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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남산예장공원의 기억6, 인권길, 국치길, 이회영기념관을 최근 조성 하였다. 그곳을 간략하게 살펴 보겠습니다.
❁ 기억6과 인권길
✵ 서울 남산 북쪽 기억6이 있는 이곳은 경술년인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국치를 당한한국통감관처터(국치터)가 있던 곳이다. 거의 같은 위치에 5.16쿠테타(1961년) 세력이 군사정변 직후 설치(6월 10일)한 중앙정보부가 들어왔다. 권위 주의 시대에 '남산' 이란 말은 곧 '중정'을 뜻했다. 이 기관은 주권자인 국민감시와 통제를 주로 하는 '권부 위권부'로 군림해왔다.
남산예장공원은 조선시대 군인들이 무예(武藝)를 연마하던 예장터였기 때문에 예장동(藝場洞)으로 불렸다. 조선시대에는 자연지형이었던 이곳이 일제에 의해 식민지 공간이 되었고 귄위주의 시대에는 중앙정보부(中央情報部:KCIA)로 인해 인권침해 공간으로 훼손 되었다.
서촌에 있던 독립운동가 이회영(李會榮) 선생의 기념관을 이곳으로 이전하는 한편 남산예장자락 재생사업으로 오래도록 고통스런 기억을 품고 있던 이곳을 1백 년여 만에 시민의 품으로 되돌아왔다. 시민들이 운동하고 산책도 할 수 있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독립운동과 인권에 대한 역사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 기억6 전시관은 옛 중앙정보부 6국이 있던 자리이다. 6국에서는 국민감시, 강압수사, 고문 등 국가 폭력에 의한 인권 침해가 자행되었다. 고통스런 역사를 기억하고, 역사와 대화하고, 나아가 시대를 성찰하기 위한 뜻을 담아 기억6은 우체통 형상을 하고 있다.
역사에 말을 걸 때만 돌과 시멘트도 외쳐 답을 해줄 것이다. 역사가 말이 없는 게 아니라 말을 걸지 않을 때 역사가 침묵하는 것이다.
옛 건물에서 나온 벽돌과 녹슨 철근, 기둥 잔해가 부서진 건물 조각들을 모아서 마당이 되고 6개의 기둥과 6개의 걸상이 되었다.)
✵ 인권길 답사지도
명동역 1번출구 대한적십자사 맞은편 기역6[중앙정보부6국]-[주자파출소 터]-서울 소방재난 본부[중앙접보부 사무동]-문학의 집[중앙정보부장 공관]-[중앙정보부 제1별관 터]-서울 유스호스텔[중앙정보부 본관]-서울 종합 방재센터[중앙정보부 제6별관]-소릿길-서울 특별시청 남산 별관[중앙정보부 제5별관]
▼ '중앙정보부 6국'은 군부독재 시절 국내 정치사찰, 특히 학원사찰과 수사를 담당했던 국가기관이다. 건물 건립 시기는 정확히 파악되지는 않지만 ‘정초(定礎), 1972. 4. 5. 중앙정보부장(中央情報部長) 이후락(李厚珞)’이라고 적힌 건물 정초석이 남아있다.
✵ 광장, 유구, 남산 위의 저 소나무길
❁ 국치길
일제는 조선 얼굴에 해당하는 남산에 가장 격이 높은 조선신궁을 세우고 메이지 천황을 제신으로 숭배하게 했다. 조선 통치 중추인 통감부를 세우고, 일본인 집단 거주지를 조성한 곳도 남산이었다. 남산은 나라를 잃고 국토, 주권을 내 주어야 했던 치욕의 장소이면서, 해방 이후에는 중앙정보부가 설치되어 100년간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장소였다.
서울시는 이처럼 우리 민족과 격리된 채 역사적 흉터처럼 가려져 온 남산 예장자락 속 현장을 1.7Km 구간 역사탐방길로 조성 하였다. 아푼 국권상실 역사 현장을 시민이 직접 걸으며 치욕의 순간을 기억하고 상처를 치유하자는 의미로 ‘국치길’이라 이름 붙였다.
국치길 1.7Km는 ‘ㄱ’자 모양 로고를 따라 이어진다. 코스는 병탄조약이 체결된 ‘한국통감관저터’를 시작으로 김익상 의사가 폭탄을 던진 ‘조선총독부’, 청일전쟁 승전기념으로 일제가 세운 ‘갑오역기념비’, 일제가 조선에 들여온 종교 시설 ‘신사’와 ‘조선신궁’까지로, 발걸음을 옮기는 자체로 시대 감정을 체험할 수 있도록 재구성했다.
국치길 로고 디자인은 ‘길’의 ‘ㄱ’을 표현한 것으로 ‘ㄱ’은 한글 첫 자음이자 이 역사를 ‘기억’(ㄱ)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보도블럭 모듈로 설치 하였다.
국치길 각 기점에는 표지석이 세워진다. 표지석 재료는 국세청 별관을 허물며 나온 일제 총독부 산하 체신사업회관 건물지 폐콘크리트 기둥이 쓰였다. 우선 한국통감부이자 조선총독부가 위치했던 서울애니메이션 부지에 설치되었다.
✵ 국치길의 국치터(한국통감관저터)는 일제침략기 통감관저가 있던 곳으로 1910년 8월 22일 3대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와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이 '강제병합' 조약 조인한 경술국치(庚戌國恥)의 현장이다.
거꾸로 세운 동상은 히야시 곤스케(林權助, 임권조, 1860∼1939)가 1900년 주한 일본공사로 부임하여 고종 황제와 대신들을 겁박하여 을사늑약(乙巳勒約)을 1905년 11월 17일 덕수궁 중명전에서 강요하는 등 병탄(倂呑:남의 재물이나 영토, 주권 따위를 강제로 제 것으로 만듦)의 발판을 닦은 자다.
일제는 그 공으로 남작 작위를 내리고 대한제국이 국치(1910년 경술년 8월 22일 총리대신 이완용과 한국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서명. 29일 발표)를 당한 이곳 한국통감관저에 동상을 세웠다. 동상 이름은 남작히야시곤스케군상(男爵 林権助 群像)이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흩어진 동상 잔해를 모아 거꾸로 세워 욕스러움을 기린다.
한양도성(漢陽都城) 유적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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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남산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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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공원(漢陽公園)'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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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신 신궁 배전(朝鮮神宮拜殿) 터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만들어진 조선신궁 15개동 주의 하나인 배전의 기초 구조물이다. 조선신궁은 일제가 세운 신사로, 배전은 일반인들이 참배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곳이다.
조선 신궁 배전(朝鮮神宮拜殿) 터, 목멱신사(國師堂) 전경도
조선 신궁 배전(朝鮮神宮拜殿) 터, 배전(조선신궁사진도집, 1925)
조선 신궁 배전(朝鮮神宮拜殿) 터, 전경(반도의 취록, 1926
일제는(日帝) ‘천황제(天皇帝)’ 주입을 위한 관립신사 설립계획의 일환으로, 1912년부터 조선신사(朝鮮神社) 설립 예산을 편성하여 사업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수년간에 걸친 기초조사와 준비 끝에 1918년 12월 「조선신사 창립에 관한 청의(請議)」를 일본내각에 제출하여 1919년 7월 18일자 일본 내각고시 제12호로 조선신사의 창립을 확정·공포하였다. 설립 위치는 서울 남산의 한양공원(漢陽公園)으로, 제신(祭神)은 일본 건국신화의 주인공인 아마데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와 한국을 병탄하고 1912년에 죽은 메이지천황[明治天皇]으로 정해졌다.
조선신사의 건립은 1920년 5월 27일 지진제(地鎭祭)라는 기공식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총부지 127,900여 평 위에 총공사비 156만 4,852엔을 들여 일본 신사 건축양식에 따라 정전(正殿)·배전(拜殿)·신고(神庫)·참배소(參拜所) 등 15개의 건물을 배치하고, 돌계단과 참도(參道)를 조성하였다. 1925년 6월 27일 일본 내각고시로 사격(社格)을 높여 신사의 명칭을 조선신궁으로 개칭하고, 신사에 둘 3종신기(三種神器)라는 상징물들을 일본에서 가져와 그해 10월 15일 진좌제(鎭座祭) 행사를 갖고 한국인들에게도 참배하도록 강요하였다. 이후 조선신궁은 일제 신사참배 강요정책의 상징적 구심점이 되었다. 일본 천황이 연합국 측에 항복 방송을 한 이튿날인 1945년 8월 16일 오후 일제는 조선신궁에서 승신식(昇神式)이라는 폐쇄행사를 갖고, 9월 7일부터 해체작업에 들어가 10월 6일까지 마무리한 다음, 이튿날 나머지를 소각하고 철수하였다.
[참고문헌: 「경성시가도」(1927);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지도』, 2006, 50쪽.]
❁ 이회영기념관
✵ 자유주의와 평등사상
◦ 우당은 혁신적이고 실천적인 양명학 계통의 유학자 출신으로, 서구의 사상과역사를 연구하여 자유주의자로 사상을 정립했다. 일체의 불평등과 부자유를 배격하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 인권을 존중하게 되었다.
◦ 이에 따라 반상계급의 타파, 적서차별의 시정, 남녀불평등 반대 등 자유와 평등사상을 몸소 실천한 선구자이다. 우당은 일찍이 노비를 해방하여 만민 평등의 자유주의 사상가로 어떠한 속박도 거부하는 혁명가적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 독립운동 노선상으로 무장투쟁을 지향
◦ 우당은 을사늑약 이전에는 국민을 깨우쳐 독립을 유지하려고 교육과 계몽에 관심이 많았으나 이후에는 제국주의 속성을 고려할 때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독립을 쟁취 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의병투쟁을 지원하고, 직접 주도했던 헤이그 만국평화 회의에 실패한 이후에 무장투쟁의 길을 걷는다.
◦ 우당은 조선 폐망의 원인 중에는 문관 우위와 무관 천시로 문무 (文武)가 균형을 잃었고, 문약한 유교문화의 폐쇄성에 원인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무관의 중요성을 강조한 분이다.
✵ 독립 이후 지방분권적 통치구조 구상
◦ 우당은 독립 뿐 아니라 독립이후의 정부형태로 아나키즘의 이념을 받아들여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의 집중을 피하고, 지방분권적인 지방자치제가 확립되어야 하고, 지방자치를 바탕으로 연합정부를 구성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 연합정부 형태의 작은 정부를 통하여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최대한 보장하고, 평등사상에 따른 복지국가를 지향하였고, 외교관계는 국제주의와 사해동포주의를 바탕으로, 이웃 나라와는 선린우호와 상호 협력관계로 평화를 유지하려는“동아시아 평화공동체”를 지향했다.
✵ 우당이 남긴 교훈
◦ 우당은 국가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생명과 재산을 바쳐 전력투구한 진정한 지도자로, 사명과 책임을 다한 세계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표상이다.
◦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폐습인 감투싸움과 계파 갈등을 퇴치하기 위하여, 자신은 일체의 대표직을 사양한 감투와 명예를 초월한 자세를 견지했다. 개인의 공로 보다는 동지와 주변을 배려하는 품성과, 화합과 통합을 지향하는 지도자이다.
◦ 월남 이상재 선생은 우당은 항상 뒤에서 동지들을 지도하는 “이면지도자” 라고 불렸다. 우당의 백의종군 정신은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할 시대정신이며, 국민적인 교훈이라 하겠다.
✵ 월남 이상재 선생은 우당 선생을 다음과 같이 칭송하였다.
“동서역사에서 국가가 망할 때 나라를 떠난 충신열사가 수백, 수천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당 일가족처럼 6형제 가족 40여명이 한마음으로 결의하고 일제히 나라를 떠난 일은 전무후무한 것이다. 장하다! 우당의 형제는 참으로 그 형에 그 동생이라 할 만하다. 6형제의 절의(節義)는 참으로 백세청풍(百世淸風)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되리라.”
✵ <이회영기념관 이용안내>
- 관람시간 : 화요일-일요일 10:00 ~ 18:00 [매주 월요일 휴관]
- 기념관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 26길 36 (남산예장공원 지하)
- 대중교통(주차불가) : 지하철 4호선 명동역 1번출구, 10번출구 /
3호선 충무로역 4번출구
- 문의 : 02-755-0610
✵ 목멱산 봉수대 터(木覓山烽燧臺址)
목멱산(木覓山) 봉수대 터는 서울에 있다고 하여 경봉수(京烽燧)라고도 불렸는데 전국의 봉수가 집결되었던 곳이다. 전국 각지에서 오는 봉수는 남산에서 집결하였고, 남산 봉수대는 제1봉수대부터 제5봉수대까지 다섯 곳의 봉수대가 있었다. 제1봉수대는 함경도~강원도~양주 아차산, 제2봉수대는 경상도~충청도~광주 천림산, 제3봉수대는 평안도 강계~황해도~한성 무악 동봉, 제4봉수대는 평안도 의주~황해도 해안~한성 무악 서봉, 제5봉수대는 전라도~충청도~양천 개화산에 이르는 봉수를 받았다.
✵ 각자성석(刻字城石, 글자를 새긴 성돌)
축성과 관련된 글자를 새긴 돌이라는 뜻이다. 천자문 순서로 표시된 축성구간 명칭, 축성 담당 지방, 공사관계자 이름과 석수의 이름을 새겼다. 한양도성에는 이처럼 다양한 시기와 유형의 각자성석이 280개 이상 전해지고 있다.
✵ 서울 남산식물원 앞 분수대 터
서울 남산 분수대는 1969년 남산식물원 앞에 만들어 졌다. 둘레는 20m로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분수대였다. 2006년 ‘남산 제 모습 가꾸기’ 사업의 하나로 남산식물원이 철거 되면서 분수대도 더 이상 가동하지 않았다. 발굴 조사 결과, 분수대가 자리한 곳은 한양도성의 내측에 해당되는 곳으로 성벽 유적은 분수대 옆면에서 확인 되었다. 1960년대 만들어진 남산식물원과 분수대가 있던 광장은 서울 시민들이 가장 즐겨 찾는 나들이 장소로 사랑받았으며, 분수대 역시 많은 이들이 기념사진을 찍는 명소가 되었다. 분수대는 추억의 명소로 의미가 크기 때문에 철거하지 않았다.
❁ 들풀의 바람 한줄기 오롯이 담은 그 가을빛
- 구절초, 낙엽, 호랑거미가 가는 가을을 붙잡고, 나무뿌리 고사목, 남산 단풍1031, 담쟁이, 국화, 신갈나무 낙엽. 배롱나무 단풍, 복자기나무 단풍, 소국 ...
[자료출처 및 참고문헌: 〈기억6, 인권길, 국치길 리풀렛 〉, 〈우당 이회영 기념관 홈페이지: www.woodang.or.kr〉, 《원색한국식물도감(이영노,교학사)》, 《한국의 자원식물(김태정, 서울대학교출판부)》, 《Daum, Naver 책검색(인터넷 교보문고)》/ 생태사진: 이영일 ∙ 고앵자 생명과학 사진작가 ∙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
첫댓글 무원 김명희 교장선생님
어둠의 역사현장, 시민품으로~ 왠지 착잡해지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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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그냥 계절을 담은 풍경들, 꽃들을 사랑하면서 이렇게 삽니다. ㅎㅎ
의미있는 산책을 하시면서 무르익은 가을까지 담으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