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자인 찰스 다윈은 맹장(혹은 충수)이 “아무 쓸모 없는 기관”이라고 했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이런 생각에 대다수가 공감했습니다. 그 결과 큰 도움은 안 되면서 터지면 합병증을 유발하다 보니, 다른 수술을 할 때 멀쩡한 맹장을 떼어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러한 관점이 많이 바뀌고 있습니다. 맹장이 면역체계 유지에 기여한다는 연구 보고가 잇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복잡 미묘한 영역을 너무 단순화시켜 부작용이 생기는 또 다른 예로 ‘조직 신학’(혹은 ‘교리’)을 들 수 있습니다. 조직 신학은 성경 진리의 골격을 잡아 주는 면에서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의 몸보다 더 신비한 진리의 세계를 무 자르듯이 재단할 때 오는 부작용 또한 없지 않습니다. 저도 알게 모르게 이런 영향을 받아 성경에서 말하는 ‘멸망’은 무조건 불신자에게만 해당된다는 관념이 있었나 봅니다. 그러다 보니 오늘 아침 전만 해도 아래 말씀을 불신자를 겨냥한 말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약속을 더디게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분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회개에 이르도록,
여러분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벧후 3:9).
믿는 우리에게 하는 경고임 : 위 말씀은 주님께서 속히 오실 것을 약속하셨지만 아직도 안 오시는 상황을 배경으로 합니다. 전에는 이 말씀에서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회개에 이르도록’과 같은 표현이 있어서, 주님의 재림 전에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시키라는 취지의 말로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위 본문과 함께 아래 각주를 읽었을 때, 이 말씀은 “여러분”(벧후 1:1) 즉 베드로후서 수신인처럼 거듭난 우리가 그 대상임이 깨달아졌습니다.
“9절의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을 가리키므로, ‘멸망하지’라는 말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영원한 멸망 …이 아니라, 믿는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적인 징계의 형벌을 가리킨다”(각주 3).
그렇게 보는 시각이 바뀐 후에 아래와 같은 그다음 말씀들을 보니, 불신자가 아니라 이미 믿은 우리가 깨어서 제대로 신앙생활 하라는 말씀인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같이 올 것입니다. 그날에 … 원소들은 뜨거운 열에 풀어지며, 땅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은 타 버릴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질 것인데,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방식으로 생활하고, 경건하게 살면서,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재촉해야 합니다”(10-12절).
‘멸망’은 믿는 이에게도 해당됨 : 여기서 쓰인 ‘멸망’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아폴뤼미’(622)입니다. 이번 추구를 통해 알게 된 것은 한국어는 모두 ‘멸망’으로 번역되었지만, 헬라어 원문은 조금씩 다르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들을 값 주고 사신 주님을 부인하는 자들”(벧후 2:1), 혹은 ”경건치 않은 자들”(벧후 3:7)이 영원히 멸망할 것을 말할 때 ‘멸망’은 아폴레이아(684)인데, 위 본문에 쓰인 아폴뤼미(622)는 “행복이 파괴되고 손실되는 것”(멸망)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흔히 아는 ‘영원한 멸망’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적인 징계’의 의미로 ‘멸망’이라는 단어가 쓰인 예는 조금 더 있습니다(마 22:7, 눅 17:27, 고전 10:9-10, 고후 2:15, 4:3, 살후 2:10, 유 5, ‘멸망’에 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벧후 2:1, 각주 5 참조).
요약하자면, 이 구절이 말하는 ‘멸망’은 구원받은 후에도 행위에 따라 구원이 취소되어 지옥불에 떨어질 수 있다는 의미의 멸망이 아닙니다. 대신에 구원 이후의 우리의 삶과 봉사가 심판대 앞에서 ‘나무와 풀과 짚’으로 판명되어 겪을 손실에 해당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고전 3:12-15 참조).
회개해야 할 내용 : 주 예수님은 요한계시록에서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하셨습니다(계 2:5, 16, 21, 3:3, 19). 이때 회개해야 할 내용은 각 교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참고로 여기서 회개가 필요한 내용은 전후 문맥에 따르면, 1) 주님의 재림을 위해 깨어 있지 않은 것, 2) 거룩한 방식으로 살지 못한 것, 3) 경건하지 못한 삶에 대한 것입니다(11-12절). 아마도 저를 포함해서 거듭난 이들 대다수는 이러한 회개의 항목들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이어지는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안 가운데서 주님께 발견되도록 힘쓰십시오”(벧후 3:14)라는 말씀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도달해야 할 표준이 어떠해야 할지를 말해줍니다.
이러한 묵상을 통해 느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교계가 이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문제’에 다소 소홀하거나 혹은 반대로 너무 지나치게 강조해 온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 예로 예수 믿고 죽으면 무조건 천국 간다(‘성도의 견인’)는 교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굳이 ‘깨어 있어야 할’ 필요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재림 준비를 너무 자의적으로 하도록 가르친 결과 밤 12시에 하는 자정 기도, 직장 포기, 집과 재산 포기, 인간관계의 단절 등으로 치우쳐 많은 사람들이 시험에 들게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재림 그리고 임박한 심판과 관련하여 마태복음 24장과25장에 있는 다음과 같은 항목들로 ‘준비’하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여분의 기름’을 예비함. 2) 밭에 있는 두 남자와 맷돌질하는 두 여자처럼 평범한 일상생활을 계속함. 3) “집안 식구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나눠 줌. 4) 받은 달란트를 발전시킴. 5) 왕국 복음을 전파하여 ‘증거’(testimony)를 확산함. 이런 말씀들은 재림을 맞이 할 준비가 어떤 운동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살고, 영적 생명이 자라고, 이미 믿는 이들 그리고 불신자들에게 자신이 누리고 체험한 주님을 소개하고 공급하는 문제임을 보여줍니다.
오 주 예수님, 당신이 다시 오실 때 정결하고 예비된 신부와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나눠주는 충성된 노예로
발견되기를 갈망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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