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성왕은 언젠간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할만한 드라마틱한 일생을
살다간 왕이었습니다.
나라의 이름을 백제에서 남부여라고 고친 성왕은
자신에게 부여된 왕조의 숙원과도 같은 사명에 대해서 잘 인식하고 있었
고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그것을 통해 다시 왕조가 부흥하는것)
불꽃같은 치열한 삶을 살았지만
신라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 부대의 매복에 걸려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죠..
우리나라 삼국시대 때 적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왕은 두명인데 이상하게
도
두명 모두 백제의 왕이었습니다..
성왕은 목을 베이기전에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는 탄식했다고 합
니다.
"과인은 매양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참고 살아왔지만, 구차하게 살고 싶
지는 않다."
(일본서기 권19, 흠명천황 15년 12월)
매양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참고 살아왔다....
성왕이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내뱉은 독백과도 같은 이 말은
성왕 스스로 자신의 일생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구절이 아닌가 싶습니
다.
아무튼 성왕의 죽음을 계기로.. 아니...한강유역을 차지하고 있다는 죄
(?)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무서운 협공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신라는 아직 백제와도 힘에겨운 대결을 벌이는 입장인데,
북방의 강호 고구려마저 전력을 기울여 신라공격에 가세한다면
신라의 앞날은 풍전등화와 같았을 겁니다.
하지만 불행중 다행이라고...
서기 589년 신라는 진평왕 11년,
고구려는 온달의 부인으로 유명한 평강공주의 아버지 평원왕 31년,
백제는 비운의 왕 성왕의 아들 위덕왕 36년
중원에서 5호 16국의 극심한 혼란기가 끝나고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중원을 석권한 수나라는 고구려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음은 당연했구
요..
우리민족의 방파제와도 같은 역할을 했던 고구려도
건국이후 지금까지 중국과 크고작은 전투를 벌이면서 성장해왔지만
거대한 중원의 통일제국과는 처음 맞서게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한때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을 함락하며
고구려를 멸망의 위기까지 몰고갔던 관구검의 군대도
말이 위나라의 군대이지 사실은 유주군과 현도군에서 차출한 부대에 불과
했습니다.
하지만 만약 수나라가 공격해 온다면 중국전역에서 차출한 대군을 거느리
고 올것이 분명할테고
당대 최첨단을 자랑하던 중국의 공병기술과 막대한 물자도 당연히 투입
될 예정이었습니다.
따라서 고구려 역시 이에 상응하기 위해서 최소한 10만에서 20만 정도의
병력을 요하방어선에 투입해야만 했죠..
고구려가 남쪽의 신라와 백제를 공략할 때 늘 2~3만의 병력만을 동원했다
는 사실은
(광개토대왕은 5만의 군대를 동원하기도 했지만)
수나라와의 전쟁이 고구려에게 어떤 부담으로 작용했을지 가늠케 해줄수
있을 겁니다.
한마디로 고구려는 더 이상 신라와의 전쟁에 몰입할수 없게된 것이죠
그리고 신라는 하늘의 도움을 받게 된 것입니다.
수나라를 건국한 양견(수 문제, 수 양제의 아버지)은 원래 북주(北周)의
재상이었습니다.
북주는 지금의 내몽골의 음산산맥 지역의 여러 군벌이 연합해 세운 국가
였는데
이 군벌들 대부분이 한족이 아닌 선비족 출신들이라고 합니다.
선비족은 그 안에서도 여러갈래가 나뉘었는데 그 중에
탁발부,우문부,모용부가 유명했다고 합니다.
선비족은 몽골계이지만 우문부 만은 인도,유럽계 였다는 얘기가 있는데
북주의 황제는 바로 이 우문부 출신이었습니다.
양견의 처는 북주의 명문가인 독고신의 둘째딸이었는데
독고신의 셋째 딸은 당나라를 건국한 이연(당 고조)의 어머니가 됩니다.
북주 황실과 사돈이 되어서 황제의 외척이 된 양견은 점차 세력을 확대
해 나갔는데
양견의 남다른 야심을 눈치챈 것인지, 양견의 세력확산으로
힘의 균형이 깨지는 것을 우려해서인지 우문씨 일가인 위지형과 사마소관,
왕겸등이
동시에 양견에 반대하여 군대를 일으킵니다.
양견은 초기엔 수세에 몰렸지만 극적으로 역전하여 승리하였고
이후 북주의 마지막 황제 정제(자신의 외손자)를 허수아비로 만들더니
선위라는 명분을 내세워 결국 자신이 황제가 되어 수 문제가 되었습니다.
황제가 된 이후에는 둘째아들 양광과 양소등을 파견하여 남조를 평정하고
는
마침내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합니다.
하지만 남조정벌로 명성을 얻은 둘째아들 광은
아버지 수 문제가 형을 태자로 삼은데 불만을 품고
심복이던 양소와 우중문,우문술등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 수 문제를 목졸라 죽이고 자신이 황제가 되었는데
이 사람이 바로 고구려를 침공한 수 양제입니다.
역시 권력이란 무서운 것인가 봅니다...부자지간에도 피바람을 일으키니
말이죠...
암튼 수 양제는 황제가 된 이후 북쪽의 가시같은 존재였던 돌궐을 토벌하
여 항복을 받아내
다시한번 군 지휘관으로써의 명성을 얻습니다.
당시 돌궐은 계민이란 추장이 이끌고 있었는데
고구려 영양왕은 수나라에 위협을 느껴 돌궐과 연합전선을 펼쳐
수나라를 견제할 생각이었나 봅니다.
영양왕 18년 (607년) 고구려는 계민에게 사신을 보냈는데
재수없게도 때마침 수 양제가 계민의 부족에 행차를 해서 들통이 났다고
합니다.
아마도 계민은 고구려와 연합하여 수나라를 견제할 것인가..
수나라의 권위를 인정하고 머리를 숙일 것인가에서
후자를 선택한 듯 합니다.
그가 고구려사신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수 양제앞에 데려갔다니 말이죠..
계민은 아마도 수나라와 고구려의 힘을 저울질 하다가
수나라의 우위에 배팅을 걸었나 봅니다.
우리가 흔히 고구려와 전쟁을 벌인 수나라의 군대는 병력수만 많지
실제 전투능력은 형편없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것은 절대로 틀린 말입니
다.
당시 수문제, 수 양제가 이끌던 수나라의 군대는 수 십년간 중국전역,
즉 내몽골의 음산산맥부터 양자강 남쪽까지 그리고 돌궐에 이르기까지
동북아시아 각지의 군대와 싸워 승리를 거둔 배테랑 전사들이였습니다.
당시 5호 16국 (5개의 종족이 16개의 국가를 세웠다는)시대를 살아가며
온갖 지형에서의 전투로 단련되고 검증받은 당대 최강의 군대였던 것이
죠.
게다가 고구려를 침공하면서 중국전역에서 새롭게 군사를 모집했습니다.
고구려 원정에서 공을 세우기만 하면
평생에 누리지 못할 부와 명예를 보장해 주었고
따라서 각지에서 힘과 무예가 뛰어난 자들이 청운의 꿈을 품고 속속 모여
들었습니다.
나중에 일이지만 당태종 역시 고구려를 침공할 때
큰 부와 벼슬을 보장하고 군대를 모집했는데
그중에 신라인 출신 설계두라는 사람도 끼어있었다고 합니다.
신라의 골품제도 때문에 고위층으로 진입이 원천적으로 막힌 설계두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과감히 고향을 버리고 당나라에 진출,
하위 무관이 되었고 고구려 원정에 자원하여 전투에 앞장서서 싸워 큰 공
을 세웠습니다.
비록 자신은 고구려와의 전투중에 사망했지만
당태종은 눈물을 흘리며 설계두의 시신에 자신의 겉옷을 벗어 덮어주었고
설계두를 장군으로 추증하고 자손들에게 벼슬과 재산을 하사했다고 합니
다.
이렇듯 뛰어난 군대와 꿈과 야망을 지니고 참전한 자들
여기에 유능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은 풍부한 전투경험을 갖춘 장군
들이
지휘하는 수나라의 군대는 가히 당대 세계최강이라고 평가할만한 군대였
습니다.
그런데 수나라와 수나라의 뒤를 잇는 당나라는 왜 그토록 고구려를 공략
하려고 했을까요...
흔히들 중국의 중화사상을 거론합니다..
중국은 주위의 국가들과의 관계를 천자와 신하의 관계로 설정하고는
중국에게 머리를 숙이지않고 복속하지 않으면 정벌을 감행했고
자존심이 강한 고구려는 중국에 머리를 숙이지 않아 서로 전쟁을 했다는
것이죠..
단지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수십년간에 걸쳐 국운을 걸고
전쟁을 한다?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보다 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중국의 역사를 보면 한족왕조와 이민족 왕조가 번갈아 가며 지배
했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한족이 쇠퇴하면 주변의 이민족이 치고 들어와서 중원을 점령하고 왕조
를 세우고 지배한 것이죠.
그 시작이 5호 16국이었습니다.
흉노족을 위시하여 갈족,강족,저족,선비족등 5부족이 16개국가를 세우고
는
중국을 번갈아 가며 지배했고, 따라서 당시의 중국은 전쟁이 끊이지않는,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를 통일한 국가가 수나라인데
그 16국을 세운 5부족은 대부분 고구려보다 훨씬 열악한 부족체제에서 출
발하여
중국을 지배한 종족으로 발전해 나간것입니다.
훗날 거란족의 요, 여진족의 금, 몽골족의 원, 만주족의 청 나라 등이
다 처음엔 초라한 환경에서 출발하였지만 발전을 거듭해서
결국 중원의 지배자가 됩니다.
청나라만 하더라도 나중에 중국을 통일하는 대 제국이 되고
조선을 침략하여 엄청난 피해를 주었지만
처음엔 조선 세조의 여진정벌 때 죽임을 당한 건주 여진추장 이만주의 후
손들이
가까스로 살아남아 다시 재기한 부족이었습니다.
따라서 수나라와 당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주변에
고구려와도 같은 강국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었죠..
고구려가 더욱 강성해져 언제 자신들을 공격해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왕조가 영원토록 지속되려면
자신들 주변에 고구려 같은 나라는 반드시 사라져야만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수나라와 당나라는 자신들의 생존차원에서 고구려침공을 감행한
것이지
단순히 자신들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고 홧김에(?) 아니면 기분 나빠
서(?)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중국 수나라와 고구려의 전쟁 이야기를 알려면 상당부분 중국측 기록에
의지해야만 합니다..
중국측 기록을 보면 항상 수나라의 피해는 최소화하고 고구려의 패배는
과장되게 기록한 흔적이 보입니다..
고구려의 역사서가 전해지는 것이 없어서 자세한 내막을 알수는 없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수나라 양제와 당나라 태종의 수십년에 걸친 공격에
도
고구려는 멸망하기는커녕 요동지역마저도 굳건히 지켜내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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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 상식
[사건]
중원의 통일제국 수나라와 동북아의 강자 고구려와의 전쟁이야기
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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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2.02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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