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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지 집성촌 종가 스크랩 [경북 경주] 문원공 회재 이언적(文元公 晦齋 李彦迪)
이장희 추천 0 조회 49 14.05.21 15: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회재 이언적(1491~1553)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서 본관은 여주(驪州=驪江),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 자계옹(紫溪翁),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생원 이번(李蕃)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계천군 손소(鷄川君 孫昭)의 따님인 경주손씨(慶州孫氏)이다.  

초명은 적(迪) 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적(彦迪)으로 고쳤다. 

이언적은 1491년 외가인 경주 안강의 양동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외삼촌인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暾)에게 글을 배우고 1514년(중종9년) 문과 별시에 급제 하면서 관직에 나아가다. 

장령, 밀양부사를 거쳐 사간이 되었으며 이때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 파직당해  귀향하여

자옥산 기슭에  독락당을 짓고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다. 

1517년 경주 주학교관(州學敎官-지방향교 교사)으로 있던 27세의 나이에 외숙인 망제 손숙돈(忘齊 孫叔暾)과 망기당 조한보(忘機堂 曺漢輔)간에 벌어진 무극태극논쟁에 가담하여 양자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고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의 견해를 논하였다.

1537년 김안로일당의 몰락후 홍문관 교리,직제학을 거쳐 전주부윤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며 일강십목 상소(一綱十目疏)를 올려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1547년 윤원형 일파가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강계에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많은 저술활동을 하였으나 63세로 죽었다.

이언적은 주희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하고 독자적으로  학문을 수립하여 조선의 유학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므로써 조선의 성리학 정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기(氣)보다 이(理)를 중시하는 主理的成理說은 이황에게로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선구가 된다. 그리고 그가 벌인 태극의 개념에 관한 논쟁은 조선조 성리학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개념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유배생활 동안 求仁錄, 大學章句補遺, 中庸九經衍義, 奉先雜儀등의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1610년(광해군2년) 문묘에 배향되었고 경주 옥산서원등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文元이다.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조광조, 퇴계 이황과 더불어 동방오현으로 불린다.

 

 

 

 

 

 문원공 회재 이언적 신도비

 문원공 회재 이언적 묘소- 뒷쪽의 묘소는 배위 정경부인 함양 박씨의 묘이다

 묘비석-행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 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시문원공회재이선생지묘

(行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 贈대匡輔국崇祿대夫議정府領議政諡문元公晦齋이先생之墓)

 문인석

 배위 정경부인 함양박씨의 묘-문원공의 묘 후좌이다

 묘비석-정경부인박씨지묘(貞敬夫人朴씨之墓)

 

 달전재사(達田齋舍)

 

 서백당 -양민공 손소(孫昭)가 류복하의 따님과 혼인하고 양동마을에 터전을 잡은 곳으로 월성손씨의 종택이다

 문원공 회재 이언적은 외가인 이곳에서 태어나셨다. 서백당은 참을 인(忍)자 백번을 쓰면서 인내를 기른다는 뜻이라고 한다

 

 무첨당-문원공 회재 이언적의 법통종가이며 양자 이응인의 후손이 살고 있다

 

 옥산서원

 

 문원공 회재 이언적 신도비와 비각-비문은 고봉 기대승이 지었다

 

 

독락당 입구- 회재 이언적의 혈통자인 잠계 이전인의 후손이 살고 있다. 독락당은 보수공사 중으로 볼 수 없다 

옥산서원과 독락당을 돌아 흐르는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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