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어 출혈이 멈춘 여인 (1873)
알렉상드르 비다
예수님이 지나가면 군중도 따라갔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사람들은 절박할 때 예수님을 찾는다.
‘고통’이나 ‘죽음’과 마주할 때 특히 그렇다.
그건 우리의 삶이 결국 연기처럼 지나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마주치는 그 모든 기쁨과 분노와 슬픔과 즐거움이 실은 ‘찰나’이다.
지독한 고통이나 허무한 죽음과 대면할 때
그런 ‘순간의 허무함’은 극도로 증폭된다.
존재의 바닥마저 푹 꺼져버리는 텅 빈 공허, 그것을 껴안고 우리는 갈망한다.
‘순간’을 넘어서는 순간, 그런 영원의 순간을 꿈꾼다.
‘치유’라는 이름으로,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인은 나이가 얼마나 됐을까?
만일 마흔 살이라 해도 20대 후반부터 하혈한 셈이다.
그러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성경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고 기록했다.
하혈하는 여인을 상상해 본다.
‘그녀는 몸이 아팠겠지. 아픈 몸을 이끌고 호숫가로 나왔겠지.
예수라는 남자에게 치유의 능력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 아니었을까.
예수 외에는 달리 기댈 곳이 없지 않았을까.’
열두 해는 짧은 세월이 아니다.
그녀가 30대라면 자기 삶의 3분의 1을 넘게,
40대라면 4분의 1을 넘게 고통의 나날 속에서 보낸 셈이다.
유다인 공동체는 철저한 율법 사회였다.
구약의 모세 때부터 그랬다.
여인이 월경할 때는 7일 동안 부정하다고 여겼다.
부정한 여인이 만지는 것은 모두 부정해진다고 믿었다.
그 여인이 깨끗해지려면 월경을 멈춘 후에 다시 7일이 지나야 했고,
8일째 되는 날에는 제사장에게 비둘기를 가져가 번제와 속죄 제물을 바쳐야 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열두 해 동안 계속 하혈한 여인은 유다 사회에서 ‘부정한 여인’으로 취급받았다.
남편과의 잠자리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이나 다른 물건에 손을 댈 수도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철저하게 소외된 삶을 살아야 했다.
나는 ‘하혈하는 여인’을 통해 ‘하혈하는 나’를 본다.
저마다 삶의 상처가 있고, 그래서 피를 흘린다.
깊이 박힌 상처에서는 더 오래 피가 흐른다.
10년, 아니 20년, 아니 30년이 지나도 피는 멈추지 않는다.
그때마다 우리는 의사를 찾아가고 나름의 처방을 찾는다.
성경 속의 하혈하는 여인처럼 말이다.
그래도 소용이 없다.
깊고 오래된 상처는 좀체 아물지 않는다.
왜 그럴까? ‘뿌리’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까?
손만 대도 부정하게 된다고 여겨지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댔으니 말이다.
예수님을 따라가던 사람들은 서로 밀쳐 댔다.
몸이 아픈 여인은 얼마나 안간힘을 썼을까?
예수님의 옷자락, 그 끝에 손가락이라도 닿으려고 말이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마르 5,28)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고, 그녀의 몸에서 출혈이 멈추었다.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마르 5,29)
사람들은 이 일화를 ‘예수님의 기적’으로만 분류한다.
그런데 더 깊이 들여다보면 다르다.
거기에는 ‘치유의 작동 원리’가 담겨 있다.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 알렉상드르 비다(Alexandre Bida, 1823-1895)는
툴루즈에서 태어나 동양화를 전공했고 외젠 들라크루아의 지도를 받았지만,
정밀함과 완벽함에 대한 예술가의 눈을 가지고 곧 자신만의 양식을 개발했다.
그는 젊은 시절 이집트, 터키, 그리스, 팔레스타인 등을 여행하며
오리엔탈리즘 양식의 작품을 제작하기 위한 영감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경 일러스트레이터로서 명성을 날린 그는
1873년에 예수님의 생애를 동판화 연작 삽화로 그렸다.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어 출혈이 멈춘 여인>은 그중 74번째 작품으로
마르코복음 5,24-34이 그 배경이다.
한 손은 땅을 짚고 한 손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향해서 뻗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절박해 보인다.
여인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다.
영어로는 ‘touching’이다.
그건 단순히 옷자락을 만진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어 성경을 보면 더 명확해진다.
‘(손을) 대다’는 그리스어로 ‘hapsomai’다.
거기에는 ‘불을 밝히다(light)’,
‘(관심이나 감정에) 불을 붙이다(kindle)’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니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것은 ‘불을 밝히는’ 일이었다.
여인의 마음에 ‘불을 붙이는’ 일이었다.
그 불로 인해 여인의 하혈이 멈추었다.
그 광경을 찬찬히 눈앞에 떠올려 묵상해보라.
여인이 손을 댄 것은 그저 옷자락이 아니었다.
직물로 짠 천 조각이 아니었다.
옷자락을 만졌다고 우리의 마음에 불이 켜지지는 않는다.
설사 그것이 예수님의 옷자락이라 해도 말이다.
그럼 무엇이었을까?
여인이 손을 댄 것은 예수님의 무엇이었을까?
그렇다. 그것은 예수님의 겉모습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이다.
예수님 안에 깃든 ‘하느님의 속성’이다.
거기에 닿을 때 우리의 마음에 불이 켜진다.
하혈이 멈추고, 고통이 멈춘다.
왜 그럴까? ‘상처의 뿌리’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출혈이 멈춘 후 예수님의 대답은 다소 뜻밖이다.
“나의 능력이 너를 구하였다.” 하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분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5,34) 하고 말했다.
왜 그랬을까?
예수님의 옷자락이 그녀를 구원했는데,
왜 예수님은 “너의 믿음이 너를 구했다” 하고 말씀하셨을까?
나는 이 대목에서 ‘치유의 작동 원리’를 발견한다.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다.
유다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부정한 여인이 손을 댔으니 상대방은 오염이 돼야 마땅하다.
하혈하는 여인이 손을 댔으니 예수님은 부정한 사람이다.
그러나 결과는 거꾸로였다.
예수님으로 인해 오히려 하혈하는 여인이 깨끗해졌다.
그게 바로 빛의 힘이다.
어둠이 빛을 만지면 어떻게 될까?
캄캄하게 될까?
어둠만 남게 될까?
아니다. 어둠이 빛이 된다.
그래서 여인의 내면에 불이 켜졌다.
그게 믿음이다.
어둠이 자기 안의 빛을 믿는 일. 그게 믿음이다.
자기 안의 빛을 깨닫는 일. 그게 믿음이다.
그래서 예수도 말했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하였다.”
그럴 때 ‘상처의 뿌리’가 사라진다.
끝없이 상처에 양분을 공급해주던 ‘내 안의 어둠’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의 몸인 성체를 만진다.
그분의 몸에 손을 댄 순간,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의 빛을 발견해야 한다.
부정한 우리가 성체에 손을 댄 순간,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가 깨끗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체를 모시기 전에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