
산업혁명 이후 인간 활동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구환경에 막대한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지구의 기후와 생태계가 급변하여 자연에 의존하던 삶은 거꾸로 자연의 위협을 받으며 인간은 지속가능한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시대를 맞이했다. 예컨대 핵실험이 실시된 1945년 이후 방사능 물질은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
나아가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와 메탄 농도의 급증, 지구 온난화 등으로 기후와 생태계의 균형은 깨지고 기상 이변이 생겨나고 있다. 자연이 인간에게 반격을 시작한 것이다. 이에 인간은 스스로의 지속가능한 생존에 부심해야 한다.
인간이 자연환경을 파괴해온, 산업혁명 이후 현재까지의 기간을 보통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라 부른다. 이 용어는 미국의 생물학자 유진 스토머(1934~2012)가 1980년대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용어가 유명해진 것은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파울 크뤼천(1933~2021. 네덜란드의 대기화학자)이 지구환경 관련 국제회의에 참석해 “우리는 홀로세가 아닌 인류세에 살고 있다”고 말해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즉 2000년 크뤼천과 스토머가 공동으로 작성, 발표한 획기적인 한 쪽짜리 문서 「인류세(The Anthropocene)」에서 인류세 개념을 소개하며, 기후변화를 인간이 유발하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인류세는 곧 인간에 의한 ‘기후 변화(=위기)’ 시대를 표상한다.
인류세-기후변화의 연결로 해서, 국내외에서는 과학자와 인문학자들의 관심을 모았고 다양한 연구가 진행돼오고 있다. 최근 국내에 소개된 책을 보면 그야말로 다양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음을 실감한다.
예컨대 조재원의 『기후변화 인문학』(2015), 클라이브 해밀턴의 『인류세 - 거대한 전환 앞에 선 인간과 지구 시스템』(2018), 얼 C. 엘리스의 『인류세』(2021), 파울 크뤼천의 『인류세와 기후위기의 大가속』(2022), 캐럴린 머천트의 『인류세의 인문학: 기후변화 시대에서 지속가능성의 시대로』(2022), 시노하라 마사타케의 『인류세의 철학』(2022), 로이 스크랜턴의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 - 문명의 종말에 대한 성찰』(2023) 등이 그것이다.
이 논의들은 대체로 지금까지 우리가 겪어온 생존 방식을 근본적, 급진적으로 바꾸어야 함을 강조하며 비관적인 전망을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어차피 변화된 지구환경에 인류가 다시 현명하게 ‘감수’(甘受. Resignation)하면서 ‘대응-적응’하며 살아가면 된다는 낙관론도 제시한다.
동양철학의 대응
기후변화는 인간이 지구환경과 세계를 바라보는 삶의 태도와 양식의 변혁에서부터 과학기술, 정치, 경제 등 여러 방면의 지속적이고 혁신적, 급진적인 제도적, 지적 실천을 요구한다.
설산의 빙하가 녹아내려 중국과 파키스탄을 연결하는 카라코람 하이웨이나 산이 수시로 무너져 지역민들의 삶을 위협하듯이, 지구환경의 파괴는 인간 삶의 조건의 파탄과 직결된다.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이 ‘지구적 존재’임을 상기시키고 있듯이, 우리가 우주의 다른 곳으로 이주하지 않는 한 지구는 우리의 터전이고, 끝내 여기서 거주해야 한다.
자연법칙과 인간법칙을 분리하지 않는다
① ‘이다=이어야 한다’는 발상, 오류가 아니다
지구에 ‘있다’는 사실은 이곳의 시공간에 맞춰 ‘살아야 한다’는 당위를 이끌어내도록 요구한다. 지갑에 ‘100원이 있으면’ ‘100원어치의 물건을 사야만 한다’는 말이다. 공자는 “임금은 임금다워야 한다(君君)”고 하여, ‘이다’에서 ‘이어야 한다=다워야 한다’를 도출하며 ‘사실과 당위를 일치’시켰다.
그런데,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공자는 조화를 깨뜨리면 불안과 문제가 생긴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한 “멍청이의 원형”이라고 했다.(조재원, 『기후변화 인문학』, 152쪽)
아울러 그는 지금의 생태위기를 극복하려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연, 생태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조재원, 같은 책, 162쪽)
조지 에드워드 무어가 ‘이다’로부터 ‘해야 한다’는 것을 도출하는 것이 ‘자연주의 오류’라고 보았다. 그러나 존 로저스 설은 이런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논파한 바 있다.
주어진 자연환경의 조건, 한계상황, 공간적 형식은 인간에게 소명이나 의무를 부과한다. ‘누울 자리 보고 발 뻗으라’고 한다. 동양철학의 오래된 아비투스인 ‘천원지방’ 전통에서 우리는 그렇게 집을 짓고, 생각하며, 거주해왔다. ‘이다’로부터 ‘해야 한다’는 것을 도출하는 동양철학의 존재론적 자연주의 전통은 오류가 아니다.
동양철학에서는 자연법칙(사실: 元亨利貞)과 인간의 법칙(당위: 仁禮義智)을 분리하지 않는다. 이렇게 자연의 변화와 인간의 윤리 도덕이 분리돼 있지 않음에서 사색을 펼쳐내어 정치, 교육, 경제라는 소프트웨어를 구축하고자 했다.
예컨대 양명 왕수인은 「기후도서(氣候圖序)」에서 “기후의 운행은 비록 자연의 운행(天時)에서 나타나는 것이지만 실제로 인간의 행위(人事)와 관련이 있다”고 했다. 율곡 이이는 「천도책(天道策)」에서 “사람은 천지의 마음이다. 사람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바르게 되고, 사람의 기가 순하면 천지의 기도 또한 순해지는 것이다. … 천지가 자리를 지키고 만물이 길러지는 것이 어찌 한 사람의 덕을 닦음에 매이지 않는다고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무슨 말인가?
한 사람의 정치인, 권력자가 어떤 욕망과 의지를 갖는가는 바로 그것이 외부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자각하게 하고 경고하는 것이다. 국가의 권력자가 만일 권력 의지를 악한 과학기술 쪽에 쏟아 무기를 대량생산하고 핵폭탄을 제조하여 전쟁을 일으킨다면 인류와 지구가 재앙에 빠져드는 것은 자명하다. 권력자의 태도, 마음가짐이 보이는 선・불선 여부가 사회, 문화, 자연 환경의 파괴, 보존 여부를 결정하기 마련이다.
기후위기 시대의 덕목, 하늘·사람·사물의 섬김
② ‘증여, 선물, 은혜’로서의 ‘존재’
『중용』에서는 “하늘이 내려준 것을 증여성이라고 한다”고 자명한 사실로 못 박는다. 인간과 사물의 본래성은 지구로부터 ‘증여된 것’이다. “이 증여성을 잘 따르는 것이 인간과 만물이 걸어가야 할 길이다” 하이데거는 ‘∼가 있다(Es gibt)’라는 말에서 존재의 ‘증여(gift)’를 끌어내 ‘존재=증여성’을 말하고 있다. 과학기술로 인해 존재가 ‘계산성’ 속에 좁게 갇혀버리게 되면 그 증여성이 은폐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증여성’ 그리고 ‘비계산성(불가지성)’은 자연의 선한 본성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맹자), 악한 본성을 외부적 룰에 따라 조절하여 야만화, 폭력화를 막는데 신경 쓰기(순자)의 두 주장에 민감하게 재음미할 필요가 있다.
전자는 루소, 괴테, 로댕처럼 자연 그 자체의 완전함을 믿고 따르며 인간과의 합일, 일체를 지향하고(천인합일), 후자는 홉스처럼 자연의 야만성, 폭력성을 알고, 제어하며 인간과의 분리를 지향한다(천인분리). 일본사상사에서는 후자에, 중국과 조선의 사상사에서는 전자에 치우치는 경향을 보인다. 물리적 자연과 인간 내면의 자연에 대한 믿음과 신뢰 여부는 기후 위기를 맞는 현재에도 여전히 문제의식과 시사점을 던져준다.
‘인간이 지구환경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물으면, 주희는 “사물의 이치(物理)가 곧 인간 삶의 원리(道理)”이니 지구적 시공간에 맞춰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한 인간, 그리고 과학과 기술과 지식은 『산해경』에 나오는 세상을 망치는 동물들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즉 “…이것이 나타나면 그 고을에 귀양 가는 선비가 많아진다”는 주(鴸) / “…물을 지나가면 물이 마르고 풀을 지나가면 풀이 죽는다. 이것이 나타나면 천하에 큰 돌림병이 생긴다”는 비(蜚) / “이것이 나타나면 천하가 크게 가문다”는 ‘옹(顒)’ / “이것이 나타나면 전쟁이 나게 된다”는 ‘부혜(鳧徯)’ - 모두 지구의 평범한 삶의 미덕을 파괴하는, 인간의 욕망과 아집을 상징한다.
성선설을 지지하는 한 동양철학에서 존재에 오류는 없다고 본다.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인식과 사유 쪽이라 여긴다. 지구라는 존재, 지구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 자체로 완전하며, 하나하나가 다 존중되어야 할 ‘님=존(尊)’인 것이다. 있다는 그 자체로 ‘님’으로 공경 되어야 하고, ‘존’으로 추앙되어야 한다. 동학에서 말하는 ‘하늘과 사람과 사물’의 섬김-모심의 사상(三敬)은 기후 위기 시대에도 음미될 덕목들이다.
지구적 자연환경이 갖는 역동적 생명력
③ ‘스스로 그러함’, ‘하얗게 꾸밈’에 주목하라
보기에 따라 지구는 ‘감옥=절망=한계성’인 동시에 ‘선물=희망=가능성’이다. ‘물 부족, 지하자원 고갈…’처럼, 지구가 가져다준 선물에는 결여나 부족함이 있다. 물론 그 자체에 삶의 한정=제한이라는 능동적 브레이크 장치도 들어있다.
이것은 지구적 존재가 갖는 일종의 ‘흰・그림자(그늘)’이다. 시인 윤동주가 ‘흰 그림자’(1942)라는 시에서, “거리 모퉁이 어둠 속으로/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흰 그림자들/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이라 했을 경우를 생각해 보자.
어둠에 몸을 감추는 어두운 듯한 그림자를 ‘흰’이라는 글자를 붙여 그 생명력을 부여했다. ‘흰’ 것은 ‘드러난 것’(陽, 가능성: 이다)이며, ‘그림자(그늘)’는 ‘숨은 것’(陰, 제한성: 아니다)이다. 이 불균형처럼 보이는 균형을 통해 입체화되어 살아나는 것이 지구적 자연환경이 갖는 역동적 생명력의 원현상이다.
예컨대 괴테는 직관된 ‘있는 그대로의 자연현상’을 그는 존중하고자 한다. 그는 『색채론』에서 빛의 ‘근본현상=원현상(原現像. Urphänomen)’(괴테, 『색채론』(민음사, 2008), 96쪽)을 말한다. 그의 시집에서는 “언어를 해부하겠다는 거지.
하지만 언어의 사체뿐이로구나. 정신과 생명은 사나운 해부도에 곧바로 미끄러져 나가버렸구나”(「언어연구가」 괴테, 『괴테시전집』(민음사, 2009), 379쪽) 처럼, ‘파헤치려 하지 마라’고 한다. 인간이 직관하는 자연의 영역을 넘어설 때 ‘추상적 인식’(=추상화)이 시작되는데, 거기부터는 오만한 ‘월권’이라고 생각했다.
더 깊이, 자세히 알고자 하여 자연의 몸뚱아리를 발가벗기고자 하여, 현재 보이는 것 그 뒤쪽에 시선이 향하거나 손을 댈 때, 즉 자연의 ‘너머-근저’(所以然之故)로 들어서는 순간 ‘정신과 생명’은 ‘사체’로 변하고, ‘외경과 신성’은 사라진다고 생각했다.
동양철학은 그렇게 자각해왔다. “직관된 ‘원현상’ 그것 이상은 더 묻지 마라” 이것을 ‘시적 정신’이라 불러도 좋겠고, 노자를 위시한 동양철학의 기본 정신이라 봐도 좋겠다. 이런 부분은 근대기 서양에 의해 ‘이성 능력에 대한 음미 부족’, ‘인식론의 결여’,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의 미분리’ 등으로 조롱받은 바 있다. 그러나 근대를 벗어난 현재, 아시아와 한국의 성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앞서 말한 대로, ‘증여, 선물, 은혜로서의 존재’라는 인식은 주어진 존재의 한도 내에서 인류가 세대에 걸쳐 공평하게 나누고, 아껴 쓰며, 모든 있는 것들의 ‘은혜에 감사’하는 태도를 갖게 한다. 이것은 인간뿐만이 아니라 동물, 식물, 광물이 갖는 고유 권리를 자각, 인정하는 지성적 통찰에 기초한다.
이를 통해서 평범한 인류적 삶의 미덕이 지속되는 인간-자연의 공동체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 사유 방식은 『주역』에서 말하는 ‘하얗게 꾸미면 허물이 없다’는 백비무구’(白賁无咎)처럼, 모든 사물의 ‘스스로 그러한’(自然), 사물이 원래 가진 ‘몸짓, 소리, 빛깔’의 생명력을 살려내고 존중해주는 것이다.
시인 정지용이 ‘비’(1941)라는 시에서 “여울 지어/수척한 흰 물살”이라며, ‘여울지어, 수척한’ 그림자를 ‘흰’ 것으로 생생히 살려내어 물의 생명력을 ‘하얗게 꾸민’ 것처럼 말이다. 그냥 물살이 아닌, 바람에 밀려 여울이 진 물살을 ‘수척하다’며 어두운 듯한 배경을 깔고서, 거기에 빛이 비친 ‘흰’ 장면을 멋스럽게 입체적으로 살려낸 대목에서 ‘하얗게 꾸밈’을 만난다.
이런 생각의 심층에 들어서면 그 자체로 생명의 감사함이 ‘아리고, 쓰리게’ 느껴진다. 주어진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붙들어내어, 보여주고, 나누고, 보살피는 일에 참여하는 것은 하이데거가 말한 “사유는 감사이다(DENKEN IST DANKEN)”(알폰소 링기스, 『길 위에서 만나는 신뢰의 즐거움』(오늘의 책, 2014), 259쪽)
인문학자들은 어떻게 공감을 얻어낼 것인가
동양철학은 평범한 일상적 삶의 길 위에서 만나는 지구를 향한 사랑과 책임의 항목을 적극적으로 찾고, 여러 문제점들을 참조하고, 해결에 동참해야 한다. 문제는 풍부한 집단지성으로 쌓은 공동의 지혜 자산, 그 체화된 오랜 삶과 언어에 묻힌 빅데이터를 어떻게 표현하고 실천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위에서 언급한 필자의 서투른 생각 가운데 일관된 것은 동양철학이 ‘지구-내-존재’라는 사유를 벗어나 있지 않다는 것이다. 지구적 존재로서 지속가능한 삶을 생각하고, 자연환경을 고려하며, 기후 위기에 지구시민으로서 각자 대응해 가야 한다.
동양철학자, 인문학자들이 국제사회의 보편적 언어 소통을 통해, 현안이 된 논의의 장에 참여하여 의견을 개진하며, 어떻게 공감을 얻어낼 것인가? 이것은 동양의 철학적 사유방식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보고, ‘세계철학사’ 속에서 다시 생각하고 실천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기후변화 시대에 동양철학의 비전은 세계사적 과제에 실천적으로 동참 가능한 길을 찾는 데서 저절로 드러날 것이다. 낡은 언어를 새로 다듬고, 무기력한 추상적 사유를 과감히 실천적 지혜(프로네시스)로 재구축하는 일이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잘 꿰어야 팔 수가 있다.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