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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亂中日記)-을미년 일기
4. 을미년 일기(1595년 01월 01일 ~ 12월 18일)
한산도의 밤
한바다에 가을빛 저물었는데
찬바람에 놀란 기럭 높이 떴구나
가슴에 근심 가득 잠못 드는 밤
새벽 달 창 너머로 칼과 활을 비추네
1월
• 1일(甲戌) 맑음.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나라 일을 생각하니 눈물이 저절로 흐른다. 새벽엔 여러 장수들과 색군들이 와서 해가 바뀐 인사를 한다. 원전, 윤 언심, 고경운 등이 와서 보았다. 색군들에게 술을 먹였다.
• 7일(庚辰) 맑음. 흥양과 방언순과 함께 이야기했다. 남해에서 항복한 왜인 야여문이 와서 인사를 했다.
✔ 충무공 이순신(李舜臣·1545~1598) 장군과 관련된 기존 기록들을 뽑아 필사한 17세기의 문서 ‘충무공유사(忠武公遺事·재조번방지초)’는 지금까지의 ‘난중일기(亂中日記)’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일기 32일치를 담고 있다.
✔ 정월 10일(癸未) 순천 부사(이순신의 부하 장수인 권준·權俊)도 공사(公私)간의 인사를 하려는 것을 잠시 보류했다가 조금 뒤에 불러들였다. 이들과 함께 좌석에 앉아 술을 권할 때 말이 매우 잔혹하고 참담했다.
順天公私禮, 姑留之, 而有頃招入, 同坐饋酒之際, 言辭極兇慘.
(이번에 발굴된 일기에는 부하 장수인 권준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이순신의 감정이 솔직하게 드러난다. 기존의 ‘난중일기’에선 찾기 어려운 부분이다. 당시는 전선이 교착 상태인 채 강화 회담이 전개되고 있었고,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은 군량 확보에 노력하면서 다시 닥칠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다.)
✔ 정월 12일(乙酉) 삼경(자정쯤)에 꿈을 꾸니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오셔서 분부하시기를 “13일에 회( ·이순신의 맏아들)를 초례(醮禮·전통 혼례)하여 장가보내는데 날이 맞지 않는 것 같구나. 비록 4일 뒤에 보내도 무방하다”고 하셨다. 이에 완전히 평소와도 같은 모습이어서 이를 생각하며 홀로 앉았으니, 그리움에 눈물을 금하기 어려웠다.
三更夢先君來敎, “十三日送醮, 往似有不合. 雖四日送之無妨”爲敎. 完如平日, 懷想獨坐, 戀淚難禁也.
(돌아간 아버지 이정·李貞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기존 ‘난중일기’에는 전쟁 중에도 수시로 사자를 보내 어머니의 안부를 대신 묻게 하는 등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을 적은 부분이 많지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쓴 부분은 거의 없었다.)
✔ 정월 15일(戊子) 우후(虞候·수군절도사 밑에 두었던 무관직) 이몽구와 여필이 왔다. 이 편에 “이천주(李天柱)씨가 뜻하지 않게 갑자기 죽었다”는 말을 들으니, 경탄함을 이기지 못했다. 천리 밖의 땅에 던져진 사람이 만나보지도 못하고 갑자기 죽으니 더욱 애통과 슬픔이 심했다.
虞候李夢龜及汝弼來, 聞李天柱氏, 不意暴逝云. 不勝驚嘆, 千里投人, 不見而奄逝, 尤極痛悼.
(‘이천주’란 인물은 이순신의 지인으로 추정된다. 전란 중 벗을 잃은 애절한 심정을 표현했다.)
• 21일(甲午) 종일 가랑비가 내렸다. 장흥이 왔는데, 그에게서 순병사 이 일의 처사가 극히 형언할 수 없고, 나를 해치려고 몹시 애를 쓴다는 말을 들으니 참으로 우습다.
• 26일(기해)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탐선이 들어와서 흥양을 잡아갈 나장이 온다고 한다.
✔ 정월 27일(丙子) 오늘이 바로 (맏아들) 회(薈)가 혼례를 올리는 날이니, 걱정하는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장흥 부사가 술을 가지고 왔다. 그의 서울에 있는 첩들을 자기의 관부(官府)에 거느리고 왔다고 하니, 더욱 놀랍다.
乃 奠雁之日, 心慮如何? 長興佩酒來, 其京妾亦率來于其府云, 尤可駭也.
(전란 중에 혼례를 올리는 아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당시 관원들의 행태를 기록했다.)
2월
• 1일(甲辰) 맑고 바람이 불었다. 일찍 대청에 나가 보성의 기한 늦은 죄를 다스리고, 도망가던 왜인 2명을 처형했다. 금부나장이 와서 흥양을 잡아갈 일을 전했다.
• 4일(丁未) 맑음. 몸이 불편하다. 장흥과 우후가 왔다. 원수부의 회답 공문과 종사관의 답장도 왔다.
✔ 2월 9일(壬子) 꿈을 꾸니 서남방 사이에 붉고 푸른 용이 한 쪽에 걸렸는데, 그 형상이 굴곡져서 내가 호로 보다가 이를 가리키며 남들도 보게 했지만, 남들은 볼 수 없었다. 머리를 돌린 사이에 벽 사이로 들어와 그림용이 돼 있었고, 내가 한참 동안 어루만지며 완상하는데 그 빛과 형상이 움직이니 특이하고 웅장하다 할 만 했다.
夢西南間, 赤靑龍掛在一方, 其形屈曲, 余獨觀之, 指而使人見之, 人不能見. 回首之間 來入壁間, 因爲畵龍, 吾撫玩移時, 其色形動搖, 可謂奇偉.
• 11일(甲寅) 비가 내리다가 늦게 잠깐 갰다. 황숙도와 허주와 변존서가 왔다. 종일 공무를 보았다. 저물게 임금의 분부가 왔는데, 둔전을 조사하라는 것이었다.
• 17일(庚申) 맑음. 군사들의 아침밥을 재촉해 먹여 가지고 바로 우수영 앞바다에 이르니, 성 안에 있던 왜놈 7명이 우리 배를 보고 도망가므로 그대로 배를 돌려 나왔다. 장흥과 신 조방장을 불러 종일 계책을 의논하고 진으로 돌아왔다.
• 20일(癸亥) 맑음. 우수사, 장흥, 신조방장이 와서 이야기하는데, 원균의 고약한 짓을 많이 전했다. 참으로 놀랄 일이다.
• 29일(壬申) 맑음. 고여우가 창신도로 나갔다. 배수사가 와서 둔전 만들 일을 의논했다.
3월
• 1일(甲戌) 맑음. 삼도의 과동한 군사들을 모아 놓고 위에서 하사하시는 무명베를 나누어 주었다.
• 9일(壬午) 맑음. 늦게 대청으로 나갔다. 방답의 새 첨사 장린, 온포의 새 만호 이담이 공적에 대한 인사를 행했다. 진주 이곤변이 보러 왔다.
• 11일(甲申) 흐리고 바람이 몹시 불었다. 사도시의 주부 조 형도가 와서, 좌도에 있는 적의 형세와 항복한 왜병들의 일을 말하기를, "수길이 출병한 지 3년이나 되었는데도 종시 아무런 보람도 없기 때문에 군사를 더 내어 부산에 진영을 만들려 하는데, 3월 11일에 바다를 건너오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 17일(庚寅) 비가 멎을 것 같다. 아들 면과 허주와 박인영 등이 돌아갔다. 이날 군량을 계산하여 표를 붙였다. 충청 우후가 보고하기를, "수사 이계훈이 불을 내고 물에 빠져 죽었으며 군관과 격군 도합 1백 40여 명이 불타 죽었다."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늦게 우수사가 보고하기를, "견내량 복병한 곳에서 온 항복한 왜병 심안은기를 문초했더니, 그는 영등에 주둔했던 왜병인에 그 장수 심안돈이 그 아들을 자기 대신 두고 쉬 돌아갈 것이라." 한다.
• 20일(癸巳) 비가 세차게 내린다. 식후에 우수사에게로 가다가 길에서 배 수사를 만나 배 위에서 잠깐 이야기했다. 밀포의 둔전 만든 곳을 살펴보려고 간다고 했다.
• 23일(丙申) 맑음. 아침 식사 후에 세 조방장과 우후와 함께 걸어서 앞산 봉우리에 올라 보니 3면으로 바라보이는 앞이 막히지 않고 길은 북쪽으로 뚫려 있다. 소포 세울 자리를 닦고 거기 앉아서 돌아갈 것을 잊고 있었다.
✔ 3월 24일(丁酉) (전라)우수사(右水使=이억기)는 앉을 대청을 개수(改修)해 세우는 것을 나쁘게 여기고 헛소리를 많이 하며 보고해 왔다. 매우 놀랍다.
右水使以坐廳改立爲惡, 多費辭報來, 可愕可愕.
(‘우수사’는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이던 시절 함께 해전에 참가해 전공을 세웠고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했다. 새로 발굴된 부분에서 이순신은 세 번에 걸쳐 이억기에 대해 못마땅한 심정을 적었는데, 역시 기존 ‘난중일기’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부분이다.)
• 27일(更子) 맑음. 아침식사 후에 우수사가 와서 종일 활을 쏘았다. 어둘 무렵에 박 조방장에게로 가서 발포, 사도, 녹도를 불러 함께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 탐후선이 들어왔다. 표마와 종금이 들어왔는데 어머님께서 편안하시다고 한다.
• 29일(壬寅) 맑음. 식사 후에 두 조방장과 이운룡, 조계종과 함께 활 23순을 쏘았다. 배 수사가 순찰사에게서 왔고, 미조항 첨사도 진에 왔다.
4월
• 1일(癸卯) 맑고 큰 바람이 불었다. 들으니 남원 유생 김굉이 해군에 관한 일로 진중에 왔다고 하므로 불러서 함께 이야기했다.
• 10일(壬子) 맑음. 구화역 역졸이 와서 아뢰기를, 적선 3척이 또 역 앞에 왔다고 한다. 이에 삼도 중위장들에게 각각 배 5척씩을 주어 거느리고 견내량으로 가서 무찌르게 했다.
• 13일(을묘) 흐리고 비. 세 조방장이 같이 왔다. 장계와 편지 4통을 봉해서 거제 군관 편에 올려 보냈다. 저녁에 고성 현령 조응도가 와서 적들의 일을 말하고, 또 말하기를, "거제에 있는 적이 웅청에 군사를 청하여 밤에 기습하려고 한다."고 한다. 비록 믿을 수 없는 말이지만 그런 염려가 없지 않다.
• 17일(己未) 맑음. 동북풍이 세차게 불었다. 식후에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보았다. 세 조방장과 활 15순을 쏘았다. 배 수사가 왔다가 곧 해평장 논치는 곳으로 갔다. 미조항 첨사가 와서 활을 쏘았다.
• 20일(壬戌) 맑음. 늦게 우수사에게로 가서 조용히 이야기하고 돌아왔다. 이영남이 장계 회답을 가지고 왔는데 남해를 효시(嚆矢) 하라고 했다.
• 24일(丙寅) 맑음. 이른 아침에 울과 조카 뇌, 완을 어머님 생신에 음식 마련할 일로 보냈다. 오정 때 강천석이 달려와서 보고하기를, "도망한 왜인 망기시로는 무성한 풀 속에 엎드려 있는 것을 잡았고, 한 놈은 물속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이에 그 왜인을 곧 압송해 오게 하고, 삼도에 나누어 맡긴 항복한 왜인을 모두 불러 모아서 머리를 베라고 했다. 그러나 망기시로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이 베임을 당했으니 가위 독한 놈이다.
• 25일(丁卯) 맑고 바람도 없음. 구화역의 역졸 득복이 경상 우후의 보고를 가지고 왔는데, "왜병의 배 대, 중, 소 모두 50여 척이 웅천에서 나와서 진해로 향한다."한다. 이에 오수 등을 정찰하러 내보냈다. 흥양이 와서 보았다. 사량 만호 이 여념이 돌아갔다. 아들 회와 조카 해가 돌아와서 어머님이 편안하시단 말을 들으니 다행이다.
• 27일(己巳) 맑고 바람도 없음. 몸이 불편하다. 권동지, 미조항 첨사, 영등 만호가 와서 함께 활 10순을 쏘았다. 밤 3경에 우수사가 적을 탐색하고 돌아왔는데 아무런 적의 종적이 없다고 한다.
✔ 4월 30일(戊申) 아침에 원수(元帥=도원수 권율·權慄)의 계본(啓本·임금에게 제출하는 문서 양식)과 기(奇)·이(李)씨 등 두 사람의 공초(供招·죄인의 진술)한 초안을 보니 원수가 근거 없이 망령되게 고한 일들이 매우 많았다. 반드시 실수에 대한 문책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데도 원수의 지위에 둘 수 있는 것인가. 괴이하다.
朝見元帥啓本及奇李兩人供草, 則元師多有無根妄啓之事, 必有失宜之責. 如是而可置元帥之任乎! 可怪.
(무척 당혹스런 기록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전체를 통솔했던 도원수는 다름아닌 ‘행주대첩의 영웅’ 권율 장군이었다. 그는 당시 이순신 장군의 상관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각각 육군과 수군의 총사령관이었던 권율 장군과 이순신 장군 사이에 이와 같은 갈등이 있었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순신의 일기가 대단히 솔직한 기록이었음을 알 수 있다.)
5월
• 2일(甲戌) 맑음. 밤 10시에 탐선이 들어왔는데 어머님께서 편안하시고, 종사관이 본영에 도착했다고 한다.
• 11일(癸未) 늦게 비가 내렸다. 두치 군량과 남원, 순창, 옥과 등 합쳐서 68석을 실어 왔다.
• 14일(丙戌) 궂은비가 그치지 않는다. 종일, 밤새도록 내렸다. 아침 식사 후에 대청에 나가서 공무를 보았다. 사도가 와서 고하기를, 흥양이 받아간 전선이 돌에 걸려서 엎어졌다고 한다. 이에 대장 최벽과 십선장 도훈도를 잡아다가 곤장을 때렸다.
• 17일(己丑) 맑음. 아침에 나가서 본영 각 배의 사부와 격군으로서 급료 받은 사람들을 점고했다. 소금 가마솥 하나를 부어 만들었다.
• 21일(癸巳) 흐림. 아침에 나가 공무를 보려는데, 항복한 왜인들이 고하기를, 저희들 동료 중에 산소라는 자가 흉칙한 일이 많으니 죽여야겠다고 한다. 이에 그 왜인을 시켜 목을 베게 했다. 활 20순을 쏘았다.
• 29일(辛丑)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사직의 영험을 힘입어 겨우 조금만 공을 세웠는데, 임금이 총애가 분에 넘친다. 장수의 직책을 띤 몸으로서 티끌만으로 보답하지 못하니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6월
• 3일(甲辰) 흐림. 아침에 남해가 보고하기를, 해평군 윤두수가 남해에서 본영으로 건너온다고 한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곧 배를 정비하고 현덕린을 영으로 보냈다. 사량 만호가 양식이 떨어졌다고 보고하고 곧 돌아갔다.
• 13일(甲寅) 흐림. 새벽에 경상 수사 배설을 잡아 올리라는 명령이 내려오고 그 대신 권준이 임명되었으며, 남해 기효근은 유임되었다 하니 놀랄 일이다. 어둘 무렵에 탐선이 들어왔는데 금오랑이 벌써 영내에 도착했다.
• 16일(丁巳) 맑음. 나가서 공무를 보았다. 순천 칠선장 장일이 군량을 도둑질하다가 잡혔기 때문에 처벌했다. 오후에 두 조방장과 미조항 등과 함께 활을 쏘았다.
• 24일(乙丑) 맑음. 우도 각 고을과 포구의 전선에 부정을 조사했다. 여기에서 12명을 잡아내고 그 대장까지 처벌했다.
• 27일(戊辰) 맑음. 허 주와 조카 해와 기 운로들이 돌아갔다. 신 조방장과 거제와 함께 활 10순을 쏘았다.
• 30일(辛未) 맑음. 문 어공이 삼을 사들일 일로 나갔다. 방답, 녹도, 신 조방장과 활 15순을 쏘았다.
7월
✔ 7월 1일(壬申) 내일은 아버지의 생신인데, 슬픔과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
明日乃父親辰日, 悲戀懷想, 不覺涕下.
• 1일(壬申) 잠깐 비가 내렸다. 나라 형세가 아침 이슬같이 위태로운데,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만한 기둥 같은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만한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니 나라가 장차 어떻게 될지 마음이 산란하다. 종일토록 누웠다 앉았다 했다.
• 3일(甲戌) 맑음. 아침에 충청 수사에게 가서 문병하니 많이 덜해졌다고 한다. 늦게 경상 수사 권준이 와서 이야기한 뒤에 활 10순을 쏘았다. 밤 10시에 탐선이 들어왔는데 어머님께서 편안하시다 하나 입맛이 달지 않으시다고 한다. 민망스러운 일이다.
• 4일(乙亥) 나주 판관 원종의가 배를 거느리고 진으로 돌아왔다. 이 전들이 산 일터에서 노 만들 나무를 가져와 바쳤다. 식후에 대청으로 나갔다. 미조항과 웅천이 와서 활을 쏘았다. 군관들도 향각궁으로 내기 활을 쏘아서 내 군관 노윤발이 1등을 했다. 저녁에 임영과 조응복이 왔다.
• 5일(丙子) 맑음. 대청에 나가서 공무를 보았다. 늦게 박 조방장 종남과 신 조방장 호가 왔다. 방답이 활을 쏘았다. 임영이 돌아갔다.
• 7일(戊寅)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음. 경상 수사, 두조방장, 충청 수사가 왔다. 방답, 사도 등을 시켜서 편을 짜서 활을 쏘게 했다. 경상 우병사에게 온 유지에, "국가의 화가 참혹하고 종묘 사직의 원수가 남아 있어, 신의 부끄러움과 사람들의 원통함이 하늘과 땅에 사무쳤는데도 이것을 아직도 깨끗이 쓸어버리지 못하고 원수와 함께 이 하늘을 이고 있으니, 대체로 혈기 있는 자로서야 그 누가 팔뚝을 걷고 마음을 썩이면서 그놈들과 살을 저미고자 하지 않으랴. 그런데 경은 적과 마주 보고 있는 장수로서 조정의 명령이 없는데도 함부로 적과 대면하여 감히 무도한 말을 지껄이고 자주 사사로이 편지를 통하여 현저히 저들을 높이고 아첨하는 태도가 있어, 수호하고 화친한다는 말이 명나라 조정에까지 들어가게 해서 부끄러움을 끼치고 혼란을 열어 놓기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 이 죄는 군율을 적용해도 아까울 것이 없지만 오히려 너그럽게 용서하고 돈독하게 타이르고 경고함이 정녕했다. 그런데도 고집을 더 세우고 스스로 죄의 구렁으로 빠지고 있으니, 나는 보기에 몹시 해괴하고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이에 비변사 낭청 김용을 보내서 구두로 내 뜻을 전하는 것이니 경은 마음을 고치고 힘써서 후회할 일을 남기지 말라."하였다. 이것을 보니 황송함을 이길 수 없다. 김응서란 어떤 사람이기에 스스로 허물을 뉘우치고 힘쓴다는 말을 듣지 못하겠는가? 만은 쓸개가 있다면 반드시 자결이라도 할 일이다.
• 10일(辛巳) 맑음. 몸이 몹시 불편하다. 늦게 우수사와 이야기했다. 군량이 떨어졌어도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말을 많이 했다. 참으로 민망스러운 일이다. 술 몇 잔을 먹고 밤이 깊어 수루 위에 누웠으니 초생달 빛은 다락에 가득하고 만 갈래 회포를 이길 길이 없다.
• 15일(丙戌) 맑음. 늦게 대청으로 나갔다. 두 조방장과 여러 사람이 보러 왔다. 경상 수사도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 18일(己丑) 맑음. 아침에 대청으로 나가서 박, 신 두 조방장과 함께 아침을 먹었다. 오후에 떠나서 저녁에 지도에 이르러 정박하고 밤을 지냈다. 3경쯤 되어 거제 현령이 와서 말하기를, "장문에 있던 적의 소굴이 이미 모두 비어 있고, 다만 30여 명만이 남아 있다."고 한다. 또 사냥하는 왜인들을 만나 하나는 활로 쏘아 죽이고, 하나는 산 채로 잡아 왔다고 한다. 4시경에 떠나서 견내량으로 돌아왔다.
• 21일(壬辰) 비바람이 크게 불었다. 들으니 우후가 들어온다고 한다. 아침 식사 후에 태구련과 언복이 만든 환도를 충청 수사와 두 조방장에게 각각 한 자루씩 나누어 보냈다. 어둘 무렵에 회와 울과 우후가 같은 배로 섬 밖에 도착했다. 아들들이 돌아왔다.
• 28일(기해) 맑음. 아침 식사 후에 배로 내려가 삼도가 합하여 포구 안에 진을 쳤다. 오후 2시에 어사 신식이 진에 왔다. 곧 대청으로 내려가 한참동안 이야기하다가, 각 수사와 세 조방장을 청해서 함께 이야기했다.
8월
• 1일(辛丑) 비바람이 거세다. 어사 신식과 아침식사를 같이 하고 곧 배로 내려가 순천 등 다섯 고을 배들을 점고했다. 저문 뒤에 어사 있는 곳으로 내려가서 같이 이야기했다.
• 3일(癸卯) 맑음. 어사는 늦게 경상도 진으로 가서 점고했다. 저녁에 경상도 진으로 가서 같이 이야기하다가 돌아왔다.
• 7일(丁未) 비. 아침에 아들 울과 허주와 현덕린과 우후가 같은 배로 왔다. 늦게 두 조방장 및 충청 수사와 함께 이야기했다. 저녁에 표신을 쥔 선전관이 광후가 유지를 가지고 왔는데, 원수가 3도의 해군을 거느리고 바로 적의 소굴로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함께 이야기하면서 밤을 세웠다.
• 12일(壬子) 흐림. 일찍 나가서 공무를 보았다. 늦게는 두 조방장과 활을 쏘았다. 김응경이 경상 수사 원 균에게로 갔다가 돌아오는데, 우수사에게 가서 활쏘기 내기를 해서 배영수가 또 졌다고 한다.
• 16일(丙辰) 비가 개지 않고 종일 부슬부슬 내렸다. 심회가 어지럽다. 두 조방장을 불러서 같이 이야기했다.
• 20일(庚申) 맑음. 종일 체찰사의 전령을 기다렸으나 오지 않는다. 권 수사, 우수사, 발포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밤 10시에 전령이 왔다. 자정이나 되어 배를 타고 곤이도에 이르렀다.
• 21일(辛酉) 흐림. 늦게 소비포 앞바다에 닿으니 전라 순찰사, 군관 이준이 공문을 가지고 왔다. 강응호, 오계성이 함께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저물녘에 사천 땅 침도 앞에 배를 대고 잤다.
✔ 8월 22일(壬辰) 강을 건너 주인집에 갔다가 그 길로 체찰사(體察使)의 하처(下處·임시 숙소)로 가니 먼저 사천현에 와서 자고 있었기 때문에 맞이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고 변명했다. 우습다.
渡江入主人家, 因到體察下處, 則以先到泗川縣宿, 而不爲迎命爲言, 可笑.
(기존 ‘난중일기’에는 이 내용의 앞부분에 ‘오후에 진주 남강가에 이르니 체찰사가 이미 진주에 들어왔다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체찰사는 비상시에 임시로 지방에 파견해 군대를 지휘 통솔하는 역할을 맡은 관직이다. 고위 관료의 행태를 비웃는 자세가 보인다.)
• 23일(癸亥) 맑음. 체찰사에게로 갔더니 조용히 이야기하는 중에, 백성들을 위해서 그들의 어려움을 덜어 주어야겠다는 말이 많았다. 호남 순찰사는 헐뜯어 말하는 것이 많으니 탄식스러운 일이다. 늦게 나는 김응서와 함께 촉석루에 가서 장수들이 패전해 죽은 곳을 보고 참혹하고 가슴 아픔을 참지 못했다. 조금 있다가 체찰사가 나더러 먼저 가라고 하므로 배를 타고 소비포로 돌아와 정박했다.
• 25일(乙丑) 맑음. 일찍 아침 식사를 마치고 체찰사, 부사, 종사관과 함께 모두 내 배에 타고 오전 8시경에 떠나 같이 서서 여러 섬들과 진을 합칠 여러 곳과 또 적과 접전하던 곳들을 가리켜 점검하면서 종일토록 의논했다. 그 결과 곡포는 평산포와 합하고, 상주포는 미조항과 합하고, 적량은 삼천포와 합하고, 소피포는 사량과 합하고, 가배량은 당포와 합하고, 지세포는 조라포와 합하고, 제포는 웅천과 합하고, 율포는 옥포와 합하고, 안골은 가덕과 합하도록 결정지었다. 저녁에 진에 도착하여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고 공사례를 모두 마친 뒤에 헤어졌다.
• 28일(戊辰) 맑음. 이른 아침에 체찰사, 부사, 종사관과 함께 수루 위에 앉아서 여러 가지 폐단이 되는 일들을 의논했다. 식전에 배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나갔다.
• 29일(己巳) 맑음. 일찍 나가 공무를 보았다. 경상 수사 권 준이 체찰사에게서 왔다.
9월
• 3일(壬申) 맑고 동풍이 크게 불었다. 아우 여필과 아들 울과 유헌이 돌아갔다. 강응호가 도양장의 추수할 일로 함께 돌아갔다. 정 항, 우 수, 이 섬이 적을 탐지하고 돌아왔는데, 영등의 적진은 2일부터 비었고, 누각과 모든 굴들을 다 태워 없앴다고 한다. 웅천 사람으로서 적에게 투항했던 공수복 등 17명을 달래서 데리고 왔다.
• 7일(丙子) 맑음. 식후에 경상 우수사가 왔다. 충청도 병영의 배와 서산, 보령의 배들을 내어 보냈다.
• 10일(己卯) 맑음. 오후에 충청 수사 선거이와 두 조방장과 함께 우수사 이억기에게로 가서 같이 이야기하다가 돌아왔다.
• 14일(癸未) 맑음. 늦게 나가 공무를 보았다. 우수사와 경상 우수사가 와서 함께 작별하는 술을 마시다가 밤이 깊어서 헤어졌다. 선 수사와 작별하면서 준시에 말하기를, "북쪽으로 갔을 때도 함께 고생했고, 남쪽으로 와서도 사생을 같이했네. 한 잔 술 오늘 밤 달이 내일은 서로 떠나는 정이 되네."라고 했다.
• 16일(乙酉) 맑음. 나가서 공무를 보고 장계를 봉해 올렸다. 이날 저녁 월식하고 밤들어 밝아졌다.
• 17일(丙戌) 맑음. 식후에 서울로 편지를 써 보냈다. 김희번이 장계를 가지고 나갔다. 유자 30개를 영의정 유성룡에게 보냈다.
• 21일(庚寅) 맑음. 박 조방장을 작별하려 했으나 경상 수사와 작별하기에 해가 저물어서 가지 못했다.
• 23일(壬辰) 맑음. 태조대왕의 황후 한씨의 제삿날이어서 공무를 보지 않았다. 웅천 사람으로서 사로잡혀 갔던 박녹수, 김회수가 와서 보고, 겸하여 적의 정상을 말해 주었다. 이에 각각 무명 1필씩을 주어 보냈다.
• 28일(丁酉) 식후에 집 짓는 데로 올라갔다. 우수사와 경상 수사가 와서 보았다. 회와 울도 기별을 듣고 왔다.
10월
✔ 10월 3일(壬寅) 오늘은 (맏아들) 회(薈)의 생일이다. 그래서 술과 음식을 갖춰 주도록 예방(禮房)에 당부했다.
乃 生日, 故酒食備給事, 言及禮房.
• 3일(壬寅) 맑음. 해평군 윤근수의 공문을 구례 선비가 가져 왔는데, 김덕령이 김윤선들과 함께 죄 없는 사람을 때려죽이고 바다 진영으로 도망해 들어갔다고 한다. 이에 이들을 찾았더니 9월 10일경에 보리씨를 바꾸려고 진에 왔다가 이내 돌아갔다고 한다.
• 5일(甲辰) 이른 아침에 수루에 올라가서 역사하는 것을 감독했다. 수루 위 바깥 서까래에 흙을 발랐다. 항복한 왜인들을 시켜 흙을 운반하게 했다.
• 13일(壬子) 맑음. 일찍 새로 세운 수루에 올라가서, 항복한 왜인들을 시켜 대청에 흙 올려 이는 일을 필역하게 했다. 송홍득이 군관을 따라서 갔다.
• 17일(丙辰) 맑음. 아침에 가리포와 금갑도가 와서 함께 아침을 먹었다. 진주 한응귀, 유기룡들이 계원미 20석을 가져와 바쳤다. 부안 김성업과 미조항 첨사 성윤문이 와서 만났다. 정항은 돌아갔다.
✔ 10월 21일(庚申) 정사립(鄭思立·이순신의 비장)을 통해 들으니 “경상수백(慶尙水伯=권준)이 모함하는 말을 거짓으로 꾸미는데 내키는 대로 문서를 작성하고, 문서로 적게 되면 오로지 알려지지 않게 했다”고 했다. 매우 놀랍다. 권 수사의 사람됨이 어찌하여 그처럼 거짓되고 망령된 것인가?
因思立, 聞“慶水伯飾誣陷辭. 倚指成文之, 而文之則專不聞”之云. 可駭可駭! 權水之爲人, 何如是誣妄耶?
• 21일(庚申) 맑음. 이 설이 말미를 청하는 것을 주지 않았다. 늦게 우후, 이정충, 금갑 만호가 안책, 이진 총관들이 보러왔다. 바람이 몹시 싸늘하다. 누워 있어도 잠이 오지 않으므로 공대원을 불러서 왜적의 정형을 물었다.
• 26일(乙丑) 맑음. 들으니 임달영이 왔다고 한다. 불러서 제주 가는 일을 물었다. 송홍득, 송희립 등은 사냥을 갔다.
✔ 10월 28일(丁酉) 초경(밤 8시쯤)에 거센 바람과 폭풍우가 크게 일었다. 이경(10시쯤)에 우레가 치고 비가 와서 여름철과 같으니 변괴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初更狂風驟雨大作, 二更雷雨有同夏日, 變怪至此.
11월
✔ 11월 1일(己巳) 조정에서 보낸 편지와 원흉(元兇·경상우수사 원균을 매우 낮춰 표현한 것)이 보낸 답장이 지극히 흉악하고 거짓되어 입으로는 말할 수 없었다. 기만하는 말들이 무엇으로도 형상하기 어려우니 하늘과 땅 사이에는 이 원균(元均)처럼 흉패하고 망령된 이가 없을 것이다.
朝報及元兇緘答則極爲兇譎, 口不可道. 欺罔之辭, 有難形狀. 天地間無有如此元之兇妄.
(이순신·원균 두 사람의 관계가 좋지 않았음 기존 ‘난중일기’에서도 드러나지만, 이처럼 커다란 혐오감을 보인 대목은 없었다.)
• 3일(辛未) 맑음. 황 득중이 들어와서 말하기를, 왜선 2척이 청등을 거쳐 흉도에 이르러 해북도에 가까이 와서 불을 지르고, 춘원포 등지로 돌아갔다고 한다.
✔ 11월 4일(壬申) 우리나라의 병사들이 쇠잔하고 피폐한데 이를 어찌하랴.
我國兵殘力疲, 奈如之何?
• 11일(己卯) 맑음. 새벽에 임금의 탄신 축하례를 행했다. 본영의 탐선이 들어왔다. 변주부, 이수원, 이원룡 등이 왔다. 그 편에 어머님께서 편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반갑다. 저녁에 이의득이 왔다.
• 13일(辛巳) 맑음. 도양장에서 추수한 벼와 콩이 8백 20석이었다.
• 15일(癸未) 맑음. 아버님 제삿날이어서 공무를 보지 않았다. 홀로 앉아 아버님을 그려 보노라니 그 정회를 이길 수가 없다.
• 16일(甲申) 항복한 왜병 여문연기와 야시로 등이 와서 고하기를, "지금 왜병들이 도망하려 한다."고 한다. 이에 우후를 시켜 잡아다가 그 주모자 준시 등 두 명의 왜인을 목베었다. 경상 수사와 우후, 웅천, 방답, 남도, 어란, 녹도는 내어 보냈다.
• 18일(丙戌) 맑음. 어응린이 와서 전하기를, "행장이 그 부하들을 거느리고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한다. 이에 경상 수사에게 명령하여 수륙으로 정탐하게 했다. 늦게 한 응문이 화서 군량을 계속해 준비할 일에 대하여 아뢰었다. 얼마 후에 경상 수사와 웅천 등이 와서 의논하고 갔다.
• 24일(壬辰) 맑음. 순라선이 나갔다가 밤 10시에 진으로 돌아왔다. 변이성이 곡포 권관이 되어 왔다.
• 26일(甲午) 흐리다가 갰다. 식후에 나가서 공무를 보았다. 관양군 훈도가 복병하고 있다가 도망간 자들을 잡아다가 처벌했다. 항복한 왜인 8명과 그들을 인솔해 오는 김탁 등 2명이 같이 왔기에 술을 주었다. 또 김탁 등에게는 각각 무명 1필씩을 주어 보냈다.
• 28일(丙申) 맑음. 예종 제삿날이어서 공무를 보지 않았다. 유척, 임영 등이 돌아왔다. 조카들과 이야기하다가 밤이 깊어서 잤다.
• 30일(戊戌) 맑음. 남해에서 항복한 왜인 야여문, 신지로 등이 왔다. 경상 수사가 보러 왔다.
12월
• 4일(壬寅) 맑음. 순천 2선과 낙안의 1선 군사를 점검하고 내보냈으나 바람이 순조롭지 못해서 떠나지 못했다. 조카 분과 해가 본영으로 갔다. 황득중, 오수 등이 청어 7천여 두름을 싣고 왔으므로 계산하여 김희방의 곡식 사러 다니는 배로 넘겼다.
• 8일(丙午) 맑음. 우우후 이 정충과 남도포 만호 강응표가 와서 인사했다. 체찰사의 전령이 왔는데 근일 소비포에서 만나자고 한다.
• 13일(辛亥) 맑음. 왜옷 50벌과 연폭... 초저녁에 종 석세가 와서 말하기를, 왜선 3척과 소선 1척이 등산 바깥 바다로부터 합포에 이르러 정박해 있다고 한다. 아마 사냥하는 왜선일 것이다. 곧 경상 수사, 방답 첨사, 우우후 등에게 기별하여 정탐하게 했다.
• 17일(을묘) 비. 삼천포 앞에 이르니 체찰사 이원익은 사천에 갔다고 한다.
• 18일(丙辰) 맑음. 아침에 삼천포로 나갔다. 정오에 체찰사가 보에 들어와 조용히 의논했다. 초저녁에 체찰사가 또 의논하자고 청하므로 같이 이야기하다가 새벽에야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