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척이란 '어머니 쪽의 친척' 이라는 의미로 전근대에 대부분의 왕조에서는 골치아픈 문제였습니다. 왕실과 왕실끼리 혼인한 유럽은 황후가 자국의 이익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일도 많았고 왕실과 왕실이다 보니 외척은 외국인 경우가 많았으며 그런 일이 거의 없던 동양권은 대신 자국의 귀족이 외척이 되는 일이 많아았습니다.
유명한 예시를 들어보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조선말 헌종~철종 시기의 안동 김씨가 이에 해당되며 일본에서는 아얘 외척이 9세기에서 11세기까지 200년간 일본 황실을 제치고 최고 권력가가 되기도 했습니다. 중국 역시도 외척 출신 권력자는 많아서 아얘 후한 말에 이르면 외척은 황제, 환관, 사대부와 함께 권력의 한 축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특히 황제가 어릴 시에 외척은 활개칠 가능성이 더 높았는데 왕이 어리면 보통 왕의 어머니가 섭정/수렴청정했고 그런 왕의 어머니(태후/대비)가 정치를 하기 위해 협력 파트너로 고르는 사람에 대부분 자기 집안 사람들이 들어가기 때문이며 또 외척이란 일개 권력자로서는 왕실과의 연이 유일한 정당성이기에 아무 관련도 없는 다른 신하들보다는 믿음직했습니다.
그러나 외척은 너무 강해지면 외척이라는 지위와는 별개의 힘을 가질 수 있었고 외척은 대게 능력검증 없이 권력을 쥐므로 외척이 명신인 경우는 그리 많지 않으며 힘을 너무 가지다가는 끝내 찬탈(역성혁명)을 할 우려가 매우 컸으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근친혼 같은 방안책이 나오기도 했습니다.(신라의 경우 외척이 찬탈을 해도 근친혼으로 인해 그 사람도 경주 김씨라 찬탈은 맞지만 역성혁명에는 적용되지 않음)
그래서 외척이란 너무 강해지면 해롭기에 외척의 발호를 어떻게 막을지에 대한 많은 노력이 있었습니다. 가령 후한의 경우 징크스 수준으로 어린 나이에 즉위하는 황제가 많아 황제가 어릴때는 어쩔 수 없이 외척이 실권자가 되지만 그렇게 집권한 외척이 너무 나대고 황제가 성장하면 환관에게 힘을 실어주어 함께 외척을 숙청하였고 위나라와 조선은 아얘 외척을 권력에서 배제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더 나아가 아얘 외척이 권력을 갖는 근간을 제거하고자 한 시도가 있었는데 그 나라와 그 나라가 시행한 제도는 바로 북위와 자귀모사 제도입니다. 자귀모사란 한무제는 늘그막에 얻은 어린 아들인 소제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는데, 그의 어머니인 구익부인 조씨가 자신의 사후에 권력을 쥐게될 것을 염려하여 그녀를 강제로 자결하게 한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북위의 첫번째 황제인 도무제(재위: 386~409)가 처음 행한 일입니다.(다만 북위로서는 첫번째지 그전에도 북위 황실이 된 탁발씨는 그러한 행위를 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도무제는 자신이 죽은 후 외척이 날뛸 것을 염려하여 황후 유씨를 자살하게 했고 이로 인해 태자이자 장남이며 유씨의 아들인 탁발사와의 사이가 벌어였는데 그러다가 도무제가 암살당하자 탁발사가 황제가 되는데(명원제, 재위: 409~423) 아이러니하게도 도무제를 죽인 것이 도무제의 후궁 하란씨와 그의 차남이자 하란씨의 아들인 탁발소라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명원제는 태자일때는 자귀모사로 아버지에게 반발했으면서 자기가 황제가 된 후에는 아버지와 같은 선택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굳어진 자귀모사 제도는 7대 황제인 효문제(재위: 471~499)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북위의 황제들은 대게 어린 나이에 즉위-젊은 나이에 사망이라는 길을 밟았기에 어린 나이에 즉위한 황제의 뒤를 봐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이 때 등장하는게 섭정을 맡게 된 황후/후궁의 일족이었습니다. 자귀모사는 태자의 생모를 죽이는 것이지 모든 선황제의 여인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므로 가능한건데 이렇게 되다보니 사실상의 외척이 되어버렸습니다.
실제로 북위 역사상에는 고조라는 외척 출신 권력자가 있었는데 고조는 고구려 출신으로 어릴적에 북위로 건너간 인물로 자기 동생이 당시 황제인 효문제의 후궁이 되자 처가 일족이 되었고 효무제 사후 8대 황제인 선무제(재위 499~515)를 끼고 모든 실권자들을 제치고 실세가 되어 선무제 재위기간동안 북위의 실권자로 군림합니다.
이러한 자귀모사 제도도 선무제 시기에 사라지게 되는데 그는 자기 다음에 황제가 되는 9대 황제 효명제(재위 515~528)를 낳은 호씨를 살려주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선무제 사후 북위가 막장이 된 것도 있고 해서 두번 다시 북위에서 자귀모사가 행해지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북위 역사상 처음으로 목숨을 건진 호씨(호태후)는 북위 멸망을 부른 인물이기도 합니다. 물론 북위의 멸망에는 효문제때 시행한 한화정책의 부작용이 더 컸지만 인물로 치면 호태후가 심했습니다. 호태후는 본디 선무제의 후궁으로 효명제를 낳았는데 북위에서 대대로 자행된 자귀모사로 인해 주변인들이 죽을 수 있으니 낳지 말라는 권고에도 나라를 위해선 제 한몸 아낄 수는 없다며 효명제를 낳았고 다행히 선무제가 자귀모사를 행하지 않아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호태후는 선무제 사후 황제의 생모로서 최초로 태후가 되었는데 문제는 태후가 되고나서였습니다. 권력을 쥐고는 사람이 이상해지기 시작했고 아들이 자라면서 아들과 권력다툼을 벌였는데 이러한 상황이 이어지면서 북위의 한화정책으로 인한 부작용을 극복할 기회를 놓치게 되었고 끝내 육진의 난이라는 북위 멸망의 서곡이 시작됩니다.
여담으로 호태후는 이후에도 막장을 벗어나지 못해서 육진의 난 이후 이주영이라는 인물이 떠오르자 효명제는 이주영을 불러 어머니를 제거하려고 시도했지만 호태후가 먼저 선수를 쳐 효명제를 독살시킨 뒤 손녀를 손자라 속이고 황제에 앉혔다가 들통날 것이 걱정되어 남편의 조카손자를 황제로 옹립하게 되었지만 자기를 불러준 황제가 독살당했다는 사실에 분노한 이주영이 군대를 끌고 오자 맞서 싸웠으나 참패, 결국 이주영에게 사로잡히고 목숨을 구걸했지만 어린 황제와 함께 황하에 던져져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