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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은혜(엡 2:1-10)
할렐루야!
이 시대의 탁월한 영성 작가인 필립 얀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에서, “은혜는 우리 시대 마지막 최고의 단어이다. 물 한 방울 속에 해의 모습이 숨어 있듯이, 복음의 진수가 그 속에 들어 있다. 세상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은혜에 목말라 있다. 안식처 없이 표류하는 세상이, 믿음의 닻을 내리기에, 은혜만큼 좋은 곳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믿음의 닻을 내리고, 날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은혜”라는 말은 헬라어로 “카리스(charis)”라고 하는데, 그 어원을 따라가다 보면 “기쁘다, 즐겁다”는 뜻의 동사가 나옵니다.
기쁨과 즐거움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세상 속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찾으려고 몸부림칩니다.
돈이 많으면, 힘이 있으면, 지식이 많으면,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건강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봐 주면, 기쁘고 즐거울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돈의 노예가 되면 부모도, 가족도 버리는 무자비한 자가 됩니다. 권력의 종이 되면 거짓과 권모술수에 빠집니다. 지혜가 없는 지식이 많은 자는 돌같이 차가운 사람이 됩니다. 많은 사람의 인기를 받은 사람도 엉뚱한 곳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라고 말했는데, 우리 안에 기쁨과 즐거움을 찾는 비결은 바로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 때, 힘써 알 때, 우리는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행하신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깨닫고 경험할 때,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맘껏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주님을 알고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시편 145:8절을 보면, 다윗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 긍휼이 많으신 분,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신 분이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경험할 때,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다윗은 그의 삶 속에서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경험했습니다. 비록 들판에서 양을 치는 비천한 목동의 신분이었지만, 하나님은 그 목동인 다윗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죽음으로 내모는, 용서받을 수 없는 간음죄와 살인죄를 지었지만, 그가 통회자복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시고, 인자와 자비를 베푸어 주셨습니다.
구약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록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바알과 아세라 같은 우상을 섬겼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시거나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타락하고, 우상을 섬기면 섬길수록, 더욱 애통한 마음으로,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호세아서는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호세아 11:1-2절을 보면,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8절을 보면,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이렇게 외치십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호세아서는 호세아 선지자와 음란한 여인 고멜과의 결혼 이야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음란한 고멜과 같지만, 결국에는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의 최고봉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성육신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1:14절을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말했습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은혜와 진리의 본체가 되십니다. 사도 요한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간은 은혜의 본체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 비로소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인생은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이 비록 좋지 않다 할지라도,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1-3절 말씀입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우리의 과거의 삶을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를 따르는 자, 불순종의 자녀,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사는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우리 자신들의 어떤 수고와 노력으로도 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자였습니다. 이런 우리의 신분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해방시켜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한 해를 되돌아보면서, 추수감사예베배를 드릴 수 있는 것도,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 우리가 어찌 이 자리에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항상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4-5절 말씀이 정답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셨고, 하나님이 다시 부활시킴으로,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베풀어 주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이것이 감사요, 축복입니다. 아무리 내가 생각해 보아도, 이런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나 조건을 갖추지 못했는데, 나를 사랑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시고, 영생을 주시고, 천국을 선물로 주신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6-7절을 보면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로부터 일으키셔서, 영광스런 주님의 보좌에 앉혀주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증거하는 통로로 삼아 주십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는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주일 아침, 이렇게 교회에 나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입니까? 가정의 평화와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입니까?
하나님께 잘 보여서, 천국에서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입니까?
나 같은 죄인 살려주신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비하면, 너무나 부족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몸짓에도 기뻐하시고, 행복해 하십니다. 내가 대단한 것을 바침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일주일 동안 세상에서 지치고 상한 심령이었지만,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께 나아와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면서, 부족하지만, 감사함으로, 우리의 정성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너 왜 그렇게 속만 썩이고 엉뚱한 짓만 하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기뻐 받아주시고, 환영해 주십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안에 보배로운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나를 위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했노라고 확증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책임을 추궁하지 않습니다.
신약 성경 역시, 우리에게 베푸시는 놀라운 주님의 은혜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는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은혜를 너무나도 잘 보여줍니다. 허랑방탕하게, 비록 재산을 모두 탕진한 아들이지만, 아버지는 이미 집을 나가는 순간부터, 그 둘째 아들을 용서해 놓고, 사랑으로 기다리십니다. 돈을 모두 탕진하고, 오갈 데 없는 아들은 돼지에게 주는 열매마저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겨우 목숨을 연명해갑니다. 그때 문득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그러나, 돌아갈 염치가 없습니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깁니다. 누가복음 15:20절을 보면,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라고 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말합니다. 그때 아버지는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 잃어버렸다가 다시 얻은 아들이라고 기뻐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탕자와 같은 우리 모습이지만,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이키기만 하면,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종이 아닌 아들로 받아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는 자격이 필요 없습니다. 내가 얼마만큼 수고하고 노력했느냐를 따지지 않습니다. 얼마만큼의 열매를 있는가 하는 것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산수의 덧셈이 아닙니다.
율법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같은 신용불량자를 완전히 탕감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힘과 노력으로 무엇인가 주님을 위해 일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면, 그만한 노력과 공로가 있어야 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4세기의 유명한 신학자였던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을 비교했습니다.
펠라기우스는 도시 출신에 점잖고 언변이 좋아, 누구에게나 호감을 샀습니다. 이에 반해, 어거스틴은 젊은 시절을 방탕하게 보냈습니다. 사생아를 낳기도 했습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원죄를 부인합니다. 인간의 선행과 노력으로 하나님의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입장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임을 믿었습니다.
그 결과, 펠라기우스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여기서, 피터슨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론상으로 어거스틴 쪽이지만, 실제 생활은 펠라기우스 쪽이라고 지적합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냐? 무엇인가 내가 수고하고 노력을 해야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그에 상응한 어떤 행동을 해야지,”
이런 생각들이 펠라기우스적인 생각들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생각들을 모두 버리고,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주변을 둘러볼 때, 은혜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우리가 보기에는 가증한 존재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기쁨이요, 자랑이요, 면류관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겉모습이나 일의 결과를 보고, 평가하지 않으셨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향해서도, 예수님은 쉽게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율법을 적용해 돌을 들어 치려는 자들을 향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법대로 하면, 당연히 죽여야 하지만, 주님은 그 여인에게, 아무런 조건없이, 용서와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가서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을 하지 말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자, 사랑할 수 없는 자, 나에게 아픔을 주고, 고통을 주는 자까지,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율법의 렌즈로 보면, 다른 사람의 약점이 보이고, 허물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렌즈로 보면, 장점이 보입니다. 좋은 점이 보이고, 칭찬할 것이 보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하나님이 의도하신 모습으로 본다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걸작품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불과 같은 열정의 삶을 살다가 33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프랑스 철학자 시몬느 베이유(1909-1943)는 “중력과 은총”이라는 책에서, 세상은 거대한 두 힘에 의해 지배된다고 말했습니다. 중력의 힘과 은혜의 힘입니다. 중력은 모든 것을 자기 안으로 끌어들입니다.
자기 욕심과 야망을 가지고, 끊임없이 자기 영역을 확장하며,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합니다. 그 결과는 싸움과 투쟁과 갈등입니다. 결국 자기 이기심의 노예로 살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의 힘은 우주의 물리적 법칙을 뛰어넘습니다. 은혜를 아는 자는 자신의 능력이나 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함을 인정합니다. 다른 사람의 약점이나 허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장점을 보고, 가능성을 봅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덮어줍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지배하는 중력의 힘을 벗어나는 방법입니다. 세상은 중력의 법칙이 지배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은혜의 법이 지배합니다. 은혜의 렌즈로 세상을 보는 자는 자신의 부족과 연약함을 알기에,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통로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때,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가 밀물같이 우리 삶 속으로 밀려옵니다.
우리는 중력의 법칙이 아니라,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죤 뉴톤은 원래 잔인하고 야비한 노예 무역상이었습니다. 그는 무자비하게, 수많은 노예를 아프리카에서 사서, 노예선에 태워, 영국에 팔아넘겼습니다. 그러던 그가 풍랑을 만나, 물에 빠져 죽게된 상황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후에, 그는 그 직업을 버리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윌리엄 윌버포스와 함께,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앞장섰습니다. 그는 평생 자기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찬송가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를 작사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목말라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로 살아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을 던지신 주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그 놀라운 은혜를 날마다 찬양하며,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해같이 빛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부터는 내 힘이나 내 노력이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에 대한 기쁨과 감격과 감사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도 나의 연약함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의 은혜의 손길에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의 강물 속에 잠기는 것입니다. 그 속에 사랑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물이 흐르면, 에너지가 생기는 것처럼, 은혜의 강물이 흐르는 곳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생명을 살리고, 어둠을 몰아내는 기적이 선포됩니다. 우리 안에 이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채워지기를 원합니다.
우리 삶 가운데, 교회 가운데 은혜의 강물이 흘러 넘쳐서 은혜에 목말라 하는 지친 영혼을 살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주님 한 해 동안, 변함없는 사랑과 은혜로,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삶 속에 원망과 불평이 사라지고, 오직 감사만이 가득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