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운이
장돈식
창문 너머 앞산을 바라본다. 다가서는 절벽 위에 한 그루 외로운 노송이 있다. 그윽한 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내 벗이다. 나무야 모두 다 사랑스럽지만, 그 중에서도 더 정감이 가는 나무
가 있다. 바로 저 소나무다. 수령이 100년은 넘었고 200년은 안 되었을 것 같다. 천 년을 사는
소나무의 나이로는 아직 젊다.
저 소나무 껍질을 닮은 내 얼굴의 깊은 주름에는 살아온 세월만큼의 나이테가 새겨져 있다.
아직 거동이 불편하진 않지만 사람의 수명으로는 황혼이다.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70여 년
대하다 보니 그나마도 정이 들었다. 이제는 그레고리 펙의 얼굴과 바꾸어준다 해도 마다할 것
이다.
외진 곳에 산다는 공통점 때문인지 저 나무와 좋아지낸다. 서로 바라보며 정을 나눈 지도 어
언 6년이 된다. 내가 상심할 때 저 솔은 축 늘어져 시름하는 것처럼 보였고, 내게 즐거운 일이
라도 있으면 제가 어찌 감을 잡았는지, 덩달아 가지가 우줄우줄하는 듯하다.
오래전 문단의 원로 임옥인 님의 초대를 받아 천호동 교외에 있는 선생의 자택을 찾은 적이 있
다. 선생은 정원을 안내하며 “저것 보세요. 나무들이 나를 반겨 잎을 흔들잖아요. 아침에는 더
반가워 가지까지 너울거려요.” 하셨다. 감성 넉넉한 분의 과장된 느낌일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에서야 선생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다.
3년 전부터 솔잎혹파리가 끓더니 나무가 시름시름 생기를 잃고 잎이 불그스레 타들어갔다. 이제
100여 살, 아직 젊은 나이에 몹쓸 병을 얻어, 속리산 소나무처럼 죽나 보다 걱정했다. 산림과 직원
들에게 간청해서 줄기에다 수간주사樹間注射를 하고, 그루 밑동에 구멍을 내고 약을 넣었다. 약석
藥石의 효험이 있어 올봄부터 ‘운이雲伊’는 새순을 내고 푸르름을 되찾았다.
운이는 내가 붙여준 저 소나무의 이름이다. 훤칠하고 썩 잘생긴 나무는 아니지만, 생김새가 아담하
고 단정해 여자다운 이름을 지어 주었다. 여말麗末에 솔이松伊라는 이름난 기생이 살았다. 시문詩文
에 능해서,
솔이 솔이 하니 무슨 솔로 여기느냐
천 길 절벽에 낙락장송 내 귀로다
라는 시를 남길 정도로 고고한 성품의 여성으로 저 나무와 닮은 데가 있다.
솔이는 송도 사람이라서 솔이라 했다면, 여기는 백운산白雲山이라 운이가 걸맞는 이름 같았다. 여름날
새벽, 안개 너울을 벗고 푸른 자태를 보일 때에는 청운이靑雲伊요, 겨울철 흰 눈을 이고 섰을 적에는 백
운이白雲伊다.
때는 조선조 말엽 어느 날, 개미의 날개 깃을 닮은 솔씨 한 알이 날려 하필이면 절벽 위 바위틈에 떨어졌
다. 씩을 틔웠으나 씨젖을 다 먹고 난 후 뿌리내릴 흙이 없었다. 어린것이 기갈은 오죽했을까. 푸근한 흙
에 자리 잡은 다른 솔싹들은 쑥쑥 잘도 커 가는데, 메마른 바위 틈새에서 모진 삶을 사느라 마디게 자랐
을 것이다.
운이가 싹을 틔운 곳은 높은 벼랑 위인지라 자라는 동안 풍문으로 듣고 본 것이 많았을 것이다. 명성황후
가 왜倭의 망나니들에게 시해된 것을 들었을 때가 서른 살이었고, 나라가 망하는 것을 안 것이 마흔 살 무
렵이었을 것이다. 백성들이 독립을 하겠다며 부르짖는 만세 소리도 들었으리라. 그러나 그 이듬해인 1920
년, 황해가 바라다보이는 황해도의 어느 마을에서, 먼 훗날 자기와 벗이 될 한 사내아이가 태어나 자라고
있는 것까지는 몰랐을 것이다.
승승장구하던 일본이 제가 일으킨 전쟁에서 자지러지는 것도, 광복을 했다며 들떴던 우리나라가 동강난
일, 동포가 서로 싸우는 비극도 다 보아서 아는 운이다. 척박한 바위틈이라 나이테는 80~90년을 만들었을
터인데도 겨우 기둥 굵기가 됐을 무렵이었다.
《장자莊子》에 나오는 “잘생기지 못한 나무는 쓸 곳이 없는 고로 오래 산다.” 라는 말은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저 나무는 연료가 귀하던 시절에는 나무꾼의 발이 미치지 못하는 벼랑에 섰기에 베임을 면했고, 영양
이 부족해서 늠름하게 자리지 못해 건축용 벌채도 면했을 것이다. 이렇듯 운이는 다른 나무들이 싫어하는
곳에 뿌리내렸기에 천수를 누릴 수 있게 됐다.
나무는 덕德을 지녔다. 나무는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을 안다. 나무는 태어난 것을 탓하지 아니하고, 왜
여기 놓이고 저기 놓이지 않았는지를 말하지 아니한다.
이양하 선생의 글 <나무>의 한 대목이다.
사람들 중에는 나무만큼이나 자족하며 사는 사람도 있다. 내가 만약 도시에 사는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면,
동기가 여덟이나 되는 집의 장남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모와
향토를 원망하거나 탓한 적은 없다.
아버지는 무애无涯 양주동 님과 보통학교 동문이었다 한다. 성적이 좋아서 도지사의 추천으로 일본 유학
을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반대로 학업을 중단했다. 만약 아버지가 자신의 성취만을 생각했다면
양선생만큼이나 대성하지 않았을까 아쉬운 마음도 들지만, 만약 그랬다면 나와는 관계없는 분이 되었을
것이다. 내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
나도 결혼 전 마음에 솔깃했던 여자들이 있었으나 지금의 아내와 결혼한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녀
는 밥처럼, 숭늉처럼 수더분하게 50여 년을 나와 살았고, 우리 아이들을 다섯이나 낳아주었다. 두 사위, 세
며느리와의 만남은 또 얼마나 소중하고 흐뭇한 사건인가. 저들은 또 끌끌한 손자, 예쁜 손녀 아홉을 선물했
다. 늦게나마 글쓰기를 시작한 것은 잘한 일이다. 문우文友들과 사귀며 저들의 이름과 나란히 지면에 오를
수 있음은 살맛나는 일이다.
피난은 아픈 기억이지만 덕으로 삼는다. 이북의 미움을 사지 않았더라면 도망쳐나와 이남에서의 자유로운
삶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업이 잘돼서 제법 큰 돈을 가져본 것을 좋은 기억으로 남겨둔다. 그러나
수성守成하지 못해 지금은 가진 게 없으나 나쁘지만은 않다. 이렇게 얽매임 없이 일신이 편함을 부자들은
모를 것이다.
소나무 밑에는 작은 식물들이 산다. 솔잎이 가늘어 햇빛이 새기 때문이다. 활엽수는 빛을 넓은 잎으로 탐욕
스럽게 다 챙기니 다른 푸새가 배겨낼 수가 없다. 그 대신 천리天理는 공평해서 활엽수들이 잎새를 떨구는
계절에도 소나무는 푸르름을 유지한다. 어수룩해서 제 몫 다 챙기지 못하는 사람이 인생의 사계절 모두를
푸르게 살 수 있다고 믿고 싶다. 높은 지위와 깊은 학문, 큰 재산이 내 신변에 없는 것은 마치 저 가난한 소
나무의 외로움과 견줄 수 있고, 척박한 바위 설렁이라 이수에 불을 옮겨줄 나무들이 없어 언저리를 핥은 몇
번의 산불에도 불타지 않은 것에도 비길 수 있으리라.
삶의 자취가 비슷한 저 운이가 벼랑 위에서 자적自適하는 것처럼 나도 지금의 처지가 좋다. 여기가 좋다.
운이가 오늘을 즐기는 것처럼, 나도 이 시대가 좋고 오늘이 좋다.
장돈식(張敦植)
1920년 황해도 장연(長淵)에서 태어나 스무 살 되던 해에 만주로 건너가 신학을 공부하던 중 일제의 탄압으로 마치지 못하고 귀향했습니다. 해방 전까지 가업인 농업에 종사하며 청소년들을 가르치다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이 격화되자 월남하여 또다시 10여 년 동안 농촌 청소년 교육에 몸담았습니다. 1950년 가나안 농원을 설립한 뒤 33년 동안 선진 농업기술을 보급하고 농민들의 자립 터전을 마련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63년 국민포장 산업상과 3·1문화상을 수상하였습니다. 1985년부터 지금까지 수필동인 모닥불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1990년 《한국수필》에 〈취하는 것이 술뿐이랴〉 로 등단했습니다. 창작수필 문인회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한중(韓中) 우리수필문학회 회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1988년부터 원주 치악산계 백운산 자락에 들어가 백운산방을 짓고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가다가 2009년 4월10일 오전 6시 30분, 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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