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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갈 1장 6~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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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 텔레스(Aristotle, BC 384~BC 322)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면 인간은 혼자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만약 인간이 혼자서만 살아가면 점점 외로움에 빠져서 의욕이 상실 되고 건강도 나빠지고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져서 극단적으로 수명이 짧아진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적당히 어울리고 교류하며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지만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미국 콜로라도 주에는 “에이디엑스 플로렌스(ADX Florence)” 라는 미 연방 관할 교도소가 있습니다. 이 교도소는 최고 등급 보안시설로 유명한데, 사형수를 제외한 무기징역형 수형자나 무기징역에 가까운 장기 복역자들만 수감 하는데, 490여개의 방이 모두 독방 이라고 합니다.
이 곳에는 교정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된 자들만 보내지기 때문에 재사회화 교육 같은 교화는 일체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미국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최대의 고통을 죄수에게 주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며, 독방에서 아무도 인간적인 접촉을 하지 않는 상황에 놓여 평생 고통스럽게 살다가 수명을 다하고 죽는 것 외에 어떤 선택지도 주지 않는 진정한 지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출처, 나무의키)
무인도나 우주의 미지의 행성에 홀로 남겨진 상황을 보여주는 영화들도 많이 있습니다. 일평생 혼자만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가 지옥 같은 삶입니다. 하나님이 남녀가 함께 살게 하시고,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게 하신 것은 복중의 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저와 여러분이 이 공간에서 주기적으로 만나고 교제 한다는 것인 복이자 기적 그 자체 입니다. 우리가 함께 있는 것이 기적의 현장임을 감사하시며 함께 예배 드리는 모든 분들을 더 사랑하시고 소중하게 여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 교회 한 곳에만 보내는 편지가 아니라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인근 교회들이 함께 보라는 ‘회람(回覽)용 서신’이었습니다. 돌려 보는 편지라면 혹시 칭찬하는 일이 있을까 싶은데 오늘 말씀은 책망의 말씀입니다. 왜 바울이 책망을 했는지 6절을 읽어 드립니다.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아멘.
다른 복음 이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바울이 책망하는 이유가 바로 이 것입니다.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와 성도들에게는 교회가 세워 진 후 시간이 지님에 따라 언젠가부터 헛 바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의 이런 저런 말들이 들려오자 솔깃하는 팔랑귀가 되어서 마음까지 싱숭생숭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자 인데도 다시 옛날 생각나서 할례도 하고 율법도 지켜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크게 흔들렸습니다. 예수님이 곧 오실 텐데 그렇게 열심을 낼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고 일 하려고 하지 않고 매사에 게으름을 피웠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섬기고 봉사하는 일은 이리저리 피해 다니면서 남이 잘하고 있는 일에는 딴지를 걸고 판단을 일삼았습니다. 도무지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죽순처럼 쑥쑥 자라났습니다. 바울은 이러다가 교회가 무너질 것 같은 위기감을 느끼고 아주 강하게 질책과 책망을 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속히 떠났다”고 책망합니다. “속히 떠났다”는 말은, 예수님 믿고 교회 다닌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금방 떠나버렸다는 시간적 의미로 보이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출애굽기 32장에는 시내산에 오른 모세를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 송아지 우상을 만든 사건이 나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시내산 위에서 모세에게 말씀 하시기를,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고 있다”(출 32:7,8)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우상을 섬긴 행위를 일컬어 “속히 떠났다”라고 표현 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이후 40일이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시간상으로 속히 떠난 것도 되지만, 마음이 완전히 돌아서서 배반하고, 거역하고, 배교하는 행위들을 속히 떠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갈라디아 교인들의 마음이 어떤 상황이었으며, 바울 사도가 왜 이렇게 책망을 하는지 충분히 납득이 갑니다. 하나가 되지 않고 마음이 여러 갈래가 되면 교회 공동체는 분열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값없는 은혜를 받 구원 받아서 교회 공동체 구성원이 되었다고 하면, 그 때부터 두렵고 떨라는 마음으로 내게 주신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이 시작 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다 끝난 것이 아니라 그 때 부터 거룩한 새 사람으로 살아가아 할 의무와 책임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 것처럼, 하나님은 구원 받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따로 구분하여 함께 지내도록 한 곳에 모아 주셨습니다. 함께 머무는 그 장소는 건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은혜 받은 자들 각자의 마음에 계시고, 우리도 예수 그리스의 몸에 지체로서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에수님과 더부렁 살아가는 것이 곧 구원의 길입니다.
죄로 인하여 멸망의 길을 헤매이며 거짓과 속임이 가득한 세상에 속해 있는 상황에서 강권적으로 끄집어 내서 거룩한 곳에 함께 모이도록 구별하여 따로 불러 세웠다 라는 말이 교회라는 용어, 에클레시아의 뜻이라는 것을 많이 들으셨을 겁니다. 우리는 각자 각자는 거룩하고 구별된 교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특징은 구별됨, 그리고 거룩함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구별되고 거룩하게 따로 모여 있는 사람들끼리 생활하는 집단에는 문제가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문제가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경제학자인 빌프레도 파레토가 1896년에 발표한 이른바 ‘파레토의 법칙’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파레토는 자신의 정원에서 키우던 완두콩 종자의 20%에서 전체 완두콩 수확량의 80%가 나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를 거시경제학에 접목시켜서, 이른바 8:2, 2:8의 법칙을 만들었습니다.
파레토 법칙에 따르면 ‘원인의 20%가 결과의 80%를 만든다’는 겁니다. 개미들의 사회 집단에서는 20%의 개미들이 나머지 80%를 먹여 살린다고 하며, 인간 사회에서도 성과의 80%는 상위 20%의 노력의 결과라는 겁니다.
이것을 공정성의 원리로 접근하여 100%의 사람들이 모두 열심을 내도록 하여 균등한 노력을 요구하게 했더니 오히려 그 집단이 붕괴 되더라는 겁니다. 재미 있는 이론이며 많은 부분에서도 인용되는 법칙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주장이지 절대 현상은 아닙니다. 그러면 20% 아주 잘하고 있는 사람들만 따로 모아 놓으면 어떻게 되느냐, 그러한 집단 이라면 잘 돌아가고 훨씬 더 유익한 결과가 나올 것 같지만, 여기에서도 20%만 열심을 내고, 80%는 결과만을 취하더라는 겁니다.
교회도 사람들이 모인 집단입니다. 구별되고 거룩한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100%로 획획 잘 돌아가야 할 것 같지만, 이 곳에서도 파레토 법칙 비슷한 비율이 작동합니다. 열심 있는 사람은 소수이고, 열심 있는 사람의 수고와 헌신에 기대어 손 놓고 있는 사람이 대다수 라는 겁니다.
안타깝게도 교회에서조차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요? 예수님이 주인이심을 입으로는 선포 하면서도, 정작 주인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가 예수님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라고 깨닫고 있으면서도 머리에서 어떤 전달이나 지시가 내려 오는데도 움직이기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내가 먼저 솔선 수범하여 능동적으로 봉사하여야 겠다는 주인 의식이 희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만큼은 2:8의 법칙이라는 이러한 구조를 넘어 설 수는 없을까요? 있습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그냥 단순하게 교회를 내 집이라고 생각하면 쉬워집니다. 집에서 가정 주부들이 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눈에 계속 보일 겁니다. 이 일 저일 계속 생각 나실 겁니다.
그러면 내 집이기 때문에 힘들어도 그 일들을 바로 바로 처리 합니다. 교회를 내 집처럼 실펴 보시고 보이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그 때 그 때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곳이 교회 이어야 합니다. 이런 살핌과 먼저 앞장서려는 능동적인 행동이 곧 주인의식 아니겠습니까?
내 집보다 교회 구석 구석이 깨끗하고, 내 집보다 교회 곳곳이 향기가 나고, 내 집보다 교회 구석 구석이 보기에 좋으면 그 교회는 생기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정말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길 바라고, 저는 여기에 있는 여러분들이 가장 앞장서서 누구보다도 먼저 능동적으로 움직여서 이런 생기난는 교회를 세워가는 공동체의 중심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고 하였으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가 지극히 당연한 이 사실을 망각하고 사람들이 중심이 되는 공동체로 변질 되어 가려고 하자, 강력한 제동을 걸었습니다.
바울은 다른 복음을 퍼트리는 주동자들을 “어떤 사람들”로 지칭하며 그들을 교란하는 자들 이라고 공격합니다. 개역 성경에서는 “요란케 하는 자들” 이라고 했는데, 이는 거짓을 퍼트려서 사람들의 마음에서 평안을 빼앗고 의심과 불안을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라고 하였듯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거짓말을 슬슬 뿌려서 분란과 분열의 씨앗을 뿌리는 자들은 사탄에 종속된 자들로, 착한 양들을 물어가는 이리떼와 같은 자들입니다. 제가 몇 번이나 강조해서 말씀 했듯이 교회 안에 분열과 분란을 조장하는 거짓말 쟁이들, 말만 앞세우는 외식하는 자들은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러한 자들에 대해 도저히 묵과 할 수 없었기에 가장 강력한 경고를 선포 합니다. 8,9절을 읽어 드립니다.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아멘.
6절, 7절에서 “다른 복음”이 두 번 나왔다면, 8절과 9절에서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라는 말이 두 번 반복 됩니다. 거짓말 뿌리는 자들, 말만 앞세우는 자들을 저주하는 선포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를 마무리 하면서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고전 16:22) 라고 하면서, 저주를 선포하며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주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평소에도 이토록 무서운 저주를 자주 내리는 사람이어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주가 아니라 십자가 은혜를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나무에 매달린 채 죽으셨습니다. 신명기 22장에서는 “22.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죽을 죄를 범한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들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시기 위해서 나무에 달려 몸소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그 저주가 누구의 것입니까? 우리들이, 내가 받아야 할 저주였습니다.
예수님이 그 모든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어떤 저주에서도 해방이 되는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된 상태가, 구별되고 거룩하여져서 교회 자체가 된 우리들의 현재 모습입니다.
그런데 저주를 벗어 버리고 자유인이 되었으면서도 왜 사람들은 다른 복음을 찾아서 자꾸만 하나님의 곁을 떠나려고 할까요? 뱀이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 먹으라고 속삭였을 때 하와의 눈에 보인 열매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 까지 하였습니다. 도저히 거부 할 수 없는 유혹이었습니다.
이렇게 사탄은 우리(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우리(나) 보다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며 매일 같이 우리(내) 눈 앞에 좋아 보이는 것들이 보이도록 들이 밉니다. 우리가 다른 복음을 따라가는 것이 바로 이러한 보이는 유혹 때문입니다.
예수님, 성령님, 말씀, 은혜, 이런 것들은 눈에 안 보이고, 반면에 나를 만족시켜 줄만큼 매우 충분해 보이는 것들은 세상에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그 눈에 보이는 것을 덥썩 덥썩 취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 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저주를 감당 하신 예수님은 언제 오실지 모르겠지만, 당장 내 옆에서 알아 듣기 쉽게, 딱 맞는 것 같은 다른 복음으로 속삭이는 친구, 동료, 이웃, 심지어는 가족이 너무나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아닌 다른 복음(예수님 아닌 세상의 모든 것)을 훨씬 더 좋아하고, 짝하여 다니고, 사람들과 먹고 마시며 즐기며 보내는 것이 마냥 즐겁기만 하다면, 구별되고 거룩하다는 것 자체를 기억하지도 생각하지도 않고 살아가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내가 곧 교회라는 인식은 사라지고야 말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그 중에는 좋은 사이로 지내서 기억하고 싶은 추억의 사람도 분명히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상처를 주고, 속임수를 쓰고, 잘난체 하고, 판단하기를 즐겨 하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비열하고 난폭한 사람도 부지기수 입니다.
어찌 되었든 돌고 도는 만남 인생 가운데, 사람은 사람에게서 충분하다고 느낄 정도로 만족함을 절대로 얻을 수 없습니다. 복음 찬양 중에 “사람을 보며 세사을 볼 땐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 분을 뵐 땐 나는 만족하였네” 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이외에는 나의 삶을 평안으로 만족으로 이끌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한 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서로 의지하고 협력 하는 대상이지 결코 믿음을 주고 받는 사이가 아닙니다. 저도 제 인생의 시간 속에서 알게 모르게 스쳐 지나간 사람이 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 많은 사람 중에 가족 이외에는 거의 기억에 남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기억에 남는 사람이 거의 없은 것이 제가 냉정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이고, 누구에게 의존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만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게 만족감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카톡 프로필을 “주님이면 충분합니다”라고 해 놓았고 한 번도 바꾸거나 다른 것을 추가 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한 삶을 믿음으로 살아내자 라는 저만의 다짐과 각오가 흔들리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복음이 판치는 이 어지러운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강력한 무기인 “믿음”이 있습니다. 싸우고 이기려는 의지만 있으면 언제든지 다른 복음의 유혹에서 승리 할 여건이 완벽하게 마련 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기억 하시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라고 시작하죠. 후반부 말씀이 생각나십니까?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아멘.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님 안에서만 사는 것이라는 이 삶의 고백이 교회 공동체 안에 흘러 넘치고, 신도들 각 자의 삶에서도 충만하게 역사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심하게 흔들렸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저주 라는 용어를 쓰면서 단호하게 책망을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와 성도들을 향해 해산으로 낳은 수고를 하였다고 표현 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갈라디아 교회와 성도들은 영적 자녀들 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자녀들에게 누군가 썩은 음식을 주고, 독이 든 음료를 주는 것을 보았다면, 달려가서 빼앗고, 쫓아내는 것이 당연할 겁니다.
만약 실제 우리 자녀들이 누군가에게 이런 경우를 당한다면, 싸우는 것은 물론이고 즉시 고소할 겁니다. 저주를 퍼부은 사도 바울의 심정이 백 번 이해가 됩니다. 복음은 양보 할 수도, 낭비 할 수도, 머뭇 거릴 수도, 빼앗 길 수도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붙잡고, 단 한 순간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곧 믿음입니다.
말씀 마지막 절인 1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아멘.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매사에 사람을 선택하느냐, 하나님을 선택 하느냐,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느냐,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사는 일을 하느냐, / 하나님만을 만족하며 감사하며 사느냐, / 눈에 보이는 다른 복음을 쫓아 다니며 허망한 것을 따라가느냐, 이런 선택의 문제가 오늘 설교의 제목에 담겨 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은 과거의 삶을 돌이켜 볼 때, 사람을 좋게 하는 일이 최대의 신념이자 업적이 되는 삶을 살다가, 오직 하나님을 좋게 하는 일에 목숨을 걸고 사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만약 그가 사람을 좋게 하는 일을 계속 했다면, 돈, 명예, 권력에 있어서 뭇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는 위치에 올랐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매 맞고, 굶 주리고, 창피를 당하고, 모욕을 들으면서도 하나님만을 좋게하는 삶을 선택 했습니다. 그런 덕분에 그는 몸과 마음이 만신 창이가 되었지만, 마냥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성령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하늘 평안을 누렸습니다. 참수 당하며 인생을 마쳤지만, 그의 영혼이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인생은 금방 지나 갑니다. 한 번 선택하고 실행한 일들은 단 한 건도, 단 1초도 뒤돌릴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도 바울은 우리의 불순종과 나태함을 꾸짖으며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믿음으로만 살 아갈것을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말로 우리의 양심을 뒤 흔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았으며, 믿음의 헌신과 충성을 다하며 살다가, 믿음의 열매를 가지고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나님을 좋게하는 결과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오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시고, 세상의 소리, 사람의 소리를 차단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다고 기도하는 일에 최대한 열심을 내십시오. 하나님은 가까이 오는 자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듣고자 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말씀 하시는 분이십니다.
00교회 모든 성도가 다른 복음을 따라 저주의 길로 가는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아니하고, 사람을 좋게 하는 일에서 속히 벗어나서, 오직 하나님을 좋게 하는 참 되고 굳센 믿음을 지니시고, 사람과 세상이 아닌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시며, 천국을 향하여 담대하고 거침 없이 나아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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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귀에 다른 복음이 들려 오는 것을 막아 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길로만 걸어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 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