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팬 H.O.G. 모임 동행취재
컬트브랜드 할리데이비슨 왜 열광하나
경영진이 전세계 돌며 동호인 '호그 문화' 전파
오토바이 외에 수만가지 액세서리·의상 등 팔아
종교나 우상처럼 고객을 포로로 만들고 열병을 앓게 만드는 브랜드를 컬트(cult) 브랜드라고 한다. 할리 데이비슨은 그 원조(元祖)이자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다.할리데이비슨의 고객 동호회 모임인 호그(H.O.G.; Harley Owners Group) 회원들, 일명 호그족들은 몸에 할리데이비슨 문신을 새길 정도로 절대적인 브랜드 로열티를 보인다. 지난 15일 속초에서 열린 호그족 행사에 동행하고, 할리데이비슨 경영진을 만나 브랜드 충성도를 높이는 비결을 취재했다.
지난 15일 밤 8시. 강원도 속초의 한화콘도 입구는 귀를 찢을 듯한 기타 사운드와 모터사이클 엔진 소리의 공명(共鳴)으로 떠들썩했다.
록 그룹의 기타 연주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주차장에 도열한 600여대의 할리데이비슨 모터사이클들이 특유의 "두둥 두둥 두두두둥" 엔진 소리를 뿜어내고 있었다. 하늘엔 불꽃이 터지고, 코에는 먹음직스러운 바비큐 냄새가 퍼졌다. 이 절묘한 합주(合奏)는 절로 심장의 박동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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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헝가리에서 열린 할리데이비슨 축제 모습.
할리데이비슨 모터사이클 동호인 모임인 '호그(H.O.G.;Harley Owners Group)'의 가장 큰 연례행사인 '호그 랠리(11th 2009 KOREA NATIONAL H.O.G. RALLY)'가 열린 것이다.
할리 직원은 "옷부터 갈아입으라"며 기자에게 할리 티셔츠와 가죽 재킷을 건넸다. 사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900여명의 참석자는 거의 모두가 검은 가죽 재킷과 할리 문양, 두건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 평상복 차림은 마치 클래식 공연장에 펑크 패션을 입고 온 것처럼 확 튀었다.
이날 행사 방문의 목적은 한양대 U-CEO 과정 수강생들과 함께 할리의 브랜드 성공 비결을 공부하고 취재하는 것. 그러나 막상 와보니 '공부할 분위기'가 도저히 아니었다.
종교나 우상처럼 고객을 포로로 만들고 열병을 앓게 하는 브랜드를 컬트(cult) 브랜드라고 한다. 할리데이비슨은 그 원조(元祖)이자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다. 호그 랠리 행사에서 그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호그 회원들이 할리에 대해 갖고 있는 애착은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2005년부터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있는 이현숙(45)씨는 "남편이 사고 싶다고 한 걸 몇 년을 말렸는데, 막상 경험해보니 나도 빠져서 타게 됐다"며 "온 종일 할리 위에 앉아 800km를 달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 모터사이클이 아니라 문화를 판다
세계적 경영학자 톰 피터스(Peters)는 "할리데이비슨은 모터사이클을 파는 게 아니라 '경험'을 판다"고 했다. 그 '경험'의 중심에는 '호그 문화'가 있다.
지난해 할리를 구입한 남기령 한국로열코펜하겐 대표는 "가죽 재킷을 입고 같은 호그 회원들과 함께 휴게소에 내려서면,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지면서 마치 연예인이 된 듯한 묘한 쾌감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군대를 방불케 하는 클럽의 정밀한 규칙도 참여자에게 오히려 재미를 준다. 예를 들어 호그 클럽의 대장 격인 '로드 캡틴(Road Captain)'은 호그 회원들이 함께 투어를 떠날 때 주행할 노선을 결정하고, 주행 내내 선두에서 대열을 이끈다. 주행 시 후미를 책임지는 '리어(Rear)'도 중요한 인물이다. 클럽의 다른 선임자들은 초보 주행자들을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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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리데이비슨 고객 동호회인 호그(H.O.G.) 행사에는 남성뿐 아니라, 여성들과 가족까지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가족이 함께 참여하는 것은,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현상이라고 한다. 지난 15일 강원도 속초에서 열린 호그 랠리 행사에서 함께 춤을 추는 국내외 호그 회원들. /할리데이비슨 제공
호그 회원들이 할리에 열광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는 '체감(體感)'이 꼽힌다. 짐 매카슬린(McCaslin) 할리데이비슨 총괄부사장은 "할리의 장점은 디자인과 소리, 느낌(look, sound, feel)"이라고 말했다.
일본 업체들이 비교적 저렴한 가격과 효율적인 성능으로 시장을 침투해 왔을 때, 할리는 기능 대신 오감(五感)에 호소하는 전략으로 대응했다. 대표적인 무기가 '할리 사운드'로 불리는 특유의 큰 엔진 소리다. 할리는 이 소리를 흥분된 심장 박동에 비유하며 '자유의 상징'으로 삼았다. 소리를 어떻게든 줄여보려 했던 일본 모터사이클과는 사뭇 다른 길을 간 것이다. 몇 년에 걸쳐 할리 사운드를 상표 등록하려고까지 했다(결국 등록되지는 않았다).
할리데이비슨 임원들은 할리데이비슨 문화를 팔기 위해 전 세계를 누빈다. CEO가 연간 300회 이상 미국과 해외로 출장을 다닌다. 이번 한국의 호그 랠리 행사에도 매카슬린 총괄부사장을 비롯해 본사에서 5명이 건너와 가죽 재킷을 입고 H·O·G족들과 모터사이클을 같이 탔다.
이렇게 '문화'를 팔아 형성된 열광적인 고객층은 할리에게 다시 없는 자산이다. 경영 컨설턴트 프레데릭 라이히엘드의 조사에 따르면 신용카드 회사가 고객 유지율을 5% 늘리면 회사 수익은 2배가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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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해 가을 이벤트 랠리 행사에 참석한 여성 회원. /할리데이비슨 제공
할리의 충성스러운 고객층인 호그의 잠재력은 그보다도 훨씬 크다. 1983년 3만명으로 출발한 호그가 100만명 넘게 불어나면서 할리데이비슨의 매출은 24배로 늘어났고(1983년 대비 2007년) 이익은 930배로 늘었다.
경영난에 빠져 다른 기업에 인수됐던 할리데이비슨을 살려낸 원동력도 호그족이었다. 1969년 레저업체 AMF에 인수된 할리데이비슨은 무리하게 판매량을 늘리려다가 품질 관리에 실패해 경영이 더욱 악화된다. 보다 못한 임원 13명이 1981년에 회사를 다시 사들였다. 할리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이들은 스스로 문신을 새기고 가죽 재킷을 걸친 뒤 충성 고객들을 모아 호그를 결성함으로써 부활의 불씨를 지폈다.
호그는 고객의 목소리를 듣고 정보를 수집하는 중요한 창구이기도 하다. 패티 윌리엄스 와튼 스쿨 교수는 "할리의 임원들이 직접 가죽 재킷을 걸치고 고객 행사에 나서는 것은 고객의 신뢰를 얻을 뿐 아니라, 정성적인(qualitative) 데이터 수집 방식으로 매우 효과가 있다"고 밝혔다.
■ 열광적인 고객 동호회를 만드는 세 가지 팁
호그처럼 충성을 넘어 열광하는 고객 동호회를 만드는 것은 모든 브랜드의 로망이다. 하지만 흐지부지되기 일쑤다. 매카슬린 총괄부사장은 충성스러운 동호회를 유지하는 팁 3가지를 소개했다.
첫째, 할리데이비슨은 호그 행사를 순수한 자발적 행사로 유지하고, 거의 돈을 지원하지 않는다. 회사로서는 당연히 돈을 쓸 가치가 충분히 있지만, 호그 회원들이 명예를 보다 중요시하기에 돈을 개입시키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이날 호그 랠리 행사 역시 비용과 인력을 모두 호그가 자체 부담했다. 영국의 대표적인 실험 심리학자 스튜어트 서덜랜드가 "어떤 활동에 보상을 주면 사람들은 그 활동을 평가 절하한다"고 말한 원칙을 충실하게 지키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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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해 가을 이벤트 랠리 행사에 참석한 가족 동반 회원. /할리데이비슨 제공
둘째, 할리데이비슨은 호그 회원들의 자부심과 경쟁심을 채워줄 부가 제품군을 다양하게 갖추고 있다. 사실 '이 세상에 똑같은 할리 모터사이클은 없다'고 할 정도로 할리는 개인이 개조할 영역이 넓은 제품이다.
할리 매장에는 모터사이클용 부품(액세서리) 카탈로그가 비치돼 있는데, 분량이 800페이지에 달한다. 머플러, 완충기, 수납함(새들백) 등 갖가지 부품을 합치면 수만 가지에 이른다. 호그는 그중 자기만의 개성에 맞는 제품을 골라 모터사이클을 개조(customizing)할 수 있다. 모터사이클에 맞춰 입을 수 있는 의상도 수백 가지. 그래서 호그들이 서로 만나면 부품과 의상에 대해서만도 이야깃 거리가 넘친다. 할리데이비슨을 '남성들의 장난감'이라고 하는 것이 실감이 난다.
회사로선 고객들의 관심을 브랜드에 묶어 두면서 부가 매출까지 올리니 일석이조다. 보통 1800만원짜리 할리데이비슨을 산 고객은 600만원 정도를 액세서리, 200만원 정도를 의상에 쓴다고 한다.
셋째, 할리데이비슨은 딜러와의 스킨십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다. 딜러들은 전 세계 고객과 호그족과의 접점에 있기 때문이다.
할리 임원들은 딜러를 만나느라 회사에 앉아 있는 경우가 드물다고 한다. 매카슬린 총괄부사장은 "전 세계에 1400개의 딜러가 있는데, 임원들이 총출동해 매년 700곳을 돈다"며 자신도 올 들어서만 20곳의 해외 딜러를 방문했다고 전했다.
딜러들은 할리데이비슨 최초 구입 고객에게 도로 연수를 시켜주고, 가입할 수 있는 적절한 호그 클럽을 소개해 준다. 딜러 매장 자체가 호그족들이 만나는 약속 장소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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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짐 매카슬린 할리데이비슨 총괄부사장이 지난 15일 강원도 속초에서 열린‘호그랠리’행사에 참석해 참석 소감을 말하고 있다. /할리데이비슨 제공
■ 기본기가 열정을 부른다
할리의 성공 비결을 좇다 보면 호그 문화 같은 감성 경영에만 초점을 맞추기 쉽다. 그러다 보면 할리데이비슨이 품질에 기울인 정성을 간과하게 된다. 그러나 정작 이 같은 '기본기'가 없었다면, 할리의 감성 경영은 구호에 그쳤을 것이다.
한때 다른 기업에 팔렸던 회사를 다시 사들인 할리데이비슨 경영진은 '품질 경영'을 핵심 전략으로 내세웠다.
품질에 도움이 된다면 적(敵)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1980년대에는 당시 CEO 본 빌스(Beals)가 혼다 공장을 방문해 일본식 경영 기법을 배웠다. 2002년에 출시한 신제품 'V-ROD'는 첫 디자인 스케치에서 제품 출시까지 7년이 걸렸다.
그러나 지금 할리데이비슨은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다. 세계를 휩쓸고 있는 경기 침체 여파로 작년 3분기 이후 매출과 순익(본사 기준)이 급감하고 있다. 지난해 매출은 2.8% 감소해 2007년(0.7% 감소)에 이어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순익은 30% 급감했다. 금융 위기 여파로 고객에 대한 모터사이클 구입자금 대출의 부실이 크게 늘어난 것이 직격탄이 됐다. 할리데이비슨은 올 초 종업원의 12%인 1100명을 향후 2년간 감원하겠다고 밝혔다.
고객층의 노령화는 더욱 근본적인 위협이다. 뉴욕타임스는 "할리데이비슨은 더 이상 젊지 않다"면서 고객 평균 연령층이 5년 전 42세에서 지금은 49세로 올라갔다고 전했다.
그러나 할리는 1분기 실적 발표에서 위안을 찾고 있다. 1분기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0.3% 감소에 그쳐 3분기(-6.4%)와 4분기(-8.4%)에 비해 감소세가 크게 둔화됐다. 또한 1분기 미국 매출은 9.7% 감소했지만, 미국 전체 중량급 모터사이클 매출이 22% 급감한 데 비해 선방했으며, 할리데이비슨의 미국 시장 점유율은 50%에서 58%로 뛰었다. 3월 한때 7.99달러까지 떨어졌던 주가는 20일 현재 17.54달러로 회복됐다.
매카슬린 총괄부사장은 "젊은 층을 위한 신제품을 준비하고 있으며, 보다 나이든 고객들이 편안하게 할리데이비슨을 탈 수 있도록 3륜 할리데이비슨(Triglide Ultra Classic)을 증산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경기 침체의 타격이 없는 건 아니지만, 오히려 적극적 투자를 통해 더 많은 고객이 만족할 제품을 개발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