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서안사변 발발 ← 중국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왼쪽)와 산보를 즐기고 있는 장쉐량(가운데). 장쉐량은 평소 장제스를 형님으로 깍듯이 모셨으나 서안사변으로 원수가 됐다. 중국의 운명은 물론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시안사변(西安事變)이 1936년 12월 12일 중국 시안의 화칭츠(華淸池)에서 일어났다. 시안의 옛 이름은 장안(長安)이고 화칭츠는 당(唐) 현종과 양귀비가 사랑놀음을 벌이던 온천지역. 1년간의 대장정 끝에 거의 궤멸된 상태로 연안에 도착, 한숨 돌리고 있는 마오쩌둥의 홍군(공산당 군)을 뿌리째 뽑기 위해 장제스(蔣介石)가 장쉐량(張學良)의 근거지 시안을 찾으면서 역사는 반전(反轉)을 시작한다. 장쉐량은 한때 만주지역을 호령했던 동북군 군벌 장쭤린(張作霖)의 아들로, 젊어서는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지만, 일본군이 아버지가 탄 열차를 폭파시키자 뒤늦게 대일 항전에 나선 사람이다. 일본군이 기세등등하게 중국 땅을 잠식해 들어와도 홍군 토벌에만 몰두하는 장제스가 그는 늘 못마땅했다. 결국 장쉐량은 장제스를 감금한 뒤 내전중단과 항일투쟁에 나설 것을 요구했고, 장제스는 요구를 수락하고 나서야 시안을 벗어날 수 있었다. 장제스는 약속대로 제2차 국·공합작을 체결, 일본군을 패퇴시켰으나 이 틈을 탄 홍군의 세력확대는 그를 역사의 중앙무대에서 밀쳐낸다. 장제스가 시안을 떠날 때 ‘사나이’ 장쉐량은 동행을 자청, 자칫 매너리즘에 빠질 뻔한 드라마 후반부를 팽팽한 긴장상태로 몰아간다./조선
[1889년] 영국의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 사망 테니슨과 함께 빅토리아조를 대표하는 영국의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이 1889년 12월 12일 사망했다. 런던의 부유한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난 브라우닝은 어려서부터 이미 문학적 재질을 인정받아 시에 몰두했다. 20대 초반 자서전적 시집 `폴린`과 극시집 `파라셀서스` 등을 출간했다. 브라우닝은 그보다 여섯 살 연상이며 여류시인인 엘리자베스 브라우닝과의 사랑으로도 유명하다. 그녀의 결혼 전 이름은 엘리자베스 버레트이다. 1846년 결혼한 브라우닝은 처가의 반대를 피해 이탈리아로 도주, 부인이 죽은 해인 1861년까지 16년간을 주로 피렌체에서 지냈다.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은 8세 때 고대 그리스어를 자유롭게 읽고 쓸 정도로 천재성을 보였으나 어려서부터 병약하고 고독했다. 그녀는 1850년 `포르투갈인의 소네트`라는 번역시를 통해 남편 로버트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노래했다. 로버트 브라우닝의 가장 유명한 시는 2만행이 넘는 `반지와 책`(1869)이다./조선
[1863년] 뭉크 Edvard Munch 출생 1863년 12월 12일 태어남 / 1944년 1월 23일 죽음 뭉크는 20세기초 표현주의를 이끌었던 노르웨이의 화가이다. 그는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죽거나 정신병에 시달린 다른 형제들처럼 잦은 질병으로 고통받았다. 이런 불행했던 유년시절의 죽음, 질병, 슬픔에 대한 기억들이 그의 여러 작품에 나타나 있다. 1885년 뭉크는 프랑스로 떠난 단기 그림여행을 계기로 프랑스 화풍을 접하면서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경직된 사고와 인습에 저항한 그는 심리적, 감정적 주제를 강렬한 색채로 표현해냈다. 1892년 베를린에서 열린 그의 전시회는 당시 격렬한 논쟁을 일으키면서 일반 대중과 기성 화가들의 거센 항의로 1주일 만에 중단되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 <절규>는 자기 내면의 지옥을 강렬한 색채 대비를 사용해 절망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브리태니커
[1979년] 12·12사태 발발 ← 전두환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20년 가까이 무소불휘의 독재 철권을 휘둘러오던 박정희 대통령이 수하인 김재규에게 살해됨으로써 유신체제가 막을 내리고, 바야흐로 민주주의를 이룩할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때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당시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 정승화가 군 내부 개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정치군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부각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전두환·노태우 등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 세력은 유력한 장성들을 끌어모아 치밀한 쿠데타 계획을 추진했다. 1979년 12월 12일 이들은 총격전 끝에 정승화를 강제로 연행하고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하룻밤 사이에 군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이듬해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계기로 국가권력을 탈취함으로써 긴 쿠데타 일정을 마무리했다. 이어 신군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하고 제5공화국 수립을 위한 과정을 밟아나갔다. 1995년 12월 21일 5.18 특별법 제정을 계기로 12.12사건은 '헌정질서 파괴' 행위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5년] 허영호, 남극대륙 빈슨매시프 정복 ← 고상돈에 이어 1987년 허영호가 한국인으로는 2번째로 등정한 에베레스트 1995년 12월 12일 탐험가 허영호가 남극대륙의 최고봉인 빈슨매시프 정상(5,140m)에 올랐다. 1995년 한국 빈슨매시프 원정대 대장으로 등반에 나선 허영호는 대원 두 명과 함께 12월 7일 빈슨매시프 남쪽 브란스콤 빙하상의 베이스 캠프(해발 2,100m)를 출발해, 닷새 만인 12일 오후 2시 20분에 빈슨매시프 정상을 정복했다. 그는 빈슨매시프 정상에 오름으로써 3극점과 7대륙의 최고봉을 모두 정복한 인류 최초의 탐험가가 되었다. 허영호는 1982년 한국 최초로 세계 제5위봉인 마칼루 등반에 성공했고 1983년에는 '죽음의 산'으로 널리 알려진 히말라야의 고봉 마나슬루에 올랐다. 그후 에베레스트, 남아메리카의 아콩카구아, 북아메리카의 매킨리,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 오세아니아의 칼스텐즈, 유럽의 엘브루즈를 차례로 정복했다. 그는 고산등정의 경험을 바탕으로 1994년 남극점에 도전해 도보탐험에 성공했고, 1995년 6월 북극대륙 도보횡단에도 성공했다./브리태니커
[1913년] 전 대법원장 민복기 閔復基 출생 1913. 12. 12 서울~. 호는 인재(仁齋). 1937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해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1965년에 경희대학교에서 법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40년 경성지방법원 판사를 시작으로 법조계에 발을 들여 놓은 후에 1945년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 판사, 1947년 법무부 검찰국장 겸 대검찰청 검사, 1948년 법무부 법무국장을 역임했다. 1949년에는 대통령 비서관을 지냈고, 1950년 제5대 법무부 차관, 1951년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 1953년 외자구매처(外資購買處) 차장, 1955년 초대 해무청장(海務聽長), 같은 해 제5대 검찰총장에 취임했다. 1956년 공직에서 물러나 서울에서 변호사로 개업했다가, 1961년 대법원 판사로 발탁되어 다시 공직에 복귀한 후 1963년에는 제16대 법무부장관에 취임했다. 1968년에는 제5대 대법원장을 맡았고, 1973년 다시 제6대 대법원장에 추대되는 등 행정부와 사법부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80년 통일원 고문 및 국정자문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81년 자신의 호를 딴 인재법률연구소(仁齋法律硏究所)를 개설하고, 1986년부터 헌정제도연구원장을 맡고 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했으며, 저서로는 〈형사소송개정법 해설〉 등 몇몇 법학관련 저작이 있다.
[1919년] 거문고산조 명인 한갑득 韓甲得 출생 1919. 12. 12 전남 광주~1987. 9. 28. 8세 때 최옥산·안기옥에게 가야금정악과 산조를 배웠고, 18세 때 박석기에게 거문고산조를 배웠다. 대동창극단(大東唱劇團)의 광주 공연에서 신쾌동의 거문고산조에 반해서 거문고산조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첫 연주는 일본의 오사카[大阪]·나고야[名古屋]·도쿄[東京]·고베[神戶] 등지에서 이화중선·이중선 등의 명창들과 함께 공연했다. 또한 조선창극단의 기악부원으로 중국의 상하이[上海]·하얼빈[哈爾濱]·신징[新京]·펑텐[奉天]·안둥[安東] 등지에서도 공연을 하여 대호평을 받았다. 조선성악연구회의 일원으로, 평양의 금천대좌(金千大座)를 비롯한 목포·함흥·성진·청진 등지의 극장공연에서도 크게 활약했다. 1978년 2월 23일 거문고산조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되면서 기·예능보유자로 지정받았다. 그가 창작한 거문고산조는 백낙준(白樂俊)류 거문고산조를 토대로 만들어졌는데, 다른 가락을 모방하지 않고 독자적인 새로운 가락을 만들어냈다. 연주기법 면에서도 연속자출을 2~3번 계속 써서 특이한 음색을 창출했고, 중중모리에는 한 장단 안에 옥타브의 주법인 겹가락의 특이한 표현법을 쓴다. 또한 보통 거문고산조는 중중모리와 자진모리 사이에 엇모리를 넣는데, 한갑득의 거문고산조는 중모리와 중중모리 사이에 넣는다. 그의 제자로 김취란·김춘지·김윤덕·방금선·강동환·원광호·황득주·이재화·원옥화 등이 있다.
[1929년] 오즈번(Osborne, John James) 출생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Look Back in Anger>로 영국 드라마에 새로운 운동을 선도한 영국의 극작가·영화감독 상업 예술가와 술집 여종업원의 아들로 태어나 1941년 아버지가 죽은 후 얻은 보험금으로 데번에 있는 벨몬트 칼리지에서 기숙하면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학교를 싫어했고 교장에 반대하는 수업거부를 한 뒤 학교를 떠났다. 런던에 있는 어머니에게로 돌아가 잠시 무역 언론지에서 일하다가 청소년 배우들의 순회극단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연극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곧 연기를 하게 되었고 후에는 지방에 있는 다양한 레퍼토리 극단의 배우 겸 감독이 되었으며 극작에도 손을 대었다. 첫번째 연극 〈그의 내부의 악마 The Devil Inside Him〉(1950)는 친구요 스승이며 그의 첫사랑이었던 여배우 스텔라 린든과 함께 쓴 것이었다. 1956년 배우로 런던에서 첫 공연을 했으며 같은 해에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가 영국무대극단(English Stage Company)에 의해서 공연되었다. 이 연극의 형식은 혁명적이지 않았지만 내용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았으며 전쟁의 여파가 초라하고 희망이 없다고 보는 20~30대의 영국인을 무대 위에 처음으로 등장시킨 것이다. 주인공 지미 포터는 비록 노동자의 아들이지만 정부의 교육제도를 통해서 중산층의 가장자리라는 편치 않은 경계선에 위치하게 된다. 그는 이같은 처지에서 좀더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자신의 신분 상승욕구를 위협하는, 전통적으로 특권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을 바라본다. 지미는 계속 노점에서 일하면서 중산층 출신의 아내와, 그녀의 친구에게 분노를 터뜨린다. 포터의 좌절에 대해 어떠한 해답도 제시하지 않으면서도 오즈번은 관객이 이같은 좌절을 예리하게 느끼도록 만든다. 2번째 작품인 〈연예인 The Entertainer〉(1957)은 자신감에 차 있던 과거에 비해 위축된 당시의 영국에 대한 비전을 투영한다. 이 극의 주인공은 쇠퇴해가는 코미디언이다. 오즈번은 연예관에서 연예를 즐기던 전통의 퇴조를 영국의 활력 쇠퇴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다. 1958년 오즈번과 감독인 토니 리처드슨은 우드폴영화사를 세우고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1959)·〈연예인〉(1959)을 제작했으며, 헨리 필딩의 소설 〈톰 존스 Tom Jones〉(1963)를 오즈번이 영화로 각색하여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종교개혁의 지도자를 다룬 서사극인 〈루터 Luther〉(1961)는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는 반항적인 주인공을 창조해내는 오즈번의 능력을 다시금 보여주었다. 그의 〈영국을 위한 연극 Plays for England〉(1962)에는 왕족에 대한 풍자인 〈밤베르크의 피 The Blood of the Bambergs〉와, 지배와 복종의 놀이를 하는 근친상간적인 한 부부에 대한 연구인 〈Under Plain Cover〉가 포함되어 있다. 지미 포터의 장광설은 다른 어조로 〈인정받지 못할 증언 Inadmissible Evidence〉(1964)의 좌절된 변호사에 의해서 계속된다. 〈나를 위한 애국자 A Patriot for Me〉(1965)는 앨프레드 레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살았던 동성연애자인 오스트리아의 한 장교를 묘사하여, 제국의 몰락과 일반적 행위를 따르지 않는 사람의 위험에 대한 오즈번의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수에즈 서쪽 West of Suez〉(1971)은 쇠락한 영국 식민주의자의 유형에 대한 어느 정도의 동정심과, 혼란되고 신경과민적인 상태로 나타나고 있는 식민주의자의 이데올로기상의 적수들에 대한 반감을 나타내고 있다. 오즈번이 자서전인 〈좀더 나은 계층의 사람 A Better Class of Person〉(1981)의 1회분에 밝힌 대로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에 나타난 분노의 대부분은 오즈번 자신의 솔직한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자서전에서 그는 자신이 싫어했던 어머니의 삶으로 구체화되고 있는 중하류층 영국인들의 평범한 삶을 공격하고 자신의 변덕스러운 성격을 말하고 있다. 처음에 배우로서 무대와 접하게 되었던 오즈번은 연기가 가능한 역할 창조의 능숙함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또한 그는 장광설 혹은 열정적이고 통렬한 대사를 연극의 요소 가운데서 높은 위치에 올려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그가 영국의 연극을 상류층의 삶을 그리는 잘 짜여진 연극으로부터 당대의 삶을 박력있게 사실적으로 다루는 연극으로 방향정립을 했다는 점이다.
[1950년] 흥남 철수 시작 (24일까지) 작전명 ‘크리스마스 카고’인 흥남철수작전은 장진호 일대에서 중공군에게 완전 포위된 미 해병 1사단 1만2000명의 병력을 구출하기 위해 12월 12일 시작됐다. 미 해병 1사단이 궤멸할 경우 동부전선에 투입된 미 10군단의 운명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동원된 수송선은 모두 193척으로 미군과 한국군 10만5000명의 안전한 철수를 위해 중공군을 겨냥한 함포 사격과 공중 폭격이 밤낮없이 계속됐다. 문제는 군병력만이 아니라 밀려드는 피란민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였다. 당초 작전계획에는 피란민 수송은 들어있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군 지휘부의 강력한 건의로 작전 책임자인 미 10군단장 아먼드 장군이 L-19기를 타고 흥남부두 위를 비행하며 수많은 피란민을 본 뒤 “우리는 이 사람들을 놔두고 갈 수 없다. 모두 구출해야 돼”라고 명령하면서 19일부터 피란민 승선이 시작됐다. 그러나 배가 부족해 1000명이 타도록 설계된 상륙정에 5000명이나 탈 정도였다. 배를 탄 피란민은 모두 9만8100명으로 이들은 거제도로 보내졌다. 이들 피란민의 한(恨)은 몇 달 뒤 가수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라는 노래로 태어나 오랜 기간 ‘국민가요’ 대접을 받았다. 흥남철수작전은 12월 24일 미 육군 3사단 병력이 마지막으로 배에 오르고 흥남부두를 함포사격 등으로 초토화하면서 끝났다. (김동철 정치전문기자-동아) /Google
[2000년] 부시 미국 대통령후보, 35일 만에 연방대법원에 의해 대통령으로 사실상 확정 미국 연방대법원이 2000년 12월 12일 "플로리다주의 수개표 재개를 명령한 주대법원의 결정은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결, 선거 35일 만에 조지 부시 공화당후보가 미국의 제43대 대통령으로 사실상 확정됐다. 연방대법원 9명 중 7명은 "플로리다주 대법원의 재개표 허용 결정이 헌법상 문제를 안고 있어 주대법원의 판결을 파기하고 환송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미국 제43대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공화당의 조지 부시 후보와 낙선자인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는 13일 각각 TV로 생중계된 연설을 통해 국민통합과 초당적 협력을 다짐했다. 부시 당선자는 이날 오후 10시 텍사스주 하원의사당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 후의 나라를 치유하는 데 함께 최선을 다하기로 고어와 의견을 같이했다"며 "우리는 이제 `정치`를 뒤로 하고 `미국의 번영`을 위해 함께 일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어 부통령은 한 시간 전인 오후 9시 부통령 집무실이 있는 워싱턴 백악관의 아이젠하워 빌딩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연방대법원의(수작업 재개표 위헌) 판결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국민통합과 튼튼한 민주주의를 위해 승복한다"며 선거 패배를 인정했다. /조선
[1997년] 유럽연합(EU) 15개국 정상들 `유로(EURO)회의` 창설 합의 유럽연합(EU) 15개국 정상들이 1997년 12월 12일 단일통화 가입국끼리 경제정책을 조정하기 위한 ‘유로(EURO)회의’ 창설 및 세부 기능 등에 합의했다. 경제통화동맹(EMU) 가맹국들은 1999년 1월부터 발효되는 단일통화 `유로`에 관한 모든 사항을 이 유로회의를 통해 논의하기로 결정했고, EU 회원국 중 영국 덴마크 스웨덴 그리스 등 유로 비가입국 네 나라는 제외됐다. 하지만 이들 네 나라도 EU 공동의 이익이 관련됐을 경우 ‘유로회의’ 에 참가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EU 정상회의는 유로회의 창설합의 과정을 통해 편의상 가입 대상국을 ‘인’, 비가입국을 ‘아웃’이라고 분류해왔다. 스트로스 칸 프랑스 경제장관은 “지금까지 존속해온 기존의 EU 경제재무장관회의에서는 주로 ‘결정’을 내리게 되고, 유로회의에서는 주로 논의, 정보 교환, 정책 입안 등의 작업을 하게 된다”고 발표했다. /조선
[1962년] 케네디, 소련에 직통전화가설 제의 쿠바미사일위기를 계기로 미-소 양국 정부간에 긴급 의사소통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어, 1963년 4월부터 미-소 양국의 전문가가 기술적으로 검토한 후, 6월 핫라인(hot line) 설치에 관한 협정이 이루어졌다. 통신방법은 유선과 무선의 2개 전신회로로써 이루어지는 텔레타이프 방식이다. 1967년 6월 중동전쟁 때, 소련은 이 통신선을 이용하여 미국에 평화를 위한 협력을 요청하였다. 1966년 6월 프랑스와 소련 정부간에 같은 종류의 직통통신선협정이 성립되었고, 1967년 2월 영국과 소련 정부간에도 똑같은 협정이 체결되었다. /naver
[1948년] 유엔총회, 대한민국을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 기독교에선 천지가 6일만에 창조됐다지만 대한민국은 1년만에 국가로서의 골격이 갖춰졌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해가 1948년이었다. 1년동안 총선(5월10일) 제헌국회 구성(5월31일) 헌법공포(7월17일) 대통령선출(7월20일) 정부수립(8월15일) 등 대한민국의 초석을 다지기 위한 일련의 과정들이 숨가쁘게 진행됐다. 이제 국제적으로 정통·합법정부임을 승인받는 일만 남았다. 10월19일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에서 맥아더를 만나 대한민국의 방위와 국제적 승인문제를 논의한다. 마침 유엔 한국임시위원단(UNTCOK)도 ‘5·10총선’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최종보고서를 유엔에 제출(10월8일)한 상태. 한국문제는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 끝 무렵인 12월7일부터 정식의제로 다뤄진다. 이미 정부는 장면 수석대표를 단장으로 조병옥 정일형 김활란 등 7명의 ‘초미니 대표단’을 파견해 놓았다. 1948년 12월12일 마침내 총회는 투표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가 ‘한국에 있어 유일한 정부(The only such government in Korea)’라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찬성41, 반대6, 기권1이라는 압도적인 지지.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은 6·25 때 유엔군이 참전할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가 됐다는 점에서 훗날 대한민국의 생존 및 발전과 직결된 더없이 중요한 외교적 승리였다. /조선
[1940년] 아인슈타인 박사, 미국에 귀화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집권자가 된 후 독일 시민권을 포기하고 독일을 떠났다. 뒤에 그는 프린스턴대학교 고등연구소 수학과정 기초임원이라는 정식자리를 받아들였다. 그결과 나치주의자들은 그가 애용하는 베를린 근처에 있는 여름 별장을 수색하고 그의 배를 압수했다. 그는 독일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음을 확신하고 유럽 자유세계가 방위력을 보충하고 무장하도록 촉구했다. 프린스턴에서 아인슈타인은 20년 이상을 거의 변화가 없는 생활을 유지했다. 그는 소박한 2층 목조가옥에서 아내와 살았고, 아침마다 산책을 하거나 연구소까지 걸어다녔다. 연구소에서 통일장이론을 연구했고 동료들과 토론했다. 마침내 그는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지만, 자신을 항상 유럽인으로 생각했다. 전쟁이 임박함에 따라 나치 과학자들이 '원자탄'을 최초로 만들 것이라는 공포감으로 아인슈타인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경계를 해야 하며 만일 필요하다면 빠른 조치를 취하라"는 편지를 썼다. 아인슈타인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했던 그러한 권고는 맨해튼 계획의 시작을 의미했다. /naver
[1936년] 영국왕 조지 6세(George VI, 재위 1936~1952) 즉위 조지 5세의 차남이며 현재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아버지이다. 해군사관으로서 제1차 세계대전 때 함대에 근무하였고, 전후에는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36년에 형 에드워드 8세가 심프슨 부인과의 결혼문제로 왕위에서 물러나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프랑스 ·캐나다 ·미국 등을 역방하여 국제 친선에 힘을 기울였고,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런던을 떠나지 않고 시민과 위험을 함께 하면서 때때로 군대 ·공장 ·공습피해지역 등을 시찰하여 사기 앙양에 힘썼다. 책임감이 강하고 중후하며, 왕실의 규범을 준수하여 국왕으로서의 중책을 훌륭히 수행하여 국민의 신뢰를 받았다. /naver
[1925년] 이란 리자 샤 팔레비왕 즉위, 팔레비왕조 시작 ← Mohammad Reza Shah & Empress Farah 이란의 새로운 국왕 레자 한이 1925년 12월 12일 즉위함으로써 1925년 10월 31일에 폐지된 카잔왕조(1779년-1925년)를 대신해 새로운 팔레비 왕조가 성립됐다. 47세의 새로운 국왕 레자 샤 팔레비(Mohammad Reza Shah Pahlevi)는 무명의 이란-코사크군 병사출신으로 눈부신 군경력에 의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 1921년 쿠데타로 테헤란 계엄사령관, 이어 육군대신이 되어 독재적인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대관식은 1926년 4월 25일에 있었다.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왕은 1974년 이래 인상된 유가로 인해 얻은 부를 근대, 서구식의 경제를 구축하는데 사용했으나 팔레비왕은 무례한, 전체주의 정치를 펼치는 국가를 만들면서 경제를 구축했다. 이로 인하여, 그는 열렬한 회교도에게서, 또 새로 등장하는 서구화된 중산층에게서도 지지를 얻지 못했다. 1978년에 불안감이 나타났을때, 팔레비 왕의 권력은 조기에 무너졌으며, 1979년 1월 16일에 그는 쫓겨서 추방되기에 이르렀고 민과 군의 지도자들이 잇달아 등장하여 팔레비는 내전을 피할 수 있었다. /조선
[1913년]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소장품 <모나리자>, 도난 2년여만에 이탈리아서 회수 세계적인 명작 <모나리자>는 오늘날 하나의 전설이다. 17~18세기에만 50점 이상의 위작이 나돌았고, 뒤샹과 달리를 비롯한 유명 화가들은 재창조 모델로 삼아 신격화시킬 정도였다. 그런데 모나리자가 감쪽같이 사라졌을 때, 전 세계인은 경악했다. 마치 유괴범에게 유괴라도 당한 듯 절망과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고, 모나리자의 미소만큼이나 수수께끼 같은 도둑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추측이 나돌았다. 박물관 측은 모나리자를 찾기 위해 거액의 보상금을 내걸었지만 사건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사건의 발단은 모나리자를 그린 다 빈치에게 있었다. 그는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왕에게 모나리자를 팔았다. 모나리자는 그렇게 미완성인 채 프랑스 소유가 되었고 세월이 흘러 루브르 박물관에 걸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애국심에 불타는 한 이탈리아 청년은 이것이 끝내 못마땅했다. 1913년, 피렌체의 골동품상인 게리는 이 청년에게서 ‘50만 리라를 주면 모나리자를 이탈리아에 돌려주겠다’는 편지 한 통을 받는다. 청년을 만나 진품인 것을 확인한 게리는 그를 경찰에 신고했다. 박물관 전 직원이었던 페루자라는 이름의 청년은 이탈리아의 보물을 고국에 돌려주고 싶어서 범행을 저질렀으며 박물관 정기휴일 날, 그림을 돌돌 말아 코트 안에 숨겨 걸어 나왔다고 자백했다. 모나리자의 명성답게 이 사건은 여러 사람과 얽혀 있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피카소와 시인 아폴리네르도 이 사건과 연루되어 곤혹을 치렀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종종 유물을 훔치던 아폴리네르의 비서 피에라는 훔친 유물을 아폴리네르 집에 두거나 피카소에게 싼 값에 팔았는데, 모나리자가 사라지자 피에라가 용의자로 지목된 것이다. 덕분에 둘은 장물취득혐의로 조사를 받았고, 아폴리네르는 구금까지 됐을 정도로 모나리자 도난 사건의 여파는 대단했다. /Google
[1901년] 마르코니, 최초의 대서양횡단 무선통신에 성공 ← 마르코니 1901년 12월 12일 당시 22살의 이탈리아인 발명가 마르코니 (Marconi, Guglielmo, 1874∼1937)가 캐나다 뉴 펀들랜드 부근에서 스스로 고안한 무선 수신기로 무선통신에 성공했다. 약속된 영국 그리니치 표준시각 정오. 숨막히는 긴장이 흐르는 가운데 기계에 반응이 왔다. “톡톡톡” 수 초도 걸리지 않은 짤막한 신호였다. 2~3m 떨어진 곳에서라면 들리지 않았을 작은 소리였지만 마르코니에겐 지축을 흔드는 굉음으로 들렸다. 그곳에서 1,600마일 떨어진 대서양 건너 영국에서 보낸 전파였기 때문이었다. 이날 마르코니가 수신한 전파는 모르스부호로 S자. 역사상 최초로 수천마일 떨어진 곳에서 선 없이 신호를 보낼 수 있게 되면서 물리적인 ‘거리’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 시대가 열린 것이다. 무선시대는 사실 모르스에 의해 열렸다. 그러나 그레이엄 벨이 전화를 발명하면서 유선전신은 급속하게 무선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무선이 아니면 안되는 곳이 딱 한 곳 있었다. 항해중인 선박과 선박간 통신이었다. 마르코니는 바로 이점에 착안했고, 실제로 마르코니는 자신의 발명품을 영국 해군에 팔았다. 처음에 무선통신은 해저전신사업으로부터 심한 저항을 받았으나 대(對) 선박 또는 선박 대 선박 통신에서 획기적인 효과를 올려 무선전신의 독무대가 되었다. 1909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마르코니의 업적은 무선통신의 기반이 됐고 위성과 지구간 통신에 활용되면서 우주개발이 가능해졌다. 1937년 마르코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전세계 방송사들은 이례적으로 2분 동안 침묵을 지켰다. 무선전신과 3극 진공관이 결합된 라디오 대중화로 세상이 온통 전파잡음으로 뒤덮여 있었던 시대였다. ‘전파의 아버지’에 대한 최대의 추모였다. /조선
[1821년] 프랑스의 소설가 플로베르(Flaubert, Gustave) 출생 ← 플로베르, E.F. von Liphart가 1880년에 그린 드로잉(부분) 1821. 12. 12 ~ 1880. 5. 8 루앙 출생. 시립병원 외과부 의사의 아들로 중학시절부터 소설 《광인일기(狂人日記)》 《11월》 등을 습작하였다. 파리대학 법학부에 재학 중 간질(癎疾)과 유사한 신경증이 발작한 것을 계기로 문학에 전념하여, 《감정교육(感情敎育)》의 초고와 《성(聖)앙투안의 유혹》의 초고를 썼다. 그 뒤 낭만파의 영향에 중독된 공상(空想)의 과잉이나 산만한 작풍을 극복하고 확고한 문체와 긴밀한 구성을 가진 《보바리 부인》(1857)을 발표함으로써, 프랑스 당대의 최고 작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는 루앙 근교 센 강변에 있는 크로와세라는 곳에서 살았는데, 독신의 연금생활자(年金生活者)로서 어머니와, 일찍 죽은 누이동생의 딸, 그리고 늙은 하녀와 함께 조용히 칩거생활을 했기 때문에 세상에서 그를 은둔자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가끔 파리로 나가서 E.D.공쿠르, A.도데, E.졸라, I.S.투르게네프 등과 만나서 저녁 식사를 할 때에는 좌담의 명수이기도 하였다. 《보바리 부인》의 극명한 현대 풍속의 묘사에서 일전하여 고대 카르타고의 서사시를 환기시키는 역사소설 《살람보》(1862), 그리고 다시 자전적 요소가 짙은 현대소설 《감정교육》(1869), 또다시 일전하여 고대 이집트 수도사의 환상을 그린 대화형식의 《성(聖)앙투안의 유혹》(1874) 등, 플로베르의 대작은 수없이 많은데 모두가 독자적인 문체를 자랑하는 것들이었고, 주옥 같은 단편집 《세 가지 이야기》(1877)는 그러한 다채로운 문체의 표본처럼 보인다. 그의 마지막 소설 《부바르와 페퀴셰》(1881)는 그가 급서함으로써 미완성으로 남은 것이다. 그가 젊은 날에 사귄 친구의 누이동생의 아들인 모파상은 그가 만년에 가장 사랑한 제자였다. 문학사상으로 플로베르가 본격적 사실주의 소설의 창시자였다는 것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사실 그는 면밀한 자료수집과 현지조사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작자의 주관이나 선입견을 작품 속에 반영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작가는 몰개성적 태도로써 객관에 철저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문학관이었다. 그러나 고백이 금지된 작가의 자아(自我)는 오히려 더욱 깊이 침잠된 진실한 모습을 작품 속에 나타내는 결과가 되는 것이므로, “보바리 부인은 나였다”고 전해지는 그 자신의 말에는 거짓이 없을 것이다. 플로베르는 결코 단순히 겉으로 보는 풍속의 갖가지 양상을 그려내는 작가가 아니었다. 그의 내부에는 꿈 많은 로마네스크한 자기 자신, 또는 무언가를 천착하기를 좋아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관조하는 소설가의 눈이 항상 번득이고 있어서, 그렇게 관찰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보편적인 인간상으로서 보바리 부인이나 부바르나 페퀴셰의 모습으로 그려 내지 않고서는 견디지를 못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작가와 작품 사이의 ‘단절(斷絶)’이 바로 ‘관련’이라는 미묘한 존재양식을 밝히는 귀중한 문헌이 그가 죽은 후에 간행된 《서간집》(9권:1926∼1933) 및 그 보충 4권(1954)이다. 엄격하게 문체를 다듬는 작가로서의 플로베르상(像)은 이미 정착된 지 오래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일어난 신비평파의 비평가들은 높은 관점에서, 문학을 결연히 언어의 문제로 환원시킨 최초의 작가로서 플로베르를 누보 로망(nouveau roman:新小說)의 원류(源流)라는 위치에 두었다. /naver
그밖에 2002년 前 국회의장 황낙주 사망 2000년 북한-영국 국교 수립 1996년 한국,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9번째 회원국으로 가입 1995년 산악인 허영호 남극대륙의 최고봉 빈슨 매시프 정복 1993년 이봉주, 호놀룰루 마라톤서 우승 1990년 미크로네시아, 유엔안보리 신탁통치로부터 독립 1989년 정부, 증시안정화 대책 발표 1988년 언론청문회 1985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발족 1984년 모리타니에 무혈쿠데타 발생 1983년 국회 재무위 ‘독립공채 상환에 관한 특조법’ 의결 1983년 쿠웨이트 주재 미국대사관 등 7개소에서 연쇄폭발테러 발생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1974년 유엔군사령부, 미합참으로의 작전명령권 이관을 발표 1969년 일본 한국산 김 3,500만장 수입결정 1968년 한국투자개발공사 발족 1966년 한국-멕시코, 무역협정 체결 1963년 케냐, 영국으로부터 독립 1963년 제3공화국 초대내각 조직 1961년 체코, 알바니아와 단교 1960년 제3대 지방의회 의원 선거(서울시-도의회 의원 선거) 실시 1956년 일본 국제연합(UN) 가입 1953년 판문점 정치회담. 예비회의 무기휴회 1952년 빈에서 제국민평화대회 개최 1946년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 개원, 의장에 김규식 1936년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 공포 1919년 구두교수법 개척한 미국의 교육자 로저스 사망 1916년 독일, 윌슨을 통해 휴전 제의 1915년 최초의 금속제 비행기 융커스 J-1 첫 비행 성공 1915년 미국의 가수 겸 배우 프랭크 시나트라 출생 1889년 영국의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 사망 1879년 아프가니스탄, 영국령으로 됨 1800년 미국 워싱턴시를 수도로 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