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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최전선에서 대대장, 유격대사령관, 연대장을 맡아가며 치열한 전투를 지휘했던 채명신(80.(사)6·25참전유공자회 회장, 전 주월 한국군 사령관) 장군이 매년 6·25를 맞는 기분은 남다를 것이다. 지난 9일 향군회관에서 만난 채 장군은 젊은 기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채 장군은 인터뷰에 앞서 요즘 젊은 세대가 6·25의 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현실을 크게 걱정했으며, 젊은 층의 국가안보에 대한 생각을 묻는 등 현 시국에 대한 걱정을 쏟아냈다.
채 장군은 이날 6·25 참전 경험담과, 전쟁의 참혹상, 한.미 동맹의 중요성, 6·25의 교훈 등에 대해 장장 2시간여 동안 쉬지 않고 이야기를 풀어나갔고, 80의 고령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당시 전투 상황과 시간, 날짜 등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반달눈썹 아래로 번뜩이는 눈빛은 55년 전 그대로인 듯 했으며, 몸짓과 말투에는 여전히 카리스마가 느껴져 백전노장의 기백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장군님께서 정의하시는 6·25는 어떤 것입니까?
6·25는 김일성이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남한에 적화통일을 꾀하기 위해 일으킨 것이며, 우리 민족 반만년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전쟁이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중국, 일본, 몽골 등의 나라와 수많은 전쟁을 치렀었지만, 6·25라는 것은 지난날 조상들이 기억했던 그런 종류의 전쟁과는 차원이 달랐으며, 그 피해규모도 가장 크고 엄청난 것이었다. 김일성은 6·25를 일으키기 전에도 남쪽에 수없이 많은 공격을 가해왔다. 1946년 대구폭동사건과 48년 4·3제주도 공산폭동사건, 여순반란사건, 49년 개성 송악산 전투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6.25 발발 시 우리나라 상황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인민군 19만 명의 병력은 IL폭격기와 야크전투기 211대, T-34형 소련제 탱크 242대, 122미리 유단포 172문을 포함한 800문의 대포, 120미리 중박격포 230문을 포함한 2,000문의 박격포 등을 밀고 38선을 돌파, 남진해 왔다. 그러나 당시 우리는 단 한 대의 공군기나 탱크, 단 한문의 120미리 이상의 대구경포도 없었다. 멍하니 있다가 당해버린 것이다. 게다가 전쟁발발 하루 전인 24일 토요일 오후부터 주말 외출과 농번기 휴가로 전.후방 장병들 반수가 외출 중이었다. 북의 기습공격을 받을 땐 전.후방을 막론하고 자기 위치에 있었던 병력은 얼마 안 됐던 것이다.
-전쟁이 터질 때 장군님의 상황은 어땠나요?
6·25가 터질 때 나는 태백산에서 북에서 남파된 게릴라들과 싸우고 있었다. 1949년 북에서 남파된 잘 훈련된 정예 게릴라가 100여명 단위로 조직해 태백산맥 등을 타고 내려와 동해안을 피로 물들이고 있었고, 송악산 전투를 끝낸 나는 곧장 동해안 지역 담당의 25연대 2중대장으로 투입돼 영덕지구를 담당하게 됐었다. 영덕군은 공산당이 제일 많았지만, 태백산 일대에서 제일 먼저 완전소탕 했다. 이후 안동으로 집결을 할 무렵 6·25가 터진 것이다. 태백산에서의 공비 토벌작전과 제주도에서의 공산폭동 토벌 체험으로 공산 게릴라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고, 월남전에서도 많은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경험이 됐다. 그러나 국군의 전투 주력을 후방에 끌어 들여 토벌작전으로 지치게 해 전력을 약화시키기도 했다.
-당시 정부는 어떤 대책을 세웠습니까?
육본, 국방부는 물론 정부도 적 남침에 전혀 대비책도 없었고 큰 혼란 속에서 우왕좌왕할 뿐이며 상황도 제대로 파악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24일 토요일 저녁에는 용산 육군본부 장교클럽 파티가 열려 서울지역 각 군 사령부, 국방부의 중령급 이상의 모든 고급장교들과 전방의 연대장, 사단장이 초청됐고, 이들은 마시고 즐기면서 새벽 2시까지 댄스파티를 벌였다. 북한군의 기습남침이 25일 새벽 4시였는데 이때 이들은 모두 깊은 잠속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더욱 기막힌 것은 25일 아침 전방의 급박한 상황이 보고되기 위해 신성모 국방장관과 채병덕 참모총장 집무실의 전화가 갔으나 이들은 각각 “일요일에는 어떤 업무를 보지 않는다”거나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드셔서 깨울 수가 없다”는 한심한 답변을 하고 있었다. 이놈들 틀림없이 빨갱이들일 것이다. 이처럼 지휘체계는 마비상태였고, 전방부대는 격파되어 혼란에 빠져 후퇴를 계속했다.
25일 오후에 접어들어서야 헌병들은 사이렌을 울리며 “국군장병들은 즉시 원대로 복귀하라”는 가두방송을 했고, 이에 시민들이 불안해 떨며 피난준비를 하자, 참모총장과 국방장관이라는 사람들은 “용감한 군인들이 반격을 하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는 거짓 방송을 했다. 이런 와중에 공산군은 27일 오후 늦게 미아리고개까지 접근해왔다.
-전쟁이 나면 가장 먼저 지휘를 책임져야 할 직급들이 왜 하필이면 전쟁 전날 파티를 벌였을까요?
공교롭게도 전쟁이 터지기 전날, 그것도 중령급 이상 장교들을 포함해 전방에 있는 연대장까지 불러들인 것은 (군내 프락치들이)싸움을 계획적으로 못하게 하기 위한 책략이었다. 육군본부는 뜬금없이 육군 보유 차량 총 1500대 중 500대를 정비 해야 한다며 부평으로 후송 명령을 내렸고, 박격포, 기관총 등 중화기의 일부도 수리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부평으로 후송토록 명령했다. 당시 군내에 얼마나 많은 빨갱이들이 깔려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혼란은 극에 달했을 텐데요, 그 참혹상은 어땠나요?
공산군이 서울 외곽까지 밀고 들어오자 정부기관과 군 사령부 등이 27일 늦게 한강 이남으로 도망가기 시작했고, 28일 새벽 2시 30분경 하나뿐인 한강 인도교는 우리 공병에 의해 폭파됐다. 이때 교량 위에는 한밤중에 빠져나온 서울시민들과 후퇴하는 군인들로 꽉 메운 상태였는데, 교량폭파로 이들은 모두 한강물에 추락하고 말았다. 폭파 후에도 뒤에서 밀어닥치는 인파들로 인해 계속해서 한강에 집단으로 떨어졌고, 일부는 수영해서 강을 건너다 죽고 마는 지옥상이 연출됐다.
28일 아침 먼동이 트기 전에 수도 서울은 공산군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쳐들어온 공산군은 대학병원에 들어가 치료받고 있던 부상병들과 임산부, 산모, 갓 태어난 어린 핏덩이 가릴 것 없이 모두 기관총으로 쏴 죽여 대학병원을 전부 피바다로 만들었다.
공산군 일개 병력은 또, 서대문 형무소를 문을 열어 죄수를 석방했는데, “인민군 만세”를 부른 죄수들은 민가, 특히 잘사는 집에 무단 침입해 “세상이 바뀌었다. 너희들은 지금까지 잘 처먹고 잘 살았지만, 위대한 인민군대가 와서 해방됐으니, 가진 것을 다 내어 놓으라”며 강도, 강간을 마음껏 저질렀다. 서울시는 완전히 공포의 도가니였다.
-미국 및 UN의 대응은 언제 시작됐습니까?
6·25를 맞아 미국은 신속한 대응조치를 취했다. 6월 27일 UN안보리에서 북의 침략에 대한 경고성명이 있었고, 6월 30일 트루먼 대통령은 미군의 즉각적인 전쟁개입을 명령했다. 당시 일본 큐슈에 주둔중인 미 24사단 병력이 한반도에 투입됐고, 그 선발대인 스미스 부대는 충청남도 연기군의 개미고개에서 500여명의 전사자를 내며 5일간을 버텼다. 이때 미군부대가 어느 정도 시간을 버텨주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끝나는 것이었다. 스미스부대를 포함한 미 24사단은 엄청난 희생을 통해 이 나라를 지켜줬다.
지난달 20일 충청남도 연기군에서 이를 기념하기위한 행사를 가졌는데, 행사에 앞서 나는 한미동맹의 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정부 측에서 관심을 보여 이 행사가 대대적으로 홍보되기를 바랬지만, 대통령의 메시지까지 전달됐던 이 행사를 국내 언론은 보도 하지 않았다.
-6·25를 전후로 기억에 남는 전투에 대해 한 말씀 들려주십시오.
육탄10용사를 아는가? 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 인민군 1사단의 기습으로 빼앗긴 38선 부근 송악산일대 진지를 되찾는 전투에서 배출된 용사들이다. 당시 육탄10용사는 1사단 11연대 하사관 교육대 소속이었는데, 나는 11연대 1대대 4중대장을 맡고 있었다. 4중대는 나의 육사 동기인 김용직 대위가 이끄는 하사관 교육대와 함께 반격을 가했는데, 오른쪽 공격을 맡은 김용직 대위의 부대가 완강한 적의 저항으로 진격이 여의치 않자 10명의 자원사병이 기폭장치를 단 폭약을 몸에 달고 적의 진지에 몸을 날려 도치카를 폭파, 10명 전원이 장렬히 산화해 우리 국군사에 찬란한 희생정신과 공격정신을 빛냈다. 그날이 49년 5월 4일이며, 육탄 10용사 동상이 있는 문산에서 매년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당시 전투에서 나도 최초로 인민군의 따발총을 맞고 쓰러진 적이 있었는데, 하늘의 도움으로 죽지 않고 끝까지 전투를 끝낼 수 있었다.
-6·25 한국전쟁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인민군은 6·25 전쟁 중 도처에서 인민재판과 집단학살을 자행했고, 그들이 후퇴할 때 이른바 ‘반동분자’들을 폐광 갱도에 집단으로 가둔 채 입구에 불을 지르거나 폭파하는 등의 처참한 대량 학살의 참상이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공산분자들은 오직 붉은 피와 무자비한 투쟁을 통해 파괴와 혁명으로 인민의 해방을 이루는 것을 인생 최고의 가치와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또, 한.미간의 동맹과 안보구축을 위한 긴밀한 협조체제가 이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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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님의 군 생활에서 잊을 수 없었던 기억은 무엇인가요?
내가 48년 소위로 임관해 처음 부임된 곳이 제주도 9연대였다. 당시 제주도는 4·3 공산폭동이 일어나 내란상태나 다름없었다. 당시 나는 육사 3기생 중대장 문상길 중위 밑에서 소대장을 지냈는데, 문 중위는 남로당 9연대 책임자였고, 내가 제주에 간 지 한 달 후에 부임한 연대장인 박진경 대령을 암살한 주범이었다. 수사요원들이 박 대령의 암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문상길이 직속부하인 나를 갖은 방법을 동원해 죽이려고 했던 것이 드러났다. 내가 이북에서 넘어왔고, 철두철미한 반공사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내가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우리 소대원들이 나를 지켜준 덕분이었다. 화장실 갈 때나 순찰 돌때 등 문상길은 수차례 날 저격하려 했으나 소대원들이 나를 따라다니면서 목숨을 걸고 보호해줘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당시 연대의 분위기는 어땠나요?
당시 9연대는 하사관, 장교 할 것 없이 새빨갛게 물든 사람들이 연대를 장악하고 있었고, 모든 사병들도 완전히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처음 소대원 42명과 대면할 당시 그들은 적의와 살의에 참 눈빛으로 나를 대했고, 난 직감적으로 “이들이 철저히 물들었구나”라고 생각했었다.
-소대원들은 어떻게 설득하셨나요?
그들에게 “자유민주주의…”라는 등의 말을 하는 건 역효과라는 생각에, 북한에서 1년 반 내가 겪었던 공산주의체제에 대해 설명을 했다. 우선 소대원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 그들이 존경해마지않았던 김일성과의 악수했던 얘기부터 꺼냈다.
“너희들 이 손 봐라. 이 손이 김일성 장군과 악수한 손 이야. 그러니까 너희들도 김일성 장군과 악수하고 싶으면 내 손과 악수를 하라고. 그 뿐 아니야, 김일성 장군은 내 어깨에도 손을 올리고 평양에 가서 같이 일하자고 했다니까.”
이러자 소대원들이 “아, 그렇습니까? 소대장님 대단하십니다”라며 흥분하고 난리가 났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럼 왜 이남에 오셨나?”라며 궁금해 했다. 나는 “천천히 얘기해주겠다”면서 공산주의의 모순점과 김일성의 제안을 뿌리친 이유에 대해 매일같이 15분씩 얘기를 해줬고, 그 결과 일주일도 안 돼 이들의 생각을 완전히 돌려놓을 수 있었다.
-소대원들에게 말씀해주셨던 공산주의의 모순점은 무엇이었습니까?
이북에서 국민학교 교사였던 나는 당시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공산주의가 좋다고 생각했었다. 공산주의는 잘살고 못사는 사람 없고 착취하는 사람도 없이 모두 다 평등하게 잘살고 있다는 선전에 나도 동감을 했었던 것이다. 당시 교사는 사회에서 꽤 지위가 높았다. 어린 학생들에게 공산주의를 세뇌시키는 1차적인 책임이 초등학교 선생님에 있기 때문이다.
진남포에 있을 때 우연한 기회에 일본말 통역장교를 하고 있는 소련군 대위를 알게 됐다. 그 대위가 우리 학교에 와서 일본어를 통역하는 과정에서 알게 됐고, 이후 식사와 술을 같이 하면서 친해졌는데, 어느 날 그가 나에게 “공산당에 들어가지 말라. 계급이 없고 모두 잘산다는 얘기는 모두 거짓말이다. 공산당에 들어가면 너도 망하고 집안과 나라가 다 망한다”는 본심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소련군의 높은 장교가 어떻게 그런 얘길 하느냐”고 되물었다. 내가 그의 말을 믿지 않자 그는 진남포에 있는 자신의 문화부대의 식사에 초대해 공산주의 실상의 단면을 공개했다.
당시 소련 공산당의 식사 등급은 1등급에서 6등급까지 있었는데, 6급 식사는 일반 사병들이 먹는 것으로 까만색 흑밀(?)종류로 된 빵 한 개와 버터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하사관급과 임관급이 먹는 식사인 5,4급 식사는 토스트와 야채절임, 생선, 스프가 제공됐고, 여기서 한 급만 더 올라가면 완전히 달라지는데, 고기와 계란, 포도주까지 나오는 것이었다. 그 대위는 이보다 더 상급 식사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잘 나온다고 설명해주면서, “제국주의인 일본 군대의 식사도 장교와 졸병들이 먹는 식사가 별반 다를 게 없는데,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소련 공산주의 군대에서는 등급과 계급을 엄격히 나누고 있다. 결국 공산당이 선전하는 것은 모두 거짓말이니까 함부로 속아 넘어가지 마시오”라고 충고했다. 나는 그 식사초대로 인해 공산주의의 모순을 절실히 느낀 것이다.
-이북에 계셨을 때 김일성을 만났다고 하셨는데, 그 일화를 말씀해 주십시오.
진남포 부근에 군 간부를 양성하는 사관학교인 ‘평양학원’이 설립됐을 때, 당시 ‘평양학원’의 원장이자 김일성의 오른팔이었던 김책은 인근 국민학교 선생들을 초청해 학교를 소개하는 오리엔테이션을 마련했었고, 당시 나는 오리엔테이션에서 공산주의에 대해 질문을 많이 하는 바람에 김책의 눈에 띄었다. 선친들이 독립운동을 하셔서 집에 정치학과 사상 서적을 몰래 훔쳐보곤 해 공산주의에 대해 어렴풋이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42년 2월 8일 ‘평양학원’ 정식 개교식 때 김일성과 소련군 측 간부들이 참석하는 자리에 나는 김책의 초청으로 김일성과 만나게 됐다. 당시 김책은 김일성에게 나를 소개하면서 “교원동무가 사회과학에 아주 통달하고 있다”고 칭찬했고, 이에 김일성이 “동무, 나와 같이 평양 갑시다. 나에겐 젊은 동무들이 필요하다”고 제의했다. 이 전에 내가 소련군의 식사를 통해 공산주의에 회의를 느끼지 않았다면 나는 김일성을 따라 갔을 것이다. 그랬다면 내 운명은 지금과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아무튼 이런 김일성의 제안에 나는 노모의 핑계를 대고 거절했고, 이에 김일성은 “그렇다면, 동무는 평양을 오가면서 김책동무를 도와주시오. 3~4개월 후에 대위자격을 주겠고, 이 다음에 동무의 어머니까지 평양에 같이 모시고 가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기도 했다.
-김일성의 인상은 어땠습니까?
김일성은 둥그런 얼굴에 미남은 아니었지만, 호남형으로 잘생겼다. 이빨에 덧니가 무척 많았던 게 인상적이었다. 김일성은 이후 자신의 덧니가 보기 싫다며 모두 뽑고 틀니를 해 넣었다고 한다.
-현재 한미동맹의 위기현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노무현 대통령은 한미동맹 중요하다고 하는데, 동맹은 말만 갖고 하는 게 아니라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며, 어려울적에 행동으로 도와주는 것이다. 지금 상태로는 우리가 전쟁 났을 때 미국이 과연 도와줄 것인가 의심이 간다. 한미동맹관계가 깨진다면, 95%의 북한 감시 장비가 다 철수될 것이다. 미군이 공군기 등을 이용해 한 번 북한감시를 하고 돌아오는데만 해도 100만 달러가 드는데, 이를 우리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그러잖아도 미국과 일본은 북한정보를 우리에게 주려하지 않는데, 이런 상황에서 미군이 철수한다면 우리는 끝장나는 것이다. 김정일은 한반도에 미군만 나가면 다 해결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핵으로 남한을 점령하려 들 것이다.
-친북좌익 집단의 행동을 어떻게 보십니까?
그들은 동족, 민족 운운하는데, 동족이 서로 이데올로기나 종교가 달라 싸움이 일어나면 더 잔인하다. 미국 남북전쟁을 보라. 얼마나 잔인한 전쟁을 했는가. 6·25때 우리군이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히면 보통 죽이지는 않았지만, 인민군은 영하 10도 내려가는 추위에 옷을 다 벗겨 얼려죽이거나 코를 꿰어 끌고 가기도 했다. 동족 운운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만약 김정일이 서울에 정복한다면, 친북반미 집단들은 김정일에 의해 가장 먼저 숙청될 것이다. 광적으로 날뛰는 공산분자들의 정체를 똑바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6·25를 잊어가고 있는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충고 한 말씀 하신다면….
요새 젊은이들은 6·25의 진실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 터무니없이 왜곡되고 날조된 역사만을 듣고 배운 채 학교를 마친 이들이 정계에 진출하거나 사회에 나와 활동하고 있는데 정말 큰 문제다. 지금 일부 젊은 사람들이 말하는 6·25는 남쪽에서 먼저 전쟁을 일으켰고 이에 김일성이 반격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주장이다. 세계 전쟁역사를 통해 봤을 때 승리에 대한 자신감이 있는 측이 항상 먼저 공격을 가하기 마련이다. 6·25도 마찬가지다. 김일성은 아주 자신만만했기 때문에 쳐들어왔고, 우리는 단 사흘 만에 수도를 뺏기고 전투부대가 모두 궤멸되는 등의 참패를 처음부터 당했다. 이런 사실이 명백함에도 우리가 먼저 공격했다는 주장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대학을 나온 우리 젊은이들이 이런 상식적인 해석조차 제대로 못하고 왜곡된 해석을 믿는 것은 비극이다. 본질이 날조된 역사를 믿는 젊은이들에게는 장래가 없다. 역사에서 얻어지는 참된 교훈을 잘 살려야 우리 미래는 밝고 희망찬 것이 될 것이다. (konas)
2005-06-13 오후 5:01:11 입력 |
첫댓글 채명신 건투를빔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