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달지기님!
정리해주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감사합니다.
세계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잘 요약되네요
개인적으론 나폴레옹을 소재로 한 영화의 장면도 오랜만에
회상하게 되더군요
<워터루> 이걸 언제적에 봤었지? 기억도 안나네
지금은 벌써 없어진 대청동의 현대극장에서 봤는데....
현대극장을 기억한다면 확실한 70년대학번 맞아요
7:00 - 7:10 몸풀기
7:10 - 8:20 달리기
어떤 분은 5바퀴 어떤 분은 4바퀴 등등 각자가 열심히 했습니다.
8:20 - 8:35 1차 회식
김말숙 선배님께서 수박을 가져 오셔가지고(얼음에 재어서) 문화회관 앞 광장에서 돗자리 펴고 맛있게 먹었습니다.
8:40 - ..... 2차 회식
공원 앞 할매 뼈다귀 해장국집에서 감자탕, 소주, 비빔밥, 뼈다귀 해장국등을 기분좋게 먹었습니다.
해장국 집에서 정담이 오가는 중 김준현 선배님께서 나폴레옹에 관한 말씀이 나오시길래 제가 간단히 요약해 둔 글이 있으니 올려 드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올립니다.
나폴레옹
나는 서점에 자주간다. 책 읽기를 좋아해서라기 보다는 친구를 만나거나 할 때 시간 보내기가 좋기 때문이다. 간혹 책을 살때도 있는데 주로 동양의 고전이나 위인전이다.
특히 위인전은 가상이나 허구가 아니고, 생생한 다큐멘터리이고 대부분 파란 만장한 삶을 산다. 알렉산더, 진시황, 징기스칸 등......
몇 년 전 나폴레옹에 관해서 자세히 알고 싶었다. 누구나 프랑스 대혁명 - 나폴레옹에 관해서 조금은 알고 있지만, 정작 나폴레옹에 관한 책을 읽을려고 하니 대형서점에서도 잘 만날 수 없었다. 그러다가 혹시나 하고 우리 학교 도서관에 있는 목록 카드를 찾아봤더니 나폴레옹이 있었다. 구입 연도가 70년대 초반이었다. 하도 오래 되어서 사서 학생이 잘 찾지를 못했다. 다음에 겨우 책을 찾아 냈는데 낡고 오래 되어서 글자도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원하던 책이라 정말 소중하게 읽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n Bonaparte)는 1769년 8월 15일 지중해에 있는 코르시카섬에서 태어났다. 당시 코르시카는 프랑스 식민지이었지만 독립 운동도 한 때 열심히 하였다.
보나파르트 집안은 명망 있는 가문의 하나 였으나 그가 태어날 무렵까지는 가난한 편이었고, 몇 년 후 그의 아버지가 법원 배석 판사로 임명되면서 나폴레옹 형제들은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나폴레옹은 어린 시절부터 군인이 되기를 꿈꾸어 왔으므로 1779년 10세의 어린 나이로 프랑스의 브리엥 유년 군사학교에 입학하였다. 이후 파리의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기까지, 아버지도 돌아가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 식민지 출신의 작고 볼품없는 촌뜨기인 나폴레옹은 당시 상류층 자제들에 의한 심한 차별을 받는다.
사관학교 졸업후 1788년까지 포병 장교로 복무중 놀라운 사건이 발생한다. 1789년 7월 근대 세계사중 가장 큰 사건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이라면 오늘날 민주주의가 성립하게된 가장큰 밑바탕이고, 봉건제도에 대한 민중의 승리이다. 나폴레옹이 아무리 천재이고 군사 전문가 이지만, 프랑스 대혁명이 없었다면 우리가 아는 나폴레옹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나폴레옹이 없었다면, 아무리 당시 민중의 힘이 강했지만 주위 유럽의 절대왕정이나 국내의 기득권 세력- 특히 왕당파- 에 의하여 프랑스 대혁명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지 아니면 영웅이 시대를 만드는지는 쉽게 결론이 나지 않겠지만, 어떻든 나폴레옹은 프랑스 대혁명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영웅이 되고 그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 전 유럽(영국과 일부제외)을 정복하고 나중에는 개인의 욕망으로 황제까지 되었다가 결국에는 몰락하여 쓸쓸하게 죽어간 것이다.
혁명이 일어나자 나폴레옹은 고향인 코르시카로 돌아와서 독립의용군을 조직하지만, 프랑스 정부와 영국과의 미묘한 관계로 인하여 1793년 6월 프랑스의 마르세유로 탈출했다. 초라한 망명객으로서 프랑스에 도착한 그와 가족들은 모진 고생과 가난을 면할 수 없었지만, 도리어 이것이 전화위복으로 된다. 그의 앞에 유럽에 대한 프랑스의 혁명 전쟁이라는 위대한 기회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1789년 혁명이후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을 당한다. 이로 인하여 다른 나라 군주들에게 프랑스 혁명의 여파가 미칠까봐 오스트리아와 영국등이 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 혁명세력을 전복시키려고 한다. 이에 혁명 세력은 온건한 지롱드파와 로베스피에르를 중심으로 한 자코뱅파 사이에 대립이 전개되다가 로베스피에르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당초부터 혁명 세력을 지지했던 나폴레옹은 로베스피에르를 지지하여 포병 연대장이 되고, 1794 2월 이탈리아 방면 군의 포병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공포정치의 주인공 로베스피에르가 기요틴(단두대)에 의해 목이 잘린다. 이로 인하여 나폴레옹도 체포되어 장교 명부에서 제명되지만 결코 실의에 빠지지 않는다. 1795년 10월 기회는 다시 찾아왔다. 왕당파 세력이 다시 신정부를 전복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신정부는 의회 방위를 위해 나폴레옹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40문의 대포를 가지고 임무를 완수했으며, 혁명세력은 보전될수 있었다. 겨우 26살인 나폴레옹은 다시 이탈리아 방면 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고, 임지로 떠나기 이틀전에 결혼을 한다. 상대는 나폴에옹보다 6살이나 연상이고 이미 두 아이의 어머니이기도 한 조세핀이었다. 우아하고 세련된 매너를 가진 구체제 귀족의 부인 이었으며, 서른두 살의 성숙한 아름다움을 지닌 그녀를 보자 말자, 코르시카 출신의 촌뜨기이며 삭막한 병영에서 고달픈 생활을 하던 나폴레옹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나폴레옹이 당시에 그녀에게 쓴 편지는 그가 얼마나 정열적인 사랑에 빠지게 되었나를 보여 준다. 그는 "당신은 나의 영혼을 가져가 버렸소. 당신은 내 인생의 유일한 희망이오." 라고 썼다. 그들은 곧 결혼했지만, 신혼의 단꿈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아쉬운 작별을 한다. 나폴레옹이 다시 이탈리아로 떠난다. 이탈리아에서 나폴레옹은 6일간 6전 6승을 할정도로 군사적 성공을 거둔다. 그 연전 연승의 승리는 물론 나폴레옹의 탁월한 전략과 전술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의 전술이란, 병력을 집중시켜 적들의 중앙을 돌파하고 난 다음에 분산된 적들을 신속히 각개 격파하는 것이었다. 이제 나폴레옹은 국민적 영웅이 되어 있었다. 1798년 나폴레옹은 영국에게 타격을 주기 위한 방법으로 이집트 원정에 나선다. 이집트 원정에서는 상당히 고생을 한다. 본국 프랑스에서는 몇번의 선거와 쿠테타가 발생하여 혼란이 가중되고, 유럽 대륙은 반 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를 더욱 압박한다. 국내외의 이러한 위기는 국민들로부터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게 된다.
1799년 10월 9일 이집트를 탈출하여, 프랑스에 도착한 나폴레옹은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다. 쿠테타를 일으켜 1799년 11월 11일 불과 30세의 나이로 권력의 정상에 오르게 된 것이다. 1799년 12월 15일 신헌법이 공포되는 날 나폴레옹은 "혁명은 끝났다"고 말했다. 이제 제1통령으로서 실권을 장악한 나폴레옹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신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징세 기구를 정비하여 우선 국고를 충실히 했으며, 1800년에는 중앙은행에 해당하는 프랑스 은행을 세워 국가 재정의 안정을 꾀했다. 그리고 흔히 오늘날 세계 3대 법전이라고 칭찬하는 「나폴레옹 법전」을 편찬한다. 나폴레옹 법전은 자유·평등·박애의 정신 아래 편찬하여 이후 거의 모든 나라의 모범이 된다. 음모가 퓨세에게는 치안 기구를 개편하여 전국에 비밀 정보망을 조직한다. 이탈리아 문제로 다시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하게 되는데 1800년 5월 눈덮인 알프스를 넘는다. 2천년 전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공략했던 것을 방불케 했다. 마렝고 라는 마을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승리를 이끈다. 이후 나폴레옹은 반대파에 의하여 몇번이나 테러를 당하지만, 그때 마다 오히려 위기를 벗어나 권력은 더욱 강해진다. 1800년 12월 오스트리아로부터 완전히 승리를 거두고, 러시아 영국과의 관계도 원만히 해결해 간다. 더욱 욕심이 생긴 나폴레옹은 마침내 1804년 5월 18일 "세습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국민 투표에 의하여 탄생한다.
1804년 12월 2일, 이 날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대관식이 거행되는 날이었다. 얼음이 얼 정도로 추운 날이었음에도파리는 환호하는 군중들의 열기로 가득했다. 식장은 노트르담 대성당이었다. 이제까지의 관례대로라면 나폴레옹이 로마 교황에게 찾아 가야 했으나, 교황 비오 7세가 프랑스에 와서 제관을 수여하게 되었다. 교황이 제관을 씌어줄 차례가 되었는데, 그 순간 나폴레옹은 제단 위에 올라가 제관을 들어 자기의 머리에 얹었다. 황제의 자리는 나폴레옹 스스로의 힘으로 차지한 것이므로,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제관을 씌어 줄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제단 밑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아내 조세핀에게도 자신의 손으로 관을 씌어 주었다. 대관식에 이어 축제는 궁전에서도, 파리에서도, 전국의 어디에서도 10여 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 때 오스트리아의 빈에서는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베토벤이 나폴레옹을 존경하여 작곡했던 교향곡 제3번 「영웅」과 그에게 바치려던 헌사를 찢어 버리고 말았다.
어쨌든 식민지 코르시카 출신의 볼품 없는 촌뜨기 소년은 이제 35세의 나이로 프랑스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여 궁전의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1805년 8월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의한 세 번째의 반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어 이제 대규모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 해 10월 21일 프랑스와 에스파냐 연합 함대와 넬슨이 이끄는 영국 함대가 트라팔가르 해협에서 만난다. 유명한 트라팔가르 해전이었다. 결과는 영국 함대의 대승이었다. 육지에서는 프랑스 군대가 강했지만 바다에서는 영국이 더 우세하였던 것이다. 넬슨은 승리 후 목숨을 잃지만, 세계 해전에서 유래없는 대승으로 인해 가장 유명한 해군 장군으로 이름을 날린다. 물론 우리 나라의 이순신 장군도 넬슨 못지 않은 전과를 올렸고, 더 훌륭하다고 할 수 있지만 넬슨이 더 유명한 것은 영국이라는 국력과, 나폴레옹을 격파했다는데 더 무게가 있는 것이다. 트라팔가르 해전의 패배로 나폴레옹은 이후 몇 년 동안은 영국 본토에 대한 공격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비록 바다에서는 졌지만, 이후 나폴레옹 군대는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션 군대를 차례로 격파 시킨다. 이제 영국과 러시아(비록 전투에서는 러시아를 이겼지만 아직 완전히 러시아를 굴복 시킨 것은 아님)를 제외한 전 유럽 대륙의 지배자가 되었고, 1807년 여름 나폴레옹은 "유럽의 평화를 회복한자"라는 새로운 명성과 함께 파리에 개선했다. 1807년 6월의 틸지트 조약이후 나폴레옹의 최대이자 유일한 적은 영국 이었다. 눈엣가시 같은 영국을 타도하기 위해 대륙 봉쇄령을 내린다. 결과는 영국을 고립시킨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나폴레옹 제국 자체의 모순만 강화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 점령지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혁명초기에 수행한 여러 전쟁은 혁명 정신을 수호하기 위해서 혹은 전파하기 위해 일으켰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히려 프랑스와 나폴레옹에 대해 반감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에스파냐, 프로이션 등에서의 반란은 곳 진압은 되지만, 그 휴유증은 크게 남는다.
유럽 대륙을 제패한 나폴레옹에게도 한 가지 개인적 고민이 있었다.조세핀과의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지 않았고, 황제의 지위를 물려줄 아들이 없었던 것이다. 나폴레옹의 재혼 가능성이 언급되었고, 1808년 러시아 황제의 여동생에게 구혼을 하지만 반응이 없다. 대신 그의 결혼 상대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 루이즈 공주로 낙찰된다. 당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는 유럽 제1의 가문이고, 프랑스 혁명때 처형된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정이기도 했다. 이들은 1810년 4월 결혼식을 올렸고, 기대하던 아들까지 낳았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나폴레옹과 러시아의 관계에는 중요한 변화의 기운이 트고 있었다. 러시가 나폴레옹과의 약속이나 의리를 지키고 않고 마음대로 행동을 하였기 때문에 1811년 8월 나폴레옹은 러시아와의 한판 승부를 결행하기로 마음먹었다. 한 번만 더 '멋진 승리'를 거두면 유럽 대륙에서 골치 아픈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러시아를 굴복시킨다면 유럽에서는 더 이상 아무도 저항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구멍 뚫린 대륙 체제도 완전히 복구됨과 동시에 영국도 무릎을 꿇고 말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1811년 후반부터 러시아 원정을 위한 거대한 준비가 이루어진다. 본국과 동맹국과 속국의 군대까지 합하여 총병력 60만이 동원 되었다. 이에 비해 러시아 군의 총병력은 16만이었다. 1812년 6월말 나폴레옹 군대는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쓴 '전쟁과 평화'는 바로 이 나폴레옹이 처들어 온 과정을 소설로 각색한 것이다. 러시아의 쿠투조프 장군은 나폴레옹과 싸움은 않고 계속 후퇴만 한다. 그러다가 모스크바 강변에서 한 번 격전을 치루는데 나폴레옹군은 엉청난 타격을 받는다. 그리고는 다시 러시아 군대는 퇴각하여 버린다. 9월 14일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모스크바에 입성한다. 그러나 모스크바 시내는 인적이 없이 소름끼칠 정도로 불길한 정적이 감돈다. 밤에는 원인 모를 큰 화재가 발생했다. 1개월 동안이나 항복을 기다리고 모스크바에 있었으나 소식이 없자, 이제는 식량과 추위가 걱정이 되었다. 전쟁에 이긴 것이 아니라 고립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나폴레옹은 10월 19일, 마침내 모스크바로부터 철수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부상자와 대포, 전리품을 싣고 후퇴를 하는데, 러시아군의 대 추격전이 시작된다. 몇 번의 공격을 받은 나폴레옹 군대는 이제 걸어갈 힘도 없이 여기 저기에서 그대로 쓰러진다. 마지막 베레지나 강에서의 도하(강건너기 작전)작전은 실로 엄청난 대가를 치른다. 12월 5일 폴란드로 도망을 쳐 나왔을 때에는 겨우 수천의 병사만 남을 정도로, 러시아 원정은 대패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나폴레옹의 이러한 실패의 원인은 러시아의 혹독한 추위와 나폴레옹 특유의 전술이 광활한 평지에서는 통하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둘러 귀국한 나폴레옹은 아직 자기의 몰락을 예상하지 못한다. 나폴레옹이 패배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각지에서는 다시 반 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기 시작했다. 1813년 "라이프찌히 전투"에서 또다시 동맹국에게 패배를 당한다.
이제 프랑스를 반대하는 주위의 동맹국들 뿐만 아니라, 한 때 나폴레옹 밑에서 일하던 친구와 부하들 까지 나폴레옹에게 등을 돌린다. 결국 1814년 4월 11일 나폴레옹은 동맹국과의 퐁텐블로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의 태도는 여전히 의연한 듯했지만 가슴속에는 분노와 굴욕, 절망의 소용돌이가 용솟음치고 있었다. "인생은 견디기 힘들다" 대륙을 힙쓸며 호령하던 절대 권력자 나폴레옹의 입에서 깊은 탄식의 말이 흘러나왔다.
그는 이전에 모스크바에서 후퇴할 적부터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독약을 갖고 다녔다. 4월 12일 밤 그는 마침내 그것을 마셨다. 극심한 고통과 경련이 일어났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너무 오래 된 약이어서 효력이 떨어졌던 것이다. 다시 기력을 회복하고, 4월 20일 유배지 엘바 섬으로 떠난다.
엘바 섬은 이탈리아의 서해안과 코르시카 사이에 위치한 면적 218㎢의 작은 섬이다. 영국의 군함에 실려 프랑스의 항구를 출발한 지 일주일 만에 나폴레옹 일행은 이 섬에 착륙했다. 반프랑스 동맹국들은 강화 조약에서 약속했던 대로 그에게 이 섬의 통치권을 보장해 주었고, 섬의 주민들도 이 세기적 영웅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하지만 활동적인 성격의 나폴레옹에게 이 작은 섬은 단조롭고 따분하여 무척이나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보고 싶은 아내 마리 루이즈와 어린 아들 로마 왕은 끝내 그를 찾아 주지 않았다. 그녀는 아들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친정으로 가버렸고, 그 후 어떤 측근 귀족과 눈이 맞아 다시 결혼하여 아들까지 낳는다. 그리고 불우했던 조세핀도 그 해 여름 자살로 생을 마감해 버림으로써, 이제 나폴레옹의 결혼 생활은 다사 다난 했던 격정의 세월 속에 묻혀 회한으로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 끝까지 옆에 남아 격려해 준 인물이있다. 바로 어머니 레티치아 라몰리노였다.
그의 어머니는 그녀의 아들이 다시 재기 하리라고 믿고 항상 용기를 붇돋아 주었다. 한편 나폴레옹이 없는 프랑스는 어떠했는가? 여러 가지로 상황이 불리 하게 돌아가면서 사람들 사이에는 '역시 지난 날이 좋았어'하면서 한결같이 나폴레옹을 그리워 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눈치챈 나폴레옹은 1815년 2월 26일 약간의 호위병만 이끌고 엘바섬을 탈출한다. 프랑스에 상륙하자마자 국민들로부터 또다시 열열한 환영을 받는다. 침입이라기 보다는 개선이었다. 이 때를 훗날 나폴레옹도 "내 인생에 있었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백일 천하'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한편 나폴레옹이 다시 재기 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반프랑스 동맹국은 다시 단결하여 나폴레옹을 물리칠 것을 의논한다. 6월 초 영국의 웰링턴(현재 뉴질랜들의 수도 이름) 장군의 지휘 아래 연합국 군대는 오늘날 벨기에의 워털루에서 나폴레옹군과 결전을 준비한다. 나폴레옹의 마지막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는 워털루 전쟁은 나폴레옹에게 영원히 재기 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이끌고 만다. 예전 과는 달리 나폴레옹의 뛰어난 전술은 더 이상 발휘되지 못하고 참패로 끝난다. 근위병들의 결사적인 호위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나폴레옹은 의회에 나가서 다시 한번 싸울 것을 호소 하지만 아무도 나폴레옹의 말에 동조하지 않는다. 백일 천하도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나폴레옹은 다시 망명길에 들어선다.
처음에 나폴레옹은 미국으로 망명길을 떠나려고 생각했지만, 영국 정부에 의해 거절 당하고 1815년 10월 17일 3개월간의 항해 끝에 유배지 세인트헬레나섬에 도착했다.
세인트헬레나는 남대서양의 외딴섬으로, 사람 살기에 적당하지 못했다. 이곳 책임자는 나폴레옹을 포로로 생각하고 예의를 갖추지 않고, 여러 가지로 괴롭힌다. 한 때 이곳에서 알게된 어떤 소녀와의 관계를 눈치채고 그것도 막아 버린다. 1819년부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여 1821년 5월 5일 불과 52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그의 죽음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조금씩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는 설과, 다른 이야기가 전해 지는데, 아무튼 나폴레옹이 살아 있다면 유럽 전체가 불안할 정도로 위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죽으면서 한마디의 유언을 남긴다. "나는 나의 유골이 세느 강변의, 내가 그처럼 사랑한 프랑스 국민들 속에서 잠들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은 19년 후인 1840년경에야 이루어진다.
프랑스 혁명과 더불어 가장 이름을 날렸고 또 영향력을 가졌던 풍운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비록 권력의 화신이라고 할만큼 독재를 했고, 개인의 욕심을 부렸던 것도 사실이지만 프랑스 혁명정신을 세상에 전파시킨 '혁명의 아들'이기도 했다. 또 역사적 위기를 극복하고 진정한 근대적 질서의 터전을 마련하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사를 쓴 조르주 르페브르는 나폴레옹에 대해 "실천하는 인간이자 참으로 뛰어난 군인이며 전형적인 18세기 합리주의자로서, 이성과 지혜와 노력을 믿었던 인간"이라고 평가했고, 그의 오랜 친구이자 정적이기도 했던 탈레앙은 "나폴레옹의 천재성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천 년간에 둘도 없는 가장 놀랄 만한 생애였다"고 평가했다. 프랑스 정복 전쟁의 결과는 민족주의를 탄생 시켰고, 그것은 자유주의와 함께 이후의 세계를 이끌어 나간 양대 지도 이념이 되었던 것이다.
* 나폴레옹, 진시황, 징기스칸 등 위대한 정복자들의 공통점이 대체로 50세 전후로 해서 수명을 다하더군요.
우리 모두 행복하게 오래도록 삽시다.
이번 여름 휴가 기간중 멋지게 피서도하고 마라톤을 한단계 업 그레이드 하실분은 제게 연락 주세요. 7/13(토), 7/16(화), 7/20(토) 훈련에 참석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