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에서 포옹으로 / 강명숙
언제부턴가 꽤 멋진 버릇이 생겼다. 궁궐의 기둥, 벽면이나 다른 유적들을 찬찬히 쓰다듬거나 손바닥을 대고 정신을 집중하게 된 것이다. 고적들은 찬란한 유산이지만 빛마저 퇴색할 것 같은 과거의 흔적일 뿐 나와는 유리된 것. 역사적 의미로만 읽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휑한 바람만이 머물다 가는 듯 적적하고 허허롭게 다가온 건 사람이 살지 않아서일까? 거칠어진 내 손의 감각도 무뎌졌으나 풍진 세월을 살아냈던 공간속의 사람들을 촉감으로 느껴보고 싶었다. 시간으로 철저히 구분된 이쪽의 존재로서 나는 과연 그들을 만날 수 있는 걸까. 지금 여기 없으나 뜨거운 감정을 가지고 살았을 숨결, 불어넣었던 마음은 유적처럼 그곳에 영원히 존재한다. 내 상상을 불러와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를 꿈꾼다. 그런 마음이 되어보고 싶은 것이다. 이 꽃문양을 만든 사람은 꽃처럼 미소 지으며 조각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고 건네는 말, 그것을 보듬은 사람의 마음을 살짝 들여다본 것처럼 나는 슬며시 미소를 보낸다. 그러면서 묘한 감동을 느낀다. 그렇게 당신을 초대한다. 당신이 온다. 비로소 공간이 따뜻해진다.
바쁘다는 핑계로 일만 보이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던 시간이 있었다. 흘끗 보고 스쳐 지나가버린 것들 속에 잃어버린 의미들. 이제라도 촉감을 통해 올라오는 진동을 진하게 가슴에 느껴보고 싶은 건 무늬처럼 몸에 새긴다는 것이 아닐까? 만남에 있어서 좀 더 호의적인 제스처는 손과 손을 맞잡는 것으로 시작되기도 한다. 이 평등과 신뢰의 심벌인 악수는 아직 가슴을 내어주는 사이까지는 아니다. 그러나 좋은 만남이 지속될 거라는 상징이기는 하다.
따뜻한 체온이 전류처럼 흐른다. 더디게 오거나 오지 않았을 세상이 터치, 어루만짐으로써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이제 당신이 반걸음 앞에 서 있다. 터치는 말 이전의 무언의 언어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가슴이 뜨거워지는 강렬한 몸의 언어가 있다. 송두리째 당신이 온다. 그것은 며느리가 몰고 온 바람이었다.
그녀는 결혼한 후 만나거나 헤어질 때 언제나 먼저 다가와 나와 남편을 안아주었다. 갑자기 당황스러웠으나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곧 그런 그녀를 어색하게 안았다. 이건 뭐지? 낯설지만 뭔가 뭉클한 이 느낌.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들들을 한번 안아주고 싶어도 괜히 쑥스런 마음을 꾹 눌렀는데 이제 안는 것이 자연스럽다. 우리는 만나면 서로 안고, 헤어질 때면 꼭 껴안아주었다. 그녀라고 그게 쉬웠을까. 그것도 결혼하자마자 시작된 시자 붙은 분들과의 포옹이라니. 그것은 그녀가 사람을 환대하는 방법이었다. 살짝 내향적인 그녀지만 우리를 한가족으로 들이고 싶다는 마음의 발로, 사랑이다. 그런 그녀가 고맙다. 삶의 한 수를 우리에게 전수했으니.
포옹은 그의 존재로 달려드는 촉감이며 감각적 사랑이다. 아주 내 안으로 훅 들어오는 거리이다. 서로의 숨이 닿는 거리. 심장이 닿는 거리이다. 당신을 다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한다고. 같이 어려움을 이겨내자고 위로하는 그 마음이 지금 당신에게 옮겨가고 있는 중이다. 한 존재에 대한 설렘과 경이가 펼쳐진다. 가슴이 부푼다. 지금 이 별 위에서 우리는 사랑과 위로가 필요한 여린 가슴이라는 것에 공감하는 당신도 나도 진하게 만나고 싶다.
당신이 슬프고 외로울 때 내가 마음으로만 ‘어쩌나’를 외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바로 그때 마음의 스위치가 켜져 당신의 등을 쓰다듬다가 두 팔로 아니 가슴으로 당신을 안게 되면 오히려 내 심장은 말랑말랑해지고 그 여운은 길고 깊다. 당신을 어루만지는 마음이 비옥해진다. 나도 그렇게 누군가의 버팀목, 기댈 수 있는 둔덕이 되어 주고 싶다. 그리고 나도 위로받고 싶다.
우리들의 관계에서 정말 필요한 것은 많지 않다. 지금 곁에 있는 누군가를 꼬옥 포옹하길. 우리는 너무 멀리 서 있었다. 서로의 숨결이 새지 않도록 그냥 ‘오래’ 안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을 주다만 듯 헐거워진 우리는, 서로에게 오다 돌아가리라. 포옹할 때 사람들의 표정에서는 안도와 공감과 따뜻함. 너그러움이 읽혀지기도 하고 어느 땐 결연함이 보인다. 그것은 이 불안한 세상에, 얼룩진 상처투성이의 영혼, 메마른 대지에 부어지는 ‘함께’라는 생명수이기 때문이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이 선물 앞에 딛고 있는 현실이 무겁다고 해도 연대한다는 느낌에 감사한다. 비록 조심스러울 때도 있으나 건조해진 마음의 경계마저도 허물고 싶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끼지 않을 일이다.
당신의 따뜻한 가슴으로 세상을 데울 수 있다. 껴안을수록 행복이 자동 충전된다. 서로 안긴 오늘은 좋은 날이다. 오늘의 포옹을 내일로 미루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