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223) 열두 편의 시와 일곱 가지 이야기 – 넷째, 선배에게 배운다/ 시인 공광규
열두 편의 시와 일곱 가지 이야기
네이버블로그 http://blog.naver.com/yyllssll/ 시학 : 문심조룡
넷째, 선배에게 배운다
위 시에 나오는 대나무의 속성이 식물학적 오류임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대나무의 굵기는 죽순에서 결정된다고 합니다.
대나무는 4년 동안 죽순 키의 상태로 멈춰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키가 정지하여 있는 동안 대나무는 뿌리를 넓게 확보하면서 굵기를 결정한다고 합니다.
대나무의 4년은, 우리의 대학 4년과 마찬가지로 고전과 선배를 공부하는 시기라고 보면 됩니다.
규범이 되는 선배의 시를 공부하지 않으면 시 쓰기에 금방 바닥을 드러낼 것입니다.
새로움은 옛것에서 옵니다.
모든 글쓰기는 옛것을 모방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시 역시 고전과 선배를 흉내 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앞에 언급한 『문심조룡』에서 “고대의 모범을 참조하여 창작방법을 정립한다”는 말을 되새겨보시기 바랍니다.
글쓰기 초기에는 모방을 하고, 이력이 붙으면 자기만의 색깔을 갖추어 가며,
점점 자기만의 독창적인 생각과 표현을 하게 됩니다.
그 이후라도 시의 질적 성장과 비약을 위해서는 고전과 선배의 글을 계속 공부해야 합니다.
고전을 열심히 공부하지 않고, 동시대 시인들의 좋은 시를 잃지 않고 시를 잘 쓰겠다는 것은 오산입니다.
실력이 느는 것 같지 않더라도 매일 잠깐이라도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고전과 선배를 공부해야 합니다.
이러한 흐름을 유지하는 것이 몰입이고, 그래야 시 쓰기에 성공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어떤 이유로든 공부를 쉬면 후퇴를 합니다.
하여튼 시를 오래 잘 쓰려면 고전과 선배들의 시를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창작자는 자신이 시의 방향을 잘 잡아 가고 있는 지,
고전과 선배의 시를 통해서 자꾸 확인해야 합니다.
공자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고 하여,
자신의 글이 고전과 선배가 이루어 놓은 것을 진술한 것이지 창작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공자는 또 ‘온고지신’을 강조하였습니다.
옛 것을 따듯하게 품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것입니다.
남녀가 따뜻하게 품어야 아이를 ‘창작’할 수 있는 것처럼 창작 행위는 창조가 아니라 재활용이라는 것입니다.
서거정은 모든 작품은 표현이나 구상에서 그 나름의 근원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시라도 구절마다 전거나 원류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추사 김정희는 “가슴속에 만 권의 책이 들어 있어야 그것이 흘러넘쳐서 그림과 글씨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서권기 문자향(書卷氣 文字香)인 것입니다.
책을 많이 읽고 교양을 쌓으면 몸에서 책의 기운이 풍기고 문자의 향기가 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작품은 독서 경향과 연결됩니다.
윤동주는 백석 시집 『사슴』을 베껴 쓰면서 공부했고,
신경림의 시에도 백석을 열심히 공부한 흔적이 나타납니다.
저는 정지용을 열심히 필사하며 공부하였습니다.
(최인호(1945~ )는 2011년 7월 9일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이번에 나는 확실하게 깨달았다.
지금까지 나는 작품은 내가 쓰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다. 작가는 받아쓰기 하는 존재다.
그리하여 항상 깨어 받아쓰기할 준비를 하고 기다려야 한다. ……
그러므로 나는 무엇을 쓸 것인가 구상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그분이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려서부터 언제 어디서든 책을 읽었다는 체 게바라는 살벌한 혁명 전장에서
선배의 작품을 열심히 읽고 자신도 글을 열심히 썼습니다.
그는 아르헨티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의대를 졸업하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의사의 길을 포기한 뒤 쿠바혁명에 참여하였습니다.
전장에서 전사한 그의 유품에는 지도와 두 권의 일기, 그리고 공책 한 권이 들어있었는데,
그가 좋아했던 네루다 등 4명의 69편의 시가 빼곡이 적혀있었다고 합니다.
주로 사랑과 낭만 시였다고 합니다(『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 실천문학사, 2009).
특별히 이 사람을 소개하는 것은 생사를 넘나드는 혁명전장에서조차
고전과 선배의 시를 읽고 베끼면서 죽는 순간까지 시를 썼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배낭 속에는 언제나 괴테, 보들레르, 도스토예프스키, 네루다, 마르크스, 포르이트,
레닌의 책들이 떠나질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걸 보면 생계를 위한 직장과 가사, 육아를 이유로 시 읽기와 쓰기를 게을리 하는 것은 모두 핑계일 것입니다.
겨울 아침에 소리 없이 쌓인 마당의 흰 눈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흰 눈과 지식은 모르는 사랑에 쌓인다고 합니다.
고전과 선배의 시에 관심을 갖고 읽어가다 보면 온 몸으로 시가 가득 차 올 것입니다.
아내를 들어 올리는 데
마른 풀단처럼 가볍다
수컷인 내가
여기저기 사냥터로 끌고 다녔고
새끼 두 마리가 몸을 찢고 나와
꿰맨 적이 있다
먹이를 구하다가 지치고 병든
컹컹 우는 암사자를 업고
병원으로 뛰는데
누가 속을 파먹었는지
헌 가죽부대처럼 가볍다.
―「아내」
위 시는 독일의 시인 브레히트를 공부하여 얻은 것입니다.
여성이 육체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는 출산과 육아기입니다.
시 「아내」는 제 아내가 육아기에 실제로 아파서 병원으로 옮기느라 들었던 체험을 시로 형상한 것입니다.
부부를 밀림의 사자로, 밥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경쟁 현실을 밀림으로 비유한 시입니다.
그러나 브레히트의 「나의 어머니」라는 시를 읽지 않았으면 이 시를 생각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음은 브레히트가 1920년에 쓴 시입니다.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땅 속에 묻었다./
꽃이 자라고 나비가 그 위로 날아갔다./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짧은 이 시의 ‘가볍다’나 ‘고통’이라는 어휘가 병든 아내의 가볍고 고통스러워하는 상황을 만나면서
시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가죽부대’라는 말 역시 『우리말 팔만대장경』을 뒤지다가 만난 어휘입니다.
아마 황지우의 어느 시에도 몸을 가죽부대에 비유한 대목이 나왔던 것을 기억하는데,
그도 불경을 열심히 읽은 흔적이 여기저기 나타납니다.
앞의 시 「별국」 역시 김삿갓의 시를 읽어서 쓴 것입니다.
여행 중 어느 집에서 밥을 얻어먹다가 가난한 주인이 밥풀이 둥둥 뜨는 묽은 죽을 내오며 미안해하자,
김삿갓은 “나는 밥그릇에 비치는 청산을 좋아한다오” 한데서 얻은 착상입니다.
그러나 에디슨의 말대로 독창성은 출처를 감추는 기술입니다.
고전과 선배의 시를 읽되 거기에서 매이지 말고 벗어야 합니다.
그동안 많은 시인들이 고전을 읽고 시를 써서 명작을 남겼습니다.
아래 시 「미루나무」는 바로 고전인 『논어』와 『장자』를 읽지 않았다면 이 시를 쓰지 못했을 겁니다.
시집에 싣지는 않았지만, 「식물서사」라는 시를 쓰기도 했는데,
이는 『논어』를 읽다가 서정적 충동이 일어나서 쓴 것입니다.
「자한(子罕)」편 22절에
“식물이 싹은 도중에 잎이 말라서 꽃이 피지 않는 것도 있으며,
꽃은 피었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 부분을 읽어가다가 공자가 틀림없이 인생을 비유적으로 말한
식물이야기를 시로 써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앞 냇둑에 살았던 미루나무는
착해 빠진 나처럼 재질이 너무 물러
재목으로도 땔감으로도 쓸모없는 나무라고
아무한테나 핀잔을 받았지
가난한 부모를 둔 것이 서러워
엉엉 울던 사립문 밖 나처럼
들판 가운데 혼자 서서 차가운 북풍에 울거나
한 여름 반짝이는 잎을 하염없이 뒤집던 나무
논매던 어른들이 지게와 농구를 기대어놓고
낮잠 한 숨 시원하게 자면서도
마음만 좋은 나를 닮아 아무것에도 못 쓴다며
무시당하고 무시당했던 나무
그래서 아무도 탐내지 않아 톱날이 비켜갔던
아주아주 오래 살다가
폭풍우 몰아치던 한여름
바람과 맞서다 장쾌하게 몸을 꺾은 나무.
―「미루나무」
< ‘유쾌한 시학강의(강은교·이승하 외 지음, 아인북스, 2015)’에서 옮겨 적음. (2021. 4. 8.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223) 열두 편의 시와 일곱 가지 이야기 – 넷째, 선배에게 배운다/ 시인 공광규|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