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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님은 세상의 빛/설교: 나균용 목사님
본문: (요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임을 선포하는 말씀이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는 하나님을 네 가지로 묘사하는데 첫째, 요한복음 1장 1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며 하나님은 말씀이시라고 선언한다. 둘째, 요한복음 4장 24절에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중에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성령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고 하셨다. 셋째, 요한일서 1장 5절에서는 "하나님은 빛이시니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다"고 말하며, 빛과 어둠의 대조를 통해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낸다. 넷째, 요한일서 4장 8절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씀하며, 사랑이 하나님의 속성임을 강조한다.
이 네 가지 표현 중 오늘의 주제는 "하나님은 빛이시다"이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빛이 있으라"고 명령하시며 어둠을 물리치셨다. 창조된 빛은 하나님의 본체가 아니라 그의 명령에 따른 피조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빛은 본질적이고 영원하며, 그의 거룩한 본성을 나타낸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빛을 닮아 빛의 자녀로 살아가야 한다.
첫째, 빛은 하나님의 창조 명령으로 시작되었다.
창세기 1장 3절에서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셨다. 이 빛은 어둠 속에 있던 세상을 질서 있게 만들고, 생명의 시작을 가능하게 했다. 창조된 빛은 단순히 물리적 빛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반영한다. 이 빛이 없이는 세상은 혼돈과 공허 속에 있을 뿐이며, 삶의 의미와 방향을 찾을 수 없다.
빛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질서를 가져온다. 하나님의 빛이 우리 안에 임할 때, 우리의 혼란스러운 생각과 공허한 마음은 안정과 의미를 찾는다. 빛을 통한 변화는 단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가정과 사회, 더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다.
둘째, 빛은 예수님 안에서 완전히 드러났다.
이사야 60장 1절은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라"고 선언한다. 이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빛이 완전하게 나타났음을 예언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을 믿고 마음에 영접한 사람은 이 빛을 받아들여 어둠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거나 그의 빛을 거부하는 사람은 여전히 어둠 속에서 방황하며, 죄와 공허한 삶을 살게 된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14절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시며, 그의 제자들에게 빛으로 살 것을 명령하셨다.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어둠 속에 있는 세상을 밝히는 존재로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빛을 반영하여, 세상 속에서 어둠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셋째,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생명을 가져온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셔서 어둠 속에 갇힌 인간을 구원하셨다. 빛이 없으면 인간은 길을 잃고 삶의 목적을 잃는다. 물리적 빛이 없다면 자연과 생명도 존재할 수 없듯이, 영적인 빛이 없다면 우리의 영혼은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우리의 어두운 마음속에 빛으로 오셔서 생명과 평안을 주셨다.
또한 빛은 세상의 부패와 타락을 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예수님의 빛이 임하면, 죄악과 부정이 드러나고 해결된다. 빛은 숨겨진 것을 드러내어 진리와 정의를 세운다. 이는 우리가 빛된 삶을 살며 정직과 의로움을 실천할 때, 세상이 변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넷째, 빛을 소유한 삶은 행복과 기쁨으로 충만하다.
예수님께서 빛으로 우리에게 오셨기에, 우리는 더 이상 어둠 속에 머물 필요가 없다. 빛은 우리 삶의 방향을 제시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통해 우리가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한다. 빛의 삶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행복을 누리며, 다른 이들에게도 이 빛을 나누는 축복의 통로가 된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서 우리를 어둠에서 구원하시고, 생명과 질서, 평화를 주시는 분이다. 우리가 이 빛을 받아들여 세상을 밝히는 빛된 삶을 살 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빛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
2. 형제에게 미련하다고 하는 자 /설교: 나균용 목사님
본문: (마 5:21-22) 옛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하신 말씀 가운데, 마태복음 5장 22절은 많은 성도들이 읽으면서 의문을 품는 구절이다. 특히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된다"라는 부분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으로 인해 지옥불에 갈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때, 당혹스럽고 어렵게 느껴진다. 이 말씀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 여러 성경 번역과 원문의 뉘앙스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성경 번역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전달되었다. 1611년에 제작된 킹 제임스 성경에서는 "형제에게 이유 없이 노하는 자"라는 표현을 포함했으나, 이 문구는 원문에는 없는 내용으로, 일부 학자들이 해석을 보충하며 삽입한 것이다. 반면 현대 번역본, 특히 NIV 성경은 더 간결하게 원문에 충실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시간이 지나며 표현을 조정하거나 수정하기도 했다. 최신판 NIV는 "지옥불에 들어갈 위험이 있다"라고 번역해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 이는 독자들에게 죄의 결과를 경고하면서도 다소 완화된 표현으로 전달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의 차이는 성경 해석에 혼란을 줄 수 있다. 성도들이 지옥불에 관한 경고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며 자신도 구원을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빠질 수 있다. 이러한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의 본질과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형제"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을 때, 이는 단순히 혈육의 관계를 뜻하지 않았다. 유대인 문화에서 형제는 친형제뿐만 아니라 가까운 관계의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폭넓은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라고 말씀하셨다(마태복음 12:50).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형제는 믿음 안에서의 공동체를 가리키며, 더 나아가 모든 인간을 아우르는 보편적인 관계로 해석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 욕하거나 경멸하는 말로 비난하는 것은 단순히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에 대한 경멸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불경으로 이어질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점을 경고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성경에서 여러 차례 "미련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 이를 통해 지혜로운 삶과 어리석은 삶을 대비시키며, 어리석은 자가 걸을 위험한 길을 경고하셨다. 예를 들어,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자를 미련하다고 하셨고(마태복음 7:26),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다섯 처녀도 미련하다고 칭하셨다(마태복음 25:2).
이처럼 미련함은 단순히 지식 부족이나 어리석은 행동을 넘어, 하나님의 뜻과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삶의 태도를 가리킨다. 따라서 형제에게 "미련하다"라고 비난하는 것은 단순한 말실수가 아니라, 상대방을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하는 태도로 연결될 수 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순히 말 조심하라는 도덕적 교훈을 넘어선다. 이는 우리가 서로를 대할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로 존중하며 사랑으로 대해야 함을 강조한다. 형제를 비난하고 경멸하는 말은 그 사람의 가치를 무시하는 행위일 뿐 아니라, 공동체 안에 분열과 상처를 가져온다. 따라서 이 말씀은 우리가 마음속의 분노와 교만을 내려놓고, 화해와 사랑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형제"는 단순히 세상에서의 혈연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 즉 참된 제자들을 가리킨다. 산상수훈 마태복음 5장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으로 "형제"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의미하며, 믿지 않는 자나 믿음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형제에 포함되지 않는다.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어머니와 형제를 찾는 사람들에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다"라고 말씀하셨고, 마태복음 23장에서는 "한 스승 예수님 밑에서 배우는 자들이 모두 형제"라고 하셨다. 따라서 "형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로 한정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형제를 향한 비방을 금지하셨다. 특히 "어리석은 자"라고 하는 것은 심각한 죄로 간주된다(마태복음 5:22). 시편 14편과 53편에서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 즉 불신자를 의미하며, 믿지 않는 자들은 형제가 될 수 없다. 형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공동체 안에서만 적용되며, 믿음 밖에 있는 사람들은 형제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방주를 만들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비웃고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았다. 롯도 소돔의 멸망을 경고했으나 사위들은 이를 농담으로 여겼다. 오순절 성령 강림 때에도 일부 사람들은 제자들의 방언을 보고 조롱하며 술에 취했다고 비웃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을 조롱하거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들은 영원한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사도바울은 세상의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와 다르다고 말하며,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를 어리석다 보고,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세상의 지혜를 부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의 지혜를 상호하며 하나님께 순수하게 나아가야 한다. 세상에서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도 하나님의 지혜를 추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지혜를 알고 순수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칭찬과 은혜를 받을 것이다.
3. 세상의 빛 /설교: 나균용 목사님
본문: (요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청년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얼마나 다행인가를 깨닫는다. 이 청년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눈을 뜨게 되었고, 그의 이름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의 이야기가 성경에 전해져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빛을 전하게 되었다. 그와 같은 예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돌아보게 된다. 또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 동안 병을 앓고 있었던 사람이 있다. 만약 내가 어려서부터 앉은뱅이가 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만, 우리가 두 눈을 밝게 뜨고 볼 수 있다는 것, 두 다리가 멀쩡해서 걸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세상에는 불구자들이 많고, 그런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기도하고 돕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야 한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빛을 전해야만, 낙심하고 절망한 사람들이 새로운 빛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세상의 빛의 중요성을 깨닫고, 생명의 빛을 가진 자로서 행복을 누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이번 시간에는 빛의 종류에 대해서도 살펴보려고 한다.
빛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며, 우리가 잘 아는 것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빛이다. 태양빛, 달빛, 별빛, 전깃불 등 다양한 빛들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빛들만 알면 그 사람은 빛을 아는 사람이 아니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모르는 다른 종류의 빛들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예를 들어, 엑스레이는 우리의 몸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빛으로, 우리는 외부에서 보지 못하는 신체 안의 상태를 볼 수 있다. 또한, 비행기나 기계의 X-ray는 가방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려준다. 이처럼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을 통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또, GPS와 내비게이션 시스템처럼 밤에도 어두운 곳에서 길을 안내해주는 신호가 있다. 이런 기계들은 인공위성에서 보내는 신호를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데, 그 정확도는 매우 놀랍다.
인간이 만든 기계조차 이렇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데,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모르시겠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를 지나가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속도나 길이 잘못됐음을 다 알고 계신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속일 수 없으며, 우리의 삶 속 모든 것을 아시고 보신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으면 그 죄를 보시고 아신다. 우리가 아무리 죄를 숨기고 감추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이 숨겨지지 않는다. 사람들 앞에서는 죄를 감추고 의로운 척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드러나고 고백하게 된다. 마지막 날 심판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면 모든 것이 드러나며,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자백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이미 아시고, 우리는 그 앞에서 속일 수 없으며, 진심으로 고백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어떤 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지은 죄나 실수를 숨기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까지 아시기 때문에 그런 속임수는 통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무리 기억을 잃고, 지금은 잊어버렸다고 생각해도, 하나님 앞에 서면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된다. 마치 기계에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완벽하게 아시고, 우리의 죄와 실수까지도 정확히 알고 계신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감추고 싶은 죄나 잘못된 생각들이나 행동들이 모두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시며, 우리의 육체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도 환히 들여다보신다. 우리가 인간 앞에서는 자신을 숨기거나 꾸며서 의로운 척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거짓이 통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생각을 아시고, 우리가 속이지 않도록 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정결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죄를 감추거나 숨기려 하지 말고, 진실되게 하나님께 회개하고 나아가야 한다. 그런 회개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고쳐주시고, 우리가 예수님을 닮은 성결한 사람으로 변화시켜주신다.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의 육체를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영혼과 양심까지도 아신다. 우리 영혼의 상태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다 알고 계시고, 그런 잘못을 고치시는 분이시다. 아담이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영혼이 죽었다고 하셨다. 그 말은 곧 양심이 죽었다는 의미와 같다. 영혼의 상태와 양심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양심이 살아나면 영혼도 살아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양심이 살아나야 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간구할 수 있게 된다. 구원은 단순히 육체의 더러운 것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선한 양심을 회복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성경에서는 "선한 양심이 살아날 때,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선한 양심을 회복함으로 가능해진다. 이 선한 양심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간구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그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고, 양심이 깨어나게 된다. 마가의 집에서 성령이 임했을 때, 사람들은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그들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방식이었다. 방언은 단지 외적인 기도가 아니라, 우리 영혼의 깊은 곳에서 나오는 고백이다. 하나님 앞에서 감추어진 죄와 마음속 깊은 고백을 드러내는 기도인 것이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더욱 깊어지고, 그들의 기도는 진실하고,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이어간다. 방언을 통해 자신의 속마음을 고백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는 것이다. 이 방언 기도는 단순히 의례적인 기도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 감추어진 죄를 고백하고, 그 죄를 하나님 앞에 드러내는 중요한 과정이다.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기도할 수 없다. 기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마음속에 감추어진 죄가 해결되지 않으면, 기도는 진실된 기도가 될 수 없다. 방언 기도는 그 죄를 고백하는 중요한 방법이기 때문에, 성령을 받은 사람은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을 얻고, 그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깊게 만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우리의 양심을 새롭게 만드셔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 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기고 기쁨을 느낀다.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기도할 수 없고, 기도해도 그 마음속에 있는 죄를 고백하지 않으므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온전히 이룰 수 없다. 하지만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깊이 나누며, 그들의 영혼이 살아나고, 하나님 앞에 진실된 기도를 드릴 수 있다.
이사야 60장 말씀을 살펴보면, "일어나서 빛을 봐라"라는 하나님 말씀에 주목할 수 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의 빛이시며, 우리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즉, 예수님이 세상에 빛을 비추신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서 빛을 비추어야 한다. 이사야 60장은 "내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너의 위에 임하였음이라"라고 선포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과연 하나님의 빛이 우리 위에 임했는가? 여호와의 영광이 우리의 삶에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 하나님의 빛이 그들 위에 임한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빛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사야 60장은 본래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했고,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놓치고 말았다. 그 후, 하나님은 그 빛을 다른 곳으로 옮기셨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의 빛은 로마를 거쳐 북유럽으로 퍼지고, 영국을 거쳐 세계를 비추었다. 영국은 작은 섬나라였지만, 하나님의 빛을 받아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19세기에는 영국이 세계의 중심이었고, 영국의 빛이 비추자 세계가 변화했다. 하지만 20세기에는 미국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이제 미국의 시대도 점점 저물어 가고 있다.
하나님의 등대가 이제는 한국으로 옮겨왔다. 한국은 하나님의 복을 받으며 세계의 중심이 되고 있다. 하나님은 이미 한국 땅에 임하셔서 이 역사를 이루고 계신다. 통일도 눈앞에 다가왔다. 예전에는 북한과의 통일을 반대하는 세력도 있었지만, 이제 상황은 변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도 그들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임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고 회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자연재해가 일어날 때, 그게 단순히 우연이 아니며, 하나님의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과거의 성경 인물들은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 회개했으며, 하나님은 그들의 회개를 보시고 은혜를 베풀었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는 니느웨의 사람들이 일어나서 이 세대 사람을 심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
하나님의 빛은 이제 한국에 찾아왔다. 우리는 이 빛을 받아야 하며, 이 빛이 비추는 대로 당당하고 밝은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 빛을 받은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일어나서 빛을 발하라"고 하셨다. 우리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빛을 받은 사람들로서, 어둠을 몰아내고 세상을 새롭게 만드는 거룩한 역사에 동참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일을 위해 더 큰 은혜를 부어주시고, 그 은혜를 통해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게 될 것이다.
4. 예수님은 양의 문 / 설교: 나균용 목사님
본문: (요 10:7-9)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나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 들어가며 나오며 골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 7절에서 9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 들어가며 나오며 골을 얻으리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자기 선포를 하신다. 첫째,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셨고, 둘째, "나는 양의 문"이라고 선포하셨다. 오늘은 이 "양의 문"에 대해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이 문으로 드나드는 자가 어떤 복을 받을 것인가?"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 말씀을 지키면 어떤 복을 받을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말씀을 지켰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적당히 넘어가거나 무시하는 경우가 많고, 세상 사람들의 길을 따라가곤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면 어떤 복을 받는지 확실하게 알고 넘어가야 한다. 이 문으로 드나드는 자가 어떤 복을 받을지, 드나들지 않으면 어떤 복을 받지 못하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문으로 드나들면 어떤 일이 생긴다"고 말씀하신다.
첫 번째로, 구원을 받는다. 예수님을 믿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예수님이 문이시기 때문에 이 문을 통해 들어가야만 구원을 받는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예수님은 양들의 우리를 지키시고, 그 안에 있는 양들은 보호받지만, 밖에 있는 양들은 보호받지 못하므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구원이 이루어진다.
사도 바울은 신약 성경에서 13권의 책을 썼고, 그 중 "옥중서신"이라 불리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썼다. 이 서신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그리스도 안에"라는 표현이다. 바울은 "내가 감옥에 갇혀 있지만,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선포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보호받고 있음을 강조한다. 예수님이 양의 문이시기 때문에, 그 문 안에 들어가 있는 자는 주님의 보호를 받으며, 평안을 누린다. 이 말씀은 바울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성도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
이 문 안에 들어가 있는 자들이 받는 복 중 첫 번째는 구원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예수님은 우리를 보호하고, 어려움과 고난으로부터 지켜주시며, 평안을 주신다. 육신은 감옥에 있을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 평안은 세상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축복이다.
이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지만, 어느 종교도 구원에 대해 확실하게 가르쳐주지 않는다. 불교는 구원에 대해 명확한 교리를 제시하지 않으며, 로마 카톨릭도 구원의 확신을 주지 않는다. 다른 종교들도 구원의 문제를 명확히 다루지 않거나, 개인이 구원받았는지 여부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님만이 구원의 문제를 확실하게 가르쳐 주시며, 우리는 그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은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며, 이 세상의 어려움과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이 세상에서 가난하거나 병들고 사람들에게 멸시받는 일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어려움은 짧고, 구원은 영원한 천국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천국을 바라보며 이 세상의 고난을 참고 이겨낼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며, 우리는 그 은혜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놀라운 은혜가 충만하기를 기도한다.
둘째로, 예수님은 양의 문으로 드나드는 자는 생명의 꼴을 먹는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꼴을 먹는다"는 단순히 양식을 먹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꼴"을 먹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육신의 양식을 먹어도 우리 육신은 잠깐 더 살게 될 뿐, 그 양식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배고픔을 느끼게 한다. 육신의 양식은 결국 유한한 것이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양식은 "생명의 양식"이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라고 약속하시며, 영원한 기갈을 없애주고 생수가 그의 속에서 계속 솟아나게 하신다고 하셨다. 물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도 제공하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양식을 먹으면, 우리는 진정한 배부름을 얻을 수 있다.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이 대화하던 중,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서 자기가 만난 분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닫고, 마을로 달려가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며 사람들을 초대한다. 그 사이 제자들이 돌아왔을 때, 예수님께서 "나에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누가 예수님께 양식을 드렸나?" 하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내 양식은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셔서 이루라고 명하신 그 일을 행하는 것"이라고 답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자신의 양식이며, 그 뜻을 이루는 것이 그에게 기쁨이자 양식임을 고백하셨다. 예수님은 시장하셨지만, 그 시장함을 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힘쓰셨다.
우리 성도들 또한 이 예수님의 양식을 본받아, 육신의 배고픔에만 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을 중요한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 육신이 배고프면 나쁜 생각을 하게 되거나, 도둑질을 하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지만, 우리가 먹을 양식은 이런 물질적 양식이 아니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이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이 잡수신 양식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생명의 양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살을 먹으라"는 말씀이다. 또한, 생명의 양식은 예수님이 주시는 말씀이다. 이 말씀이 우리를 살려낸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라는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고 살아야 한다. 입술로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양식"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이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체험되고, 우리의 양식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배부름을 얻고, 만족함을 느끼며, 마음의 평안을 얻고, 하늘로부터 주시는 놀라운 힘을 받게 된다. 이러한 말씀으로 우리의 삶이 풍성해지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누리며 살아가게 된다.
셋째로, 예수님의 문에는 전능자의 보호가 있다. 이 길을 통해 들어가면 가장 안전하고 복된 길이 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가려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길이 어떤 길인지 알지 못하거나, 이 길이 종종 어려운 길이기 때문입니다. 양들이 사는 동네는 집처럼 문을 만들어 놓았겠지만, 목자들은 양떼를 데리고 들판으로 나가 푸른 초장을 찾아 다닌다. 밤이 되면 양들은 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들판에 모여 잠을 자게 되며, 목자는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 밤새 지킨다. 이때 목자는 울타리가 되어 양들을 지키고, 맹수가 들어오지 않도록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이시며, 시편 121편에 나오는 것처럼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우리를 보호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위험한 일로부터 지켜주시고, 악한 자들이 우리를 해치지 못하게 하시며, 우리의 걸음을 인도해 주신다.
넷째로, 양의 문은 오직 양들만 드나들 수 있다. 이 문은 목자가 허락한 짐승들만 통과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이다. 예를 들어, 양을 지키는 개들도 그 안에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맹수나 도둑 같은 악한 존재들은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 이곳은 안전하고 평안하며 행복한 곳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시며, 양의 문이 되신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성경에서 등장하는 "문"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 "문"은 여러 가지 의미로 등장한다. 예를 들어, 창세기 28장에서는 야곱이 형을 피해 외갓집으로 가던 중 베델에 도착하여 밤을 맞이하고,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자며 사다리 꿈을 꾸게 된다. 사다리는 하늘 끝까지 닿아 있었고, 하나님이 그 위에 계셨다. 이 꿈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이 자신의 보호자이심을 알게 되었다.
이 양의 문은 오직 양들만 드나들 수 있는 안전한 곳이다. 목자의 보호 아래 있는 양들만이 이 문을 통과할 수 있고, 맹수나 도둑과 같은 악한 것들은 절대 이 문을 넘어설 수 없다. 이 문은 평안하고 행복한 곳이며, 예수님은 우리에게 양의 문이자 목자가 되신다고 말씀하신다.
성경에서 "문"은 다양한 의미로 등장하며, 예수님께서 이 문이 되신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성경의 여러 "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은 하늘의 문을 보았다고 고백하며, 하나님이 자신에게 보호와 인도를 약속하셨다. 이 사건으로 베델이라는 지명이 생겨났으며, 야곱은 이곳을 하나님의 집, 하늘의 문으로 여겼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삶과 교회가 베델, 즉 하나님의 집이 되어야 한다고 배울 수 있다.
하늘의 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의 문과도 연결된다. 예수님은 천국의 문이자 하늘의 문이시며, 우리가 그 문을 통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가르쳐 주신다. 예수님은 또한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계시며, 우리가 믿음으로 그 문을 통과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 예수님 위에 임하셨다. 이 장면에서 하늘의 문이 열리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하늘의 문은 우리가 믿음으로 들어가야 할 문이며, 이 문을 통해 하나님의 복을 경험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부어질 때, 하늘의 문은 우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열려 있다고 하셨다.
십일조나 헌금은 하나님께 씨를 심는 것이며, 이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는 통로가 된다. 이 과정은 단기간에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기다리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과정이다. 우리는 하늘의 문을 통해 천국에 들어가는 믿음을 지니고, 하나님의 집인 우리의 몸을 거룩하게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
정리하면, 첫째, 예수님은 양의 문이시고, 그를 통해 우리는 구원을 얻눈다. 양이 들어가고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구원을 받으며, 예수님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고 강조하셨다.
둘째,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은 문이며, 사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은 문이다. 좁은 문은 회개의 문, 주일 성수의 문, 기도의 문, 전도의 문, 헌금의 문, 말씀 연구의 문, 봉사의 문, 성결의 문, 순교의 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에서 쉬운 것만 찾고 어려운 것을 피하려고 하여 결국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멸망으로 가는 넓은 문으로 가게 된다. 예수님이 좁은 문을 가신 분이며, 십자가의 길을 가신 분이기에 우리도 예수님이 가신 그 좁은 문을 따라가야 한다.
셋째, 지혜와 지식의 문이다. 누가복음 11장 52절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며, 그들이 지혜와 지식의 문을 가져가고 자신들은 들어가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고 하셨다. 지식은 바리새인들의 전유물처럼 되어 있었다. 세종대왕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글을 창제하여 백성들이 쉽게 글을 배울 수 있도록 하셨다. 이로 인해 한국은 문맹률이 낮고, 지혜와 지식이 있는 나라가 되었으며, 세계적으로 경제와 교육 등에서 발전한 나라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혜와 지식의 법을 주셨으나, 이들은 그 복을 받을 자격을 상실했으며, 그 복은 한국이 받았다. 한국은 가장 작은 나라지만,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가장 큰 나라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한국에 주신 복과 지혜를 깨닫고, 예수님을 따르며 형통하고 승리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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