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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최후
마 27:1-10
1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3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9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10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마 27:1-10 / [예수께서 빌라도 앞에 서시다;막15:1,눅23:1-2,요18:28-32] 아침이 되자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은 다시 회의를 열어 예수를 로마 정부에 인계하여 사형에 처할 방법을 모의한 뒤에 2) 예수를 결박하여 로마 총독빌라도에게 보냈다. 3) [유다의 죽음;행1:18-19] 그때 예수를 배신한 유다는 예수께서 사형 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고 깊이 뉘우쳤다. 그래서 그 은전 서른 닢을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에게 돌려주며 4) `내가 죄를 지었소. 내가 죄 없는 분의 피를 팔았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소? 그것은 당신이 알아서 할 문제요' 라고 대꾸하였다. 5) 유다는 은전을 성소에 내던지고 나가서 목매달아 죽었다. 6) 대제사장들은 그 은전을 주워 들고 `이것은 피값이므로 헌금궤에 넣을 수가 없겠소. 이런 돈을 받아넣는 것은 우리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니 말이오' 하고 7) 의논한 끝에 그 돈으로 옹기장이의 밭을 사서 예루살렘에서 죽은 이방인의 묘지로 쓰기로 하였다. 8) 그 밭은 오늘날까지 `피의 밭'이라고 불린다. 9) 이렇게 하여 예레미야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ㄱ) `그들은 은전 서른 닢을 받았으니 이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팔려 간 그의 몸값이다. 10) 이것으로 옹기장이의 밭을 샀으니 주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이다.'
가룟 유다는 예수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은 30개를 받고 내어 줍니다.
빌라도에게 넘겨줌(1-2)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넘겨진 시간은 새벽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대제사장들과 공회는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 죽이기 위해 밤새도록 심문한 후에 금요일 이른 아침에 넘겨주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지금 대제사장과 공회는 악한 일에 은밀하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악한 일에 대제사장과 공회는 함께 힘을 모았습니다. 열심히 밤새도록 협력하여 자신들의 사익을 추구하는 그릇된 결정을 내렸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6장 19절에서 “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신앙생활하면서 얼마나 선한 일에 지혜롭고 담대했는지 자신을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가롯 유다의 최후(3-10) 가룟 유다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은 삼십을 가지고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가져갑니다. 그는 그 곳에서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고백합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사실 이런 고백은 쉽지 않은 고백이었을 겁니다. 용기있게 자신의 잘못을 돌이키는 선언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공회는 유다의 이런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4절을 보면 “네가 당하라”고 합니다. 곧 죽게 될 예수의 죽음에 대하여 모든 책임을 유다가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유다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은 삼십을 성소에 던지고는 그 길로 가서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유다는 사울 왕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대표적인 두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다와 대제사장과 공회와의 관계는 신앙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인 문제로 보는 관점도 있습니다. 모든 인간관계를 정치적으로 보면 차갑기 그지없습니다. 언제든지 상대방을 버릴 수 있는 것이 정치적 인간관계입니다. 자신이 불리하다 싶으면 모든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것이 정치적 인간관계입니다.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긴 것도 이런 정치적인 관점으로 스승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줄 분으로 보았지만 스승은 오히려 예루살렘에 올라가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정치적으로 실망한 나머지 스승을 팔아넘긴 겁니다.
적 용 :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깨지듯 최근 인간관계가 깨지는 것을 봅니다. 깨진 인간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방법에 대하여 나누어 봅시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을 쉽게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은 모두 이유가 있는 일이라 변명하고 다른 이의 허물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비난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고한 자를 비난하는 일을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가볍게 던지는 험담도 대상자들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성도의 거룩한 모습은 일상의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다른 이를 헐뜯는 죄를 뉘우치되 감정적으로 후회하거나 유감을 느끼는 수준에 머물지 말길바랍니다. 하나님께 죄목을 정직하게 아뢰고 변화된 삶으로 회개의 증거를 드러내는 오늘이 되길 바랍니다.
< 설 교 >
가룟 유다를 통해 배울 점
반면교사(反面敎師)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나 사물의 부정적인 측면에서 가르침을 얻는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중국의 모택동입니다. 1960년대 한참 문화혁명을 추진해 갈 때 모택동이 공산당 간부를 모아놓고 이렇게 연설했습니다. “일부 중죄인을 빼고는 체포하거나 숙청하지 말고 그냥 제자리에 두고 고립시킨 채 반면교사로 이용하면 된다.” 비록 반동분자라고 해도 다 숙청해 제거하지 말고 그대로 두면 그 나름대로 반면교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가 많은 사람도 때론 그 부정적인 측면으로 교훈을 줍니다.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겠구나! 나는 저런 실수를 하지 말아야겠구나!”라고 깨달음을 얻게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 가운데 우리에게 반면교사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반면교사 역할 때문일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12 제자 중 하나로 택함을 받았습니다. 이름에서 보듯이 그는 예루살렘 남쪽 가룟 출신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대체로 북쪽 갈릴리 출신인데 비해서 그는 남쪽 유다 출신입니다. 아마도 그는 머리 회전이 빨랐고 계산에 밝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역에 필요한 재무를 담당했고, 제자들 공동체의 살림을 담당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사탄의 미혹에 넘어가서 예수님을 넘길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셨지만 무시했습니다. 단돈 은 삼십을 받고 예수님을 제사장에게 넘겼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받게 되시자 후회합니다. 끝내 목매달아 자살하고 맙니다.
마태복음 26:24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다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이것은 저주입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께 이런 저주를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12 제자로 택함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재무를 담당하면서 주님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사람이 되고만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어제 주님의 제자로 택함 받은 영광을 누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오늘 재무를 담당하며 주님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섬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 2:12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긴장을 풀지 말고 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신앙생활하라는 것입니다. 끝까지 넘어지지 말고 구원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까지 신앙생활 잘 하셨습니까? 잘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마음 놓지 마십시오.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 부르시는 날까지 믿음 잘 지키시기 바랍니다. 최후 승리를 얻어 온전히 구원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가룟 유다로부터 배울 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가룟 유다를 반면교사 삼아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을 경계하라
성경에 나타난 가룟 유다의 첫 번째 이미지는 돈을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네 복음서 여러 곳에 가룟 유다가 등장합니다. 주목할 것은 그가 등장하는 곳마다 돈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 13:29를 보면 그는 돈 궤를 맡은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재무를 담당했다는 것입니다. 돈을 관리하면서 늘 돈을 가까이 했었다는 것입니다.
요 12장을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에 가룟 유다가 등장합니다. 마리아가 값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있었습니다. 이 때 가룟 유다가 끼어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향유를 팔아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우선 그는 그 향유가 삼백 데나리온이나 된다는 것을 금방 계산해 냈습니다. 그리고 향유를 발에 붓는 것을 낭비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님께 드리는 헌신을 돈 때문에 가로막고 나섰습니다. 돈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 12:6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아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가룟 유다가 돈을 관리하면서 개인적으로 착복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이지만 돈을 관리하다 도둑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돈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마 26:15을 보면 더욱 기막힌 내용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3년간 모시던 스승을 팔아넘기며 흥정하는 장면입니다. 이 때 가룟 유다가 받은 돈은 고작 은 삼십입니다. 성경학자들의 추산에 의하면 은 삼십은 오늘 우리 돈으로 2-3만 원 정도 랍니다.
이제 가룟 유다는 돈을 받고 스승을 팔아넘기는 파렴치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돈 때문에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그 보잘 것 없는 돈 몇 푼 때문에 망하고 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룟 유다는 돈을 가까이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돈을 사랑하게 됐습니다. 이제 돈 때문 해서는 안 되는 자리에 까지 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가룟 유다의 표면적인 잘못입니다.
돈은 매력(魅力)이 있습니다. 그 돈이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자기가 필요한 것들을 다 얻을 수 있게 해 줍니다. 또 어려운 이웃들에게 따뜻한 사랑의 손길도 펼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래서 그 돈은 참 매력 있는 물건입니다.
그러나 돈은 또 마력(魔力)이 있습니다. 돈의 매력을 맛 본 사람들을 사로잡습니다. 돈이 없어지면 못 견디게 만듭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게 끌어당깁니다. 또 돈이 있는 사람들은 더 가지게 만듭니다. 법을 어기고라도 돈을 더 벌도록 합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깨고서라도 돈을 더 벌도록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돈을 경계해야 합니다. 돈의 매력을 느끼는 것은 나쁘다 할 수 없습니다. 열심히 땀 흘려 돈을 벌고 올바로 돈을 써서 행복해 진다면 이것은 축복입니다. 그러나 돈의 마력에 휘둘려서는 안 됩니다. 돈 때문에 형제를 잃어버리고, 돈 때문에 신앙도 잃어버린다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2008년 6월 11일 서울대는 “이용희(70)씨가 100억 원을 기부하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용희씨는 소감을 피력하면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돈 때문에 말년을 불행히 보내는 부자를 많이 봤다. 자식에게 줘도 불화, 안 쥐도 불화가 생기더라. 유산문제 때문에 자식이 부모 장례식에 안 오는 경우도 봤다. 나이가 들면서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 어떻게 돈을 쓰고 죽을 것인가 고민을 많이 했다.”
이분은 일찍이 돈의 마력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돈의 마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돈의 마력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돈은 경계해야 합니다. 아마도 가룟 유다는 우리에게 “돈을 경계하라! 잘못하다가 돈 때문에 나처럼 망한다!”고 외치고 있을 것입니다.
딤전 6:10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우리가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요 13:2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사도 요한이 가룟 유다 사건을 신앙적으로 해석해서 이렇게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12 제자 중의 한 사람이 예수님을 팔아 넘긴 사건 뒤에 마귀가 개입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사건은 가룟 유다 단독 범행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다 자세하게 들여다보겠습니다. 마귀가 벌써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가룟 유다의 행동은 즉흥적이고 우발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의도적 행동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팔겠다는 생각은 마귀가 넣어주었다는 것으로 가룟 유다의 생각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그런 생각을 가룟 유다의 마음에 넣어주었고, 가룟 유다가 그 생각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마귀의 행동입니다. 마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못된 생각,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생각을 넣어줍니다. 그런데 마귀는 바보가 아닙니다. 아무에게나 아무 때나 그런 생각을 넣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길거리에 지나다가 앞에 가는 사람을 볼 때 “저 사람 죽여!” 이런 생각을 넣어주지 않습니다. 마음이 그 생각을 받아들일 리 없으니까요.
그러면 언제 그런 생각을 넣을까요? 그 마음에 틈이 생길 때입니다. 가룟 유다에게도 그런 틈이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향유를 붓는 여인에게 왜 그 비싼 것을 허비하느냐고 책망했을 땝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가로 막으셨습니다. 그가 참 좋은 일을 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의 행한 일이 전해 질 것이라 하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편을 들어주셔야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섭섭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메시야로 등극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놀라운 일을 행하셔야 할 때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여간 실망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대한 원망도 생겼습니다.
마귀가 이런 틈을 노렸습니다. 그 마음에 예수를 팔라는 생각을 넣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가룟 유다가 그 생각을 마음에 받아들였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귀가 좋지 않은 생각을 넣습니다. 섭섭할 때, 억울한 마음이 들 때, 원망하는 마음이 들 때, 무엇인가 불공평하다는 마음이 뜰 때 조심해야 합니다. 마귀가 그 틈을 노리고 악한 생각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래서 참 조심해야 합니다.
이럴 때 그 생각을 받아들이면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 생각이 내 생각이 되고 맙니다. 이렇게 되면 마귀의 종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셈이 됩니다.
요 13:17절에 중요한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의 마음에 악한 생각이 있음을 아시고 경고하셨습니다.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의 발도 씻어 주셨습니다. 마귀의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저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 사탄 곧 마귀가 아예 가룟 유다의 심령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부터 가룟 유다는 마귀의 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마귀의 노예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이 가룟 유다의 본질적인 잘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12 제자 중의 한 사람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보다 훨씬 믿음이 좋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 특별하게 택함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마귀가 주는 생각을 받았고, 아예 마귀의 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가룟 유다는 우리에게 이렇게 외치고 있을 것입니다. “마귀에게 속지 마시오. 결코 마귀를 받아들이지 마시오!”
약 4: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마귀가 다가올 때 마음을 잘 지키십시오. 말씀으로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회개하라
가룟 유다는 여러 차례 예수님께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끝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요 13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0절을 보면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말씀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깨끗지 않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18절을 보면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말씀했습니다. 함께 떡을 먹던 사람 가운데 배반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21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직접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26절에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하시고 가룟 유다에게 떡을 주셨습니다. 그래도 그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27절에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마지막 경고였습니다. 이 때라도 그는 돌아섰서야 했습니다. 그러나 끝내 그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가룟 유다는 주님의 다섯 차례의 경고를 받고서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고 난 뒵니다. 마 27:4을 보면 그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자기가 죄를 범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것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입니다. 주님 앞으로 나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목매달아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가룟 유다의 최후의 실수입니다. 아마도 가룟 유다는 우리를 향해 몸부림치면서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회개하시오. 아직 기회가 있을 때 회개하시오”
후회와 회개는 다릅니다. 후회와 회개는 자신의 잘못과 죄를 깨닫고 인정한다는 면에서는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후회와 회개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후회하는 사람은 그 죄를 자기 스스로 처리하려고 합니다. 가룟 유다는 돌이켜 보려고 돈을 가지고 제사장을 찾아갔지만 거절당했습니다. 고민하다가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사람은 그 죄를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옵니다. 주님께 죄를 고백하고 죄사함을 받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께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그는 회개했습니다. 주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죄를 깨닫고도 주님 앞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천국에 도달하는 그날 나는 천국 문에서 하나의 현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현판에는 오직 회개한 자라고 쓰여 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를 들고 주님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거기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살 길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룟 유다는 우리에게 반면교사입니다. 돈을 경계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회개하라! 교훈을 줍니다. 그 교훈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