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춘생 安椿生 (1912~ 미상) 】 "광복군 제2지대 제1구대장"
1912. 8. 12.~졸년 미상. 독립운동가.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황해도 벽성(碧城)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안장근(安莊根)이고, 안중근(安重根) 의사(義士)의 종질(從姪)이다.
1909년 안중근의 하얼빈[哈爾濱] 의거로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1917년 가족과 함께 만주(滿洲)로 망명하였다.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서 해륜중학교를 졸업한 후 일제의 만주침략이 본격화 되자 산해관(山海關)을 넘어 난징[南京]으로 건너가 중앙육군군관학교(中央陸軍軍官學校)에서 군사학을 수학하였다.
1936년 졸업과 함께 중국군 제2사단에 배속되어 대일전에 참전, 일본해군육전대 사령부를 공격하고 인상항(引翔巷)의 보산지창(寶山紙廠)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1938년 중국군 육군대위로 후난성[湖南省] 경비사령부에 복무 중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령을 받고,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상하이[上海]에서 거사할 폭탄을 홍콩[香港]까지 운반하였다.
1939년 10월 중국군 육군소령으로 군정부 감호대대(軍政府監護大隊)에서 복무하다가 1940년 10월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에 편입, 노태준(盧泰俊)‧노복선(盧福善)‧조인제(趙仁濟) 등과 함께 산시성[山西省] 다퉁[大同]으로 파견되었다.
1941년 광복군 제1지대 간부로 배속되어 산시성 등지의 사병을 모아 훈련시키는 한편, 정보수집‧적정정탐 등의 임무를 수행하며 지하공작을 전개하였다.1942년 4월 광복군 제2지대 제1구대장에 임명되었고, 1945년 8‧15광복 후에는 광복군 주난징지대장[駐南京支隊長]으로 활동하다가 귀국하였다. 민족청년단 훈련부장으로 청년운동에 헌신하였다.
1949년 육군사관학교를 제8기로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교장, 육군 제8사단 사단장, 국방부 차관보 등을 역임한 뒤 1961년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을 비롯하여 제5대 광복회장, 평화통일정책자문위 위원, 독립기념관 건립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조국광복과 건국에 이바지한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정부에서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1976년 국민훈장 동백장, 1987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안기선이고, 딸은 안수영‧안주영이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