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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1-03일간 남도여행(고창 고흥 여수 장흥 정읍시고부면 새만금방조제) 이야기 2부.
(백리 섬섬길 여행 이야기)
6.2일 아침 목포 친척집에서 06시32분에 백리 섬섬길 여행길에 나섰다. 우선 조식 전이라서 목포시 인근의 청계면 장부다리 기사식당에서 한식부페로 조식을 때우고 07시34분에 기사식당을 출발했다.
서해안고속도로 목포ic로 진입해 무안군 삼향면 죽림ic에서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달렸다. 차량네비에는 팔영대교 주소인 “전남 고흥군 영남면 우천리 팔영대교”를 찍고 출발했다.
고흥반도와 여수반도 사이의 바다가 순천만이다. 이 순천만 바다에는 고흥군 영남면 우천리(팔영대교)-적금도(적금대교)-낭도(낭도대교)-둔병도(둔병대교)-조발도(화양조발대교)-여수시 화양면 육지 순으로 연결된 5개의 다리가 바로 백리 섬섬길이다.
남해고속도로 고흥ic를 빠져나와 팔영대교를 건너서 교량관리사무소에(국토안전관리원) 도착하니 시간은 09시35분이다. 교량 관리사무소(국토안전관리원) 앞에는 이곳 행정구역이 “여수시 화정면 적금리”라는 큰 돌비석이 서 있다.
팔영대교를 건너기 전은 고흥군 영남면 우천리이지만 일단 팔영대교를 건너면 여수시 화정면 적금리이면서 적금도라는 섬이었다.
적금도 교량관리사무소(국토안전관리원)에서 서쪽 고흥반도쪽으로 보이는 팔영대교는 푸르고 잔잔한 바다위를 날렵하게 쭉 뻗어 있는 모습이 한없이 아름답다. 6.2일자 목포에서 이곳 적금도 국토안전관리원사무실(교량관리사무소)까지의 주행거리는 151km이다.
(고흥반도에서 팔영대교를 건너면 여수지 화정면 적금도라는 섬에 위치한 교량관리사무소가 있음.우측의 흰색건물이 교량관리사무소임 이것을 국토안전관리원이라고도함)
(적금도 교량관리사무소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팔영대교 모습. 바다건너쪽이 고흥군 영남면 땅이고 바다위로 뻗은 다리가 첫번째 다리인 팔영대교임. 우측하단의 건물이 적금도 교량관리사무소임.)
여수시 화정면 적금리 소재 교량관리사무소에서 잠간 쉬었다가 다시 약 1km쯤 달리니 적금도 전망공원이었다. 여기서 남쪽으로 보이는 남해바다와 섬들도 한없이 아름답고 조용해 보인다. 그리고 바다는 더 푸르게 빛나는 것 같았다. 적금도 어촌 마을은 정말 한가롭고 평화롭게 보였다.
(적금도 교량관리사무소에서 조금더 동쪽으로 도로를 달리면 적금도전망공원이 나타남.사진에 보이는 정자가 적금도 전망공원내 정자임.)
(도로상에서 바라본 적금도 어촌마을의 한가롭고 평화로운 모습)
이 적금도 전망공원을 지나니 적금도 섬과 낭도 섬을 연결하는 다리가 또 나타났다. 바로 적금대교였다. 적금대교 다리의 중간부분은 붉은색 아취모양으로 만들어져서 다리가 더 아름답게 보였다.
(적금도 섬과 낭도 섬을 연결하는 적금대교 모습. 팔영대교 다음의 두번째 다리임. 오른쪽 멀리 보이는 섬이 적금도이고 왼쪽에 보이는 육지가 낭도 섬이다. 중간부분의 아취 모양이 무척 독특하고 아릅다다.)
적금대교를 건너니 이번에는 낭도 섬이 나타났다. 이 낭도 섬과 둔병도 라는 섬을 연결하는 다리가 나타났다. 이 다리를 낭도대교라고 했다.
(바다 건너에 보이는 육지가 낭도 섬이고 사진 아래쪽 육지가 둔병도 섬이다. 낭도섬에서 둔병도 섬으로 연결된 낭도대교의 모습임)
더 달려서 낭도대교를 건너니 이번에는 둔병도라는 섬이다. 이 둔병도라는 섬과 또 다른 섬인 조발도라는 섬을 연결하는 다리가 나타났다. 이 다리가 둔병대교다. 따라서 둔병대교를 지나니 조발도라는 섬이 나타났다.
(사진 위쪽의 육지가 둔병도 섬이고 사진 왼쪽의 육지가 조발도 섬의 육지임. 푸른바다 위의 다리가 둔병대교 모습임. 둔병대교는 네번째 다리임)
조발도 섬에 들어서서 조금 더 달리니 이번에는 조발도 전망공원이 나타났다. 이 조발도 전망공원 앞에는 조발도 입체교차로가 잘 만들어져 있다. 조발도 마을 진입로와 화양조발대교로 직진하는 교차로였다. 이 교차로 남쪽에 조발도 전망공원이 있다. 이 전망공원은 주자장이 넓고 카페와 식당도 있다. 조발도 전망공원에서 잠시 쉬었다가 조발도와 여수시 화양면 육지를 연결하는 다리를 건넜다. 이 다리를 화양조발대교라고 했다. 여수시 위쪽이 순천시이니 여수시 화양면은 순천만 연안과 연결되는 육지인 셈이다.
(조발도 전망공원앞에 위치한 조발교차로 모습, 이 도로변 우측에 조발도 전망공원이 있음,.이 공원에는 카페 식당 등의 편의시설이 있음.)
(조발도 전망공원 모습. 카페와 식당 등의 편의시설 모습.)
(조발도 섬에서 화양조발대교를 진입하기 전에 바라본 화양조발대교 모습. 화양조발대교를 건너면 여수시 화양면 육지와 연결됨.백리 섬섬길의 마지막 다섯번째 다리임.)
이렇게 백리 섬섬길인 팔영대교(고흥군영남면우천리)-적금대교(적금도)-낭도대교(낭도)-둔병대교(둔병도)-화양조발대교(조발도)라는 5개의 섬섬길을 통과했다. 섬과 남해바다의 풍광을 구경하는 재미가 솔솔했다. 앞으로는 화양조발대교에서 여수시 돌산도까지 연결하는 공사가 착공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백리 섬섬길은 훨씬 더 다채롭고 아름다운 풍광의 관광지가 될 것 같다.
(장흥군 회진면 회진리 성화식당의 졸복탕 이야기)
여수반도의 화양면과 여수시내를 거쳐 “순천시 해룡면 대안리”의 남해고속도로 도롱ic를 지나서 계속 달리니 남해고속도로 순천만ic–남순천톨게이트를 통과해 한참을 더 달렸다.
남해고속도로 장흥ic를 빠져 나와서 국도를 타고 더 달려서 “전남 장흥군 회진면 회진리 207-2번지“의 성화식당에 도착했다. 이 성화식당은 졸복탕으로 유명하다는 모일간지 기사를 보고 취득한 정보였다. (성화식당에 도착해 시간을 보니 14시04분이고 목포에서 이곳 장흥군 회진면 회진리 성화식당까지의 6.2일자 누적주행거리는 296km이다.)
성화식당 겉 모양은 무척 허름해 보였다. 쪽문을 열고 식당으로 들어가니 할머니 한분이 하는 말이 오늘은 재료가 다 떨어져서 영업을 끝냈다고 한다. 한참 생각을 하더니 서울에서 오신 손님이라 특별히 준비해 주겠다고 들어와서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그래서 졸복탕을 먹게 되었다. 서울에서 복어국을 먹었던 기억이 생생해서 그 생각만 하고 찾아왔는데 막상 여기 성화식당에서 제공한 졸복탕은 맛이 영 달랐다.
복어는 크기가 조그만 복어를(이것을 졸복이라함) 통째로 된장에 풀어서 여러 마리를 끓였는데 복어속 뼈들이 무척 억셌다. 목에 걸리면 큰일 날 것 같아서 조심조심 먹었지만 내가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몰랐다. 정말 맛이 없어서 먹을 수가 없었다. 겨우 겨우 먹는 시늉을 해서 식사를 마쳤다. 그렇다고 맛이 없다고 불평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카드로 계산을 하고 나왔는데 졸복탕 값이 1인당 1만6000원씩해서 2인분 3만2000원을 받았다. 오늘 점심은 망쳤구나 하는 생각으로 성화식당을 떠났다. 맛도 없는 졸복탕을 3만2000원이나 주고 사먹었으니 정말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불평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난감하기만 했다.
모일간지의 장흥군 회진면 회진리 성화식당 소개 기사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장흥의 술꾼이 검증한 숙취에 좋은 음식은 졸복탕이다. 졸복탕은(작은복어를 끓인 탕) 개운한 국물 덕에 속을 달 래기 좋다. 졸복은 고춧가루 없이 맑은 탕으로 끓인다. 장 흥 졸복탕은 맑지 않고 누렇다. 소금 대신 된장을 넣 어서다. 성화식당 임평심 할머니도(73) 집된장 풀어서 미나리 넣고 졸복탕을 끓인다. 구수한 국물 덕에 금세 밥 한 공기를 비웠다.(백종현 기자)”
그러나 이런 특정식당 홍보기사를 보고 100% 확신한 내가 바보였던 것 같다. 음식은 반드시 시식을 해 보고 판단해야 한다는 교훈을 너무 늦게 깨딸았으니 바보가 아닌가 말이다.
(소설가 이청준 선생 생가 이야기.)
이렇게 장흥군 회진면 회진리 성화식당에서 졸복탕으로 맛 없는 점심을 마친 뒤 우리는 소설가 이청준 선생의 생가를 찾았다. 생가 주소인 “전남 장흥군 회진면 진목리 482-2번지”를 네비에 입력시키고 득량만 해안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향했다.
이청준 소설가의 생가인 회진면 진목리에 도착하니 시간은 15시20분이고 목포에서 이곳까지의 누적 주행거리는 300km다. 동네 중심부에 큰 당산나무가 있고 이 당산나무 주변 그늘에는 동네 아낙네들이 앉아 휴식을 즐기는 모습이다. 당산나무 앞은 동네 주차장 겸 동네마당이었다. 동네 마당을 지나 서쪽 골목으로 들어가니 동네 마을 가운데 기와집이 한 채 있는데 거기가 바로 이청준 소설가의 생가였다.
(이청준 소설가의 생가가 있는 장흥군 회진면 진목리 동네 마을 당산나무와 마을주차장 겸 마당 모습. 이 당산나무 주위에 동네 아낙네들이 휴식을 즐기고 있는 모습임.)
(소설가 이청준씨의 생가 모습. 이 생가는 동네 마을의 한 중심부에 위치해 있음.)
진목리 마을을 둘러보니 동.서.남.북중에서 남쪽만이 뻥 뚫린 계곡 사이로 득량만 바다가 보였다. 나머지 삼면은 모두 산으로 둘러쌓여 움푹패인 골짜기 속에 들어앉은 명당자리에 위치한 동네였다. 그래서 이청준 선생 같은 소설가가 태어났다 보다. 동네 북쪽만이 산이 유난히 높아 보였다. 그리고 산들은 모두가 소나무 숲이다. 이청준 작가가 중고등학교 시절 겨울에 어머니와 함께 눈길을 걸을 때 소복 소복 눈 밟는 소리가 들렸다는 장흥 읍내로 나가는 그 고갯길은 어디인지는 알 길이 없다.
동네 아낙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이청준 작가는 딸이 하나 있는데 이청준씨가 생전에 애를 생산하지 못해 입양한 딸이라고 귀뜸해 주기도 했다.
(소설가 이청준씨의 생가가 있는 진목리 마을에서 남쪽으로 만 뻥 뚫린 모습. 앞에 보이는 보성군 연안을 파고 들어온 등량만 바다 모습)(여기서 1.8km쯤 남쪽으로 떨어진 곳에 이청준씨의 묘가 있음.)
(소설가 이청준의 이력)
1.소설가 이청준은 1939년생이다. 필자보다는 7년 선배이 다. 지금은 고인이 되어 생가에서 약 2km 남쪽으로 떨 어진 진목리 생가집 인근에 잠들어 있다.
2.장흥군 대덕면(지금의 회진면) 대덕동 초등학교-광주서중 -광주일고-서울문리대 독문학과 졸업후 사상계 여원 등 의 잡지사에 근무하면서 많은 소설을 남긴 소설가이다.
(소설가 이청준의 문학세계)
1.총명한 아이였던 이청준은 그 뛰어남 때문에 가난한 고 향을 떠나 도시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남루한 고향을 떠났다는 생각과 남루한 고향이 자신을 버렸다는 생각에 묶여 자유롭지 못했다. 이청준은 “나 는 가난한 고양이 부끄러웠고 그 고향에서 쫒겨난 꼴이 된 자신이 부끄러웠다”는 진술에서 보듯이 이청준은 자 신의 마음속에 원죄의식처럼 자리잡은 가난한 고향의 부 끄러움에서 도망칠 수 없었다.
2.소설가 이청준은 “삶의 출발이 남루해서”에서 언급된 “나의 내면속 부끄러움이 내 소설을 쓰게하는 것 같다.” 는 고백에서 볼 수 있듯이 그 부끄러움이 자신의 소설창 작의 에너지로 전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3.이청준은 소설 “소문의 벽” “조율사” “씌어지지 않는 자 서전” “당신들의 천국” “남도 사람” 등 많은 소설속에서 자신의 고향에 대한 원죄의식과 부끄러움을 (다른 사람 의 눈에 보이지 않는) 소설창작의 에너지로 사용하고 있 다.
4.이청준은 인간이 가진 현재의 꿈과 희망이 현실의 고통 때문에 시달리는 일이 없기를 소망하면서 소설을 썼던 사람이었다.
가난은 죄가 아니다는 통설도 있는데 이청준은 고향과 자신의 남루함과 가난함에 대한 부끄러움이 지나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창작작업의 에너지로 전환시켰다는 점과 현재의 꿈과 희망이 현실의 고통에 시달리는 일이 없기를 소망하면서 창작에 전념했다는 점은 평가받을 수 있다고 본다.
(이청준 소설가의 이력과 문학적 세계관을 홍보하고 있는 안내게시판 모습)
이렇게 이청준 소설가의 생가를 둘러본 뒤 우리는 15시47분에 다시 남해고속도로 장흥ic쪽으로 출발했다. 이렇게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목포 친척집에 도착하니 시간은 19시58분이고 오늘의(6.2일) 누적 주행거리는 418km다.
(동학혁명의 원인이 된 전북 정읍시 고부면 이야기)
여행 3일째인 6.3일 06시40분에 목포 친척집을 출발했다. 목포시 인근 청계면 장부다리 기사식당에서 한식부페로 조식을 마쳤다. 우리는 전북 정읍시 고부면으로 향했다. 현재의 정흡시 고부면에 가면 옛날 관아터 등의 유적지가 있을 것이란 막연한 추정을 하면서 출발했다.
그래서 정읍시 고부면 면사무소(행복복지센터) 주소인 “전북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72-1번지”를 네비에 찍고 출발했다. 정읍시 고부면 면사무소에 도착하니 시간은 09시25분이다. 목포에서 고부면까지의 6.3일 주행거리는 117km다.
고부면 면사무소에 도착해 옛날 고부관아터를 주민에게 문의하니 현재의 고부초등학교 자리가 고부관아 터라고 한다. 고부초등학교를 찾아가니 학교정문 옆에는 안내판이 2개가 설치되어 있다.
(정읍시 고부면 소재 고부관아 터 안내문 내용1)
“고부관아는 1894년1월10일 고부 봉기 때 전봉준을 중심 으로한 농민군이 이곳을 점령하고 탐관오리를 몰아내면 서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을 알렸던 역사적 현장이다.
1911년 고부관아의 모든 건물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고 부 공립 보통학교가 건립되었다. 이러한 사실에서 전통 문화유산을 말살하고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사실을 왜 곡하려던 일제의 만행을 명백히 볼 수 있다. 지금은 고 부관아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정읍시 고부면 고부초등학교 정문에 설치된 안내게시판1의 모습.)
(정읍시 고부면 소재 고부관아 터 안내문 2)
“고부는 백제시대 5방중의 하나였으며 곡창지대이면서 해 안을 접하고 있어 물산이 풍부한 곳이었다. 이는 역설적 으로 탐관오리가 선호하는 곳이 되었고 1894년 당시 고 부군수 조병갑의 수탈과 탐욕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고 부의 동학교도와 농민이 합심하여 봉기를 일으키니 바로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인 고부봉기다.
본래 관아는 동헌과 객사 등 여러 부속건물이 있었으나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 인해 모두 헐리고 대신에 초등 학교가 세워졌다. 이로 인해 그 고부관아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다.”
(정읍시 고부면 고부초등학교 정문에 설치된 안내게시판2의 모습.)
(정읍시 고부면 고부초등학교의 현재 모습. 이 자리에는 1894년 이전까지는 고부관아 건물과 그 부속 건물들이 있었으나 일제가 강제로 농학농민혁명군을 진압하고 고부관아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고부 초등학교를 건립한 것임.)
(탐관오리 고부군수 조병갑 악행 이야기.)
조병갑의 본관은 양주(楊州).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의 서질(庶姪)이다. 여러 주군(州郡)의 수령을 거쳐 1892년(고종 29) 4월 고부군수가 되었다. 조병갑은 부임한 이래 갖가지 명목으로 탐학비행(貪虐非行)을 저질렀다.
(1)농민에게 면세(免稅)를 약속하고 황무지 개간을 허가해 주고는 추수기에 강제로 세를 징수했다,
(2)부민을 붙잡아들여 불효(不孝)·불목(不睦)·음행(淫行)·잡 기(雜技) 등의 죄명을 씌워 그들의 재물 2만여 냥을 빼 앗았다,
(3)대동미를 쌀 대신 돈으로 거두고 그돈으로 질이 나쁜 쌀 을 사서 중앙에 상납하고 차액을 착복했다.
(4)세곡을 운송하는 전운소(轉運所)에서 추가로 쌀을 강징 (强徵)하고 부족미(不足米) 명색으로도 더 거두었다.,
(5)묵은 땅을 개간하여 면세가 되어야 할 땅에서 도조와 시 초(柴草)를 거두었다.,
(6)태인현감을 지낸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운다고 1,000여 냥을 거두었다.
(7)고부읍 북쪽에 흐르는 동진강(東津江)에 축조되어 고부 군과 태인현의 농민들이 수리(水利)의 혜택을 받고 있던 만석보(萬石洑)가 파손되지도 않았는데도 농민들을 동원 하여 구보(舊洑) 밑에 신보(新洑)를 쌓게 하고, 그해 가 을에 신보 이용에 따르는 수세(水稅)를 1마지기에 상등 논은 쌀 2말, 하등논은 쌀 1말씩 농민들로부터 거두어 700여 석을 사취했다.
(8)이러한 탐학이 계속되자 농민들은 1893년 11월 진정서 를 제출하기로 하고 동학접주인 전봉준(全琫準)을 찾아 가 진정서를 부탁했다. 11월 15일 전봉준이 농민 40여 명과 함께 조병갑에게 진정했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 았다. 이에 전봉준 등이 봉기를 준비하고 사발통문(沙鉢 通文)을 작성했다.
(9)그러나 그해 11월 30일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전근명령 을 받음으로써 이 봉기는 취소되었다.
(10)그러나 조병갑을 이어 고부군수로 발령받은 자들이 계 속 다른 곳으로 재발령되거나, 병으로 오지 못하게 되 자 1894년 1월 9일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다시 임명되 었다.
(11)1894년 1월 11일 전봉준을 지도자로 하는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농민들이 고부관아를 습격하자, 그는 전부사 (前府使) 정모(鄭某)의 집에 숨어 있다가 옷을 바꿔입 고 정읍을 거쳐 전주로 도망쳐 관찰사 김문현(金文鉉) 에게 농민항쟁을 보고했다.
(12)김문현은 조병갑의 탐학으로 민란이 일어난 것을 알고 그의 죄상을 취조해야 된다고 정부에 건의하자 정부는 조병갑을 체포하여 의금부에 압송하여 치죄(治罪)하고 섬으로 귀양보냈다.
(13)이 고부민란이 계기가 되어 갑오농민전쟁으로 확대되었 다.
(14)조병갑이 고부군수 전에 함양군수를 거쳤는데 함양군 함양읍 교산리 1073-1번지의 상림공원에는 조병갑 선 정공덕비가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원인 제공자 고부군수 조병갑은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희생된 자들의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얼마나 많은 서민들이 수탈을 당했는지를 안다면 능지처참을 당해도 분이 안 풀릴 정도의 중범죄자였다.
조병갑의 후손들은 조상의 수탈행위로 화를 입은 분들에게 사과의 말로 덮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법률과 연좌제의 문제를 떠나서 늘 속죄하는 마음으로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조용히 사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싶다.
(새만금 방조제 구경 이야기)
정읍시 고부면 고부관아 터를 구경한 뒤 우리는 09시25분에 전북 부안군 새만큼 방조제를 향해서 정읍시 고부관아 터를 출발했다.
(새만금방조제 입구의 잼버리경관쉼터 공원 이야기)
새만금 방조제 입구에 있는 잼버리경관쉼터에 도착하니(잼버리경관쉼터 공원 주소는 “부안군 하서면 백현리”였다.) 시간은 6.3일 오전 10시03분이었다. 6.3일자 목포에서 여기까지의 누적주행거리는 153km이다. 잼버리경관쉼터의 정자에서 북쪽으로 바라보는 새만금평야는 끝이 보이지 않는 대평원과 잠겨 있는 강물 그 강물 너머로 또 대평원이 펼쳐져 있다.
(새만금 입구에 있는 잼버리쉼터공원 정자에서 바라본 새만금 평야 모습. 잡초지 평원과 잔잔한 강물 및 그 강물 건너의 또다른 잡초지 평원 모습.)
(새만금 방조제 부안군쪽 입구에 있는 잼버리경관쉼터공원에 있는 정자 모습)
(새만큼방조제 홍보관 이야기)
새만금입구에 있는 잼버리경관쉼터공원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10시34분에 출발하여 새만금방조제홍보관으로 향했다. (새만금방조제 홍보관 주소는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597번지”였다.) 방조제홍보관에 도착하니 시간은 10시43분이고 여기까지 금일 누적 주행거리는 156km이다. 잼버리경관쉼터공원에서 이곳 새만금방조제홍보관까지는 3km쯤 떨어진 거리였다.
방조제홍보관은 먼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3층전시관으로 올라가 내려오면서 2층전시관 및 1층 휴게실 순으로 구경하게끔 구조가 되어 있다. 새만큼 전체 면척은 409평방킬로미터로서(1억24백만평) 축구장 37,130개 규모란다. 방조제 길이는 34km이다.
(새만금방조제상의 너울쉼터 이야기)
새만금방조제홍보전시관을 둘러본 뒤 우리는 다시 11시50분에 홍보전시관을 출발해서 새만큼방조제길 도로 위를 달렸다. 방조제뚝길에는 군데군데 쉼터가 있지만 우리는 너울쉼터에서 잠시 쉬었다. 너울쉼터에서 바라보는 서쪽은 바닷물이고 동쪽은 민물 같았다. 동쪽의 민물 호수는 농업수 공업수로 얼마나 유용하게 쓰겠는가. 새로 생긴 새만금 땅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의 문제는 전북도와 국가의 미래를 크게 좌우할 과제로 보인다.
(사진은 새만금 방조제의 부안군쪽 입구 모습임. 방조제 왼쪽은 바닷물이고 방조제 오른쪽은 민물 호수임. 이 교차로를 지나면 죄회전해서 서해안고속도로 부안ic로 갈 수 있고 또 우회전하면 변산반도로 갈 수도 있다.)
(새만금방조제 뚝길 도로상의 너울쉼터 전망대에서 북쪽으로 바라본 새만금 방조제 모습. 왼쪽은 서해바다물이고 오른쪽은 민물 호수임.)
(새만금방조제상의 너울쉼터에서 동쪽으로 바라본 민물호수 모습)
(새만금방조제 뚝길에서의 상경길)
우리는 새만금방조제상의 너울쉼터에서 잠시 쉬면서 주변경관을 둘러본 뒤 11시50분에 군산시내로 향했다. 군산시내에서 서해안고속도로 동군산ic를 찾아간다고 갔지만 길을 잘못들어 서해안고속도로 서천ic로 빠지고 말았다. 다시 서해안고속도로 동서천ic로 빽코스해서 공주jc-정안휴게소-천안-안성-판교ic를 거쳐 수도권외곽순환고속도로 의정부ic를 빠져나왔다. 도봉동 아파트 단지에 도착하니 시간은 6.3일 19시였다. 6.3일 누적주행거리는 469km이고 평균연비는 26.4km/리터였다.
공주시 정안휴게소부터 밀리기 시작한 도로정체는 경부선 판교ic를 지날 때까지 정체가 반복되었다. 따라서 새만금부터의 상경길은 5시간이 걸리는 고생길이었다. 그러나 6.1일부터 6.3일까지 2박3일간 여행은 만족스러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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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총주행거리:1일차468km+2일차418km+3일차469km=
=총1,355km
2.평균연비 26.4km/리터
3.휘발유값:1,355km/26.4km*1977원=101,471원
4.고속도로 통행료:26,750원(15건에 장애할인적용)
5.친척 선물비 : 66,800원(휴지3세트+수박1통)
6.여행간 식사비 : 74,000원(점심 석식등 식비 등)
7.간식비 : 1,200원
8.집사람 생필값 지출액 : 58,500원(들깨기름+모시떡+
미수가루+간식비 등)
9.여행경비 총계 : 331,721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