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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형공판: 1951년 12월 15일, 대구고등군법회의 제 1호법정
확정판결 : 1951년 12월 16일 , 대구고등군법회의 제1호 법정
판결문
공비토벌은 애국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국군(國軍)작전의 개기투항(揭旗投降)하는 적군은 의법(依法)처우하는 전장도의(戰場道義)를
소홀하여 즉결처분이라는 국법명령(國法命令)을 부하 군대에 하달함으로서 천부된 인권(人權)을 유린하였으며 의명행동(依命行動)한 부대장도 일부 피의자를
경솔히 총살하여 명령 범위를 이탈하였다. 평소에 교육과 감독의 불충분으로 이와같은 불상사를 초래케 됨은 유감 천만이다.
비도(非道)를 책하고 정도(正道)를 명시함은 군대통사(軍隊統師)의 근본임에도 불구하고 건군정신(建軍精神)에 배리되어 군기의 근본을 파괴하고
국군(國軍) 위신을 손상케 하였을 뿐만아니라 실제 방침을 실천하는 부대장은 상부의 착오된 방침 정신을 악용하여 사태를 가일층 악하게 하였다.
수명(受命) 감행하는 군통사(軍統師)의 특수성과 명령의 존엄성에 비추어 책임의 귀추를 논함이 초점의 하나이다.
명령권자로 불법한 명령지시를 하달한데 대하여 이에 책임과 동시 수명(受命)감행자로서 각각 상부의 명령지시의 범위를 이탈한 책임을
피치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동범행에 대한 책임의 분과가 아니라 각이한 행동에 대한 각자의 책임소재를 구명한 것이다.
본 군법(軍法)회의는 피고 등이 멸공전에서 발휘한 거대한 전공을 시인하는 동시에 외부에서 논의되는 당 파적 또는 감정적 해결을 초월하여
보국안민(保國安民)의 국군(國軍) 근 본사명과 배치되는 범죄 사실의 중요성과 명맥 일관한 군대(軍隊) 통수의 특수성에 비추어
국군사병화(國軍私兵化)에 대한 일대경종이 되기를 기원하며 법치국가(法治國家)의 권위와 건전한 국군(國軍)발전을 위해 읍참마속(泣斬馬謖)자에
주문(主文)과 같이 판정판결함.
피고
오익경(吳益慶) 무기징역
한동석(韓東潟) 징역 10년
이종대(李鐘大) 무죄
김종원(金宗元) 징역 3년
이 학살사건이 발생한 지 며칠 후 한 사병이 엄상섭(嚴祥燮) 의원에게 사건의 내막과 학살당시의 사진, 그리고 학살당한 사람의 명단을 보내옴으로써
국회차원의 조사가 시작되었다.
국회조사단의 현지조사는 경남지구 계엄사령관 김종원(金宗元) 대령의 집요한 방해를 받아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거창출신 국회의원 신중목(愼重穆)의
집요한 추적 끝에 사건의 진상이 국회에 공개되었다.
신중목(愼重穆, 1902년 ~ 1982년 12월 31일)은 제2대 국회의원과 제7대 농림부 장관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과 수료, 경상남도 창원군·거창군 군수,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 독립촉성국민회 거창군 지부장을 지냈다.
월여산 자락에 운무가 서렸다.
추모공원의 안내문.
추모공원 관람시간.
천유문(天유門)을 들어가면서 '유'자가 무슨 글자인지 도무지 몰랐지만...
안내판에 상세히 설명해 놓았다. 천유문이란 영령들을 하늘로 인도한다는 뜻이란다.
오른족으로 정면 10칸짜리 건물은 '위패봉안각'
현판.
'위패 봉안각'은 거창사건으로 희생된 719명(어린이 359명, 성인 294명, 노인 66명)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충혼탑위의 월여산에 운무가 서려있다.
충혼탑.
희생된 사람을 부축하는 조형물과...
잘못을 사죄하는 국군의 조형물로 보인다.
'송헌 남상경'의 '追慕韻(추모운)'이라는 한시.
백형진의 시 '신원 가는 길'은 산행기 말미에 전문을 올릴 것.
역사교육관을 찾아...
안으로 들어간다.
교육관 안의 자료를 두서없이 사진에 담는다.
거창양민학살사건의 시대적 상황은 분단국가의 이념논쟁으로 시작된다.
거기다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터지고, 후퇴하던 국군은 연합군의 참전으로 북진하면서 북한군은 고립되었다.
고립된 북한군은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으로 변모하여 비정규전으로 남한의 후방을 교란하고 있었다.
그렇게 산으로 숨어든 빨치산은 식량확보를 위하여 민가에 출몰하였고, 마침내 관공서를 습격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다.
1950년 12월 5일 신원지서를 습격하여 4~5명의 경찰을 전사케 하였다.
이에 우리 국군과 경찰은 토벌대를 창설하여 소위 '견벽청야'작전으로 공비토벌을 실시하였다.
제11사단 9연대는 제주도 4.3사건을 진압한 전력이 있는 부대다.
1950년 9월에는 11사단에 배속되어 다시 한 번 민간인 학살에 관여하게 되었다.
견벽청야(堅壁淸野)란 성벽을 튼튼히 하고 들판을 깨끗하게 하는 것으로 적의 공격에 대비해 성벽을 튼튼하게 다지고 들판의 곡식을 모조리 거두어 들여
적의 군량 조달을 미리 차단하는 전술을 말한다. 위기에 대비하여 미리 준비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견벽청야 작전 명령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견벽청야 작전 명령문.
제1차 학살장소인 '청연마을'에는 한동석 대대병력이 가옥을 방화한 후 논쌓인 논으로 끌어내어 무차별하게 주민 84명을 학살하였다.
제2차 집단학살 장소인 '탄량골'엔 100여명이 학살당했다.
밤새 소를 잡아먹고 1951년 2월 10일 날이 새자 중유리, 대현리, 와룡리로 이동하여 마을 전체를 방화하고 주민들을 끌어내어 신원국민학교로 이동하던 중
주민 일부가 기력이 빠져 뒤에 쳐지자 탄량골 골짜기에 끌고가 무차별 학살하였다.
제3차 학살장소인 '박산골'은 제일 많은 517명의 인명피해가 난 곳으로 추모공원을 둘러본 후 박산골은 직접 찾아 볼 계획이다.
같은 날 3개 리에서 끌고온 주민들을 신원국민학교에 몰아넣고, 밤새 광란을 부리다가 날이 밝을 무렵 박산골 골짜기로 끌고가 잔인하게 학살하였다.
박산골 사건의 개요.
거창군의 집단학살 사건에는 스물다섯 살의 육군 소령 한동석이 있었다.
이 사건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거창출신 신중묵 국회의원에 의해 제54차 국회 본회의에서 폭로됐다.
이후 국회에서 조사단을 파견 이 사건의 전모를 조사하려고 했으나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 김종원 대령이 국군 1개 소대로 하여금 공비로 가장하게 하여
조사단에게 총격을 가함으로써 사건을 감추려고 했다.
이후 다시 시작된 국회조사를 통해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고 사건 주모자들이 군법회의에 넘겨져 실형을 받았으나 얼마 되지 않아 군부정권의 특사로 모두
석방되어 복직하여 화려한 공직생활을 보냈다.
당시 사단장 최덕신 장군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으며 훗날 장관을 지낸 이후 월북했다.
교육관을 나오니 저쪽 산아래에 보이는 누각은 박산골 희생자 묘역이 있는 곳.
교육관을 벗어나 '박산합동묘역'으로 왔더니 먼저 보서져있는 위령비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1961년 5.16 군사정부는 5월 18일 유족회 간부 17명을 반국가 단체로 몰아 투옥을 시키는 등 동년 6월 25일 경남지사 최갑중은 당시 학살현장 접근이
어려워 3년여 만에 유골을 가매장할 때 앙상한 뼈로서는 성별조차 구별할 수가 없어 큰뼈는 남자, 중간뼈는 여자, 작은뼈는 소아로 구분, 화장하여 517기를
합장하여 놓은 '박산합동묘소'에 개장 명령을 내렸다.
천신만고 끝에 만들어진 묘역을 다시 파헤쳐서 뼈가루와 흙 한 줌으로 가족의 유골을 대신하여 거주지 공동묘지에 개인별로 개장하라 하였다.
훼손된 비석의 측면엔 '단기 4293년 경자구월(庚子九月)이라고 쓰여있다. 단기 4293년이면 1960년이다.
'李殷相(이은상)은 글을 짓고 愼宗漢(신종한)은 글씨를 쓰고 新院面民(신원면민)은 삼가 이 비를 세우다.'라고 쓰여있다.
위령비의 뒷면의 글자도 한자 한자 정으로 지워서 땅속에 파묻었으니 부관참시를 한 셈이다.
'박산합동묘역'의 안내판은 '(사)거창사건 희생자 유족회'에서 세웠다.
묘 두 기는 남자 묘와 여자 묘이고,
작은 비석은 어린이들의 비석이다.
부관참시를 당하듯 훼손된 무덤들 뒤로 누각이 보인다.
새로 세워진 위령비의...
옆면과 뒷면의 모습. "오호! 통제라! 다시는 이 땅에서 그런 비극은 원치 않노라!"
반듯한 누각인 '오일칠앙모루'를 살펴보고...
517명의 희생자를 우러러 사모한다는 오일칠앙모루(五壹七仰慕樓) 누각.
이제 가깝기도하고 최대의 희생자를 낸 '박산골 희생지'를 찾아간다.
중유천을 건너 좌측 중유방향으로 '박산골 학살장소'란 안내판이 붙어 있다.
이 냇가는 중유천.
좌측 중유천 건너 비석이 있는 소공원이 보인다.
소공원 우측 골짜기가 박산골로...
현장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사진에서 보았던 그 지형은...
'총탄흔적바위'란 안내판은 당시의 현장으로 필자를 몰아가고 있다. 필자가 태어나던 그 해이니 66년이 지났다.
바위에 선명히 자국이 남은 탄흔.
66년 전 그들의 아비규환의 절규와 신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돌아서다 다시 한 번 박산골을 되돌아 본다.
'박산골 희생장소 보존비' 뒷면엔 희생자 517명의 명단이 빼곡히 적혀있다.
당시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산골 바랑산 소룡산엔 희뿌연 운무만이 아픔을 쓸고 있을 뿐.
차도를 걸어 신기마을로 향하는 오형님을 배웅하고 필자는 월여산을 올라 신기마을로 내려가야 한다.
'거창추모공원'에서 능선을 따라 월여산을 오르려고 하였지만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라 내탐마을 임도를 따라 팥죽재로 오르기로 하였다.
차도를 걸으며 좌측으로 거창사건추모공원을 지나고...
추모공원 입구의 주차장을 지나...
좌측 내탐마을로 향한다.
내탐마을 안내판을 일별하고...
마을을 지나...
느티나무를 지나면서...
보이는 비닐하우스는...
버섯재배 농장.
마지막 민가를 지나면...
포장 농로는 끝이나고...
10분이 채 되지않아 안부(팥죽재 575m)에 올라선다.
팥죽재의 이정표에 추모공원 2.6km는 능선길을 말하는 듯.
돌아본 팥죽재. 빨간 화살표(←)는 필자가 올라온 내팜마을, 파란 화살표(↑)는 추모공원 능선길, 하늘색 화살표(↓)는 월여산 또는 신기마을.
다시 5분 만에 신기마을(칠형제바위)갈림길에 닿는다. 지형도 상에는 '추모공원 갈림길'이라 적어 놓았다.
바위군들이 모여있는 이곳은 날씨가 맑았다면 전망이 트이겠지만 오늘은 안개로 인하여 오보무중(五步霧中)이다.
다시 전망바위를 만나지만 온통 백색천지.
나중에 필자가 신기마을로 내려간(거창딸기 하산길 2.5km)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
가파른 데크계단에서도 돌아보면 서쪽으로 바랑산과 소룡산이, 북쪽으로는 감악산이 조망될 것이지만 오늘은 모두 깜깜이.
계단을 모두 오르면 바위가 도드라진 암봉.
발 아래 봄비를 함초롬히 머금은 철쭉.
네이버지도를 확인하니, 이 바위가 있는 지점이 두번째 '신기마을갈림길'. 나중에 이 길로 내려갔지만 우중에 암릉이 위험하여 되올라 왔다.
돌아보니 전혀 다른 이 지점의 지형지물.
단지 위험한 암릉 갈림길에서 불과 100여m(2분소요) 지점의 공기바위가 확실한 지형지물.
돌아보니 공기바위가 흔들바위로 보인다.
또다시 만나는 바위를...
돌아보니 아까 그 공기바위와 닮았네.
금세 정상에 올랐다.
셀프촬영을 하느라고...
10여분 머무른 셈이다. 정상석 뒷면의 "그대(山) 있음에 나 여기 왔노라."
정상의 이정표.
다시 되돌아(U턴) 위험한 암릉 갈림길에 섰다. 내려가면서 거꾸로 바라보는 바위는 흡사 거북이를 닮았다. (빨간 화살표가 암릉방향)
조금 내려서니 암봉이 나타나고, 그리 위험해 보이지 않아 암봉을 올라...
주변 바위들을 둘러본다.
이 넘은 흡사 거북이를 닮았네. 거북이도 승천을 하나?
조금 더 진행하며 안개에 묻힌 암릉을 바라본다.
거대한 바위더미에 맞닥뜨렸다. 우측 나무 뒤로 바위를 타고 넘으려다 여의치 않아 우측으로 우회길을 살펴 보았다.
우회로는 사람이 다닌 흔적이 없어 다시 두어 발자국을 암반에 밀착시켜 보았다가...
내려서서 결단을 내려야만 하였다. 악천후의 오늘 같은 날에 궂이 이 위험한 등로를 타고 넘을 이유는 없었다.
아쉬움으로 다시 한번 하산 능선을 내려다보지만 그 새 암릉마저 묻히고 말았다.
다시 아까 그 갈림길의 지형지물에 올라서서(16분 소모)...
데크계단 바위에서 혼술혼밥을 펼쳤다. 그 사이에도 봄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만난 이정표 갈림길에서 <거창딸기 하산길 2.5km> 방향으로 산길을 내려선다. (산꾼들은 너나할 것 없이 가본 길을 두 번 가기 싫어 함일 것.)
산길은 그리 험하지 않아 오늘같은 궂은 날씨에도 무난하다. 바위 틈새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가 있는 전망대.
그 새 안개가 살짝 걷히더니 좌측으로 칠형제바위 능선이 드러난다. 더 뒤는 657봉인 듯하고, 더 뒤는 희끄무레한 감악산 라인.
다시 만난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신기마을.
산불로 생채기가 난 능선길에 모진 생명력이 느껴진다.
마사토가 깔린 등로는 그리 미끄럽지 않아 산행하기에는 무난하다.
무덤의 비석은 '현풍 곽씨와 합천 이씨'
우측으로 계곡물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얼추 내려왔나 보다. 맞은 편 운무에 가린 산은 거창의 진산 감악산.
사방공사가 이루어진 계곡을 내려서다...
월여산을 뒤돌아 보고 소동파의 '빈 산에 사람 없는데, 물은 흐르고 꽃은 피었네(空山無人 水流花開 )'라는 글귀를 떠올린다.
추적추적 봄비 내리는 월여산을 마지막 빠져 나왔으니 이제 산중에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겠지만 물은 흐르고 또 꽃은 피리라.
* 소동파(蘇東坡 1036 ~ 1101)는 중국 송(宋)나라의 시인.
칠형제바위로 오르는 들머리인 다리.
느티나무를 만나고...
원만저수지 둑길을 걸어오다...
다시 한 번 월여산을 올려다 본다. 월여산은 그렇게 신비를 감추고 있는 듯하다.
농로를 따라 내려와 일행들이 기다리는 원평마을 주차장에 닿았다. 맨 마지막으로 필자가 탑승한 후에야 조금 이동을 하여...
거창군 신원면 59번 국도상의 '신기마을' 입구로 나왔다.
군내버스가 서는 '구사(리)' 버스정류소 옆의 '산들깨비딸기작목반'이라고 쓰여진 창고 안에서 비를 피하며 뒷풀이를 하였다.
'산들깨비딸기작목반'
-신원 가는길-
지지, 않는 땅
찔레꽃이 만발하고
달구지 몰고 오고가는 할아버지가 쉬어가는 곳
읍내 면서기도 기피하는 이곳을
우리는 아파도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간다.
농촌 살리 자고
플래카드 읍내 한 바퀴 돌아도
누구하나 거뜰떠도 안보고
배고픈 오지의 땅에
무 배추 농사지어 고랭지 채소라고
이름 내도 거들떠 보지도 않는곳
우리는 아파도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간다.
빨갱이란 말에 쪽팔려서
명예회복 한답시고
거리마다 도시마다 곳곳이 돌아도
거들떠도 안 봐주는
서울 양반들 말만 OK, OK
누군들 멋진 곳에 살고 싶지 않으랴
누군들 도회지에 살고 싶지 않으랴
과정리. 박산골과 덕산리, 청연골
대현리, 탄량골, 흙무덤 거느리고
구들장 같은
농노빛 한 바지게 지고 살아도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간다.
신원길아!
신원길아!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간다
<백 형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