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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17일 금요일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제1독서 : 지혜 13,1-9
복 음 : 루카 17,26-3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6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28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29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30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
31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32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33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3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36)·37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교구청에 갈 일이 있을 때, 또 장례로 병원에 갈 때,
그밖에 송도를 떠나 도심지로 갈 때 자주 지나가는 동네가 있습니다.
바로 옛날에 그러니까 거의 50년 전에 살았던 동네입니다.
함께 차를 타고 있는 분에게 이 동네를 가리키면서,
“이 동네가 예전에 자그마한 동산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넓은 공터가 있기도 했지요.”라고 말하면 깜짝 놀랍니다.
왜냐하면 도저히 동산이나 공터가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이거든요.
이 동네에서 제가 기억하는 예전의 모습은 전혀 없습니다.
동산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 아파트들이 들어섰습니다.
갈대밭이 있었던 공터는 지금 많은 빌딩과 상가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당시에 어머니와 어머니 친구들이 함께 이야기 나누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때 어머니 친구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는 절대로 개발되지 않을 거야.”
이사 가자마자 곧바로 터미널이 생기는 등 개발이 이루어졌습니다.
어머니와 친구분의 예상은 불과 몇 년 만에 완전히 틀렸습니다.
그 뒤 그곳이 계속 발전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예상도 틀렸습니다.
터미널은 다른 곳으로 이전했고, 이제는 개발이 멈춰진 완전 옛날 동네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예상은 늘 틀렸습니다.
그런데 자기 예상은 꼭 맞을 것처럼 생각하고 또 그렇게 기대합니다.
정확하게 맞출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주님만이 틀림 없이 올바른 길로 가십니다.
하지만 여전히 틀린 주장을 맞는 것처럼 우기고 있던 우리가 아닐까요?
따라서 주님의 뜻만을 찾아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주님도 겸손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는 우리 역시 겸손의 모습으로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아 때, 사람들은 대홍수가 날 것을 알았을까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과연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예측할 수 있었을까요?
모두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종말을 준비하는 모습이 꼭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인간적인 기준을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주님의 기준을 따르면서, 주님의 뜻에 함께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연한 이치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종말도 언젠가는 반드시 오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는 것입니다.
이 당연한 이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노아 시대의 사람들,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과 같은 모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뜻이 아닌, 주님 뜻에 집중할 때 잘 준비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용서하지 않는 사람의 내적 고통처럼 큰 고통은 없다.
그것은 평안을 거부한다. 그것은 치유를 거부한다. 그것은 망각을 거부한다(찰스 스윈돌)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어제 <복음>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사람의 아들의 날”에 대한
때와 장소와 방식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이어서, 오늘은 재림을 맞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때에 벌어질 일을 물과 불에 의해 멸망하게 된 구약의 두 사건,
곧 노아(창세 6-7장)와 롯(창세 19장)때와 같을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재림’의 준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노아와 롯의 시대에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노아 때에 대해서,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그저 평범하게 살아갔음을 말하고 있을 뿐, 특별한 죄나 부패를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은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사랑에 소극적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의 죄가 아니라,
그들이 장차 일어날 일에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오직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들처럼, 비록 죄를 짓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인간적인 세속의 삶에 빠져 주님을 알려 하지도,
하느님을 경외하지도, 하느님의 의로움을 구하지도 않고,
타자를 향해 자신을 내놓은 사랑을 실현하지 않으면, 멸망을 당하리라는 말씀입니다.
<마태오복음>의 25장의 ‘심판의 비유’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들이 사랑하지 않았음이 문제였음을 말해줍니다(마태 25,31-47).
한편, 롯의 때에는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불과 유황으로 멸망 당하였습니다.
롯도 노아와 마찬가지로 장차 닥쳐올 재앙을 미리 알고서
소돔을 떠나는 조처를 취하고 구원받을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집안에 있는 세간 곧 소유물에 대한 애착으로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 17,33)
결국, 이 두 이야기는 ‘사람의 아들의 날’을 미리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먹고 마심과 자신의 소유와 목숨의 보존에 매이지 말고, 그때를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의 삶이 어디를 향하고, 누구를 향하여 있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곧 죽음을 향하여 있는지, 생명을 향하여 있는지를 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루카 17,37)
<오늘의 말·샘 기도>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 17,33)
주님!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을 향하여 살게 하소서.
제 삶이 썩어 부패한 시체의 삶이 되지 않게 하소서.
당신 말씀이 살아 팔딱거리는 생명의 삶이 되게 하소서.
자신의 보존을 향한 죽음의 삶이 아니라,
타인을 향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생명의 삶이 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초등학교 때의 기억입니다. 학년이 높아지면서 ‘소유’에 대한 집착도 커졌습니다.
짝꿍과 함께 쓰는 책상을 반으로 나누어 ‘줄’을 그었습니다.
줄을 넘어오지 말라는 경고의 표시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한심한 일인데 그때는 철이 없었습니다.
친구의 공책이 제 자리로 넘어 왔습니다.
저는 옮기라고 하면서 경고를 하였고, 친구는 무시하였습니다.
저는 친구의 공책을 찢었습니다. 이번에는 저의 교과서가 친구의 자리로 넘어갔습니다.
친구는 옮기라고 하면서 경고를 하였고, 저는 무시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친구가 저의 교과서를 찢었습니다. 사실 공책과 교과서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소유에 대한 저와 친구의 욕심 때문에 벌어진 참사였습니다.
결국 저와 친구의 이런 행동은 선생님의 레이더에 포착되었고
친구와 저는 아주 엄한 체벌을 받았습니다.
친구와 저는 책상을 나누었던 줄을 깨끗하게 지우면서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저의 공책이 넘어가도, 친구의 교과서가 넘어와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소유를 표시하던 줄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70년 전에 남과 북은 ‘정전협정’을 하였고 남과 북의 허리에는 ‘휴전선’이 생겼습니다.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면서 넘어갈 수도 없고,
넘어올 수도 없는 휴전선은 70년 남과 북의 분단선이 되고 있습니다.
북한은 땅굴로 도발하였고, 남한은 북한에 ‘총풍’을 요청하기도 하였습니다.
휴전선은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문제는 남과 북의 정치인들의 생각입니다.
휴전선을 자신들의 욕망과 정권을 채우려는 도구로 삼는다면
휴전선은 긴장과 갈등의 상징으로 남을 것입니다.
휴전선을 민족의 일치와 화해를 위한 도구로 삼는다면
휴전선은 평화와 생태의 관광지가 될 것입니다.
북한에 개성공단과 같은 경제협력 공단이 10개가 더 생긴다면,
남한의 철도가 북한의 철도와 연결되어서 남한의 수출품이 북한을 통해서 유럽으로 수출된다면
우리는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문화강국, 경제강국이 될 것입니다.
북한의 숙련된 노동과 남한의 세련된 기술이 만나면 마치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처럼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부디 남과 북의 지도자들이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남한과 북한의 국민들이 그런 판단을 할 수 있는 정치인들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자녀라고 자부하는,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자부하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목숨을 건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들이 넘어올 수 없는 장벽을 만들었습니다.
팔레스타인들의 생명줄인 물과 전기를 통제 하였습니다.
팔레스타인들을 정당한 재판 없이 체포하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 놓은 ‘선’으로 평화가 이루어지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들은 지하에 땅굴을 파 놓았습니다.
장벽 안에 갇힌 팔레스타인들은 분노하였습니다.
물과 전기를 공급받아야 하는 팔레스타인들은 가난과 굶주림에 지쳐갔습니다.
정당한 절차와 재판 없이 체포당하고, 죽어야 하는 이웃을 보았습니다.
분노와 굶주림 그리고 저항은 결국 ‘선’을 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기약 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참된 평화와 화해는 높게 쌓은 장벽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참된 평화와 자유는 제한된 물과 전기의 공급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참된 자유와 평화는 힘에 의한 억압과 탄압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을 알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
저는 초등학생 때 ‘소유’의 상징인 ‘선’을 지우면서 친구와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외줄 타기와 같은 긴장 속에서도
휴전선을 평화와 생태의 공원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도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답게
높은 장벽은 허물어 버리고, 자유롭게 왕래하며 참된 평화와 화해를 이루면 좋겠습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함께 새로운 노아의 ‘방주’를 만들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여드는 법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알지 못할 때 오시리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옛날 노아와 롯의 때처럼 세상 끝 날도 갑자기 닥칠 것이라 하신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방주를 짓는 오랜 세월 동안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방주를 짓는 일 자체가 설교였다. 그들은 산꼭대기에 방주를 짓는 노아를 비웃었다.
오늘날도 그들을 본받는 자들은 믿지 않는다.
구원의 방주인 교회가 세워지고 있지만, 그들은 역시 비웃고 있다.
홍수와 같은 심판이 그들을 위협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하였다.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27절)
홍수는 믿는 이들에게는 세례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죽음을 의미한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려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31절)
우리는 어떤 시련을 겪더라도 영적인 삶에서 육적인 삶으로 내려오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앞으로 나아간 사람은 지난날을 뒤돌아보거나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돌아서지 마라.”(31절)
하느님의 말씀이 뿌려져 영적인 열매를 갈망하고 덕성스러운 수고의 열매를 거두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변치 말고 부지런히 열매를 거두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32절)
롯의 아내는 뒤를 보는 바람에 소금기둥이 되었다.
남편이 도와주었지만 뒤돌아보는 바람에 결국 산에 이르지 못했다.
이러한 삶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어야 그 생명을 얻을 수 있다.
하느님의 심판 때 두 사람이 전 생애를 함께 지내 왔다 하더라도
하나는 선택을 받고 하나는 버림을 받을 수 있다.
선한 사람과 친하게 지냈다 해도 그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면 버림을 받는다는 경고이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결과가 다르다는 것이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37절)
믿음이 있는 곳에는 성체성사가 있고 거룩함이 머문다.
언제나 주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까마귀를 보면 기분이 나쁘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이른 아침 까치를 보면 반가운 손님이 오려나? 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까마귀를 보면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까마귀 색깔이 검은 탓도 있지만 그놈이 심하게 울어버리면
영락없이 동네의 앓던 어르신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까마귀가 흉한 일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분이 떠날 것을 사람보다 미리 안 것일 뿐인데 까마귀를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까마귀가 길조로 환영받습니다.
어린 까마귀는 어미의 극진한 도움을 받고, 커서는 제 어미를 철저히 보살피기 때문입니다.
제가 미국 샌디에이고에 있을 때는 매일 같이 까마귀를 보았습니다.
까치는 아예 보지 못했습니다.
까마귀를 흉조로 생각했으면 아마도 매일 기분이 언짢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루카17,3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한국 정서로 말하면 ‘주검이 있는 곳에 까마귀가 모여든다’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썩은 고기는 독수리를 끌어들이듯이 죄인들은 자기 삶에 심판을 불러들인다는 말씀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합니다.
“사람들은 언짢은 죽음을 두려워하나 언짢은 삶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심판이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지금 죄악으로부터의 자유와 회개의 문제입니다.
지금 여기서 천상을 이미 살고 있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심판은 하느님께서 하시기 전에 이미 내가 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삶이 심판의 자료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 심판이 있게 마련입니다.”
준비하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심판이 오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지금 여기서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 보듯 비춰봐야 합니다.
심판은 외부에서 오지 않고 자기 내부에서 이미 내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믿는 이들은 ‘자비는 심판을 이긴다’(야고2,12).는 것을 알기에
결코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죄가 아무리 막중해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그런 절망감에 빠지지 마십시오.
죄가 아무리 막중해도 하느님의 자비는
어떤 죄라도 용서하실 것이며, 이미 용서하셨습니다”(성 예로니모).
심판을 두려워하지 말고 삶의 태도를 바꿔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까마귀를 보고 기분 나빠할 것이 아니라
까마귀가 왜 몰려왔는가를 생각해야 할 시점입니다.
외적인 환경과 예기치 않은 일에 마음을 상할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무질서를 보고 언짢아해야 할 것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심판의 날은 곧 구원의 날입니다. 하느님을 마주하는 날입니다.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이에게는 그야말로 심판이고 죽음입니다.
노아는 많은 사람의 비웃음에도 믿음으로 방주를 만들어 생명을 얻었고,
롯과 그의 가족은 구원받았지만, 롯의 아내는 순종하지 않았고
세상에 미련을 두어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자비를 잊지 않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희망을 당신의 자비에 맡기게 하소서.
자비하신 하느님! 우리의 잘못을 기억하지 마시고,
우리의 죄악대로 우리를 벌하지 마소서!”
주님,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당신의 크신 자비뿐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아멘.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지금’ 그리고 ‘여기’에 종말이 있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가 언제 도래할지를 예수께 물었다.(20절)
그들은 구약을 통해 예고된 메시아가 올 때를 하느님 나라가 도래할 때로 믿고 있었다.
더욱이 그들은 하느님의 나라와 주님의 날이 요란하게 올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다고 했다.
예수께서 이미 메시아로 이 세상에 와 계신데 어떤 답을 줄 수 있겠는가?
들을 귀가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볼 눈이 있는 사람만이 메시아이신 하느님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21절)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언제’라는 질문에 ‘이미’, 그리고 ‘벌써’로 대답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다면,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시점이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은 곧 인자의 재림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세상에 와 있음을 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재림의 시기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22-35절)
그런데 재림의 정확한 시기와 장소에 대한 언급은 없고,
재림 때 일어날 일들에 대한 언급뿐이다. 그러나 분명히 그날은 온다.
단지 그날이 언제인지는 하느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날이 언제인지를 굳이 알고 싶으면 그날에 일어날 일들을 보고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통상 ‘날짜’를 먼저 정하고 난 뒤에 그날 ‘어떻게’할 것인지를 계획한다.
이 방법이 인자의 재림에는 통하지 않는다.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스스로 날들을 결정하지만, 재림의 시기는 하느님이 결정하신다.
인자의 재림은 곧 세상의 종말이기 때문이다.
그 종말의 날에 관하여 ‘언제, 어디서’ 보다는 ‘어떤 모양으로’
그날이 들이닥치는지를 깨달으라는 것이 오늘 복음의 요지이다.
따라서 ‘노아의 홍수’(창세 6-7장)와 ‘소돔과 고모라의 최후’(창세 19장)가 좋은 본보기가 된다.
노아 때의 사람들과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날들을 정하고
그날들에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심고, 집을 지었다.
그들은 온갖 죄악을 저지르고 부정과 부패를 일삼았다.
바로 그날에 그 사람들은 최후를 맞이 하였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日常 중에 최후를 맞이하였다.
노아와 소돔의 교훈은 일상 속에 최후의 날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최후의 날을 정할 수는 없지만 살아가는 날들 속에 그날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실 인간은 ‘지금과 여기’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아무도 ‘지금, 그리고 여기’ 있으면서, 과거나 미래의 시점에 있을 수 없으며,
다른 어떤 장소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후의 날과 장소도 바로 지금과 여기에서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이며,
그 완성도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그때가 되면 철저하게 혼자 서게 된다.(34-35절)
구원과 저주의 결정에 대한 책임은 누구나 스스로가 져야 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과거나 미래에 집착하지 말고
오직 ‘;오늘’, 그리고 ‘여기’에서 회개하고 기도하며,
최선을 다하여 자신보다는 남을 배려하며 사는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그날에 사람의 아들이 나타날 것이다.
이승화 시몬 신부
종말은 언제 올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쉽게 지치고 멈추게 됩니다.
마음은 간절하나 쉽게 나태해지고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며 스스로 타협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스스로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먼저 언제 올지 모르는 종말이기에
하느님께 대한 희망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그분이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시고 이끌어주시는지
지속적으로 확인하며 마음을 다져야 합니다.
이렇게 하느님께 대한 마음을 키웠다면
이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환경을 꾸며야 합니다.
같은 신앙인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적절한 책임감과 의무를 가지는 것도 좋고
묵상 노트나 기도 노트 등을 만들어
자신의 신앙생활을 꾸준히 돌보는 자세도 좋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준비하고
그 마음을 지속하기 위한 노력
이런 자세가 깨어있는 삶이고
우리의 영혼이 시체가 되지 않도록 생기를 불어넣는
근면 성실한 자세입니다.
무엇보다 이 모든 일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큰 기쁨이 되는 일임을 기억할 때
우리는 뒤를 돌아보지 않게 됩니다.
오늘 우리 역시 노아와 롯처럼
하느님의 오심을 준비하며 생명으로 나아가는
그런 기쁨 가득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 ‘시몬 신부의 신앙 이야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