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11월 18일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제1독서 : 지혜 18,14-16; 19,6-9
복 음 : 루카 18,1-8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2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3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4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5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6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7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안성기 배우를 잘 알 것입니다. 80년대부터 최고의 주연배우로 활동했었지요.
그러나 90년대 중후반부터 영화에서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솔직히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 영화에 나오는 그의 모습이 너무 어색했습니다.
그렇다면 안성기 배우 본인은 어떠했을까요?
본인도 이 조연의 역할을 받아들이기가 전혀 쉽지 않았습니다.
이제 겨우 40대 후반인데, 벌써 뒤로 밀려났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역할을 맡은 것이 오히려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주연이 아니더라도 존재감 있는 배역은 얼마든지 있었으며,
역할의 크고 작음보다 작품 자체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꾸준히 연기 활동을 계속했기에,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국민배우 안성기 씨가 된 것입니다.
우리 각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주연이 되고 싶지만, 주연만 할 수 있는 세상이 절대로 아닙니다.
주연은 딱 하나밖에 없지만, 그래도 비중 있는 조연 역할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비록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하느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멋진 역할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멋진 조연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주연이 아니라고 포기하고,
겨우 조연만 한다면서 포기하고, 내가 엑스트라 역할을 할 사람이냐면서 포기하고….
삶 안에서의 포기는 결국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지는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면서
하나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입니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재판관이지만,
귀찮을 정도로 계속 찾아오는 과부의 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하시지요.
하물며 하느님께서는 어떠하시겠냐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우리의 마음만 있다면,
그래서 삶 안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약간의 노력만 있어도 하느님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하십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올바른 판결을 곧바로 받게 됩니다.
또한 믿음은 세상의 것과는 많은 차이를 드러냅니다.
즉, 세상 것에 대한 욕심과 이기심이 가득할수록 주님을 향한 믿음을 갖추기란 쉽지 않게 됩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뜻에 함께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용기란 주어진 상황을 헤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를 품고 가는 것이다(최유안).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막바지 길에서 '기도'에 대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기도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는 뜻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비유입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말씀은 대체 어떤 기도를 말하는 걸까?
흔히 ‘기도의 황금률’이라 불리는 이 기도를 우리는
'끊임없는 기도'(Laus perennis), ‘항구한 기도’, ‘지속적인 기도’,
‘중단 없는 기도’ 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교회 전승 안에서, 주로 서방교회에서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의 형태로,
동방교회에서는 ‘예수기도’(εύχη Ιησοû)의 형태로 전승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말씀은 대체 무슨 뜻일까?
그것은 우선, ‘끊임없이 주 하느님을 향하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기도는 하느님을 ‘향하여’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마음이 동반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기도가 주님을 향하여 있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의 넋두리요, 하소연이요, 자기 한탄이요, 독백일 뿐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그 어떤 누군가가 아닌, 바로 우리 ‘주님을 향하여’ 있고,
우리 주님과 관계 안에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곧 그것은 주님을 믿고 주님께 희망을 두고 주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언자 사무엘은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죄”(1사무 12,23)라고 말합니다.
만약 하느님과 관계 맺지 않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지 않는다면,
곧 하느님이 아닌 다른 우상을 향하게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말한 대로,
인간은 ‘하느님을 향하여 방향 지워진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보다 앞서
우리의 주 님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루가 18,1)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그분이 계시기에, 기도하기를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희망하기를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과부가 판결해 주지 않는 재판관 앞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간청하기를 포기하지 않듯이 말입니다.
사실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음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우리의 믿음을 찾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2,8)
그러니 이 '끊임없는 기도'는 '사람의 아들이 올 때'까지의 지속되어야 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이를 '루카 복음의 소묵시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도하기를 결코, 멈추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곧 하느님을 향하여 있기를 멈추지 말아야 하고,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머물러 있기를 멈추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기도하는 한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한 민족보다 위대하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세상에서 하느님의 살아있는 증거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
주님!
제 마음이 당신을 향하게 하소서.
이미 제 마음 안에 와 계신 당신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늘 저를 향하여 있는 당신을 외면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 믿음을 두고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당신의 희망이 저의 희망이 되게 하시고 낙심하지 말게 하소서.
늘 제 안에 살아계신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세상으로 나오려는 알 속의 새와 알 속의 새를 만나려는
어미 새의 노력이 같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깨달음을 얻으려는 이와 그 깨달음을 얻으려는 이를 도와주려는 스승의 뜻이
동시에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지창조를 나타내는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본 적이 있는지요?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손가락과 이제 막 창조되려는 아담의 손가락이 만나는 그림입니다.
바로 그 순간을 줄탁동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줄탁동시가 한쪽으로 치우치면 깨달음의 길에서 멀어집니다.
줄탁동시가 한쪽으로 치우치면 집착이 됩니다.
성급한 마음으로 어미 새가 아직 여물지 않은 알 속의 아기 새를 쪼아서 꺼내려 한다면
아기 새는 하늘을 날 수 없는 새가 됩니다.
명문대를 나온 능력 있는 아버지가 아직 부족한 아들을 자꾸만 몰아세운다면
아들은 바르게 자라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줄탁동시는 상당한 인내와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존경하는 선생님이 있습니다. 평생 ‘복음화’를 위해서 헌신하신 분입니다.
지금도 복음화를 위해서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습니다.
허리가 아파서 병원엘 갔는데 염증이 퍼져서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앉아 있을 수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앉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제 걸을 수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걷게 되었다고 합니다.
의사 선생님도 그런 경우는 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앉고,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선생님의 간절한 기도가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선생님 주변에서 선생님을 아끼고, 사랑하는 많은 분들이 기도했다고 합니다.
선생님의 간절함과 주위 분들의 뜨거운 기도가 만났습니다.
저는 이 또한 줄탁동시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이야기기 생각납니다.
“주님께서 기회를 주셨을 때 일을 해야 합니다. 밤이 되면 일을 못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지금 밝은 대낮에 살고 있습니다.
주어진 그 시간 최선을 다하고 죽을 힘을 다해 주님께 봉헌해야 합니다.
저는 그때의 체험 이후 지금까지 죽을 힘을 다해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죽을 힘을 다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이끌어 주신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느 백화점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백화점 식품부에서 한 여성이 포도를 보고 있었습니다.
겨울의 포도는 가격이 제법 비쌌습니다.
20,000원의 가격이 있었습니다. 여성은 2,000원밖에 없었습니다.
하염없이 포도를 바라보는 여성에게 직원이 물어보았습니다.
포도를 사시려고요?
여성은 사고 싶은데 2,000원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직원은 가위를 가져와서 포도를 잘라서 2,000원어치를 주었습니다.
여인은 감사의 눈물을 흘리면서 포도를 가져갔습니다.
딸을 위한 어머니의 간절함과 백화점 직원의 따뜻한 마음이 만났습니다.
저는 이 또한 줄탁동시라고 생각합니다.
며칠뒤 신문에 여인의 포도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여인의 딸은 백혈병으로 삶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딸은 마지막으로 포도가 먹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백화점의 식품부로 갔었습니다.
딸을 치료하던 의사가 포도를 먹고 하느님의 품으로 갔던 소녀의 이야기를 신문에 기고했습니다.
나의 따뜻함이 지금 어려운 이웃을 위한 ‘줄탁동시’가 되면 좋겠습니다.
지금 내가 가슴이 뜨거운 것은 누군가가 나를 위해 ‘줄탁동시’가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믿고 바라고 사랑하자.
반영억 라파엘 신부
저는 기도에 관해 이야기할 때
“믿고 바라고, 믿고 감사하고, 믿고 기뻐하고, 믿고 사랑하자!”하고 말합니다.
기도할 때는 무엇보다 믿음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또한 믿는 바는 반드시 이루어 주시니 미리 감사해야 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고 은혜를 입었으니, 그분께서 바라는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그분의 뜻을 헤아리고 그분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잘못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 잘못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그러므로 끈기 있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다만 우리가 원하는 때, 원하는 방법으로 주시지는 않기 때문에 인내가 필요합니다.
기도는 하면 할수록 더 잘하게 됩니다.
우물쭈물, 어영부영, 할까 말까? 망설이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4,6-7).
우리는 기도함으로써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되고 그리하여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사실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기도의 참맛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알베리오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기도하신 바와 같이 기도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방법대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18,1)는 뜻으로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재판관이 한 과부의 끈질긴 청을 못 이겨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는 자기의 기도가 받아 들어지지 않을 때나 지치고 싫증이 나서 그만두고 싶을 때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기도 하다가 “얼마나 더” 청해야 하는가? 할 때도 있습니다. 바로 그때야말로 기도할 때입니다.
끈기 있는 기도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끈기 있는 기도가 ‘꼭 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하되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한두 번이 아니라 천번 만번 거절을 당해도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열릴 때까지 두드리지 않으니까, 문이 안 열리는 것입니다.
문 안에는 반드시 그 문을 열어줄 하느님의 손이 있습니다.
모든 기도는, 그냥 한번 건성으로 해보는 기도가 아니라면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그러므로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1,6-7).
시편에도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여라.
그분께서 네 마음이 청하는 바를 주시리라.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라고 적고 있습니다.
부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청하면 그 청을 반드시 들어 주신다는 확신을 지니고
하느님께 떼를 쓰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소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
조욱현 토마스 신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1절).
예수께서는 불의한 재판관에게 계속 졸라 대어 결국 자신의 말을 듣게 만든 과부의 예를 드셨다.
과부가 재판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정이나 동정심에 호소해서가 아니라,
지치지 않고 졸라댔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항구하게 기도하면 자비롭고 의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들어주신다.
재판관과 과부, 둘 다 고집스러운 사람들이다. 과부의 끈질긴 기도가 좀 더 고집스러웠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의와 인간을 업신여기는 사악함을 과부의 끈질긴 청원이 이겼다.
불의한 재판관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여자의 억울함을 풀어 주었다.
우리도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한다면
하느님의 은총과 정의가 우리의 본성에 맞는 열매를 얼마나 많이 맺게 하겠는가?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간구하는 사람들의 청을 얼마나 잘 들어주실지 깨닫기를 바라신다.
가난한 과부의 끈질김이 사악하고 불의한 재판관조차도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우리를 모른 척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하다.
우리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당신께서 원하시고 더 좋은 때에 들어주실 것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을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부서진 마음과 꺾인 영을 안고 기도해야 한다.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더 좋은 방법으로 들어주실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올 때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8절) 하신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갈 것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마지막 때에 옳고 흠 없는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충실한 종으로서,
그분의 영광을 거스르는 자들의 사악함과 유혹에 흔들리지 않게 해주시기를 기도하며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항상 기도하는 자세를 갖도록 하고 그 기도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고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기도가 되도록 해야 한다.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은 내가 원하는 대로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나에게 이루어 주시도록 맡겨드리는 자세를 가지고 기도하여야 한다.
참된 기도는 나 중심의 기도가 아니다.
항상 하느님 중심으로 찬미와 감사가 선행되는 기도를 바치도록 하여야 한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집요하게 졸라대는 과부의 비유를 통해
우리의 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자들과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가르침의 요지는 간단합니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
낙심(落心)이라는 단어가 참 재미있습니다. 떨어질 락에 마음 심자입니다.
마음이 바닥으로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뭔가 추구하던 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다 보니 맥이 풀리고 마음이 상함을 의미합니다.
그런 경우 많이 체험하실 것입니다.
한 가지 특정한 목표를 정해놓고, 9일 기도를 넘어 54일 기도를 바친다든지,
한 달 내내 새벽 미사를 다닌다든지, 정말 열심히 기도했지만, 목적했던 바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을 때, 우리는 그야말로 낙심(落心)합니다.
지향이 적당한 것이면 청이 수락되지 않아도 그러려니 할 텐데,
심각한 문제라면, 누군가의 일생이 달려있고,
생사가 좌지우지되는 문제라면, 낙심 정도가 아니라
마음이 산산조각 부서지고 깨어지는 느낌일 것입니다.
요즘 주변을 둘러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낙심하며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낙심을 넘어 좌절하고 절망하고, 포기하고 울부짖습니다.
더 이상 한발자국도 나아갈 힘도 없어, 엎어져 있습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조금 더 힘을 내어보라 초대하십니다.
지금 하루 두 시간 기도하고 있는 우리에게,
그것으로 부족하다, 밤낮으로 부르짖어 보라고 요구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 거리시겠느냐?”(루카 18,7)
따지고 보니 지금 우리가 바치는 기도에 조금 더 추구될 사항이 있습니다.
보다, 간절함입니다. 보다, 절박함입니다.
그냥 간절한 기도가 아니라 목숨을 건 간절한 기도입니다.
육체는 물론 지니고 있는 모든 에너지를 총동원한 기도,
정신과 영혼, 일생 전체를 건 간절한 기도입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런 기도를 바치는 과정에서 주님께서 내 가까이 현존하신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내 기도의 지향이 정말 올바르고 순수한 것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청원의 수락 여부보다는
나와 하느님 사이에 주고받는 친밀한 대화,
부모와 자녀 사이에 이루어지는 진솔한 대화,
그것이 얼마나 좋은 기도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 내가 드리는 기도는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의 ‘과부의 끈질긴 간청을 들어주는 거만한 재판과의 비유’는
루카 복음에만 있는 고유사료이다.
비유릐 소재는 루카가 즐겨 주제로 삼아 보도하는 기도에 관한 것이다.
그것도 인내와 끈기를 동반한 기도의 자세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중요한 점은 비유자체의 이야기에 있다기보다는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라는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격려에 있다.
그것은 오늘 복음이 기도에 대한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라
종말(8a절)을 대비한 유비무환의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비유의 내용처럼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언제나 기도하며 용기를 잃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도하는 데 있어서 얼마만큼 인내와 끈기를 가져야 하는가?
오늘 복음에서 과부의 끈질긴 간청을 들어주는 거만한 재판관의 비유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으로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신 후에
성가실 정도로 끈질긴 친구의 청에 빵 세 개를 내어주는 비유(11,1-13)를 상기시킨다.
성가실 정도의 끈질긴 간청을 어제는 친구가 들어주고,
오늘은 거만한 재판관이 들어줄지언정 내일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8b절)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쉽게도 예수께서는 종말을 기다리다 지쳐 이미 믿음을 포기한 사람들을 내다보시고 계신 것이다.
따라서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간청하기를 수도 없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염치불구 하고 끝까지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11,9)는 것이다.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켜 줄 수 있는 것은, 인내와 끈기를 동반한 기도뿐이다.
이미 지나간 복음에서 인자의 재림과 종말에 관한 표징들이 언급되었다.(17,20-37)
노아의 홍수(창세 6-7장) 때나 소돔과 고모라의 최후(창세 19장)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 그리고 ‘여기’라는 日常 안으로 종말이 들이닥칠 것이 분명하다.
일상 안으로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종말을 피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더욱이 그날이 언제가 될지를 모르고 살아간다면 다리를 펴고 잘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잃지 말고, 언제나 기도하되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하라는 것이다.
사실 종말의 ‘그날’이 언제일지 정확히 안다는 것도 모르고 있는 만큼 불안하고 힘든 일이다.
알고 있다면 그날을 향하여 한 걸음씩 다가서는 두려움과 각박함,
그야말로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찬 ‘시한부 인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고,
모르고 있다면 넉넉함과 막막함의 엇갈린 긴장으로 불안한 인생을,
그래서 지치고 쉽게 포기할 수도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그리고 ‘여기’에서 ‘그날’을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기뻐하고 감사하며 희망을 가지고 ‘오늘’ 기도하는 사람은
늘 기도하는 사람이다.(로마 12,12; 골로 4,2; 1데살 5,17)
우리들 가운데 고통을 받거나 죄를 지은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위해 ‘오늘’ 기도해 주어야 한다.
올바른 사람의 기도는 ‘오늘’이 가기 전에 바로 효과가 있을 것이다.(야고 5,13. 15-16)
성령의 도우심으로 ‘오늘’ 기도하는 사람은 믿음의 터전 위에 스스로를 세우는 것이다.(유다 1,20)
그것은 하늘나라의 원로들이 향이 가득 담긴 금으로 된 대접을 가지고
어린 양 앞에 엎드리기 때문이다.
그 향은 곧 ‘오늘’ 우리가 바친 기도이다.
그때 대천사가 금향로를 들고 와서 ‘오늘’ 우리가 바친 기도를
향에 섞어 향로에 넣고 황금 제단에 태워 올린다.
그러자 대천사의 손으로부터 ‘오늘’ 우리가 바친 기도를 태운 향의 연기가
하느님 앞으로 올라가기 때문이다.(묵시 5,8; 8,3-4)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부르짖으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이승화 시몬 신부
간절한 기도는많은 것을 변화시킵니다.
기도를 하는 자신이 먼저 겸손해지고
내가 무엇을 바라보고 희망해야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변화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자신이 머물고 있는 환경이 변하게 됩니다.
세상의 기쁨이 아니라
참된 행복을 추구하게 되고
세상 안에서 참된 행복으로 이어주는 요소를
하나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결국 삶이 변하게 됩니다.
이렇게 간절히 기도할 때
끊임없는 기도로 변하게 되고
나와 세상을 바꿀 수 있기에
예수님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낙심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내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음이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잘못 알고 추구했던 것을 내려놓는
상실의 아픔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실 뒤에 찾아오는 충만함을 알기에
우리는 마음을 다잡고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은
간절함과 충실함이 만날 때 가능합니다.
언제 기도해야 할까, 고민하기보다
바로 지금부터, 기도를 하게 되고
무엇을 기도해야 할까, 고민하기보다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어갑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변할 수 있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걱정처럼
우리의 나약함은 쉽게 유혹에 빠지게 되고
이 세상에 믿음을 찾아보기 어렵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희망을 간직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께 기도하며 주님 안에 머물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이 심판받을 때
사랑의 증언을 할 수 있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 ‘시몬 신부의 신앙 이야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