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18 주일예배
본문: 고후 4: 16-18
제목: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
1. 겉사람은 낡아져도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
그리스도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보배를 질그릇 안에 가진 사람이다.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다.
심히 큰 능력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해도 싸이지 아니한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한다.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아니한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11)
예수의 죽음을 우리 몸에 짊어져야
예수를 위해 우리가 죽음에 넘겨져야,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난다.
이것이 참 기독교이다.
나는 없어지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 이것이 참 기독교이다.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도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실 때 가능하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
이는 하루 아침에 신비적인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신비주의자들, 성령주의자들은 그렇게 주장들 한다.
그러나 성경은 오랜 광야 생활의 연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그리스도인 삶은 구원 받고서 곧장 가나안 축복으로 들어가는 삶이 아니다.
잘못된 전도들은 예수 믿기만 하면 부자 되고 병 고치고 만사 형통한다고 한다.
미신 복음은 그렇게 가르쳐도, 성경은 결코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출애굽 후엔, 광야 연단과 훈련이 기다리고 있다.
세상에서 부름 받은 후엔 교회 와서 회개하고 말씀으로 사는 훈련을 해야 한다.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훈련을 해야 한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지, 무조건 복음 믿으라, 그러면 형통한다, 그런 것 없다.
사기군 목사, 전도왕들이 그러는 것이고, 복음으로 사기치는 교회가 하는 짓이다.
사방으로 욱여쌈이 있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한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
하나님이 광야 생활을 통해 연단하신 후에 순금이 되어 나온다고 분명 말씀하고 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길, 순금이 되는 그 길,
그 길을 우리 주님은 아시고 함께 하시며 인도하시며 우리를 만들어 가신다.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짓게도 한다.(시129:3)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들이셨나이다.”(시66:10-12)
은과 금을 제련소에서 단련함 같이 하셔요.
초벌구이 재벌구이 하면서 도자기를 만듦 같이 하셔요.
그물에도 걸리게 하시고, 어려운 짐을 지게도 하셔요.
원수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넘어가게도 하셔요.
불도 통과하고 물도 통과하게 하셔요.
다 통과한 후에 풍부한 곳에 우리를 들이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시다.
다윗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통과한 후에, 시글락 시련 후에, 헤브론에 오르게 하셨다.
요셉도, 어린 나이에 노예생활, 억울한 감옥생활 후에 총리로 세우셨다.
모세도,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낮아지고 또 낮아지는 연단 끝에 온유한 자가 되어
출애굽과 광야 40년의 위대한 지도자로 세우셨다.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위험 칼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겪게 하신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롬8:35-36)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이다.(엡2:10)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도, 성령 세례를 받아 능력 있는 증인이 되어도,
우리 몸과 마음에 베어 있는 사고방식과 가치관은 연단을 통해 성숙되어간다.
말씀으로 사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신다.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성령의 지혜로 가르침을 받으면서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숙 성장한다.
젖만 먹던 아이에서 굳은 음식도 먹는 장성한 사람으로 성장한다.
광야 생활의 연단과 변화와 성숙은 그리스도인에겐 필수 과정이다.
우리의 겉사람은 겉환경은 이 광야생활의 연단 받으며 낡아지고 볼 품 없어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고 순금이 되어 나오고 있음을 믿으라.
이를 못 믿으면 낙심천만이 되고 만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광야생활의 연단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요 수단이요 훈련이다.
마침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화를 당한 연수를 훨씬 초과하고 넘친다.
2.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한다.
우리가 받는 고난과 환난은 결코 가볍지 않고 결코 잠시가 아니다.
그러나 무엇과 비교하느냐에 따라 잠시로 경한 것으로 될 수 있다.
우리가 받을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에 비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요셉 13년, 다윗 10수년, 아브라함 25년, 모세 40년.
젊은 사람은 짧고, 늙은 사람은 긴 것 같기도 하고.
아직 덜 굳어진 자아는 짧고, 오래 굳어진 자아는 긴 것일까?
여하튼 우리의 자아는 쓸모 없는 것이다.
사람의 지혜와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찌들어 있는 것이 내 자아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게 해야 한다.
내 자아가 죽은 내 몸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해야 한다.
나의 독한 냄새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게 해야 한다.
나의 낡고 헌 부대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고 그 향이 번져나가게 해야 한다.
그것이 세상에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것이다.
유대교회 로마교회 현대교회는 말만 많고 빛과 소금의 삶은 없는 것이 특징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에 무슨 영광과 축복이 있겠는가?
교회는 지금,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꺽어 주고 있는가? 이 행함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이고,
이 일들을 행할 때,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한다고 하신다.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하신다.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고,
헐벗을 때에 옷을 입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는 것이다.
이 일을 행한 사람들에게만,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하신다.
이 일을 행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마귀와 그 사자들에게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하신다.
행동하는 양심이 아니라, 행함이 있는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아야 한다.
이 믿음의 행함들을 하기 위해서 긴 세월 받은 고난과 환난이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도록 받은 긴 고난의 세월들이다.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훈련의 세월들이다.
내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던 내가,
열심은 있었지만,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어서,
내 의를 살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던 내가,
죽고 또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나로 변화되기까지 주님은 긴 세월 만들고 계신다.
그러나 그 긴 세월 무거웠던 고난의 연단들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실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에 비하면, 그것은 잠시요 경한 것이다.
다윗이 헤브론에 올라 지극히 크고 영원하고 무거운 왕권의 영광과 축복을 누릴 때,
그 기쁨과 감사와 찬양이 얼마나 가슴 벅차고 놀라웠겠는가?
모세도 긴 40년 험악한 광야 생활을 끝내고 위대한 하나님의 종으로써 쓰임 받을 때,
화를 당한 연수대로 40년 동안 기쁘게 하실 때, 얼마나 가슴 벅찼겠는가?
요셉도 노예생활, 억울한 감옥생활 끝에 총리로 세워졌을 때, 그 기쁨이 어떠했겠는가?
이 땅에서도 그렇게 긴 세월 보상을 받았는데,
영원 세상에서 지극히 크고 영원한 상의 중한 것으로 받을 때,
그 기쁨과 감사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 상이 우리의 고난과 연단 뒤에 기다리고 있다는 것,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고 믿고, 의심하지 않으며,
하나님께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시기를 바란다.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을 확실히 믿었도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시27:13-14)
3.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8)
우리가 받을 상과 영광은 지금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것임을 성경은 약속하고 있다.
우리 인생은 길어야 백세를 못 넘긴다.
그 다음에는 심판이 있고, 영원한 상이 거기서 결정이 난다.
그들에게는 영벌의 심판, 우리에게는 상급의 심판만 있다.
이 땅에서 누리게 하신 것도 놀랍지만 그 영원한 상과 영광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7-18)
고난 없는 영광은 없다. 그것은 도둑의 심뽀일 뿐이다.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그와 함께 받는 고난이다.
우리가 누리게 될 영광은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 주시는 영광이다.
이 모든 영광이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보좌 우편에 앉으심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또한 성경과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이 없다면 우리는 이를 알 수도 없고 거듭날 수도 없다.
여기에 교회와 가르침이 없다면, 성장하고 성숙하며 믿음의 행함들을 이루어갈 수 없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리 좋아도 잠깐이다.
그것을 보는 우리 인생도 잠깐이면 끝이 난다.
우리가 주목하여 보는 것은 말씀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5-17)
오직 주의 말씀도 영원하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벧전1:24-25,사40:6)
마지막 나팔에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되어 영원히 주와 함께 살 것이다.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 영원한 하나님,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된 영원한 우리 몸과 영혼,
영원한 주의 말씀을, 이 땅에 살면서도 사모하며 주목하며 살자.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을 믿고 주목하고 살자.
고난은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게 한다.
고난은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게 한다.
우리가 잠시 받은 고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룰 것이다.
이 땅에서도, 영원 세상에서도, 그 영광을 이루심을 믿고, 고난으로 인하여 낙심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