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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인형 제 1장
기억(記憶)편.
1부
[ - 프랑스에서 온 황녀 - ]
(6)
"현…령……."
힘겹게 말문을 여는 청년의 목소리.
늘 포근했던 그의 눈동자가 소녀의 갈기갈기 찢겨나간 옷자락을 보곤 그
대로 굳어버릴 듯 심하게 흔들렸다. 언제나 차갑게 안정되어 있던 그의
눈동자에 혼란이 보이자 그런 청년을 바라보는 또다른 청년. 청동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그 청년은 차마 바로 앞의 소녀에게 손을 내밀지 못하
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연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청년의 눈동자가, 그
리고 그 눈동자의 살기가 너무나도 강했기 때문일까. 그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 역시, 그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있는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흐리
멍텅한 갈빛 눈동자.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인 초점없는그 눈
동자에서 점점 어리기 시작하는 이슬방울. 그것은 이내 소녀의 깨끗한
턱선을 지나 그녀가 쓰러져 있는 그 차가운 바닥으로 떨어졌다. 똑,
똑. 그것을 본 그 갈빛 머리카락의 청년은 그녀에게 애써 다가갔다.
뚜벅, 뚜벅.
이내 그 구두굽소리가 끝나고 그녀 앞에 선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는 이내 소녀 앞으로 앉아보이는 청년. 그 청년은 그런 그녀를 조심스럽
게 감싸올렸다. 일어날 기운조차 없을것만 같은 앞을 못보는 소녀를 멍
하니 바라보던, 이제는 서서히 감싸들어올려지는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
던 또다른 청년은 이내 채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그들을 주시했다. 그
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차갑게 연갈빛 머리카락의 청년은 입을 열었다.
"다신, 현령이에게 접근하지마라.
이런일이 또한 번 있을 시에,
…그때의 난 내 행동을 책임지지 못할지도 모른다."
"……."
비교적 간단한 말.
그러나 그 말에는 분명 엄청난 위협의 경고가 깃들어 있음을 안 청년은
대꾸를 하지 못했다. 점차 사라져가는 연갈빛 머리카락의 살랑거림을 바
라보던 그는 잠시 뿌옇게 담배의 그을림이 서린 천장을 바라보며 마치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말을 뱉어내듯 힘겹게 말했다.
"……젠장…할."
- 콰앙 ㅡ !!!!
화풀이를 하듯 강한 힘이 실린 주먹으로 벽을 강타하는 청년.
그의 살에 핏줄이 강하게 드러났고 이내 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그리고
슬픔이 서려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본 소녀의 얼굴에 깃든 것은, 웃
음도 슬픔도 아니었었다.
그것은.
자신이 믿는 사람에 의한, 절망감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충격을 심하게 받은 그녀에게 감히 손을 내밀 수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만약 그가 손을 그렇게 내밀었다면,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았을까……?
- 쾅!! 쾅!! 콰앙 ㅡ !!!!
몇번을 더 그렇게 세게 벽을 강타한 그는 이내 그 벽에 기대어 몸을 내
리 끌었다. 주르르르. 한번도 사랑이란것따위 믿어본 적없는 자신이 이
렇게까지 변한것에 대한 놀라움, 그리고 그 사랑을 지키지못한 허망함
을 한몸에 담기 힘들었는지, 그는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벽을 잡고 몸을 일으키는 그. 그는 이내 날카로
운 그 특유의 검은 눈동자를 되찾아가며 그곳에 똑바로 섰다. 탁. 이윽
고 그는 아까 연갈빛 머리카락의 청년이 갔던 그 길을 걷기 시작했다.
. . .
『 캐서린……. 』
『 걱정마세요, 아버지.
전 꼭 웃는 얼굴로 돌아올테니까요. 아무일도 없을꺼예요. 』
금발머리를 가진 중년의 남자는 자신의 앞에서 싱긋 웃는 갈빛 머리카락
의 소녀를 보며 그녀가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앞을 볼 수 없는 자신
의……딸. 그녀가 가려는 곳은 그녀가 태어나고, 자라왔던 친아버지와
의 추억이 서린 자신의 고향, 한국.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가기엔 너무
나 위험한 요소가 많다고 생각한 금발머리의 남자, 즉 그녀의 양아버지
는 심한 고민을 해야만 했다.
5년전, 그녀는 자신의 부와 명예에 희생되어 두 눈을 잃었다.
그 일은 분명 자신의 잘못…이기에, 지금으로서 그녀에게 닥칠 그 모든
위험을 모두 지켜주는 것이 그가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
가 살고 있는 이 거대한 캐슬(castle:성)은 오래전부터 견고하기로 소문
나 있기 때문에 이 안에서만 살고 있다면 그녀에겐 아무문제 없을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그로선 그녀가 나간다는 그것조차가 그의 걱정으
로 남았다. 그러나, 그는 왠지 그녀를 이곳에서만 가둬놓을 수 없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었다.
새가, 눈을 잃었다고 해서 푸른 하늘을 날지 못하는 건 아니잖은가.
앞을 볼 수 없더라도, 새는 『새』.
하늘의 푸른 빛을 볼 수 없다고 해도,
새는 그 하늘의 품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것을 알기에,
그렇기에 그는 그녀의 부탁을 채 거절 할 수 없었다.
『 3년…동안이다. 』
『 3년 이요? 』
『 3년 간만 있다 오너라.
네가 원하는 것, 그리고 원했던 것들을 모두 느끼고 나서,
그 후에 내게…돌아오거라.
네가 살던 곳, 이 프랑스를 잊지 말고. 』
『 아…버지……. 』
꼬옥.
이내 금발머리의 사내는 그녀를 꼭 껴안아주었다.
프랑스식의 인사이기도 한 볼키스를 감미롭게 해준 그 사내는 이내 그녀
를 곧 자신의 품에서 풀어주었다. 그러자 이내 활짝 웃는 그녀. 그녀의
갈빛 머리카락과, 현재 입은 아름다운 푸른빛 에어라인 드레스를 흐트러
뜨리듯 알수없는 계절의 바람이 창가에서부터 불어왔다. 따스한 바람.
마치, 그녀의 친아버지가 금방이라도 그녀에게 전해주는 숨결처럼.
"……아."
꿈을…꾸었나.
내 머릿속에 아직도 양아버지의 말소리가 들리듯 영롱하다.
비록 양아버지라고는 하지만, 그는 늘 자상하셨다. 일렉트릴가라는 프랑
스 최대의 가문을 이끄는 사람이라지만, 그는 내겐 지극히 친절하고 사
려깊은 분이셨지. 난, 어쩌면 잠시 동안이라도 그분의 곁에서 떠나온 것
을 후회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옆에서 아주 익숙한 이의 인기척이 들
렸다. 내가 깨어나기를 기다린 그의 인기척은, 내가 조용히 눈을 뜨자
더 확실해졌다.
"현령, 아니……캐서린님."
"현진오빠……?"
털썩.
그가 무릎을 꿇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내 난 놀라 내가 누워있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갑
작스런 그의 행동으로 인해 난 잠시 당황스러워졌다. 평소때도 늘 차갑
고 강한 모습을 보이던 리차드, 그가 내게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대체
내게 뭘 전해주는 것일까.
"다신…그렇게 혼자다니지 말아주십시오. 다시는……."
"리……차드?"
"당신이 다치면, 그렇게되면…전……."
그렇구나.
내가 다치면, 그가 위험해지는 거구나.
그래서 내가 다쳐선 안되는 거고, 그로 인해 그는 날 걱정하는 거였어!!
결국 난 그에게 그저 프랑스의 황녀, 귀족의 딸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었……어. 이런…말도 안되는.
아니, 리차드는 그만큼 차가운 사람이었으니, 어쩌면…….
내가…그 모든일을 내 시선만으로 바라보고 착각한 것일지도 몰라.
"알았어."
나도 모르게 차가운 목소리가 나왔다.
내가 이래선 안되는데, 정말 나도 모르게 왜 리차드에게 차갑게 대하려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난 이내 그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넌 내가 돈으로 보인다는 거였군?
내게 늘 다가오던 다른 남자들하고 하나도 틀린 게 없었어.
조금이라도 널 믿고 있었는데, 프랑스에서의 내 돌아올 재산만 노리고
달려든 그런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캐서린님……?"
"당장 사라져. 그리고, 내 곁에 있지 말아줘."
"……."
말없이 일어서는 그의 기척이 느껴진다.
서서히 문을 통해 사라져가는 그의 발소리도 같이 들린다.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내 곁에 있던 그를 떠나보내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 줄은 알았
다지만, 왠지 이런내가 조금은 장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보다는.
"왜지? 자꾸…눈물이 나."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눈가를 만져봤다.
축축함. 그것은 이미 멀어져버린 내 두눈에 눈불이 맺히고 있음을 알려
주는 것이었다. 오히려 가슴시원해야 할텐데, 그렇기에 웃어야 할 내가
왜 울고 있는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누군가가 내게서 떠나간다는 슬
픔따위는 이미 잊혀진지 오래. 내겐 그런 감정없다고, 그렇기에 난 강하
게 살아왔다고 굳게 믿었던 나인데,
어째서……눈물이 나는건지.
혹시.
이것이 내가 믿지 않았던……사랑이라는 감정일…까?
"거짓말. 내겐 사랑따위 없어.
난,
아무도 좋아한 적 없다고……."
아니, 오히려 그 말이 거짓말일 지도. 난 어느새 그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 곁에서 날 늘 지켜주던 그의 모습, 숨결, 손길 하나하나를
모두 외우고, 그의 말소리조차 모두 알아들을 수 있는 내 모습이 왠지
낯설지 않았다. 그의 따뜻한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보일 것 같아 늘 웃
던 내 모습이, 그리고 그의 모습을 눈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암흑 속에
서 회상하던 내 모습이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렸다.
그때서야 알았다.
난 사랑을 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하지만, 이미 늦은 것이겠지.
터벅. 난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을 이미 찢어진 그 소매자락으로 닦아내면서.
그때였다.
"남현령, 새 교복 가져왔다."
"김……유하?"
"내가 네 짝이라는 이유만으로 오늘부터 고생 꽤나 하게되겠군.
그 걸레짝같은 교복 벗고, 이거 입어라. 난 나가 있을테니까."
딸깍.
문이 아까 리차드에 의해 열려져 있었는지 어느새 문여는 소리도 없이
들어와있는 어느정도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내 짝이기도 한
김유하라는 남자아이의 목소리였는데, 그가 놓고갔는지 어느새 내 옆엔
새 옷가지들이 제대로 정돈되어 있는 것이 내 손을 통해 느껴졌다. 이
내 그가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리고나서 그가 이 공간에 없는 것을 확인
한 나는 옷을 갈아입었다. 눈이 보이지 않더라도 제법 옷맵시가 갖출
수 있을 정도로 이런 일에 익숙해진 난, 얼마 지나지 않아 새 교복으로
깨끗이 입을 수 있었다. 그러고 난 후, 나는 이내 더듬거리면서 문고리
를 잡아 열었다.
- 끼익.
"다 입었군. 그럼, 이제 교실로 들어가야되니까 날 따라와."
"으, 응……."
터벅.
아무도 없는 복도에 둘만 걷고 있는 발소리가 난다.
하나는 나고, 다른 하나는 내 앞에서 날 안내하는 김유하, 그의 것이겠
지. 그와 난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
게 문득 무언가를 물어보고 싶은 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말을 그에게 묻고 있었다.
"너, 머리카락색이 은색이라며?"
"……탈색되서 염색한거다. 그냥 단순한 회색일 뿐이야."
"설마 그 화재 때문에……?"
타닥.
그가 돌아서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로인해 난 잠시 멈칫거렸다.
"넌, 남의 과거를 들추는 악취미가 있는 모양이군."
"아……."
"잘 들어.
장님이라고 해서, 남 배려하는 마음까지 잊어먹진 말도록 해."
맞다.
그는 예전의 기억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지.
난 그 질문이 그의 가슴에 비수를 꽂을 정도의 가슴아픈 질문임을 그제
서야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난 곧 그에게 사과해야했다. 미안…하다
는 말로 다 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는 다시 돌아서서 갈길을 가기 시작
했다. 내가 사과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채. 아니, 사과따위 받을 필요없
다는 생각으로 그런 것이겠지.
"이번 시간이 체육수업이었나. 아무도 없군."
교실에 도착해서 한 말이었는지 유하, 그는 잠시 교실을 두리번거리고
는 퉁명스런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차가운 이미지. 마치, 얼음장과도
같은 마음씨를 가졌다고 해야할까. 친구들이 오늘 말해준 그의 차가운
이미지 그대로였다. 왕자님이라. 그때였다.
"현령……아."
★작가메일:live7star@hanmail.net
★저작권은 남두군에게 있습니다.
★출처:인터넷소설닷컴(http://cafe.daum.net/youllsos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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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틴 로맨스소설
[순정연재]
유리인형 - [ 1부 : 프랑스에서 온 황녀 (6) ]
남두육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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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0.30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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