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옷과 인생 리폼 >
옷이 시간을 입는지 시간이 옷을 입는지 알 수 없지만, 오랜 세월 동안 내가 즐겨 입었던 옷들은 기억을 겹겹이 품은 채 이제는 낡은 모습이 되었다. 입던 옷들이 낡았다는 말은 해지고 닳았다는 의미도 있겠으나 나와 오랜 시간을 지내왔다는 삶의 정직한 자취인지도 모른다. 그런 옷들이 이제 내 몸에 맞지 않게 되었다. 자주 입고 다녀서인지 익숙하긴 하지만 유행에 너무 뒤져 모양이 어딘가 어색해 보이고, 또 한때는 더없이 편안했으나 소매가 길어지고 어깨와 허리 품이 늘어져 입기에 불편해진 옷들이 되었다. 이럴 때 나는 선택의 길에 서서 고민한다. 그런 옷들을 아깝지만 버릴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서 남길 것인지를.
그럴 때 나는 자주 옷 수선점에 맡겨 고쳐 입는 '리폼(Reform)‘을 택한다. 집 근처 상가 지하실 한켠. 한 여인이 주인인 수선점으로 가 내 몸에 맞게 고쳐 입는다.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이런 결정은 ‘버림’ 대신에 ‘옷의 변형’을 선택하는 일이다. 이처럼 내 옷의 과거를 지우지 않고 지금의 내게 맞게 다시 배열하는 과정은, 옷 형태를 바꾸는 일이기도 하지만 흐르는 시간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바꾸는 일인지도 모른다.
옷장을 열어보면 입기에는 어딘가 망설여지는 옷들이 제법 걸려있다. 은퇴 전, 밖에서 활동할 때는 즐겨 입었지만 오래되어 색이 바래고 몸에 맞지 않은 양복과 바지 등이다. 티셔츠들도 있다. 예전 같으면 미련 없이 아파트단지 헌 옷 수거함에 넣었겠지만, 은퇴한 지금 그런 옷들은 손질해 입는다. 옷 수선점에서 길어진 소매는 자르고 늘어진 품은 줄이며 좀 헤진 곳은 다른 천을 덧댄다. 자주 들리기에 내 몸 치수를 잘 아는 주인장의 손길을 거친 옷은 낡은 옷이 아니라 시간을 품은 새 이야기가 되어 돌아온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멋진 옷이 되어서..
이런 옷 리폼의 과정은 어쩌면 우리 인생과 닮은 점이 많다. 먼저 내가 옷이 낡았음을 알고 어디가 헤어졌고 어디가 맞지 않는가를 살핀 후 버릴지 살릴지를 생각한다. 만약 살리기로 했다면 불필요한 부분은 덜어내고 필요한 곳에는 새것을 덧대는 과정을 거친다. 그런 과정을 거친 옷은 이전보다 몸에 더 잘 맞는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지금의 내 몸에 잘 맞아 한결 자연스럽고 편안해진 옷이 된다. 이렇게 해서 수선된 옷의 바느질 자국이 지나온 시간을 증명해 주듯 사람의 삶에도 세월이 남긴 흔적들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런 흔적을 숨기는 일이 아니라 새로운 무늬로 이어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인생도 그렇지 않은가. 특히 은퇴 후의 삶은 더욱 그렇다. 돌아보면 나는 그간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오랫동안 사회적인 역할과 직함이라는 정해진 규격의 옷을 입고 살아왔다. 그 옷들은 나를 보호도 했지만 때로는 하나의 틀 속에 가두어 두기도 했다. 그러다 은퇴를 맞이하자 나를 설명했던 이름표들이 하나둘 떨어져 나갔고 낯선 균열을 실감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 균열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틈’이었다. 인생을 새로 손보라는 신호였던 셈이다. 이런 생각과 경험은 나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삶의 전환점을 맞이한 은퇴자들 역시 나와 같은 마음으로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기에 우리네 인생도 옷처럼 리폼이 가능하다. 이것은 자신을 다시 해석하는 일로서, 먼저 잘라 내어야 할 것들이 있다. 이제 나에게 필요하지 않는 역할, 붙잡고 있던 집착과 익숙함을 내려놓는 일이다. 그러면서 덧대어야 할 것들도 있다. 그동안 여러 이유로 미루었던 취미 활동, 배우고 싶었던 공부, 다시 이어가고 싶은 사람들과의 관계들이다. 그러면서 예전처럼 바쁜 삶을 좇지 않고 ‘무엇이 내게 중요한가’를 묻고, 또 무엇을 더 채울 것이 아니라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 가를 아는 일이다. 그런 선택 위에서 나에게 맞는 하루를 다시 만들어가는 것, 이것이 바로 삶의 리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리폼한 옷이 특별한 이유는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모습 때문이듯, 시간을 지나온 사람이 다시 만들어낸 삶 역시 전보다 더 깊고 단단할 수밖에 없다. 옷 리폼 핵심이 완벽함이 아니라 '다시 입고 싶어지는 마음'이듯 인생도 타인의 인정이 아니라 '내가 다시 새롭게 살아가고 싶은 모습'으로 바꾸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은퇴 후 삶은 낡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시기를 지나왔을 뿐이므로 제2의 인생 설계가 꼭 필요하지 않을까. 그럴 때 은퇴의 삶은 공백이 아닌 여백이 되고 그 여백은 그저 텅 빈 공간이 아니라 무엇이든 새로 담고 그릴 수 있는 가능성의 자리가 될 것이다.
이처럼 나이가 들어 은퇴했다 해서 삶의 가능성이 끝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나이 든 이들은 진화의 산물이면서 문명이 이루어낸 축복이다. 그러니 주어진 여건에 맞춰 마치 옷을 리폼하듯 자기 삶을 개발하고 개척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삶의 목적은 에우다이모니아 (좋은 삶)이다.’라 하지 않았던가? 주위에는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 독서와 취미활동, 노래하기, 인문학 강좌 등 은퇴 후의 우리를 행복하고 즐겁게 해 줄 프로그램이 많이 있다.
우리 인간의 생(生) 또한 하나의 유기체이라 시간이 흐를수록 형태는 바래고 바느질선은 풀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낡은 천 조각이 수선사의 바늘 끝에서 새 작품으로 태어나듯, 우리 또한 지난날의 상처와 기억을 엮으면 새로운 생의 무늬를 아름답게 짜낼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삶의 완성은 처음 내게 주어진 모습 그대로를 지켜 가는 데 있지 않고, 닳거나 해진 부분을 잘 다듬고 어루만지며 자기만의 모습과 색깔로 고쳐 입는 노력에 달려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으로 오늘도 나는 조용히 내 삶을 한 번 더 고쳐 입는다. 어제는 입던 웃옷을 수선집에 맡겼고, 다가오는 목요일에는 그간 미뤄두었던 <중용(中庸)> 공부를 위해 동래(東萊) 향교(鄕校)로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그러노라면 문득 내가 좋아하는 가황(歌皇), 나훈아의 은퇴공연 모습이 다시 떠오른다.
‘막이 오르자
<고향역> <18세 순희> <테스 형> -
가황의 목소리가 공연장을 가득 채우고
환호성과 울음이 파도처럼 울렁인다.
“안돼! 우린 아직 보낼 준비가 안 되었어 ”테스형!“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은 마이크를
내려놓는다는 이 결심입니다.“
떠나야 할 때를 아는 사람,
그의 마지막 무대가 눈부시다.
우리도 인생이라는 무대에 선 배우.
저이처럼 스스로 물러날 때를 알아
최선을 다한 홀가분한 뒷모습을 남길 수 있을까
아, 테스 형!,
”너 자신을 알라“하며 툭 내뱉고 간 그 말.
내가 어찌 알겠소.
모르겠소.
테스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