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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원: 무극신(성사)
두번째 원: 태극신(도주)
세번째 원: 황극신(우당)
네번째 神: 백복신(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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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위의 그림을 보고 <3개의 원(圓)(=天圓)> 을 각각 무극신, 태극신, 황극신이라고 주장했었다.
그 이론적 근거는 아래구절에 있다.
(공사 3장 22절)
상제께서 어느 날 고부 와룡리에 이르사 종도들에게 “이제 혼란한 세상을 바루려면 황극신(皇極神)을 옮겨와야 한다”고 말씀하셨도다. “황극신은 청국 광서제(淸國光緖帝)에게 응기하여 있다” 하시며 “황극신이 이 땅으로 옮겨 오게 될 인연은 송 우암(宋尤庵)이 만동묘(萬東廟)를 세움으로부터 시작되었느니라” 하시고 밤마다 시천주(侍天呪)를 종도들에게 염송케 하사 친히 음조를 부르시며 “이 소리가 운상(運喪)하는 소리와 같도다” 하시고 “운상하는 소리를 어로(御路)라 하나니 어로는 곧 군왕의 길이로다. 이제 황극신이 옮겨져 왔느니라”고 하셨도다. 이때에 광서제가 붕어하였도다.
(1) 우당: 上帝(상제)라고 호칭하면 안 되는 이유
우당께서는 전통이론에 의하면, 황극신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당께서는 '황극'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못했다. 우당께서도 자신을 지칭할 때 사용하지 못한 '황극' 을 後人 이 어떻게 사용하겠는가?
그러면 우당께서는 왜 '황극' 이라는 단어를 사용 못하고 그냥 圓(=대순) 이라고만 했을까?
(2) 우당께서 '황극' 이라는 단어를 사용 못한 이유
도주님의 신신당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아래에 있다.
(아래)
25일 조회석상에서 임원들에게 하문하시기를 "그대들 가운데 호(號)를 가진 사람이 있느냐?" 하시므로 모두 "아직 없나이다." 하고 아뢰니 "도인은 본시 자호(自號)가 있을 수 없고 그 사람의 품격과 포부에 맞게 장상(長上)이 지어 내리는 법이나, 그대들의 기국이 어떠한지 보리니 각기 호를 지어 보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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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박한경은 충광(忠光), 임규오는 요산(樂山), 박중하는 태헌(太仚), 유철규는 풍산(豊山), 신상철은 초표(楚豹), 김영하는 춘담(春潭), 오영식은 백일(白日), 오치국은 청파(靑波), 권동흠은 덕포(德飽)라고 지어 올리니 상제님께서 감하시고 "모두 호의 기품(氣稟)이 아니로다. 한경의 충광은 아직 문을 못 찾은 격이고, 규오의 요산은 요산, 저산이니 못쓰겠으며, 철규의 풍산도 도호가 아니니라. 중하의 태헌과 상철의 초표는 넘치거나 천한 격이고, 영하의 춘담은 작은 격이며, 치국의 청파는 비록 조부의 유언이라 하나 내가 너희 팔자도 모두 뜯어고쳤는데 어찌 쓰며, 더구나 영식의 백일은 네 위에는 사람이 없는 격이니 너를 누가 지도하랴?" 하시니라. 그 후에 영식이 "저는 토암(土庵)으로 하겠나이다." 하니 윤허하지 않으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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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너희 자작(自作)이 모두 호로서 부적(不適)하니 내가 사호(賜號)하리라. 한경은 우당(牛堂)이라 하고, 금현과 상철은 오미당(午未堂)과 청음(靑吟) 중에서 수의하여 나누어 쓰라." 하시니라. 이날 오후에 상철은 오미당, 금현은 청음으로 하기로 정하고 아뢰니 "금현은 호에 대한 상식이 있으니 청음은 철규에게 주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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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조회에서 다시 호에 관한 말씀을 하시고 규오에게 건월당(建月堂)이란 호를 내리시니 황감하게 받드니라. 상제님께서 또 "내가 생각하기에 신묘한 글자는 날 출(出)자니 양산(兩山)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는 산(山)자를 넣은 호는 못쓰느니라." 하시므로 금현이 "그 출자를 저에게 주시옵소서. 출재(出齋)로 하겠나이다." 하고, 최해창도 "저는 출암(出庵)으로 하겠나이다." 하니 윤허하시니라. 며칠 뒤에 "중하는 청농(靑農), 윤섭은 청룡(靑龍), 용화는 청헌(靑軒), 치국은 청당(靑堂), 이용직은 청인(靑仁), 영하는 청원자(靑源子), 이갑성은 토헌(土軒), 조호선은 청음(靑陰)으로 하라." 하시고 그밖에 몇 임원에게 사호하시며 "그대들이 아직은 호를 쓸 때가 아니니 간직하고 있으면 후일 도호로 쓰이게 되리라." 하시니라.
(3) 참고
황극(皇極), 그리고 『정역(正易)』 - 대순회보 106호 상생의 길 (idaesoon.or.kr)
1. 들어가며
상제님의 천지공사로 청국(淸國) 명부(冥府)를 담당한 조선말의 유학자 김일부(金一夫, 1826~1898)01는 『정역(正易)』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김일부가 『정역』을 저술한 과정을 살펴보면, 그는 당대의 석학(碩學) 연담(蓮潭) 이운규(李運圭, 1809~?)에게 사사(師事)받았으며 그 뒤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고 평생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러다가 54세가 되던 1879년에 이상한 괘(卦)들이 눈에 보이는 신비체험을 하게 된다. 몇 년간 이런 현상이 계속되자 김일부는 1881년에 그 괘들을 그려 ‘정역’이라 이름 지었으니, 일설에는 그때 공자가 나타나 “내가 일찍이 하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했던 것을 그대가 이루었으니 이런 장할 데가 있나”라고 크게 격려했다고 한다. 정역은 주역(周易)에 뒤이어 앞으로 전개될 새로운 세상을 상징하는 역(易)으로서 그 의미가 매우 깊다. 김일부는 그 정역에 자신의 학문을 더해 60세가 되던 1885년에 한 권의 책을 완성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정역(正易)』이다.
주역의 팔괘 배치가 억음존양(抑陰尊陽)을 상징하고 있음에 비해 정역의 팔괘 배치는 조양율음(調陽律陰)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에, 정역 그 자체는 대순사상의 패러다임02과 일치한다. 그러나 김일부가 저술한 『정역』은 핵심 사상이라 평가받는 황극 우주론 그리고 후천의 발생과 전개 이론에서 대순사상과는 사뭇 다른 패러다임을 가진다. 특히 김일부의 황극 우주론은 수도인들에게 혼란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하다.
김일부가 신비체험으로 받은 역상(易象)인 정역의 패러다임은 대순사상과 일치하지만, 그가 저술한 『정역』의 사상체계는 대순사상과 일치하지 않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선 김일부는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여 놓고 그 사상을 표현하기 위한 상징체계로서 정역 괘상을 직접 그린 것이 아니라 신비체험을 통해 정역 괘상을 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연후 정역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정역』으로 기술하였던 사실에 주목해야 할 듯하다. 다시 말해 『정역』은 김일부의 사상체계 속에서 정립된 것이니 만큼 ‘김일부의 관점에 바탕 한 정역 해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대순사상의 입장에서 본다면, 김일부는 지극한 성심으로 평생 학문을 닦았고 그 결과 정역을 보게 되는 신비체험을 하게 되었지만, 정역의 오묘한 원리를 완전히 밝혀내는 데는 성공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이런 내용들을 하나로 모아 정리한 것이다. 2장에서는 전통적인 황극 개념이란 무엇인가, 『전경』에 기술되어 있는 황극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김일부는 황극을 어떻게 규정했으며 그것이 수도인들에게 어떤 오해를 가져다 줄 수 있는가를 조명해 봄으로써 황극에 대한 대순사상과 김일부의 사상을 비교 검토하였고, 3장에서는 김일부의 『정역』을 대순사상과 비교하며 살펴보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2. 황극에 대한 이해
(1)전통적인 황극의 개념
① 황극(皇極)이란 말이 가장 먼저 나타나는 문헌은 사서삼경 중의 하나인 『서경(書經)』이다. 황극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도 바로 여기에서 성립되었다.
『서경』에 따르면, 대략 삼천여 년 전 천자국인 은(殷)나라03의 임금 주왕(紂王)이 폭정을 저질러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자 섬서성(陝西省) 기산현(岐山縣) 근처의 제후국이었던 주(周)나라가 다른 봉건 제후국들과 연합하여 은나라를 멸망시켰다. 주나라는 은나라를 대신하여 새로운 천자국으로 등극하였으니 이때의 주나라 왕은 무왕(武王)이었다. 천자가 된 무왕은 정치의 근본을 알고자 은나라의 성현(聖賢)으로 추앙받던 기자(箕子)를 찾아갔다. 은나라의 망국민(亡國民)이던 기자는 적국의 임금을 미워하지 않고 예를 갖추어 정치의 근본에 대해 가르침을 주었으니, 그것이 홍범구주(洪範九疇)였다.
홍범(洪範)에서 홍(洪)은 크다는 뜻이고 범(範)은 법이라는 뜻이니, 요즘으로 보면 홍범은 헌법(憲法)과 유사하다. 홍범은 기자가 창시한 것이 아니라 우(禹)임금 이후 내려오는 고대 철학으로서 고대 유가(儒家)의 핵심 사상이었다.04 그 내용은 『서경』 「홍범(洪範)」편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는데, 바로 여기에 ‘황극’이라는 말이 처음 보인다.
무왕 13년에 왕은 기자(箕子)를 방문하여 말하였다. “오호, 기자여! 하늘은 아래의 백성을 보호하고 서로 돕고 화합하여 살도록 가르쳤는데, 나는 그 가르침의 법도가 어떻게 베풀어지는지를 잘 모르오.” 기자가 바로 대답하기를, “제가 듣기엔 옛날 곤()이 홍수를 막으려다 오히려 그 오행만 어지럽혔으므로, 상제께서 크게 노하시어 아홉 가지의 큰 법도(홍범구주)를 주시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법도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곤은 극형을 당하였고 뒤이어 우(禹)가 일어나니, 하늘은 우에게 홍범구주를 가르쳐 줌으로써 법도가 베풀어지게 하였습니다. 홍범구주의 첫째는 오행(五行)이요, 둘째는 오사(五事)를 공경하여 행함이요, 셋째는 팔정(八政)을 힘써 행함이요, 넷째는 오기(五紀)를 조화시키는 것이요, 다섯째는 세움을 황극(皇極)으로써 함이요, 여섯째는 삼덕(三德)을 다스려 쓰는 것이요, 일곱째는 점을 쳐서 의문을 풀어 밝히는 것이요, 여덟째는 여러 징후를 고려하여 쓰는 것이요, 아홉째는 오복(五福)을 기르고 여섯 가지 곤액[六極]을 누르며 쓰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05
홍범에는 구주(九疇) 즉 아홉 가지가 있으니, 세계의 구조 및 운행 원리를 설명하는 오행과 인간의 바른 생활 태도, 사회·국가의 정치에서 위정자(爲政者)가 신경 써야 할 여러 항목들이 그것이다. 『서경』 「홍범」편에 있는 그 모든 내용들을 여기에 모두 싣기에는 분량의 문제가 있으므로 다만 중요한 내용만 요약해 보면 다음 도표와 같다.
이와 같이 자연과 인간의 질서를 규범화하여 정치철학화한 홍범구주는 다섯 번째 항목인 황극을 중심으로 네 가지씩 이루어져 있다.
송나라의 유학자 채침(蔡沈, 1176∼1230)은 역대 『서경』의 주석서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받는 『서전(書傳)』을 저술하여, 5가 중심이 되고, 1·2·3·4를 생수(生數), 6·7·8·9를 성수(成數)라 하는 상수역학(象數易學)을 이용하여 홍범구주의 구조를 설명하였다. 즉 채침은 홍범구주의 첫 번째 항목부터 네 번째 항목을 하나로 묶어, 오행으로 근본을 삼고, 공경함을 오사(五事)로 하고, 후하게 함을 팔정(八政)으로 하고, 합함을 오기(五紀)로써 하는 것은 황극이 세워짐을 말하는 것이라고 해설했다. 또한 홍범구주의 여섯 번째 항목부터 아홉 번째 항목을 하나로 묶어, 다스림을 삼덕(三德)으로써 하고, 밝힘을 계의(稽疑)로써 하고, 징험을 서징(庶徵)으로써 하고, 권면(勸勉)과 징계를 오복과 육덕으로써 하는 것은 황극이 행해지는 바라고 주석하였다.06
이 외에 홍범구주는 다섯 번째의 황극을 중심으로 첫 번째, 네 번째, 일곱 번째, 여덟 번째 항목[五行, 五紀, 稽疑, 庶徵]은 천도(天道)를 말하고, 두 번째, 세 번째, 여섯 번째, 아홉 번째 항목[五事, 八政, 三德, 五福·六極]은 인도(人道)를 말한다는 견해도 있다. 다시 말해 홍범구주는 황극을 중심으로 천도(天道)와 인도(人道)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07
② 천도와 인도를 밝혀서 정립한 정치철학을 실제로 시행하는 당사자는 임금이다. 바로 이에 해당하는 것이 홍범구주에서 중심이 되는 황극이다.
당(唐)나라 공영달(孔穎達, 574~648) 이후 황극(皇極)의 황(皇)은 대(大), 극(極)은 중(中)이라 하여 황극은 곧 대중(大中)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 경우 황극은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고 크고 공정한 중용(中庸)의 도라는 의미로 해석되어, 『서경』의 ‘세움을 황극으로써 한다[建用皇極]’는 뜻은 곧 임금이 중용의 도를 세워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상도(常道)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주자는 이 해석을 반대하여 황(皇)을 임금 군(君)으로, 극(極)은 지극한 표준(기준)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주자는 황극이 ‘중용의 도’가 아니라 ‘임금이 지켜야 할 표준’이라고 했던 것인데, 그 이유는 ‘중용’이 관대함을 나타낼 뿐 정작 임금이 정치를 할 때 지켜야 할 규범을 제대로 나타내주지 못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08 이 규범은 임금이 스스로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에서 정하여 준 것이라고 한다.09 이 경우 『서경』의 ‘세움을 황극으로써 한다[建用皇極]’는 뜻은 곧 임금이 반드시 지켜져야 할 어떤 법도에 맞추어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상도(常道)를 베풀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황극을 중용의 도로 보든, 임금이 지켜야 할 표준으로 보든 간에 어쨌든 황극은 임금이 중앙에서 요순(堯舜) 이래로 내려오는 성인(聖人)의 심법(心法)10을 가지고 백성들을 위하여 지극한 정치를 펼침을 상징하는 것임에는 변함이 없다. 이에 대해 기자는 『서경』 「홍범」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황극이란 임금이 다스리는 법을 세우는 것이니, 임금이 오복(五福)을 모아 백성들에게 베풀면 백성들도 임금의 법도를 지키고 따르게 됩니다. 대개 그 백성들이 나쁜 무리를 짓지 않고 관리들이 사사롭게 나쁜 무리들을 두둔하지 않는 것은 임금이 법을 시행하기 때문입니다. 무릇 백성들 가운데 계책을 생각하는 이가 있고, 뜻있는 일을 하는 이가 있고, 자기 도리를 지키는 이가 있으면, 임금은 이를 기억하여 쓰셔야 합니다. 백성들이 법을 따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면 임금은 받아주며, 안색을 부드럽게 하여 ‘나는 덕을 좋아 한다’고 말하는 이가 있으면 그들에게 복을 내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이런 이들은 임금의 법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이들을 학대하지 말며, 덕이 높고 밝은 사람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지닌 능력과 뜻을 발전시켜 행하게 하면 나라는 창성할 것입니다.11
③ 한편 전통적인 황극 관념을 이용하여 독특한 역사관을 정립한 인물이 있으니, 그는 바로 송나라의 유학자 소강절(邵康節, 1011~1077)이다. 상제님께서도 그의 지식을 높이 평가하신 바 있기 때문에,12 여기에서 소강절은 황극을 어떻게 역사관에 활용하였는지 잠깐 언급하여 보고자 한다.
소강절은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를 통해 세상이 다스려지는 시간적 주기 법칙을 밝혀놓았다. 그 역사관은 상수역(象數易)의 64괘와 384효를 바탕으로 하는 원회운세(元會運世)의 새로운 역법(曆法)이다. 즉 12진(辰: 시간)이 모이면 1일이 되고, 1일이 30번 모이면 30일 즉 한 달이 되고, 1달이 12번 모이면 12달 1년이 된다. 1년이 30번 모이면 1세(世)라 하고, 1세(30년)가 12번 모이면 12세인데 이를 1운(運)이라 하고, 1운(30년×12=360년)이 30번 모이면 30운인데 이를 1회(會)라 하고, 1회(360년×30=10,800년)가 12번 모이면 12회인데 이를 1원(元)이라 한다는 것이다. 1원은 10,800년×12이니 곧 129,600년이 된다. 소강절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걸쳐 성인군자가 출현하거나, 뛰어난 임금들에 의해 백성들이 누리게 되는 태평성대, 그리고 세상이 다스려지는 주기가 바로 이 ‘원회운세’라는 시간대 안에서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소강절은 이렇게 세상이 다스려지는 원리를 다룬 책을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라고 이름 붙였다. 이에 대해 『황극경세서해(皇極經世書解)』를 저술한 청나라의 유학자 왕식(王植)은 “책의 이름은 곧 책의 의도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도로 말하면 위로 삼황시대를 미루어 봐야 하니, 소위 『서경』 「홍범」 편에 말하는 오직 황(皇)이 극(極)을 세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황극이라고 한 것이다. 날줄 씨줄을 짜 맞추는 것을 ‘경(經)’이라고 하니 원(元)·회(會)·운(運)은 다 세(世)가 쌓인 것이기 때문에 원(元)으로 회(會)를 운영하고 회(會)로 운(運)을 경영함은 다 세(世)를 경영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13 이와 같이 소강절도 황극을 임금이 정치를 시행하는 차원에서 이해하였고, 그 시간적 구현 원리를 원회운세라는 역사관으로 풀어보였던 것이다.
(2)『전경』에서의 황극
① 결국 『서경』 「홍범」 이후 형성되어 온 전통적인 황극 관념은 ‘중용의 도’, ‘임금이 지켜야 할 표준’으로서 임금의 정치철학이었다. 이를 염두에 두면서 황극(皇極)과 관련된 부분을 『전경』에서 찾아보면 모두 다음의 네 곳이다.
(가) 상제께서 “선천에서 삼상(三相)의 탓으로 음양이 고르지 못하다.”고 하시면서 ‘거주성명 서신사명 좌상 우상 팔판 십이백 현감 현령 황극 후비소(居住姓名西神司命 左相右相八判十二伯 縣監縣令皇極後妃所)’라 써서 광찬에게 “약방의 문지방에 맞추어 보라.”고 이르시니라.(공사 2장 20절)
(나) 상제께서 어느 날 고부 와룡리에 이르사 종도들에게 “이제 혼란한 세상을 바르려면 황극신(皇極神)을 옮겨와야 한다.”고 말씀하셨도다. “황극신은 청국(淸國) 광서제(光緖帝)에게 응기하여 있다.” 하시며 “황극신이 이 땅으로 옮겨 오게 될 인연은 송우암(宋尤庵)이 만동묘(萬東廟)를 세움으로부터 시작되었느니라.” 하시고 밤마다 시천주(侍天呪)를 종도들에게 염송케 하사 친히 음조를 부르시며 “이 소리가 운상(運喪)하는 소리와 같도다.” 하시고 “운상하는 소리를 어로(御路)라 하나니 어로는 곧 군왕의 길이로다. 이제 황극신이 옮겨져 왔느니라.”고 하셨도다. 이때에 광서제가 붕어하였도다.(공사 3장 22절)
(다) 어느 날 상제께서 황극수(皇極數)를 보신 후에 종도들을 모으고 각기 소원을 물으셨도다. 경석은 상제께서 재차 묻는 말씀에 “유방백세(遺芳百歲)를 못하면 유취만년(遺臭萬年)이 한이로다. 열지(裂地)를 원하나이다.”고 여쭈니 상제께서 경석에게 “너는 병부가 마땅하니라.” 하시니 경석은 불쾌히 여기는지라. 상제께서 “병권은 직신(直臣)이 아니면 맡기지 못하므로 특히 너에게 맡기었노라.”고 말씀하셨도다.(교운 1장 54절)
(라) 갑오년 三월에 도주께서 안상익(安商翊)외 네 명을 대동하고 청천에 가셔서 황극신(皇極神)이 봉안되어 있는 만동묘 유지(遺趾)를 두루 살펴보고 돌아오셨는데 돌아서실 때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밤중에 폭풍과 뇌성벽력이 크게 일어 산악이 무너지는 듯하니라.(교운 2장 50절)
② 먼저 (가)의 ‘좌상 우상 팔판 십이백 현감 현령 황극 후비소(左相右相八判十二伯縣監縣令皇極後妃所)’는 관리들인 좌상(좌의정)과 우상(우의정), 팔판(중앙 행정직인 8명의 장관들), 십이백(지방 행정을 총책임지는 12명의 지방관들), 현감과 현령(고을의 우두머리, 큰 고을을 맡으면 현령이고 작은 고을을 맡으면 현감)들이 죽 둘러 서 있는 가운데 ‘황극’이 후비(后妃=왕비)와 같이 있는 형국을 묘사하고 있다. 상제님께서 이 공사를 보신 뜻은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우나 어쨌든 이 구절에서 황극(皇極)은 임금의 의미로 보인다.
(나)와 (라)의 ‘황극신(皇極神)’은 상제님의 공사에 의해 만동묘로 옮겨오기 전까지 천자국이었던 청나라의 황제에게 응기되어 있었다는 그 전후 문맥으로 보아 만민(萬民)을 다스리는 제왕의 일을 하는 신명으로 해석된다. 이 경우의 황극도 앞서 (가)의 경우처럼 임금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특기할 것은 황극신이 상제님 공사 이후 도주님에 의해 다시 거두어지기까지 사람이 아닌 만동묘에 봉안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원래 속세의 황제에게 머물러 인사(人事)를 펴던 존재였던 황극신이 황제를 떠나 상제님의 명을 직접 받들어 시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다)의 구절에는 ‘황극수(皇極數)’가 있다. 『서경』의 홍범구주에서 황극은 다섯 번째 항목이므로 대개 오황극(五皇極)이라 불린다. 즉 황극의 수리(數理)는 오(五), 중앙 토(土)인 것이다. 또 소강절은 원회운세(元會運世)라는 역법(曆法)을 정립할 때 상수역의 64괘와 384효를 사용하고, 384효의 각 효에 상응하여 황극이 그 다스림을 편다고 주장하였으니14 384 역시 또 다른 황극의 수리가 된다.
상제님께서 ‘황극수를 보셨다’ 함은 ‘황극수 공사를 보셨다’는 뜻인데, 이 황극수를 ‘황극수리’로 볼 수도 있겠으나 수(數)에는 이치, 도리, 법칙이라는 뜻도 있으므로 황극수는 ‘황극의 법칙’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사실 상제님께서 황극의 수리에 대해 공사를 보셨다 하더라도 그 실제 의미는 황극의 법칙에 대한 공사를 하셨다는 것으로 봐야 함은 당연하다. 그 무렵 황제 일인(一人)의 신으로 기능하고 있던 황극신이 상제님의 명을 받들어 천지공정에 참여하고 있었음도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러므로 상제님의 황극수 공사는 황극의 법을 조정하는 공사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상제님께서는 황극의 법을 어떻게 바꾸셨는가? 그에 대한 해답은 알 수 없지만, 상제님께서 공사 직후 직신(直臣)15인 차경석(車京石, 1880∼1936)에게 병권(兵權)을 맡기신다고 하신 대목에서 약간의 유추는 가능하리라 본다. 직신과 병권의 상대가 되는 것은 임금이고, 이 경우에는 바로 상제님 자신이 되신다. 따라서 상제님께서는 황극의 기운, 황극신을 어느 특정 인간(황제)에게 맡기지 않으시고 직접 다스려 쓰시겠다고 하신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상제님께서 만국 제왕의 기운을 모두 걷는다고 하신 말씀을 돌이켜보면,16 후천에 어떤 황제에게 황극신이 응기된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상제님께서 친히 황극신을 부려 쓰시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성이 있다. 그렇다면 황극의 법은 황제라는 인간을 통해 인사(人事)의 법이 펼쳐지는 것에서 상제님에 의해 직접 인사(人事)가 펼쳐지는 것으로 바뀐 것으로 이해해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상과 같이 『전경』에 등장하는 황극, 황극신, 황극수는 각각 임금, 임금의 일을 하는 신, 황극의 법칙이라는 뜻이었다. 따라서 『전경』에서의 황극 개념도 전통적인 황극 개념 즉 ‘중용의 도’, ‘임금이 지켜야 할 표준’이라는 무형의 정치철학 혹은 임금이 지극한 정치를 편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3)『정역』에서의 황극
① 원시 유학에는 두 가지의 세계관 전통이 있었는데, 하나는 음양으로 세계를 설명하는 주역 계통이었고 또 하나는 오행으로 세계를 설명하는 홍범 계통이었다.17 음양오행은 하나의 우주 법칙이지만 옛날에는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음양과 오행을 각각 독립된 개념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음양과 오행을 하나의 관념으로 결합하여 음양오행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전국시대 추연(鄒衍)과 한나라의 동중서(董仲舒) 이후부터였다. 이렇게 한나라 이후 사상사(思想史)에서 주역과 홍범의 세계관은 하나로 통합되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홍범이 정치론을 위주로 하는 사상체계라면 주역은 우주론을 위주로 하는 사상체계였으므로, 홍범과 주역의 통합은 쉽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주역은 지리(地理)와 정치를 포함하는 인사(人事) 등에 다양하게 응용되어 왔으므로, 홍범과 주역 사이에는 공통 영역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주역 우주론의 핵심은 단연 음양의 본원(本源)인 태극(太極)이고 홍범 정치론의 핵심은 황극(皇極)이기 때문에, 태극과 황극도 나름 어떤 공통 접점에서 논해질 여지는 있었다. 바로 이것을 시도한 최초의 인물이 김일부였던 것이다.
② 김일부는 1885년에 완성한 『정역』에서 황극을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의 우주론에 대입시켜 자신의 논리를 전개했다. 먼저 그는 무극이 십(十)이며 체(體), 태극은 일(一)이며 용(用), 무극인 십(十)과 태극인 일(一)을 합하면 토(土)가 되니(十+一=土) 이것이 바로 체와 용을 합한 중앙 오황극(五皇極)이라고 했다.18 이 오황극은 홍범에서 말한 황극을 뛰어넘는 것으로 무극과 태극을 집약 통일시키는 존재이며, 무극과 태극의 중앙자리이자 무극·태극·황극을 종합한 새로운 황극이라고 한다.19
또 그는 하도(河圖)의 중심은 십무극(十無極)이고, 낙서(洛書)의 중심은 오황극(五皇極)이며, 정역의 중심은 십무극과 오황극을 혼융하는 일태극(一太極)이라 주장했다. 다시 말해 『정역』이 제시하는 우주의 중심이란 무극·태극·황극의 모든 중심을 종합하여 지향하는 최고의 중심이라는 것이다.20
그는 십무극을 하늘, 오황극을 땅, 일태극을 사람이라고도 규정한다. 즉 천지인 삼재(三才)를 무극·황극·태극의 삼극(三極)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21 그러면서 그는 무극과 황극, 태극의 합일을 주장하여 인간과 천지우주의 일치를 강조하고 있다.22
이상 김일부의 주장을 종합해보면 우선 그는 무극·태극·황극 이론을 전개해 나갈 때 기본적으로 ‘무극과 태극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즉 우주의 운동이란 무극에서 태극이 나오고, 그 태극에서 음양이 분화되어 만물로의 분열이 일어나는데 그 분열의 극점에 이르면 다시 통일 운동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그랬다가 다시 분열 운동을 계속하고 또 통일 운동으로 돌아가는데, 이와 같이 분열과 통일운동의 순환을 가능하게 해주는 존재가 바로 황극이라는 것이다.23 다시 말해 무극과 태극은 서로 다르지만 황극에 의해서 통일 집약되기 때문에 비로소 같게 된다고 한다.24
③ 그러나 도주님 그리고 도전님께서는 ‘대순(大巡)이 원(圓)이며 원(圓)이 무극(無極)이고 무극(無極)이 태극(太極)이라’고 하여,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우주의 근본인 무극과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우주의 근본인 태극은 서로 같은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셨다. 즉 유학에서는 무극과 태극이 같은 것인지 혹은 무극에서 태극이 나온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지만, 대순진리회의 사상체계에서는 무극과 태극은 동일한 것이다.25 따라서 무극과 태극은 원래 다른 것이며, 황극의 운동에 의해서 무극과 태극이 하나로 통일된다는 김일부의 주장은 대순진리회의 사상체계와는 맞지 않다 하겠다.
대순사상의 입장에서 본다면, 무극과 태극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김일부의 황극 이론은 전혀 다른 패러다임이다. 무극과 태극은 다른 것이며, 무극에서 태극이 나온 것이라고 믿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무극과 태극을 하나로 묶어야 할 황극의 운동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원래부터 무극과 태극이 같은 존재의 두 다른 이름일 뿐인 사람들에게는 그런 황극의 운동이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
④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부의 황극 이론에 약간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김일부는 원래 인간이 태극적인 존재였으나 이제 일태극에서 오황극으로 일대 전환을 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즉 십무극에서 분화되어 나온 존재인 일태극 인간은 점점 자라 오황극으로 진입한다는 것이다.26 이것은 선천의 황극이 오직 임금에게만 해당되는 특수한 자리였다면, 후천의 황극은 사람이면 누구나 그 완성을 기하여 진출할 수 있다는 것으로, 다시 말해 선천의 임금은 특정인이었지만, 후천에는 인간이 높아져 누구나 임금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27
물론 김일부는 어떤 구체적인 방법과 원리로 인간이 오황극으로 진입하여 완성을 기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그의 이런 주장은 도통군자의 출현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상제님께서 삼계를 개벽하는 천지공사를 시행하시기 전에 그가 이런 주장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필자는 김일부의 황극 개념에 일정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대순사상과는 다른 패러다임이므로 수도인들에게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고 본다. 필자도 과거에 그랬듯이 우리 주변에는 무극에서 태극이 나온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수도인들이 없지 않은 상황이다.28 아직까지 무극과 태극을 다른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수도인들에게 김일부의 황극 개념은 매우 위험한 관념이 될 수 있다. 사실 무극과 태극이 다르다면, 필연적으로 이 둘을 하나로 통일시키기 위한 그 무언가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황극인데, 그렇다면 그 경우 대순사상과는 맞지 않는 황극의 실체를 찾다가 오히려 다른 곳에 현혹될 수도 있다.
그뿐 아니라 김일부가 제기한 무극·태극·황극 이론 즉 황극의 운동으로 서로 다른 무극과 태극을 하나로 묶어준다는 이론을 완전히 오해하고, 우주의 만물이 ‘무극→태극→황극’으로 발전하다고 더 엉뚱한 상상을 하여 황극을 찾아다니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니, 참으로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사람들은 무극주를 구천상제님, 태극주를 옥황상제님이라고 믿고 있으며, 그 근거도 도주님의 말씀이라고 기록된 『태극진경』을 들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태극진경』의 원 저자인 황진규가 『태극진경』에 대한 감수를 못하였으므로 진실임을 확신할 수 없다며 솔직히 고백한 적이 있고, 태극도 시절부터 수도를 해 오신 원로 임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도주님께서는 무극주가 구천상제님이고 태극주는 당신이라는 말씀을 단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 책에는 도주님의 말씀이라 수차례 기록되어 있으니 참으로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도주님께서는 분명히 무극과 태극은 같은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으므로, 무극주와 태극주는 서로 다를 수가 없고 오직 구천상제님 한 분으로 동일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도 무극주를 구천상제님, 태극주를 옥황상제님이라고 믿고, 황극주가 미지의 제3의 인물이라고 하여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3. 『정역』과 대순사상
① 앞서 서술한 대로 『정역』과 대순사상은 각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우주론 자체가 서로 다르다. 특히 『정역』의 황극 이론은 『정역』의 핵심 이론이다. 그렇다면 김일부의 『정역』과 대순사상은 상당 부분 차이가 있음이 분명하다.
『정역』을 단적으로 요약해 보면, 주역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팔괘 배치인 정역을 내세우면서 무극과 태극, 황극으로 우주의 운동을 설명하고, 윤달이 없는 1년 360일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데 그 시대는 억음존양(抑陰尊陽)의 시대가 아닌 조양율음(調陽律陰)의 시대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강돈구 교수는 『정역』이 새로운 시대의 전개 방식에 대해서 대순사상과는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29
첫째, 『정역』이 우주의 변혁을 말하기는 하지만 아무런 신적 존재의 역할이 없이 단순히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도래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물론 김일부는 신비체험을 통해 정역을 그렸고 그 신비체험을 하게 해 준 장본인을 화무상제(化无上帝) 혹은 화옹(化翁), 화화옹(化化翁), 화무옹(化无翁)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김일부는 우주의 변혁에 있어 신적 존재의 역할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이에 비해 대순사상은 구천상제님이라는 우주의 주재자가 시행한 천지공사에 의해서 우주의 변혁이 일어난다고 단언한다. 그러므로 『정역』과 대순사상은 새로운 시대가 전개되는 근본적인 동인(動因)이 서로 같다고는 보지 않는다.
둘째, 『정역』은 특정한 재난이 없이 자연스레 새 시대가 도래한다고 보지만, 대순사상은 병겁30이라는 대재난이 닥칠 것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사실 재난의 유무 여부는 이를 겪어야 할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두 사상 사이에서 발견되는 이 차이는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다.
셋째, 『정역』에는 새로운 시대에 한국이 세계의 중심국이 된다는 설명이 없다는 것이다. 즉 새 시대의 도래 이후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구체적인 상황 전개에 대한 설명이 『정역』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와 달리 대순사상은 우리나라를 상등국으로 상정하고 개벽시대에 한국이 가져야 할 사명의식을 강조한다.
이와 같이 『정역』과 대순사상은 그 내용면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김일부는 신비체험을 통해 새로운 시대의 이상을 표상하는 정역을 받았고, 그 정역은 억음존양(抑陰尊陽)이 아니라 조양율음(調陽律陰)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대순사상과 유사한 점이 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학식을 동원하여 정역을 해설한 『정역』은 우주론과 새 시대의 동인·전개 방식에 대해서는 대순사상과 다른 패러다임을 만들어 내었다. 따라서 대순사상의 입장에서 본다면 정역이 주역 이후 후천을 설명하는 하나의 새로운 역이라는 점, 즉 새롭게 배치한 팔괘를 통해서 새 시대의 원리를 상징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분명히 일정한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으나, 김일부가 저술한 『정역』은 정역의 온전한 의미를 다 밝히지 못하고 다만 후천의 도래만을 이야기하는 데 그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사실 김일부는 정역을 완전하게 해설하지 못하고 단지 상수학의 영역에만 머물렀고 실질적인 사상체계를 더 이상 전개시키지 못했다.31 김일부의 『정역』이 구체적이고 뚜렷한 체계와 실천철학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김일부를 추종하는 몇몇 종교들이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정체될 수밖에 없었다는 지적도 있다.32 『정역』은 열 개의 날개라는 뜻의 십익(十翼)33을 달고 있는 『주역(周易)』의 정교한 이론 체계와 비교해 보면 부족한 것이 많다. 『주역』도 처음에는 단순히 점을 치는 복서(卜筮)로만 생각되었지만 십익이라는 해설서가 붙여진 뒤에야 비로소 세련된 사상체계를 갖추게 되어 경전으로서 그 지위가 격상되었다. 『주역』이 오랜 기간에 걸쳐 많은 학자들에 의해 저술되었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김일부 단 1명에 의해서 저술된 『정역』이 그 체계성을 갖추기란 쉽지 않았던 것이다.34
② 『정역』이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주장하기는 하지만, 사실 그것은 조선후기의 일반적인 흐름이었다. 조선 중기 이후 조선의 민중들은 밖으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외환(外患)을 겪고 안으로는 관리들의 학정에 따른 내우(內憂)에 끊임없이 시달렸고, 이 괴로운 현실에서 벗어나 지극히 복된 낙원세계에 살기를 갈망해 왔다. 이로 인해 ‘진인(眞人)이 나타나 고통 받는 민중을 이상세계로 인도할 것’이라는 민간신앙은 자연히 생겨났는데, 그 이상세계라는 것이 곧 ‘남조선(南朝鮮)’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이런 사상을 바탕에 두고 몇몇 비밀결사가 조직되기도 하였고, 나아가서 이의 실현을 성취하려고 하는 농민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에 새로운 시대를 꿈꾸는 것은 민중들의 염원이었다. 특히 새 시대를 노래하는 『정감록』이나 미륵사상은 19세기 중반 최제우(崔濟愚, 1824~1864)의 동학 이후 출현한 새로운 종교들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으므로,35 내친 김에 이 사상들과 대순사상의 관계도 잠깐 살펴보도록 한다.
우선 『정감록』은 이씨조선 이후 정씨(정도령)가 계룡산에 도읍하여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데 그 전에 환난의 시대가 닥쳐오니 십승지(十勝地)로 피해야 한다는 비결서이다. 실제로 몇몇 종교들과 사람들은 이 영향을 지대하게 받아 계룡산의 신도안에 모여 살면서 정도령의 출현을 기다려 왔다. 그런데 1980년대 초중반 그곳에 군사기지 계룡대(鷄龍臺)가 건설되면서 모두 강제 이주를 당하게 되자 계룡산 근처인 논산, 연산, 대전 등지로 옮겨 여전히 정도령의 출현을 고대하고 있다고 한다.
상제님 재세 시 어떤 사람이 계룡산에 도읍하는 비결을 물은 적이 있었는데, 상제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일본인이 산 속만이 아니라 깊숙한 섬 속까지 샅샅이 뒤졌고 또 바다 속까지 측량하였느니라. 정씨가 몸을 붙여 일을 벌일 곳이 어디에 있으리오. 그런 생각을 아예 버리라.”고 충고하신 적이 있다.36 또다시 어떤 사람이 계룡산 건국의 비결을 묻자 “동서양이 통일하게 될 터인데 계룡산에 건국하여 무슨 일을 하리오.”라고 하셨으며,37 “속담에 짚으로 만든 계룡(鷄龍)이라고 하는데 세상 사람은 올바로 일러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도다”라고 한탄하신 적도 있으셨다.38 이와 같이 상제님께서는 『정감록』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셨다. 따라서 대순사상은 새 시대의 도래라는 면에서는 『정감록』과 유사점이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정감록』을 비판하는 입장에 서 있다.
또 미륵사상이란 불교의 사상으로, 미륵이 천상의 정토(淨土)인 도솔천에서 수행을 하다가 약 56억 년 후에 도솔천의 수명이 다할 때 지상에 내려와 용화수(龍華樹)39 아래에서 성도(成道)하여 3회에 걸친 설법을 통해 중생들을 제도하는데, 첫 번째 설법에서는 96억 명, 두 번째는 94억 명, 세 번째는 92억 명이 일체의 번뇌를 파하는 아라한(阿羅漢)의 경지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미륵을 따라 그 설법에 참여하고자 발원(發願)하는 것이 바로 미륵하생신앙(彌勒下生信仰)이다. 또 미륵이 이 땅에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세월이 너무 길기 때문에 죽은 뒤 도솔천에 태어나 그곳에서 미륵과 함께 56억 년을 함께 보내다가 지상에 내려와 설법에 참가하겠다는 신앙도 있으니, 이것을 미륵상생신앙(彌勒上生信仰)이라 한다. 미륵신앙이라고 하면 이 두 신앙을 모두 뜻하지만 대개는 미륵하생신앙을 말하며, 한중일 삼국 중에서 미륵신앙의 전통이 유일하게 계승되고 있는 곳은 우리나라뿐이라는 견해가 있다.40
상제님께서는 인신(人身)으로 강세하시기 전에 금산사 미륵금불에 30년간 임어해 계셨고 또 “나는 곧 미륵이라.”고 직접 말씀을 하신 적도 있다.41 게다가 금강산 토성수련도장에도 미륵이 서 있는 것을 보면 대순사상은 미륵에 대해 『정감록』과 같이 비판적 입장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제님께서 미륵에 대해 말씀하셨다고 해서 또 도장에 미륵이 서 있다고 해서 대순사상이 불교의 미륵사상이라는 틀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마치 영대(靈臺)에 석가모니가 봉안되어 있다고 해서 대순사상이 불교의 영역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과 같다. 대순사상에 미륵이 등장하는 것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 그리고 ‘구세주의 출현’이라는 미륵의 상징성을 인정하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4. 정리하며
이 글은 1년 전 회보에 게재된 「종단 대순진리회의 변천 과정과 무극 태극의 관계」에 이은 후속작이라 할 수 있다.
그 대강의 개요를 정리하면 『서경』에서 형성된 황극은 중용의 도, 임금이 지켜야 할 규범이라는 정치철학이었다. 또 소강절은 그 개념을 활용하여 황극이 세상에 펼쳐지는 주기를 원회운세(元會運世)라는 그만의 독특한 역사관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상제님께서는 공사를 통해 황극의 법을 새롭게 변형시키기는 하셨으나 그 기본적인 개념만큼은 전통적인 황극의 개념을 그대로 사용하셨으므로, 대순사상에서의 황극은 전통적인 황극 개념선상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또한 정역이 주역에 뒤이은 새로운 시대를 설명하는 역인 것은 분명하며 대순사상과도 같은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김일부가 저술한 『정역』을 대순사상과 비교하면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우주론부터가 다르며 후천의 동인(動因) 및 전개에 대해서도 다른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대순사상의 입장에서 보면 김일부가 정역을 신비체험으로 받기는 했지만 그 온전한 의미를 다 드러내지는 못하였고, 다만 후천의 도래 그리고 새로운 인간상이 출현하는 것만을 이야기하는 데 그쳤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김일부의 위대성을 폄훼할 필요는 없다. 『주역』이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학자들에 의해 그 사상체계가 다듬어져 온 데 비해서, 『정역』은 불과 5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단 1명에 의한 결과물이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신비체험으로 정역을 받아 궤를 그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김일부의 업적은 훼손되지 않으리라 본다.
01 조선명부(朝鮮冥府)를 전명숙(全明淑)으로, 청국명부(淸國冥府)를 김일부(金一夫)로, 일본명부(日本冥府)를 최수운(崔水雲)으로 하여금 주장하게 하노라.(공사 1장 7절)
02 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이론적 틀이나 개념의 집합체.
03 은(殷)나라의 원래 이름은 상(商)나라였다. 『사기』에 따르면 상나라는 수도를 다섯 차례 옮겼는데, 제20대 왕인 반경(盤庚)이 마지막으로 옮긴 수도가 바로 은(殷)이었다. 이후부터 상나라는 멸망할 때까지 약 270년 간 은나라로 불렸다. 은(殷)의 유적지인 은허(殷墟)는 1898년 봄에 하남성(河南省) 북쪽 안양(安陽) 부근에서 발굴되었다.
04 남명진, 「홍범사상연구」, 『충남대학교 인문과학논문집』 제3권 제1호, 1976, pp.239∼240.
05 惟十有三祀 王訪于箕子 王 乃言曰, 嗚呼 箕子 惟天陰下民 相協厥居 我 不知其倫攸. 箕子乃言曰, 我聞 在昔 洪水 陳其五行 帝乃震怒 不洪範九疇 倫攸. 則死 禹乃嗣興 天乃錫禹洪範九疇 倫攸. 初一 曰五行. 次二 曰敬用五事. 次三 曰農用八政. 次四 曰協用五紀. 次五 曰建用皇極. 次六 曰乂用三德. 次七 曰明用稽疑. 次八 曰念用庶徵. 次九 曰嚮用五福 威用六極.(『書經』 「洪範」).
06 本之以五行 敬之以五事 厚之以八政 協之以五紀 皇極之所以建也. 乂之以三德 明之以稽疑 驗之以庶徵 勸懲之以福極 皇極之所以行也(『書經集傳』 「洪範」).
07 양재학, 『서경 홍범사상의 고찰』, 충남대학교 철학과 석사학위 논문, 1986, pp.15∼16.
08 조남호, 「주희의 태극 황극론 연구」, 『시대와 철학』 Vol 18 No 1, 한국철학사상연구회, pp.147∼154.
09 是天下之常理 時天下之大訓 非君之主訓也 天之訓也(『書經集傳』 「洪範」).
10 『서경』에서 묘사한 성인의 심법에 대해서 상제님께서는 “『서전(書傳)』 서문을 많이 읽으면 도에 통하고… (교법 2장 26절)”라 하시어 그 중요성을 말씀하신 바 있다.(이승목, 「‘서전서문’에 대한 이해」, 『대순회보』 제71호, pp.88∼113 참고).
11 皇極 皇建其有極 時五福 用敷錫厥庶民 惟時厥庶民 于汝極 錫汝保極. 凡厥庶民 無有淫朋 人無有比德 惟皇作極. 凡厥庶民 有猷有爲有守 汝則念之. 不協于極 不罹于咎 皇則受之 而康而色 曰予攸好德 汝則錫之福. 時人斯其惟皇之極. 無虐獨 而畏高明. 人之有能有爲 使羞其行 而邦其昌.(『書經』 「洪範」).
12 동학가사(東學歌辭)에 세 기운이 밝혔으니 말은 소·장(蘇秦張儀)의 웅변이 있고 앎은 강절(康節)의 지식이 있고 글은 이·두(李太白杜子美)의 문장이 있노라.(교법 2장 42절)
13 書之名卽書之意也 言治道則上推三皇 所謂惟皇作極 故曰皇極也 經緯組織之謂經 曰元 曰會 曰運 皆世之積 故以元經會 以會經運 皆以經世也(왕식 저, 윤상철 역, 『황극경세(소)』, 대유학당, 2002, p.26).
14 자세한 사항은 조동원, 「소옹의 역사관」, 『부대사학』 제6집, 부산대학교 사학회, 1982, pp.118∼119 참고.
15 나라에 이로운 여섯 종류의 신하를 육정신(六正臣)이라 하니, 성신(聖臣: 인격이 훌륭한 신하), 양신(良臣: 어진 신하), 충신(忠臣: 충성을 다하는 신하), 지신(智臣: 지혜로운 신하), 정신(貞臣: 지조가 곧고 바른 신하), 직신(直臣: 강직한 신하)을 말한다.(유향 찬집, 임동석 옮김, 『설원』 상권, 동문선, 1997, pp.55∼56)
16 “만국 제왕의 기운을 걷어 버리노라.”고 말씀하시더니 이상한 기운이 제왕의 장엄한 거동의 모양을 이루고 허공에 벌려 있더니 사라지는 도다.(예시 27절)
17 방동미 지음, 남상호 옮김, 『원시 유가 도가 철학』, 서광사, 1999, p.84.
18 擧便无極十 十便是太極一 一无十无體 十无一无用 合土 居中五皇極(『正易』 「十五一言」).
19 금장태, 「일부 김항과 정역의 종교사상」, 『한국 현대의 유교문화』, 서울대학교출판부, 2002, p.74.
20 위의 글, p.73.
21 이정호, 『정역연구』, 국제대학 출판부, 1983, p.169.
22 강돈구, 「정역의 종교사적 이해」, 『한국 종교의 이해』, 집문당, 1985, p.319.
23 한동석, 『우주 변화의 원리』, 대원출판, 2001, pp.45∼47, pp.382∼386.
24 김만산, 「역학상 용어의 개념 정의에 관한 연구(Ⅰ)」 『동양철학연구』 Vol 17, 동양철학연구회, 1997, p.259.
25 「종단 대순진리회의 변천 과정과 무극 태극의 관계」, 『대순회보』 제94호, pp.78∼113.
26 각주 21의 글, p.176.
27 이정호, 『정역』, 아세아문화사, 1988, p.116.
28 그 이유와 배경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 회보에 자세히 실은 바 있다. 각주 25의 글 참고.
29 각주 22의 글, pp.319∼320.
30 선천 개벽 이후부터 수한(水旱)과 난리의 겁재가 번갈아 끊임없이 이 세상을 진탕하여 왔으나 아직 병겁은 크게 없었나니 앞으로는 병겁이 온 세상을 뒤엎어 누리에게 참상을 입히되 거기에서 구해낼 방책이 없으리니 모든 기이한 법과 진귀한 약품을 중히 여기지 말고 의통을 잘 알아 두라. 내가 천지공사를 맡아 봄으로부터 이 동토에서 다른 겁재는 물리쳤으나 오직 병겁만은 남았으니 몸 돌이킬 여가가 없이 홍수가 밀려오듯 하리라.(공사 1장 36절)
31 정역은 상수학의 논리에 사로잡혀 있다. 정역의 상수적 언어를 보편적 언어와 사유논리로 재해석하지 못한다면 정역은 보편성을 잃고 술수가의 폐쇄적 상상력 속에 갇혀버리고 말 위험이 있다.(각주 19의 글, p.90)
32 각주 22의 글, pp.305∼306 참고.
33 전국시대에서 한나라 초기에 여러 학자들에 의해 저술된 『주역』의 해설서. 단전(彖傳) 상·하 2편과 상전(象傳) 상·하 2편, 계사전(繫辭傳) 상·하 2편, 문언전(文言傳), 설괘전(說卦傳), 서괘전(序卦傳), 잡가전(雜家傳)의 7종 10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34 김일부는 1881년 정역 괘상을 그린 뒤, 1884년에는 『정역』의 전반부인 십오일언(十五一言)에서 무위시(无位詩)를 썼고, 1885년에는 정역시(正易詩)와 포도시(布圖詩) 그리고 『정역』의 후반부인 십일일언(十一一言)에서 십일음(十一吟)까지 완성하였다. 따라서 김일부가 『정역』을 저술한 기간은 1881년부터 1885년 사이이다.
35 강돈구, 「한국 신종교의 역사관」, 『현대 한국 종교의 역사 이해』,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p.268.
36 교법 3장 39절.
37 교법 3장 40절.
38 예시 65절.
39 미륵보살이 성불하여 그 밑에서 용화삼회를 여는 나무로, 꽃가지는 용머리와 같고 나뭇가지는 보룡(寶龍)과 같다고 한다.
40 김삼룡, 『한국 미륵신앙의 연구』, 동화출판공사, 1983, pp.24∼25.
41 상제께서 어느 날에 가라사대 “나는 곧 미륵이라. 금산사 미륵전 육장금신은 여의주를 손에 받았으되 나는 입에 물었노라.”고 하셨도다. 그리고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아래 입술을 내어 보이시니 거기에 붉은 점이 있고 상제의 용안은 금산사의 미륵금신과 흡사하시며 양미간에 둥근 백호주가 있고 왼 손바닥에 임(壬)자와 오른 손바닥에 무(戊)자가 있음을 종도들이 보았도다.(행록 2장 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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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https://www.youtube.com/watch?v=TMN43-wb5WI&t=3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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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를 알았다면 허접한 지식들은 버리면 그 뿐이다. 다만, 실체를 알기 전까지는 허접한 지식들이 반짝 반짝 빛나는 보석 역할을 할 수 있다. 황극에 관한 '대순회보' 의 글은 꽤나 길지만, 저 정도의 글쓰기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독자들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읽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님께서는 폭넓게 공부를 하신분 같습니다 주역,정역등~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무극주-증산
태극주-정산
대순주- 우당 입니다
2008년에 태극도에서
황극도 바람이 일어나서
상도에서도 그쪽으로가신 분들이 많았어요
제 수반(2010년)중에도 그쪽으로갔지요~
최해경차선감(청도원)쪽으간 상도 수도인 이었던 분들중에도 그쪽으로 가신분들이 그당시 있었습니다
"무극/태극/황극" 은 한 몸처럼 움직이는 겁니다.
도주께서 창도하신 <무극도-태극도-> 다음은?...이렇게 자문자답하였다면, 당연히 황극도 간판을 세울 가능성이 농후해지지요. 이걸 하지 말라는 것이 도주님의 <山> 이야기지요. 같은 맥락으로 구천상제, 옥황상제, 뒤에도 "상제" 붙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理雖高 出於太極无極之表 不離乎日用事物之間
........................................
성사의 저 표현을 山을 매개로 해서 연원들이 주거니 받거니 한 겁니다. 우당께서 말씀하신 <출출명장> 이란, 出(=兩山) 에서 나온(=出) 명장(名將=理:대순진리) 라는 뜻입니다. 결국 그것이 황극의 다른 표현이고, 우당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理> 라는 글자는 "理서남이교통" 에서 쓰이고 있습니다.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far-reaching spirit 공감합니다
도전박우당님 화천후
나온 대순회보는 신빙성이
없습니다
대순전체임원들이 도전박우당님 생전시
박우당님이 하느님 이라고
했었지요~
제가 90년도 입도해서
1991년 수강생으로 포천 대진대학교
공사 받들러 갔을때
공사일꾼들 500여명 조회시 타방면 임원 책임자가 교화하시길
도전님이 누구시냐!
하느님이 아니시냐!
하느님일 공사받들러
왔으면 꽤부리지 말고
열심히 일 하라고 교화
하셨어요~
1991년 여주본부도장 수강생으로
일할때 도전 박우당님께서
행차 하시면 임원들이 단속하셔서 화장실로 들어
갔던 일도 있었지요~
하느님이 행차하시면 도문소자들이 예를 갖추고
인사드리면되지 임원들이
유난 법석을 떤것입니다
그래서 상도방면이 보유한
도전박우당님 훈시를 보면
전체임원들이 임원들 추종하는 수도인이지
도전 박우당님 추종하는
수도인들이 아니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부분이
여러군데 나옵니다
천안방면서 도전박우당님 생전시 선감했던 내수분이
말하기를~
선감되야 도전박우당님 뵐수 있다해서
자녀들 초딩,중딩다닐때
애덜 못나오게 현관문 잠궈놓고 포덕사업해서
선감되서~
여주본부 도정업무때
도전박우당님 훈시를
접하고 임원들이 지방서
도담 했던것이 혹세무민
이란걸 깨달아서 자녀
교육에 힘썼다 라고 하셨고
또 도전박우당님께서 상임원들을 손으로 가리키시면서 너희들은
다 해원해써 도통군자는
저아래(수반) 이써 라고
하셨답니다 그래서 더 자녀들 교육에 힘썼고
방면 임원들 교화는 걸러서
들었다고 하더군요~
도를 깨닫는 것은 직책과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도 대순임원들은
전도인이 부모보다 더
중요하다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수칙이
있음에도~
가정의 부모보다
선각자가 부모라고
혹세무민 하는 말로 도를가르치니 청소년들이
가출을하고 유부녀들이
가출을 해서 대순진리하고는 무관한
도를 닦게 만들고 있어
대순진리회의 덕화손상이
임원들에게 있다는것입니다
도문소자들은 직책과 관계없이 자유스러운
토론이 되야 진리도통에
다가서는것이지
임원들의 권위의식등
강박관념이 작용한다면
진리를 가까이 할수 없는것입니다
1일치성 3일도통이 무었이겠습니까!
😂🙂🤔 가히 명문(名文)의 댓글입니다. 짝짝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