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 9장과 10장에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그리스도를 거부한 모습이 기술되어 있으므로 수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완전히 이스라엘을 버리셨다고 생각 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질문에 대하여 그가 본서신에서 즐겨 사용하고 있는 단호한 부정적 표현인 '그럴 수 없느니라'는 말로 답변하고 있다.
'하나님이...버리셨느뇨'로 번역된 헬라어 '메 아포사토 호 데오스'에서 '메'는 부정적인 답변을 요구하는 질문 형태이다. 또한 '자기 백성'(톤 라온 아우투)에서 인칭 대명사 '자기'는 용어 속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결코 버리시지 않았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1절에서 제기되는 이와 같은 질문은 11장 전체의 주제가 되고 있다.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경우를 들어 이스라엘이 결코 버림받은 것이 아님을 답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자손인 사도 바울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 것은 이스라엘이 전적으로 버림받지 않았다는 하나의 산 증거이다.
예전에 그가 복음을 결사적으로 반대한 것은 이스라엘이 가진 불신앙의 전형적인 본보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실은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증거가 된다.
[롬 11: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 자기 개인의 경우를 예로 들었던 바울은 이제 왕상 19:1-18에 기록된 엘리야의 경우를 예로 들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은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바울은 특별히 왕상 19:10, 14, 18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이스라엘의 종교가 극도로 부패한 나머지 여호와를 바로 섬기는 자가 엘리야 한 사람뿐인 것 같았으나 사실은 당시에도 하나님이 남겨두신 참 성도 7천 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미리 아신 자기 백성 - 몇 명의 주석가들은 이 말이 '구원받기로 예정된 영적 이스라엘'을 의미한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이 말은 1절에서와 같이 유대 민족, 곧 메시야의 구원과 관련된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을 암시한다고 봄이 타당할 듯하다. 예수와 동시대에 살았던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를 배척했다. 이러한 민족적 불신앙은 오랜 세월에 걸쳐 계속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신다. 그들의 눈이 열려 그들의 메시야를 자유롭게 받아들일 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마침내 메시야를 믿고 구원받게 될 것을 미리 아시고 계신 것이다. 엘리야를 가리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엘리아'는 문자적으로 '엘리야 안에' 또는 '엘리야로'라는 뜻이다.
이러한 표현은 신약에서 자주 사용되는 인용구이다. 래빈스에 의하면, '엔 엘리야'는 '엘리야에 관한 이야기를 뜻한다고 한다. 저가...송사하되 - '엔튕카네이'는 '청구하다', '간구하다'는 의미로 본절에서 전치사 '카타를 동반하여 '...거스려 송사하다'의 뜻을 갖는다. 여기서 '송사한다'는 표현은 이상하게 생각될지 모른다.
그러나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완전히 저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모습을 목도한 엘리야는 자신의 민족을 하나님 앞에 송사하며 멸망시킬 것을 기도하였다. 이러한 엘리야의 기도는 민족에 대한 반역이 아니라 자신의 민족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 중하게 생각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롬 11:3]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저희가...헐어 버렸고 - 본절에서 바울은 왕상 19:10, 14을 인용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선지자들을 죽인 것을 먼저 말한 후 제단 훼파를 서술함으로써 그 순서를 바꿔놓았다. 거기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제단들을 - '뒤시아스테리아'는 '뒤시아스테리온'의 복수형이다. 율법에 따르면 합법적인 제단은 예루살렘 한곳 뿐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율법은 그외 다른 곳에도 합법적인 제단으로서의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예컨대, 하나님이 현현(顯現)하신 '벧엘' 같은 곳에 쌓은 제단은 제단으로서의 권위가 인정되었다. 더욱이 그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제사드리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그러한 상황 속에서 믿음이 신설한 자들은 과감히 예루살렘 외에 다른 곳에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나만 남았는데 - 혹자는 '나만'이라는 말은 '모든 선지자들 중에 홀로'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이러한 해석은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칠천 명을 남겨두었다고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하신 대답과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칠천 명의 남은 자들은 선지자들이 아니라 단순한 경배자들이었다. 엘리야 외에는 선지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담대히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없었다. 선지자라 이름하는 자들은 모두 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 뿐이었다.
[롬 11:4]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대답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레마티스모스'는 하나님의 신탁을 의미하는 말로서 대답의 계시적인 특성과 권위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바알에게 - 헬라어 '테 바알'의 '테'는 여성 정관사이다. 그 당시 페니키아인들에게 '바알'은 태양을 상징하는 남신으로, 아스다롯은 달을 상징하는 여신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본절에서 바알에게 여성 정관사를 쓰고 있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70인역에는 바알이란 이름에 남성과 여성을 병용해서 쓰고 있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70인역에는 바알이란 이름에 남성과 여성을 병용해서 쓰고 있다. 그러므로 바알이 양성체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바알신'이 아니라 단지 '바알상'을 여성으로 간주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우상이라고 하는 것이 물질 그 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바로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여성 정관사를 바알 앞에 붙이고 있는 것 같다.
칠천 - 이 숫자는 여자와 아이 외에도 그러하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7'은 완전수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7천이란 숫자는 영원 전부터 구원을 얻기로 선택된 엘리야 시대의 모든 성도들이 완전한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보호 받고 있었음을 상징한다.
[롬 11: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남은 자 - 바울은 엘리야 시대의 상황을 자신의 시대에 적용시키면서 그때에 남은 자 칠천명이 있었던 것같이 자신의 시대에도 '남은 자'가 있다고 하는 결론을 도출(導出)하고 있다. 바울 주장의 요지는 아무리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불신과 배교가 만연했다하더라도 '남은 자'가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사랑하셔서 택했다고 하는 것이다.
'남은 자'사상은 성경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데, 먼저 창세기에 살펴보면, 노아의 때에 소수의 택함 받은 자만이 구원을 받았다. 롯의 때에도 그러했다. 이사야 시대에는 그루터기와 같은 남은 자들이 있었다. 이 외에도 구원은 선택된 남은 자들의 것이라는 사상이 구약 여러 구절에서 발견된다 특별히
이사야의 아들 스알야숩은 그 이름 자체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뜻으로서 구약의 남은 자 사상을 대변해 준다.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 '은혜로 택하심' 심리어의 관용구로서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뜻한다. 이것은 인간의 어떠한 행위나 결정보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가 선행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