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관승의 영감의 길]
55세에 유배 당한 추사…
절대고독 속
‘세한도’가 탄생했다
제주 별도봉에서 돌아본
김정희 세한도 180주년
----제주도 별도봉 산책코스. 왼쪽은 제주항이고
그 옆으로 화북포구----
< 손관승 제공 >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세한도(歲寒圖)’를 보러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가 뜻밖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작품 탄생 180주년을 맞아 오랜만에
공개되었다는 사실보다 내가 주목한 건
59세라는 작품 당시 추사의 나이였다.
마침 퇴직 예정자를 위한 제주도
워크숍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으니
둘 사이의 동질감을 발견한 것이다.
직장인들은 대개 ‘세 가지 파도’를
동시에 맞는다.
정년퇴직, 몸과 정신이 지쳐있는
번아웃, 환갑의 삼각파도다.
퇴직이 아니더라도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추사의 제주도
유배길은 통찰력을 주기에 충분하다.
명문 가문 출신에다 총명함으로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던 추사에게
일생일대의 고난이 닥친 것은 그의
나이 55세.
청나라로 파견할 동지부사에
임명되어 30년 만에 북경을 다시
방문한다는 꿈에 부풀어 있을 때였다.
젊은 시절 북경에서 중국 지식인들에게
“경술과 문장이 해동(조선)에서 제일”
이라는 극찬을 들었던 추사였다.
그런데 정치권에 일진광풍이
몰아치더니 느닷없는 유배형이
내려졌다.
해외 출장 준비하고 있는데 유배를
떠나라는 황당한 명령,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스티브 잡스의 표현을 빌리면
‘벽돌로 인생의 뒤통수를 얻어맞은’
격이다.
----제주도는 원악도(遠惡島)라고 불릴 정도로 먼
유배지였고 대정현은 특히 생활 여건이 열악했다.
일명 '강도순의 집'으로 알려진 추사의 대정 유배거처----
< 손관승 제공 >
그렇게 추사가 제주에 도착한 것은
1840년 9월 27일 저녁.
해남에서 함께 배를 탄 사람들 대부분이
멀미가 나서 고생했지만, 추사는 밥도
먹고 뱃머리에서 선장이나 뱃사공과
이야기도 나누었다고 기록돼 있다.
추사의 도착 장소는 어디일까?
일명 별도포구로 불리는 화북포구.
제주목 관아에서 가장 가까워
조천포구와 함께 제주의 관문 역할을
하던 곳이며 1653년 태풍으로
제주도에 표착한 하멜 일행이
서울로 압송된 출발지이기도 하다.
지금은 주변이 개발된 데다 현대식
제주항에 밀려 항구로서 기능은
축소되었기에 옛 자취를 느껴보려면
별도봉 산책길을 걷는 편이 낫다.
뱃사람의 안전을 기원하는 해신당(海神堂),
연기를 통한 비상 신호 수단인
연대(煙臺)가 남아 있고, 끝없이 이륙하는
항공기와 푸른 바다를 건너는 선박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근처에 국립 제주박물관과 우당도서관과
산지 등대까지 있으니 환상적인
산책 코스다.
이 산책길에서 가장 높은 별도봉은
제주도가 발표한 오름 368곳 가운데
가장 특별한 사연을 간직하였다.
인근 사라봉 옆에 별도로 솟은 오름으로
생각했는데 한자로는 별도봉(別刀峰)이라
한다.
당시에는 중앙에서 내려온 이들에게
음식과 빨래 등을 거들어 주는
배수첩(配修妾·일종의 현지처)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임기 혹은 유배가 끝났을 때 제주도에서
함께 살던 여인과 가족을 떼어놓고
갔기에 남은 가족은 오름 높은 곳까지
올라 육지로 떠나는 배를 피눈물로
배웅했다고 한다.
즉 칼로 끊는 것처럼 생이별한 장소라는
뜻이다.
추사는 애처가답게 현지에서 여자를
구하지 않고 지냈으나 유배 3년 차에는
부인마저 사망하는 불운이 겹친다.
----제주도 별도봉 오름. 정상 우측 아래는 제주항----
< 손관승 제공 >
제주도는 원악도(遠惡島)라고 불릴
정도로 먼 유배지였고 그중 대정현은
특히 생활 여건이 열악했다.
그가 가장 오래 거주했던 일명
‘강도순의 집’의 거처에 귤중옥(橘中屋)
이라 당호를 지었다.
다른 꽃은 어디에나 있지만 귤만은 오직
이곳에 있으며 겉과 속이 다 깨끗하고도
향기로운 지조를 기리는 뜻이었다.
입에 맞지 않는 음식과 잦은 질병,
무엇보다 세상과 절연되어 있다는
외로움과 싸워야 했다.
“하루가 한 해같이 긴데, 온종일 듣는 것은
까마귀와 참새 소리뿐”
이라고 적고 있다.
요즘도 제주도에는 까마귀가 흔하다.
남들은 달려가는데, 혼자 멈춰 있다는
느낌처럼 힘든 것도 드물다.
40대 중반에 공직에서 추방된
마키아벨리도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가난도
걱정도 병도 아니다.
그것은 생에 대한 권태”
라고 적고 있지 않았던가.
완장을 채워주었을 때 인간의 감춰진
얼굴이 나타난다면, 고난을 겪을 때
그의 진짜 실력을 알게 된다.
유배자들은 중앙의 권부에서 불러줄
날만 기다리며 울분의 세월을 술이나
마시면서 현지인들과 담쌓고 지내는
경우가 많았던 반면,
추사는 독서에 매진하고 현지인을
제자로 삼으며 자기 수양의 기회로
삼았다.
세상은 그를 외면했어도 드물게도 평생
그를 존경한 이 가운데 한 명이 제자
이상적. 역관의 신분으로 12번이나 중국을
다녀온 전문가였다.
출장 때마다 청나라의 해외 문물 최신
소개서 ‘해외도지(海外圖志)’ 등 많은
책을 구해 추사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었다.
제주도 유배 생활 5년째인 1844년,
제자의 고마움에 대한 답례로 특별한
선물을 준비하게 되니 바로
‘세한도’
였다.
----추사 김정희가 59세 때 만든 작품 '세한도'---
< 국립중앙박물관 >
40대 마키아벨리에게 해직이 없었다면
‘군주론’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50대
추사에게 유배가 없었다면 ‘세한도’는
탄생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카잔차키스가 대표작
‘그리스인 조르바’
를 쓴 것 또한 환갑 무렵이다.
흔히 자유인의 상징으로 해석하지만,
이 작품은 포도주의 비유를 통해
환갑과 부활 정신을 말하고 있다.
포도를 짓이겨 발효와 숙성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포도주가 되지 않는
것처럼, 세상으로부터 짓이김당하는
과정을 통해 불후의 명작이 태어난다.
글은 뾰족할수록, 인격은 둥글수록
좋다.
고난은 개성 강한 글을 쓰게 만들지만,
인품은 원만하게 변화시킨다.
별도봉에서 오름의 정신을 되새겨 본다.
올라갈 때는 강건해지고 내려갈 때는
현명해져야 한다.
‘올강내현’,
인생의 법칙도 그러하지 않을까?
손관승 글로생활자
[출처 : 조선일보]
[100자평]
JMS
한 사람의 인생에서 이상적 같은 이가 하나만
곁에 있어도 대박일 것이다
베토벤과 모차르트
김정희 선생은 인생 말년에 지금 강남 삼성동에
위치한 봉은사에 있었습니다.
절에 있으면서도 본가인 과천에서 늘 육류를
가져다가 먹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대우를 받으면서 살아서 고기
반찬이 없으면 수저를 들지 않았다는 거에요.
판전이라는 간판이 김정희 선생의 작품임은
다들 아는 사실입니다.
제주도 유배지에 가보면 집이 제법 번듯한데
당시에 있던 집 그대로는 아니고 개량한
것입니다.
김정희 선생이 거처한 당시에는 초라했을 것인데
유배 당시에도 워낙 정치적으로 거물이고 좋은
집안 출신이라 제주목사가 신경을 써줘서 생각만큼
어렵게 살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거물들이 유배를 가면 지방관들이 함부로
하기 힘들었어요.
나중에 이조판서가 될지 좌의정이 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아무튼 김정희 선생은 일생 전체를 보면 상당히
대우 받고 부유하게 사신 냥반입니다.
재산도 넉넉했고...
베토벤과 모차르트
저도 세한도를 좋아해서 실물 크기의 그림을
액자에 넣어 가지고 있고 제주도 유배지에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중앙국립박물관에서 실물을 보기도 했구요.
조선시대 대표적인 문인화로 손꼽히는 작품인데...
글쎄요...
솔직히 그림 자체로는 그렇게 평가할 작품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글씨야 거론할 것 없이 거장인데 그림은 글쎄요...
난은 기가 막히게 잘 쳤지만 그 외에는...
세한도는 그림보다는 옆에 쓰여진 문(글) 때문에
살아난 작품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청나라에서 대단한 평가를 받았다는 것도
제자 이상적이 그림을 가지고 다니면서 평가를
부탁한 것인데...
개인적으로 와서 평을 부탁하는데 찬을 나쁘게
써줄 수야 없지요.
적어도 세한도 그림 자체는 과대평가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정희는 금수저 출신입니다.
워낙 어린 시절부터 부유하게 자랐고 벼슬도
2품까지 올랐어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좀 오만한 기질이 농후했다고
합니다.
불교이론에도 대단히 깊이 있고 정통한
양반이었습니다.
ksw1010
나를 괴롭히는 고난을 넘어섰다면 그로인해
내가 강해진다-
철학자 프레드리히 니체
bearking
올강내현, 마음에 듭니다. 올라갈 때는 오로지
올라가는 생각만 하게되는데, 내려올 때는
여러가지 생각들이 많이 드니 특히 주의해야
합니다.
서울 性醫學 설현욱
....歲寒圖..안동 김씨..
1840년 56에 고문을 받고 제주도 유배..8년..
그리고는 67세 또 유배 1년 ..71세 까지../
구치소 2번 가는게 힘들다고 하는데 추사는
3년 8년 1년 3번이나 유배가 되었군..
도합 12년../
그리고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希臘인 조르바..
니체의 그리스적 해석../
예전에 이런 글을 썼었군..
니코스 카잔타키스의 靈魂의 自敍傳에
'聖子의 病'이라고 나오는데.. --
사막에서 끊임없이 수도만 하던 수도승들이 여자가
보고싶어서 뛰쳐나오는 순간 온 몸이 문둥병처럼
문드러지는 것--
이걸 psychosomatic disease의 대표적 사례로
예전에 보았었고..
뭐 난 요즘은 질경련증 vaginismus를 대표적
이 psychosomatic disease로 보고 있지만..
음..
른희
세한도가 왜 국보가 될 정도의 작품인지
일반인은 잘 모른다.
왜 이 그림이 걸작인지 알기 쉽게 설명해 주기 바란다.
사연 같은 거 그런 거 말고.
솔개79
김정희라는 사람을 지금 치환해서 비유를 하면.
가문은 명문가이고 재계 톱 순위 재벌이면서
그런 배경도 한몫해서 국무총리나 장관같은 요직을
전전한 사람입니다.
이런 인물을 무슨 대단한 사라처럼 떠받드는 시각으로
표현되어 온 이유가 아직도 노론의 후예들이
장악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문고니
이 글을 쓰신 분!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와 역관
이언적의 관계를 언급하며 세한도를 그린 추사의
이언적에 대한 끈끈한 정 즉 "長毋相忘"
'오래도록 서로 잊지말자"에 관한 내용이 빠질 수야
없지 않는가요?
내용이 좀 아쉽네요.
순수
고금에도 훈구파와 사림,사림간에 사화.
자유민주우파와 진보종북세력. # 옛날이나 지금도
나보다 잘난 O은 친다 # 부패한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
pop
제주도도 호남 못지않은 유배지였구만.
양사
'짓이김 당하는'. 조선 왕조 시대의 귀양터는 정신
수양하러 가는 곳.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재앙없는사회
아무튼 재밌는 글이네.
카잔차키스까지는 너무 나간 듯
수리
추사의 글씨는 기괴하고 거칠고 난삽하여 읽기
어렵고 눈이 피로해지기 십상이다.
이런 글씨로 된 책 한 권을 읽자면 누구나
짜증이 나고 독서가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 조선에 명필이라 하니, 그 까닭을
모르겠다.
이런 글씨체로 교과서를 만든다면 학생들이 눈 아파
책을 읽지 못하겠다고 내동댕이 치지 않을까?
둘레바위
추사의 세한도는 이처럼 인생의 쓰디쓴 담즙을
맛보면서 탄생 했네요..
서동방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작품의 고통점은 유배지 칼날위에서 걸작을
만들었다.
인간의 극한대 고독에서 피워낸 작품들이다
정두산
손관승 글로생활자의 글이 멋지네요^^
세상모르고 살자
김정희 이런 인간은 당시로서는 관종이라,
북한산 경계비 자기가 신라것임을 알아내고,
비석아래를 깍아 자기 이름을 새겼다.
좀 명승지면 인간들 돌을 파 자기 이름 넣는건
배운것들이건 못배운것들이건...
조국이 당명에 지이름 넣는거 봐라. 엽전들.
KEVIN91
다산 정약용의 강진 유배지 다산 초당,
추사 김정희의 제주 대정 유배지와 고산 윤선도의
보길도까지 다 가보았습니다.
언급한 순서 다산> 추사> 고산 순으로 거주
공간이 좋았지요.
다산 초당은 산속 오두막이었고 추사는 아담한
시골 부자집 수준이라면 고산의 보길도
부용동은 '윤선도공화국' 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만큼 잘 꾸며져 있지요.
세연정, 낙서재, 곡수당 등 특히 동천석실은 산
중턱이라 맨몸으로 올라도 숨이찬 데...
먹거리 지게에 지고 거길 오른 머슴들 고생
많이 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