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폴란 著/ 조윤정 譯/ 다른세상 出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육식과 채식의 경계를 논한 책이기 보다는 우리가 먹는 '음식'에 대한 글입니다.
무엇을 먹느냐, 어떻게 먹느냐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 책이예요.
마이클 폴란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가 먹는 것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먹는 행위는 농업 행위이다'라는 웬델 베리의 말을 인용한 폴란은 이에 덧붙여
먹는 행위는 농업 행위일 뿐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행위라고 말합니다.
저널리스트인 마이클 폴란은 산업적 음식 사슬의 고리를 추적하고자 대단위 산업 농장의 경로를 몸소 추적하고
음식 사슬의 또다른 형태인 전원적 음식 사슬을 추적하기 위해 유기농(보다 정확한 표현으로는 '지속 가능한 농업') 농장에서
그 경로 또한 추적합니다. 마지막으로는 몸소 수렵과 채집을 통해 자신의 식탁을 차려봄으로써 잡식 동물이
원초적으로 겪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에 직접 부딪혀봅니다.
책의 첫 머리에서 시작한 옥수수에 대한 얘기는 이 책의 삼분지 일을 할애하는 큰 주제로 관통하는데 옥수수의 대량 생산과
잉여 생산된 옥수수를 소비하기 위해 왜곡된 미국의 음식 산업 사슬과 이로 인한 국가적 섭식 장애는 비단 미국 뿐 아니라
현재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내심 심각(?)하게 읽었습니다.
산업적 음식 사슬을 추적한 폴란은 옥수수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농장을 점령한 옥수수는 수확된 이후 소나 닭의 사료가 될 뿐만 아니라 수퍼마켓에 진열된 많은 상품을 최종 도착지로 하여
결국 인간에게 소비되지요. 옥수수는 제분되고, 발효, 증류, 가공되어 진열대의 상품의 구성 성분으로 변신한다는 것.
폴란은 우리의 몸이 우리가 먹는 음식이라 한다면 인간은 걸어다니는 옥수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대량 생산되는 산업화된 농장의 현실을 파악한 뒤 그는 다시 전원적 음식 사슬 즉, 태양광으로부터 에너지를 생성하는 '풀'에서 시작된 생태적, 순환적 음식 사슬을 구현하는 농장을 찾아갑니다.
폴란은 거기서 일하면서 풀에서 반추동물로 그리고 인간에게로 이어진 에너지의 흐름을 짚어보게 되지요.
저자는 이런 두 가지 유형의 농장에서 일을 하면서 그 생산과 소비의 메커니즘을 파악한 후 마지막으로 자신이 직접
자연에서 취한 재료로 근사한 식탁을 차리는 것으로 이 책의 말미를 장식하고 있어요.
사냥을 하고, 야생 버섯을 채취하고 직접 요리를 하는 등.... 폴란의 식탁차리기는 음식에 대한 신성한 '의식'처럼 진행되고
의식은 힘들었지만 성공적으로 치러졌습니다. 저자는 이 챕터의 도입부에서 '죽음의 밥상'의 저자인 '피터 싱어'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싱어의 육식에 대한 거부 혹은 혐오에 반해 폴란은 개체의 고통과 종의 보존과는
다른 차원이라고 설명하며 포식자로서의 인간을 옹호하는 입장을 보입니다.
물론 산업화된 농장에서 사육되는 가축의 고통에 대한 부분을 긍정하는 것은 아니지만요.
폴란은 무엇보다도 산업화, 기계화된 공장같은 농장에서 소나 닭의 개체의 고통에 앞서 전체적인 생태의 순환 고리가 끊어져
결국은 과도한 화석 연료를 소비하게 되는 불합리한 메커니즘을 지적하고 있어요.
동물 개체의 고통에 주목하기 이전에 심각하게 파괴된 생태 사슬로 인한 각종 부작용은 결국 최종 소비자인 인간의 몸 안에
쌓이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요.
우리가 맥도날드의 치킨 너깃을 먹으면서 콜라를 마신다는 것은 옥수수에 옥수수를 더해 먹을 뿐이라는 사실과 이런 옥수수를 소비해야 하는 가축들이 비인도적 사육 환경으로 인해 많은 양의 항생 물질을 소비해야 한다는 사실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유기농을 찾지만 이제는 유기농도 산업화 되어가고 있다는 것. 폴란은 로컬 푸드를 지향하며 '유기농 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은
또 다른 '유기농 산업'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남의 나라 얘기로 들리지는 않네요.
우리는 이상적인 농업 환경을 구현할 수 있을까요? 대도시의 많은 인구를 먹여살리기 위해 유기농이나 '지속 가능한 농업'은
과연 대안이 될 수 있을까요? 폴란은 이상주의자는 아니며 대안 농업에 큰 희망을 걸고 있지는 않은 것 같지만 그래도 자본주의 논리에 망가지고 있는 우리의 먹거리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이 결국은 도움을 줄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맛과 영양(칼로리)에만 신경 써서 먹었던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는 식품을 집어 든 순간 그 식품의 이동 경로와 고향(?)에서의
생활 환경을 생각해야 할 시대가 된 것입니다. 푸드 마일리지를 생각하면 사실 기가 막힙니다.
이 책에서 언급된 내용은 아니지만 영국 인근 북해에서 잡은 새우는 노동력이 싸다는 이유로 아프리카 중서부까지 가서
껍질을 까진 뒤에 다시 독일으로 가서 깐새우로 소비되는 현실...새우의 여행은 죽어서도 고단하기만 합니다.
암튼 내 고장에서 나는 우리 농축산물로 밥상을 차리는 일은 이젠 기적에 가까운 일이 되어버렸고 신토불이는 그야말로 희망 사항이 되어버린 거죠.
책을 읽은 뒤 달라진 점이 있다면...비싼 값을 치르고라도 올바른(?) 먹거리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
본문에 표현한 것처럼 닭이 닭처럼 살고, 소가 소처럼 살면 닭고기에선 닭 맛이 제대로 나고 쇠고기에선 제대로 된 쇠고기 맛이
난다는 것입니다. 바르게 자란 먹거리를 먹겠다는 소망이 요즘처럼 절실한 때는 없었던 것 같아요.
그건 그 만큼 우리의 먹거리가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근데 바른 먹거리를 먹는 게 참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기초 식량마저 자본의 논리에 휘둘리고 있으니 말이죠.
저자인 마이클 폴란은 저널리스트답게 온 몸으로 부딪혀 이 책을 썼어요.
피상적 지식과 도서관의 장서에만 의존해 쓴 책이 아니라 몸으로 발로 뛰며 쓴 책입니다. 머리로 쓴 책이 아니기에
가슴과 발로 쓴 그의 책은 또 다른 감동이 있습니다.
심각할 수도 있는 주제를 특유의 위트로 풀어낸 이 책은 읽는 내내 그의 유머로 즐거웠으며 정작 500쪽이 넘는 분량의 책을
집어드는 데까지는 시간이 걸렸지만, 집어든 순간부터 빨려들 듯 순식간에 읽게된 책입니다.
요즘 먹거리로 고민하는 분들께 추천하고픈 책이예요. 또한 친환경을, 유기농을 생각해보신 분들은 한 번 참고하실 만한 내용이 많습니다.
무엇을 먹을까.....보다는, 먹는다는 행위가 과연 무얼까....생각해보신 분들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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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中 -
우리의 몸은 우리가 먹는 음식이기도 하지만, 그 음식이 먹는 음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기일 뿐만 아니라 넘버2필드 옥수수이며 석유이기도 하겠다.
사람들로 하여금 더 많은 음식을 먹게 만들고자 할 때, 가공 식품이 왜 뛰어난 전략이 될 수 있는지 이제 여러분도 이해할 것이다. 식품 과학의 힘은 음식을 각각의 영양소로 분해한 다음 특정한 방법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
인간 같은 잡식동물이 곤경에 빠지는 것은 가공식품의 과도한 에너지 밀도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제 반추동물에게 옥수수를 먹이는 행위가 어떤 경제적인 의미를 얻게 되었다.
나는 '어떤'이라고 말했다. 이런 경제적인 의미가 우리의 경제를 바라보는 특정한 시각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사회의 시각에서는 옥수수로부터 생산되는 값싼 음식 에너지의 고비용을 감추는 경향이 있다. 패스트푸드 햄버거 가격의 99%는 이 음식에 실제로 들어간 비용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 토양, 석유, 보건, 국가의 자금 등, 이런 비용은 소비자에게 직접적으로 부담이 지워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간접적으로 그리고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납세자나, 건강 관리 제도나, 환경에 부담이 지워진다.
따라서 소떼가 목초지에서 나와 사육장 안으로 걸어 들어간 이유는 매우 많지만, 그 모두가 하나의 이유로 귀결된다. 우리의 문명과 음식 시스템이 꼼짝없이 산업의 논리에 따라 조직되어 있다는 이유이다.
단일 품종 재배 또는 사육은 우리의 음식 시스템에 생기는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잡식동물의 축복은 자연에 있는 아주 많은 것들을 모두 먹을 수 있다는 데 있다. 반면 잡식동물의 저주는 그 가운데서 먹어도 안전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많은 부담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먹을 거리를 발견할 때마다 그들은 제왕나비에게는 알려져 있지않은 상반되는 두 가지 감정 사이에서 고통스런 경험을 해야 한다. 이 두 가지 감정에는 각각의 생물학적 이유가 있다. 하나는 네오포비아(neophobia)로 새로운 것을 먹는 데 대한 분별 있는 공포이며, 다른 하나는 네오필리아(neophilia)로 위험하지만 필요한 새로운 것에 대한 취향이다.
잡식동물의 딜레마라는 개념은 동물들의 음식 선택 행동을 규명해줄 뿐 아니라 훨씬 더 복잡한 영장류(인간을 포함하여)의 '생물 문화적' 적응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불가해한 여러 문화적 관행들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유명한 말처럼, 인간이라는 종에게 음식은 '먹기 좋은 것일 뿐만 아니라 생각하기 좋은 것'임이 분명하다.
요리는 인간이라는 잡식동물이 자연에서 새로운 종류의 생태적 지위(echological niche)에 들어섰다는 증거로 종종 인용되곤 한다 (도구 제작 그리고 원인(原因)이 발전시킨 또 다른 소수의 기술이나 수법과 함께). 일부 인류학자들은 이를 '인식의 틈'(cognitive niche)이라고 불렀다. 이 말은 생물학과 문화의 경계를 흐려놓으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사실 그랬다. 이런 인류학자들에게 인간이 다른 종의 방어를 물리치기 위해 발전시킨 다양한 수단들(식품 가공 기술뿐만 아니라 사냥과 채집 도구 및 기술 전체)은 생물 문화적 적응의 결과였다. 생물 문화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얼마간 자연 선택과 동떨어진 문화적 창조라기보다는 진화적 발달에 가깝기 때문이었다.
개별적인 멋익감의 입장에서 보자면 포식행위는 공포를 불러온다. 하지만 집단의 관점에서보자면, 집단의 유전자풀을 생각해 보자면 포식행위는 없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도덕은 인간이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처리하기 위해 고안한 인간 문화의 산물이다. 인간 사회에서는 도덕이 유용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자연이 인간의 사회적 행동에 훌륭한 지침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의 도덕 체계가 자연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적절한 지침이 되리라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정말 인간 중심적인 발상이 아닐까? 우리에게는 단순히 자연 세계를 다루기 위한 다른 종류의 윤리 지침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윤리 지침은 여러 권리들이 오늘날 우리 인간에게 잘 맞고 우리의 목적에 도움이 되고 있는 것처럼, 식물과 동물, 서식지의 특별한 필요에 잘 맞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