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탐구생활 버전 휴가보내기 편.
아싸가오리! 오랜만에 갖는 자유시간이예요.
어제 밤, 잠자리에 누워 오늘 어디를 가볼까 고민했지만 딱히 가고 싶은 곳이 떠오르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런, 벌써 아침이네요.
빨리 나가고 싶은데 아이가 안 일어나네요. 어린이집 또 지각이예요.
게다가 밥까지 천천히 먹어요. 속이 터져요. 또 한 번 버럭 소리질러줘요. 그리고 어린이집 알림장에 적힌 글이 떠올라요.
<친구들이 '예림아, 늦잠 잤어?' 하고 물으니, '아니, 엄마가 늦잠 잤어.' 하네요>
괜시리 뒤통수가 화끈거려요.
겨우 집을 나섰어요. 눈도 오겠다 늦었겠다 돈 아깝지만 택시를 타고 가기로 해요. 그런데 오늘따라 택시들이 우리만 피해 다녀요. 이런 젠장. 손가락이 시려 미치겠어요. 겨우 택시를 잡아 타고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었어요. 이제야 기분이 한결 상쾌해져요.
그런데 아뿔싸! 아침부터 내리던 눈이 벌써 꽁꽁 언 까요. 왜 이렇게 길이 미끄러운지. 멋 다고 구두신고 나왔더니 폼이 말이 아니예요. 쪽팔리게 엉거주춤이예요. 운동화 신고 나올걸 잠깐 후회했지만 곧 마음을 바꿔 먹어요. 얼마만의 외출인데 청바지에 운동화 신고 나올 수는 없잖아요. 원피스에 부츠는 신어줘야지. 똥폼은 잠깐 감수하기로 해요.
발길이 자연스럽게 전철역으로 향해요. 좀 멀리 나가보고 싶지만 오랜 시골 생활에 서울 나들이 하려면 너무 피곤해요. 오늘도 그냥 부천역 근처에서 배회하다 들어올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휘감아요.
역에 다다를 무렵 멋진 생각이 떠올랐어요. 갑자기 발걸음이 빨라지네요. 지하상가를 지나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어요. 바로 네일아트 집이예요. 예전부터 한 번 해보고 싶었거든요. 오늘 날 잡았어요. 손 내밀고 우아하게 앉아서 호강 좀 해보고 싶어요. 드디어 미모를 감추고 있던 내 손톱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해요. 그런데 어떤 엄마가 딸을 데리고 오더니 내 옆에 앉혀요. 어쭈구리. 일곱 살이래요. 충격 좀 먹었어요. 요즘 애들, 아니 요즘 엄마들이 다 이런가요. 아니면 나만 이런가요.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옆을 보니 또 고등학생이 와서 앉아요. 컬러는 안하고 케어만 한 대요. 다시 한 번 충격 먹어요. 와우. 다들 부자인가봐요.
와우, 드디어 손톱이 이뻐졌어요. 떨리는 손으로 돈을 지불해요. 저 돈이면 뭘 할 수 있는지는 애써 생각하지 않기로 해요. 그리고 장갑으로 보호막을 형성해주고 다시 걷기 시작해요. 가다보지 예쁜 귀걸이가 눈에 띠네요. 내친김에 귀걸이도 하나 사기로 해요. 막힐 뻔 했던 귓구멍들이 좋아하며 소리를 질러요.
이제 뭐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고맙게도 두 다리가 나를 이끌어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서점으로 가요. 항상 가는 여행기 코너에서 새로운 책이 나왔나 살펴본 다음 육아서 코너로 가요. 오, 사고 싶은 책들이 몇 권 있네요. 당장 사서 읽고 싶지만 꾹 참아요. 인터파크 포인트 적립해야 해요. 위시리스트를 적고 나니 책을 손에 든 것처럼 든든해져요. 그리고 시계를 봐요. 아뿔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어 버렸다니. 젠장. 오늘도 전철타고 나들이 가긴 틀렸어요.
실망한 마음을 달짝지근한 초코 케익으로 달래주기로 해요. 커피 전문점에 들어가 케익 진열장에 눈을 박아요. 와우, 다 먹고 싶어요. 그런데 배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요. 꼬르륵. 젠장. 맛있게 생긴 놈들은 왜 그리 다 조막만한지. 저거 먹어서는 간에 기별도 안 갈 것 같아요. 발광하는 위를 달래주기 위해 할 수 없이 가격대비 가장 양이 많은 샌드위치를 시켜요. 흑흑, 이건 아닌데 어쩔 수 없어요. 커피와 샌드위치를 들고 삼층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아요. 눈깜짝할 사이에 샌드위치를 먹어치워요. 초코칩 쿠키도 하나 들고 오길 잘 했어요. 이것마저 없었다면 어쩔 뻔 했어요. 배가 든든해지자 가져온 책을 펼쳐요. 얼마 안 남았던 책이라 금세 다 읽어버렸어요. 이제 일기장을 펼쳐요. 딱히 쓸 말은 없지만 그냥 주절주절 몇 자 써요. 책을 한 권 더 가져올걸 그랬나봐요. 이제 mp3로 음악을 들어요. 이어폰을 귀에 꽂고 눈을 감아요. 그리고 푹신한 쿠션에 몸을 기대요. 아, 얼마나 편한지. 조카 보느라 쌓였던 피로가 다 녹는 것 같아요. 이렇게 마음 편하게 멍 때리는게 얼마만인지 몰라요.
창 밖에는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어요. 이제 곧 어린이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예요. 멀리 나들이 못 간게 약간 아쉽긴 하지만, 봄이 되고 날씨도 따뜻해지면 가는게 더 낫다고 스스로 위로해요. 커피 전문점을 나와 또 미친듯이 어린이집을 향해 질주해요. 오늘은 늦지 않아서 천천히 걷고 싶은데 발이 말을 안 들어요. 이제 아주 자동이예요. 경보대회 나가도 되겠어요.
저 멀리 어린이집이 보이네요. 흑흑, 아쉬운 휴가여 안녕. 다음에는 더 멋진 휴가를 보내겠다고 다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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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고 기다렸던 자유시간이 이렇게 허무하게 가버리고 말았네요.. 다들 설은 잘 보내셨나요?
저는 차례지내고 예림이랑 둘이 바다보고 왔어요. 영종도에서 배 타고 들어가는 신도, 시도. 명절이라 가장 안 막힐 것 같은 고속도로가 영종도, 인천공항 가는 고속도로일 것 같더라구요. 역시나 쌩쌩 달려 다녀왔습니다.
근처에 멋진 조각공원이 있다고 해서 내비 찍고 갔는데 이 놈의 내비가 아주 좁은, 그리고 바로 옆은 절벽인 시골길로 안내하는 거예요. 눈이 쌓인 데다가 차도 안 다니던 길이라 어찌나 위험하던지.. 시골길로 계속 들어다가다 이대로 가다간 헨젤과 그레텔의 집에서 마녀에게 잡아먹힐 것 같아서 다시 되돌아 나오는데, 차 돌릴데도 없고, 겨우 찾아서 돌리다가 절벽에 떨어질 뻔. 오르막길에서 아무리 밟아도 차가 안나가고.. 예림 아빠도 옆에 없고,,, 엑셀을 밟는데 제가 몸도 같이 앞으로 막 밀고 있는거예요. 자동차가 자전거도 아닌데 말이죠. 암튼 십년감수하고 왔습니다. 그래도 위험했다는 생각보다, 어려운 상황에서 차분히 문제를 잘 해결했다는 생각으로 뿌듯했지 뭐예요.
다시 평화로운 일상 시작이네요... 모두들 명절 피로 잘 푸세요 ^^
첫댓글 야, 날씨 추웠을텐데... 바다 바람 맞고 어땠을까 싶네요.
휴가를 내게 되면 자기 만의 멋을 좀 자주 부리셔요. 그리고 그런 모습도 좀 사진으로 올려 주시지 ^^
아이와 찍은 겨울 바다 사진은 참 멋있는 것 같아요. 나도 좀 가봤으면 좋겠다...
맨날 글로만 입으로만 하는 것 같아서 아쉬워요...
저도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살아돌아오셔서 넘 다행이예요.에궁.등 뒤로 소름이 끼칩니당.이전 여행기를 읽을 때도 느꼈지만 님은 돌발상황에서의 위기대처능력이 뛰어나네요.^^오지탐험가로 나서도 되실 듯 해요.^^그리고 베네치아는 언제 보여주시남요????
반쯤 읽고 나갔다가 다시 읽는데 재미와 스릴이 함께 있네요...저도 영종도에서 네비가 안내하는 길 따라 가다가 허허벌판에서 헤맨적이 있어서 남일 같지 않았어요 ㅋㅋ 담에는 우아하게 조막만한 케익과 차를 드시길~! ㅎㅎ 파이팅~!
넘 넘 재밌네요. 저 애독자 될것 같아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