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담마는 아야 케마 (Ayya Khema)의 “지금 여기서 보기 위하여(To be seen here and now)”의 마지막 10번째 단원인
“매일 최상의 날이 되기 위하여 (making the most of each day)”를 번역한 내용입니다.
~~
이제 수행처에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다.
가능한 많은 이로움을 얻기 위해, 자신의 일상 생활을 어떻게 체계적으로 해야 할지를 알아야 한다.
돌아가서 예전에 한 것과 똑같이 한다면, 일주일 내로 모든 것을 완전히 잊게 된다.
그러면 다음에 명상코스에 와서는 모든 것을 다시 반복해야 한다.
이번 생에 충분한 시간이 있는지 여부를 누가 알겠는가?
이번 생은 우리가 책임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지금 여기서 자신의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에 대해 약간의 제어력을 지니고 있다.
내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내일 명상할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내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현재만 존재할 뿐이다.
다음 생이 오게 되면, 그것은 바로 현생이다.
실제로 지금이 우리의 내생이 되는 것이다.
오늘 명상하지 못하는 수 많은 이유를 찾는 것은 언제든지 가능하다.
자녀, 날씨, 남편, 아내, 사업, 경제, 음식, 무엇이든 될 것이다.
그 무엇을 먼저 할 것인지 여부는 엄밀히 우리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미래는 존재하지 않고, 과거는 완전히 가버렸다면,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정말 아주 덧없는 순간. 바로 이 순간뿐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말하는 순간보다 더 빨리 지나가 버린다.
그러나 각 순간을 숙련되게 활용한다면,
결국에는 순간 순간의 알아차림을 지닐 수 있고,
그것이 깊은 통찰을 낳는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최초로 해야 할 일은 알아차림 두기를 결심하는 것이다.
자신의 눈을 뜨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고, 알아차림의 시작이다.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자신의 눈을 떴다면, 눈을 감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면 된다.
그리고 그러한 조그만 사건부터 알아차림에 대한 이해와 그것의 의미를 알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또 다른 하루를 가지는 것에 충분히 감사하는 마음을 지닐 수 있다.
더 좋은 음식을 요리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새로운 물건을 사기 위해서도 아니며,
오직 닙바나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이다.
닙바나를 성취할 수 있기 위해서는 충분한 지혜가 필요하다.
붓다께서 반복적으로 그것을 이야기 하지만,
우리는 그 말뜻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그의 모든 가르침에 완전히 열려 있지 않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자주 들을 필요가 있다.
감사하는 마음 상태가 되면, 수용할 수 있는 상태와
“오늘 하루를 무엇을 할 것인가?”하는 즐거운 기대를 갖게 된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자리에 앉아 명상을 하는 것이 될 것이며,
아마 좀 더 일찍 일어나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자리에서 죽는다.
그것은 죽기에는 완벽한 장소이지만,
불필요하게 오랜 동안 보내기에는 완벽한 장소가 아니다.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아침 여섯 시가 되면 일어나기 시작하고, 그리고 시끄럽게 된다.
그렇다면, 그것을 피하기 위해 충분히 일찍 일어날 필요가 있다.
그것만으로도 닙바나에 가까이 가기 위해 무엇인가 특별한 일을 한다는 만족감을 줄 것이다.
한 시간 동안 명상할 수 있다면, 아주 좋다.
최소한 30분 이상 명상하도록 하라.
왜냐하면 마음이 가라앉고 집중하는 데에는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침 시간은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시간인데,
그 이유는 밤 동안에는 낮처럼 수 많은 민감한 느낌에 의한 시달림을 받지 않기 때문이며,
따라서 비교적 조용하다.
만약 30분 동안의 명상부터 시작하여 1시간이 될 수 있도록 천천히 늘려간다면,
그것은 좋은 프로그램이다.
우리는 매 주마다 하루의 수행에 10분씩 늘릴 수가 있다.
명상을 마친 후에는, 이제 마음이 고요해지고, 집중되어
내면 깊숙이 도달하기 위한 보다 많은 능력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매일 기억하여야 할 다섯 가지를 숙고할 수 있다.
나는 자연히 쇠퇴하게 된다. 나는 쇠퇴함을 피할 수가 없다.
나는 자연히 병들게 된다. 나는 병듦을 피할 수가 없다.
나는 자연히 죽게 된다. 나는 죽음을 피할 수가 없다.
소중하고 즐거운 나의 모든 것들은 변하고 사라질 것이다
나는 내 업의 주인이며, 나는 나의 업에 의해 태어났다. 나는 나의 업과 연관되어 있다.
나의 업에 의해 지지되어 살고 있다. 내가 행하게 되는 좋거나 나쁜 업을 물려 받을 것이다
정확한 말들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말은 개념으로서, 오직 그 의미들이 중요하다:
우리 몸의 무상함,
우리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나 소유물들의 영원하지 않음,
그리고 우리 자신의 업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
또 달리 기억하여야 할 것은 자신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과 친절한 태도를 지니는 것과
자기 자신의 행복을 지키고, 모든 존재가 행복해지도록 바라는 것이다.
내가 증오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해로운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몸과 마음이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내 자신의 행복을 지킬 수 있게 되기를,
모든 존재들이 증오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모든 존재들이 해로운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모든 존재들이 몸과 마음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모든 존재들이 자신들의 행복을 지킬 수 있기를,
이러한 두 가지 면을 의미 있는 방식으로 회상하게 되면,
우리는 마음속에 세가지를 지닐 수 있다.
먼저 존재들이 일반적으로 널리 행하는 방식에 대한 순수한 주시인 알아차림이 온다.
그것은 마음의 방황함이 없는 육체적 행동일 수 있다.
혹은 일어난 느낌이나 어떤 생각일 수도 있다.
완전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산만한 쓰레기 속에 그것을 파묻으려 하지 않고,
단지 자신의 삶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다.
육체적 활동에 자신의 주의가 요구되지 않을 때에는,
다시 생각을 자신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 무상함을 향하게 할 수 있으며,
그리고 짧은 시간에 우리가 유용하게 할 수 있는 것을 기억할 수 있다.
-
(아야 케마) |
*** 매일 수행을 통하여 마음의 평온과 지혜가 함께 하길 기원합니다 ***
올바르게 숙고할 때, 친절함과 사랑, 그리고 유익함이 먼저 해야 할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을 도울 필요는 없다,
같은 집에 살고 있을 한 사람이라도, 돕는다면 유익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태도와 동기이지, 그 결과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일을 하기를 원하나, 보답을 기대한다.
그것은 정신적 물질주의이다.
자신들의 선행에 대하여, 최소한 보다 멋진 미래의 삶과 같은 어떤 형태의 보답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것 또한 고통을 얻는 것과 동일하다. 돈으로서가 아닌 결과들을 통해서,
그러한 두 가지 태도 모두를 놓아버릴 수 있으며, 새롭게 인식을 재구축할 수 있다.
“이것은 내가 지닌 유일한 하루다. 이 시간들을 가장 유용한 곳에 활용하자”.
“이번 생에서 이런 짧은 시간밖에 없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러한 이해로부터 우리는 닙바나(Nibbana)에 가까이 가기 위하여 행동할 수 있다.
자기중심, 자기위주, 자기확신, 개인적인 좋아함과 싫어함 등을 가도록 버려 두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자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라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번 생에서 자아를 확신하고 뒷받침하면 할수록,
그것 자체가 줄어드는 대신 더 커지고 더 비대하게 된다.
우리가 자기 자신만의 중요성과 자신에 대한 배려와 관심만을 생각하면 할수록,
열반으로부터는 더욱 멀어지게 되고, 자신의 삶 안에서 평화와 행복이 일어나는 기회는 줄어든다.
아주 뚱뚱한 사람이 좁은 문을 통과하고자 한다면,
그의 몸이 문 한쪽에 부딪치고 다치게 될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극히 비대한 자아(Ego)를 지니고 있다면,
그는 계속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부딪칠 것이고 불쾌하게 될 것이며,
다른 사람들의 자아는 그가 부딪치는 문설주가 된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유형의 경험을 반복적으로 하게 되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그것이 다른 사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오직 우리 자신에 관한 문제라는 것이다.
매일 이러한 사색과 숙고로서 시작한다면,
자신에 대하여 지나친 관심을 갖지 않게 되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경향으로 바뀔 것이다.
어떤 사고든 일어날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다.
그러한 사고들은 우리가 알아차림을 두지 않은 사고들, 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주의를 소홀히 함에 따른 사고들,
성급함, 본능적 반응 혹은 다른 사람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사고들이다.
이러한 사고들은 그것들이 무엇인지, 즉 말 그대로 사고인지, 주의를 두지 않음에 따른 것인지를 보아야만 한다.
다른 사람이나 자신에게 따라 다니는 비난은 없다.
우리는 단지 알아차림을 두지 않은 특정한 순간을 볼 수 있어야만 하고,
다음 번에는 그것을 고치려고 하여야 한다.
완벽히 깨달은 아라한만이 그런 종류의 사고들이 없다.
붓다께서는 감정의 들어내는 것이나 그것의 억제를 가르치지는 않았다.
대신 그가 가르친 것은 네 가지 고귀한 마음(brahma viharas,慈悲喜捨)이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가치 있으며, 그 외 다른 모든 것들은 알아차려지고,
다시 진정되도록 놓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화가 일어난다면, 그것을 억압하거나 표현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화가 일어난 것을 반드시 알아차려야 하며,
그렇지 않게 되면, 자신의 반응을 결코 바꿀 수가 없다.
우리는 그것이 일어나고 그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어렵다.
화는 빨리 진정되지 않는다.
그 대신 화를 표출하는 것은 우리 생을 구성하는 특정한 하루가 매우 불운한 사고를 포함한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기억함으로써,
우리는 화를 대체시키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있다.
하나의 감정을 완전히 놓아버리는 것보다 다른 것으로 대체시키는 것이 더욱 쉽다.
놓아버리는 것은 그냥 가도록 하는 신중한 행위를 의미한다.
명상에서 배운 대로 우리는 산만한 생각을 호흡에 집중하는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
즉, 매일의 생활에서 불건전한 것을 건전한 것으로 대체시키는 것이다.
화는 대게 다른 사람들을 향해 일어난다.
동물들이나 우리가 모르는 사람이 하는 행동은 우리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자신이 알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관심을 지닌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아주 좋은 자질들과도 친숙해야만 한다.
그 사람들의 어떤 부정적인 행동을 자주 생각하고 말하는 대신에,
그들에 대하여 유쾌한 것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
비록 그들이 방금 우리가 싫어하는 말을 하였을지라도, 다른 때에는 좋은 것들을 말하였었다.
그들은 선한 일들을 했고, 사랑과 동정을 보여 주었다.
이것은 우리가 명상에서 배운 것처럼 자신의 주의의 초점을 바꾸는 문제다.
이것이 명상을 통해서 아주 습관화되기 전에는, 일상생활에서 그렇게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지속적인 수행을 통하여 그것이 가능하게 된다.
*** 매일 수행을 통하여 마음의 평온과 지혜가 함께 하길 기원합니다 ***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수행을 하여야 한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주의를 올바른 곳으로 기울이게 한다면,
바로 그것이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의 전부다.
그러면 나쁜 업을 짓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하루를 망치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여야 하는 것은 우리가 또 다른 하루를 가질 수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생각, 말, 그리고 행동에 따른 즉각적인 결과는 아주 분명하다.
계속하여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면, 건전한 감정과 생각은 평화와 행복을 가져오고,
반면 불건전한 것들은 그 반대의 것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오직 바보만이 자신을 의도적으로 불행하게 만든다.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서 모든 불건전한 것을 제거토록 해야 하며,
건전한 것으로 대체해야 한다.
우리 모두 단 한가지만을 찾고 있는데, 그것은 행복이다.
불행은 오직 자신만의 관념이나 반응을 통해 일어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행복과 불행의 창조자이며, 그것을 통제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명상이 잘 될수록, 그것이 더욱 쉬워지는데,
마음은 이것을 행할 근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산만한 마음에는 강력함과 힘이 없다.
우리는 하룻밤 사이에 완전함을 기대할 수 없으므로, 지속적으로 수행을 해야 한다.
얼마 동안 수행한 후에 뒤돌아본다면, 어떤 변화를 볼 것이다.
만약 하루나 이틀이 지난 후 뒤돌아 본다면, 거기에 어떠한 새로운 것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자라는 채소와도 같다.
땅에 씨를 뿌리고 난 다음날 그것을 파버린다면,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씨앗뿐이다.
그러나 씨앗을 돌보고 기다린다면 싹과 초목을 볼 것이다.
순간순간 점검하는 것은 별 소용이 없지만,
과거를 점검하는 것은 도움이 되고,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
매일 하루를 마감하는 시점에 대차대조표를 만드는 것은,
아마 그것을 기록하는 것일지라도, 훌륭한 수행이 될 수 있다.
훌륭한 상점 관리자는 그 날 마지막에 상품을 점검하고,
어느 것이 고객들에게 잘 팔리는지 그리고 어느 것이 선반에 재고로 남아 있는지를 볼 것이다.
그는 선반에 남아있는 것은 다시 주문하지 않고, 잘 팔리는 상품만 다시 주문할 것이다
우리는 그날 그날 자신의 행위와 반응들을 점검할 수 있고,
어떤 행위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행복으로 이끄는지, 그리고 어떤 것이 거절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거절되는 것들은 다음날 다시 주문하지 않고, 단지 선반에서 사라지도록 놓아 둔다.
만약 우리가 매일 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동일하게 수용되는 행위와 거절되는 행위를 발견할 것이다.
친절, 따뜻함,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 도움, 배려와 돌봄 등은 항상 받아 들이게 된다.
사리사욕, 싫어함, 거절, 논쟁, 시기는 항상 거부된다.
단 하루만일지라도 우리의 모든 행위를,
그것이 행복을 생산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차변과 대변에 기록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동일한 자극에 동일한 반응을 반복적으로 되풀이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러한 대차대조표는 사전에 프로그램화된 불건전한 행위들을 중단 시킬 수 있는 강력한 자극을 줄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행위들을 수년 간, 여러 생에 걸쳐 지속적으로 행해 왔으며, 그것들은 항상 불행을 초래해 왔다.
만약 그것들을 기록으로 점검하거나 우리 마음 안에서 명확히 본다면,
우리는 분명히 변하려 할 것이다.
알아차림을 두기를 결심하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매일 기억할 것들을 숙고하며,
오늘이 우리가 지니고 그것을 가장 능숙하게 활용할 수 있는 유일한 하루라는 것을 깨닫고,
저녁에 대차대조표에서 그것을 점검하는 것은 우리에게 하루 안에 전체 생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만약 이것을 조심스럽고 습관적으로 행한다면,
우리의 다음 생인 다음 날에 유익한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논쟁하고, 싫어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고민하는 날을 갖게 되면,
그 다음날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하루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과 관심을 주는 날이었다면,
다음 날 동일한 존재 형태로 일어날 것이다.
잠들기 전의 마지막 생각이 아침에 깨어날 때의 첫 생각이 된다.
물려받은 업이 다음날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또 다른 다음 생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것은 너무나 막연하고 알 수 없기에,
바로 지금 그렇게 하고, 내일 그 결과들을 보라.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자애명상을 수행하는 것이 좋다.
그것을 그 날 밤에 마지막으로 하는 것이 되면,
아침에 자신의 마음 안의 첫 번째 것이 될 것이다.
자애명상에 관한 붓다의 말씀은
“행복하게 잠자리에 들면, 나쁜 꿈을 꾸지 않고, 행복하게 깰 수 있다”.
더 이상 물어볼 것이 있는가?
매일매일 이러한 원칙을 동일하게 적용한다면,
우리 삶이 조화롭게 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자신의 삶의 하루 하루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 자신을 제외한 다른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의 하루 하루를 최대한 활용하도록 하는데 관심이 없다.
오직 자신의 삶을 최대한 활용하는데 관심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자신의 행복을 남에게 의존할 수는 없지 않는가?
자신의 명상 수행에 관한 한, 그것이 옆으로 흘러가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매일 그렇게 하기를 지속한다면, 최소한 안거 수행을 하면서 얻게 된 기본을 지킬 수 있고,
아마 그 위에서 진보할 것이다.
훈련을 중도에 그만 둔 육상선수는 처음부터 그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처럼,
그와 동일하게 마음도 훈련과 집중을 필요로 한다.
그 이유는 마음이 그 집안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마음 이외에 우리에게 어떤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는 마음이 스스로 새로워질 수 있도록, 편안하게 하고,
잠시라도 생각을 멈추게 하며, 평화와 고요한 순간들을 지닐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한 에너지의 재충전이 없다면, 다른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마음도 쇠퇴하게 된다.
만약 우리가 마음을 돌보면, 마음은 우리를 돌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자신의 매일 일상의 활동과 수행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한 개략적인 내용이다.
담마가 명상코스나 특별한 날을 위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담마는 삶의 방식이다.
담마 안에서 우리는 이 세상의 무상함과 불만족을 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진리를 자신의 가슴 안에서 깨달아야 하며,
단지 그렇게 생각만 하는 것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가 이러한 방식으로 매일 수행한다면,
자신의 근심 걱정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움을 발견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러한 걱정과 근심은 항상 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담마(Dhamma)는 이 세상을 초월한다.
첫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