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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악업의 부정이 곧 십선업이다. 십악업 중에서 사회적으로 특히 문제되는 것은 신체적인 세 악업(살생. 투도. 사음)이다. 그것은 남에게 직접적인 상해를 줄 수 있는 외적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이 언어적인 네 악업(망어. 양설. 기어. 악구)이 되지만 그것은 거짓말(妄語) 하나로 대표된다. 두 말이나 꾸밈말 욕지거리 등은 일종의 망언(妄言)이기 때문이다.
그 밖에 십악업에서는 비록 빠졌지만 사회적으로 문제되는 식생활에 음주가 있다. 따라서 불교는 이것을 경계하는 불음주(不飮酒)를 위의 네 가지에 보태 오계(五戒)를 정하고 있다. 사회인이면 누구라도 익히고 지켜야 할 계명이라는 뜻이다.
불교의 계율은 또 팔재계(八齋戒) 십계(十戒) 등이 있고 출가한 승니僧尼에게는 보다 강제성을 띠는 비구계 250계와 비구니계 348계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계는 오계를 기초로 하고 있다. 그러나 단순한 악업의 부정은 그것이 계율의 형태로 강화되었다고 하더라도 아직은 소극성을 면할 수는 없다. 진정한 선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능동적인 적극성을 띠어야 한다.
아함경에 계를 지키는 것과 함께 끊임없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 보시(dāna)이다. 보시는 남에게 아낌없이 주는 행동이다. 따라서 그 정신적 기반은 사무량심(慈悲喜捨)이다. 사무량심의 근본이 되는 사랑(慈)은 남을 나 이상으로 사랑하는 것이므로, 그러한 마음이 행동으로는 아낌없이 주는 보시라는 형태를 띨 것이다.
보시는 주는 행위이므로 주는 자 · 주는 물건 · 받는 자의 셋이 관여하게 된다. 그 중에서 시물은 일차적으로 물질적인 재물을 들 수 있다(財施). 그러나 어두운 사람에게 바른 법을 베풀어 주는 것도 중요한 보시라 할 수 있다(法施). 시물을 받는 자는 수행에 전념하는 승가를 가리킴이 보통이고 그것은 무한한 공덕(福)을 발생하기에 복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보시의 기본입장에서 볼 때 받는 자를 승가에 한정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잡아함 권4 제93경> 일체 중생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뒤에는 삼보(三寶)로 부터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 심지어는 축생에 이르기까지 복전의 개념이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법망경 권하 제9경구죄>
보시는 이상과 같이 일체 중생을 진정한 친구로 보고, 그런 우정(慈)에서 우러나는 것이므로, 그와 함께 사랑스러운 말을 하고(愛語), 이익을 주고(利行), 항상 함께 일하는(同事) 행동이 수반될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와 남은 돈독한 우정으로 묶여 함께 선업을 행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보시와 지계는 불교의 업설에서 가장 적극적인 선행으로 설해지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보시를 누구에게 보시해야 합니까?
누구에게 보시하면 더 큰 결과 있습니까?
보시하고 싶은 대상에 보시하면 됩니다. 그것은 자유입니다.
하지만 결과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축생에게 보시해도 수명과 용모, 행복, 힘, 지혜의 다섯 가지 과보를 백 배, 즉 백 생 동안 누리게 됩니다.
계를 잘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게 보시하면 천 생,
부처님 가르침 밖에서 계를 잘 준수하는 이들에게 보시하면 십만 생,
부처님 가르침 밖에서 신통을 지닌 수행자들에게 보시하면 십만 생,
그 위에 수다원 도 이상은 헤아릴 수 없는 생 동안 과보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개인에게 보시하는 것보다도 승단에게 보시하는 것이 더욱 과보가 큽니다.
붓다는 재가자들에게 시(施)·계(戒)·생천(生天)를 강조했다. 이것을 ‘삼론(三論)’이라고 부른다.
시란 보시를 말하고, 계란 지계를 말하며, 생천이란 좋은 곳[善趣] 혹은 하늘나라[天界]에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세 번째의 생천은 보시와 지계를 통해 얻는 과보인 것이다.
이 삼론의 가르침은 초기경전의 도처에 언급되어 있다.
보시(布施, dāna)는 ‘준다’는 말이다. 보시를 ‘베풂’ 혹은 ‘나눔’으로 옮긴다. 지계(持戒, sīla)는 계율을 지킨다는 말이다. 지계를 ‘절제’ 혹은 ‘단속’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생천(生天)은 글자 그대로 ‘하늘에 태어남’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생천은 내세에 하늘에 태어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현세에서는 ‘성스러운 삶’ 혹은 ‘행복한 삶’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시·계·생천은 ‘나눔과 절제의 생활을 통한 행복한 삶’을 의미한다. 이러한 삶은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소망이다. 붓다는 재가자들에게 나눔과 절제의 생활을 통해 현세에서 최상의 행복을 누리고, 내세에서는 ‘좋은 곳’에 태어나는 것이야말로 훌륭한 불자의 삶이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그 첫 번째 조건이 바로 ‘베풂’ 혹은 ‘나눔’의 덕목인 것이다. 이것을 경제학에서는 ‘분배의 윤리’라고 한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자기의 것을 남에게 베풀 줄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물의 세계에서는 나눔의 미덕이 없다. 오직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법칙만이 존재할 뿐이다.
‘나눔’과 함께 강조되는 두 번째 덕목은 ‘절제’이다. 인간의 가치는 ‘절제’의 미덕에 있다.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서 윤리적이다. 인간사회는 윤리를 통해 질서가 유지된다. 반면 동물은 오직 본능에 따라 행동한다. 동물에게 윤리를 기대하기 어렵다.
동물은 오직 종족 보존을 위한 생식 본능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보시는 육바라밀(六波羅蜜) 가운데 탐욕을 끊는 첫째 바라밀이다. 육바라밀은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에 보시행·인욕행·정진행을 추가한 것이다. 보시는 자비심으로써 다른 이에게 조건 없이 베풀어 주는 것이다. 이러한 보시에는 크게 재시(財施)·법시(法施)·무외시(無畏施) 등의 세 가지가 있다.
재시((āmisa-dāna)는 물질적인 베풂을 말하고,
법시(dhamma-dāna)는 가르침의 베풂을 말하며,
무외시(abhaya-dāna)는 두려움을 제거해 주는 베풂을 말한다.
보시의 참된 의미는 나눔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비심이 바탕이 되어야만 한다. 자비심이 충만해지면 나보다는 먼저 남을 배려하게 된다.
그런데 베풂은 꼭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은 넓은 의미의 보시에 포함된다.
《잡보장경(雜寶藏經)》,《大正藏》
법구비유경
과일나무에 거름을 주고 가꾸면
풍성하게 열린 과일의 맛이 제각각 다르듯,
동물에게 순수한 마음으로 보시하면 100배의 공덕을 받으며,
계율을 지키지 않는 속인에게 순수한 마음으로 보시하면 1000배의 공덕을 받네,
계율을 지키는 사람에게 순수한 마음으로 보시하면10만배의 공덕을 받으며,
선정에 들어 모든 욕망을 끊으려는 수행자에게 순수한 마음으로 보시하면
1,000억배의 공덕을 받네,
4처 4과에 들어간 수행자는 물론 불보살님께 순수한 마음으로 보시하면 무량공덕을 받는다 하시네.
이와같이 경전을 보면 보시에서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공덕을 열거한다. 보시는 사회 구성원들을 응집시키고 단절시키는 힘이 있다. 보시는 가진 자들과 가지지 못한 자들 사이에 놓인 물질적, 경제적 격차를 메워주기보다는 심리적 단절을 이어 주는 최선의 방법이다.
보시가 자리 잡을 때 서로를 미워하는 마음은 어느새 사라져 버린다. 마음이 너그러운 이는 남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친한 사람이 많다. 베푸는 일은 또한 정을 돈독하게 해 준다.
어떤 사람이 보시한 후에 어느 특정한 곳에 나고자 발원하더라도 그 소원은 오직 계행이 청정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극히 얼마 안 되는 보시행과 계행을 실천했을 뿐이고 선(禪) 수행에 관해 아는 바가 없다면, 다음 생에서 그는 인간계에 불행하게 태어난다.
또 상당한 정도의 보시나 지계(持戒) 등의 선행을 하지만 선 수행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인간계의 복락을 누리는 데 그친다. 그리고 참선에 대해 전혀 아는 바 없어도 한없이 많은 보시행을 하고 계를 철저히 지킨 사람은 천상에 태어나게 되며, 그들은 수명과 미모, 복락과 명성 그리고 오관의 감각적 즐거움에서 다른 신들을 능가한다.
‘증지부’ 에서는 보시를 베푼 결과 누리게 되는 세간적인 복덕으로 “인색하지 않고 후덕한 사람은 남들의 호감을 얻는다. 아라한들이 그에게 다가와 그의 공양을 받고 그에게 제일 먼저 법을 가르쳐 준다. 그에 대한 좋은 평판이 퍼진다. 그는 어떠한 모임에도 자신감과 위엄을 가지고 참석할 수 있다. 사후에 좋은 곳에 태어난다.”는 점을 꼽는다.
또, 관대한 사람은 인망을 얻고 고결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그와 어울리며, 재가자의 도리를 다한 것에 스스로 만족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베푸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과 아름다움과 행복과 활력과 지성을 주는 것이라고들 한다. 남에게 그와 같은 것을 베풀면 실은 자기에게 베푸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이 그 뜻을 간결하게 잘 드러낸다.
신심으로 베푼 보시는 언제 그 결실을 맺든지 재물과 아름다움을 얻게 하며, 그 위에 더 나아가 마땅히 공경할 사람에게 성의껏 공양을 올리면, 공손하고 충실하며 사려 깊은 자손과 아내, 부하와 아랫사람들을 얻게 된다.
때맞춰 베푼 보시으로는 커다란 부를 얻게 될 뿐 아니라 온갖 필요한 것들이 제때에 충족될 것이다.
오직 남을 돕겠다는 순수한 바람으로 베푼 보시는 막대한 부와 오관의 쾌락을 맛볼 수 있는 건강한 체질을 가져다준다.
자기와 남을 상하게 하지 않고 행한 보시는 화재, 홍수, 도둑을 막아 주고 통치자의 횡포나 원치 않는 사람이 상속자가 되어 일으키는 화근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해 준다.
성스러운 팔정도를 따르는 수행자들에게 베푼 보시는 마치 비옥하고 잘 손질되었으며 물이 충분한 땅에 뿌려진 씨앗이 많은 수확을 내듯이 놀라운 과보를 돌려준다.
아무 보답도 바라지 않고 보시한 사람은 범천에 태어날 수 있고 마침내 불환과를 성취하게 된다.
〈보시에 대한 분석의 경〉에는 보시를 베풀 대상과 그로 인한 공덕이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다. 동물에게 베푼 것은 백 배의 보답을 가져온다. 행실이 변변치 못한 보통 사람에게 베푼 보시는 천 배의 보답을, 계행이 훌륭한 사람에게 베푼 보시는 십만 배의 보답을 낳는다.
불교에 귀의한 사람은 아니더라도 감각적 욕망을 떨쳐 버린 사람에게 베푼 보시는 10억 배나 되는 과보를 가져오며 예류의 도(道)에 들어선 사람에게 베푼 보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과보를 가져온다. 하물며 예류과를 이미 성취한 사람이나 일래과, 불환과, 아라한, 벽지불 그리고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께 올린 보시는 더 말할 나위가 있으랴!
〈보시에 대한 분석의 경〉은 또한 승가에게 베풀어진 보시가 한 스님의 역량을 보고 그분 개인에게 주어진 보시보다 더 큰 가치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경전은 또한 “먼 훗날, 성직자의 표시로 노랑 가사만을 입었을 뿐, 계를 지킬 줄 모르고 사악한 성질을 지닌 사람들도 나올 것이다.
비록 그와 같은 승려들에게라도 승가에 대해 베푸는 것이 한 승려 개인의 역량에 대해 베푸는 것보다 훨씬 공덕이 크다.”고 설명한다.
부처님께서는 심지어 자기가 먹고 난 밥그릇을 씻은 물이라도
“이 개숫물 속에 있는 음식 찌꺼기가 땅에 사는 미물들의 먹을 것이 되기를 바란다.”
하고 후덕한 마음으로 버리면 그 또한 선행이 된다고 하셨다.
그러할진대 사람에게 음식을 베푸는 일이야 얼마나 큰 공덕이겠는가? 그러나 이 경전은 계를 지키는 덕스러운 이에게 베푸는 공양이 더 유익한 것임을 잊지 않고 강조하고 있다.
또 다른 경전은 여섯 가지 자질을 모두 갖춘 보시는 복되기 이를 데 없어 그 공덕의 크기를 상상할 수조차 없다고 가르친다. 이 가운데 세 가지는 보시자의 자질에, 나머지 세 가지는 받는 사람의 자질에 속한다. 주는 사람은 보시를 하기 전에는 주겠다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해야 하며, 주는 동안에도 즐겁고, 주고 난 다음에도 만족스러워야 한다.
베풀기 전이나 베푸는 동안이나 그 뒤까지 욕심의 흔적이 조금도 없는 고결한 마음이 보시물을 진정으로 숭고하게 만든다. 수혜자 또한 탐·진·치 삼독심에서 벗어난 사람이거나, 또는 이와 같은 마음의 때를 닦아내기 위해 이미 수행 길에 들어선 사람이어야 한다.
이처럼
훌륭한 자질을 지닌 사람들 간에 주고받는 보시는
그 공덕이 망망한 바다의 바닷물처럼 측량할 길이 없다.
율장 대품에 보면, 부처님께서 위사카 부인에게 큰 보시행을 함으로써 어떤 이로움을 얻었는지 물으셨을 때,
위사카 부인은 아낌없이 보시하면서 기대하는 공덕에 대해 지혜롭게 설명했다.
“어떤 비구, 비구니 스님이 어느 성위를 성취했다는 소문을 듣게 될 때 저는 그분께서 사왓티에 머문 적이 있다면 제가 항상 올렸던 공양을 분명히 받으셨으리라 믿습니다. 제 공양이 스님께서 성위를 성취하시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을 것을 생각하면 큰 기쁨이 일고 기쁜 마음에서 다시 환희심이 솟아납니다. 마음이 환희심으로 가득 찰 때 몸이 편안해지며 몸이 편안하면 행복한 느낌이 생기고, 이 행복감은 선정에 들도록 도와줍니다. 이것은 다시 오근, 오력, 칠각지를 계발하게 합니다. 이런 것들이 제가 아낌없이 보시를 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로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위사카 부인의 현명한 대답을 들이시고 기뻐하시며 그녀가 승가에 올리고자 하는 여덟 가지 보시를 쾌히 허락하셨다.
불교는 조금씩 자신을 비워나가는 과정을 가르친다.
우선 물질적인 소유물을 내주는 것으로 첫 걸음을 삼는다. 점차 마음속에 베푸는 성품이 자리 잡고, 그러한 성품이 사물의 실상을 꿰뚫어 보는 깊은 이해로 힘을 얻게 될 때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의 미망으로부터 깨어나게 된다.
이러한 단계에 이르면 어떤 사람은 재가자의 생활을 청산하고 출가의 길에 들어서기도 한다.
다음은 감관을 잘 제어함으로써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유혹들을 비워낸다.
그리고 깊이 들어앉은 번뇌들을 명상을 통해 제거하고 그 자리를 고결한 자질들로 채운다.
그러나 부정적인 요소들을 제거해 나가는 이 모든 과정은
보시의 실천에서 시작된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보시의과보 결과에 집착하지않고 순수한마음으로내는 진정한보시 실천하겠습니다 나모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