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조 16년(1792) 윤 4월,사도세자의 복권과 임오 화변(1762) 의리의 천명을 요구하는 '嶺南萬人疎' 가
올라왔다.사도세자의 30주기를 겨냥해 영남의 양반사대부 유림들의 1만 57명이 연명한 상소였다.이 상소
는 노론들을 향한 남인들이 벌린 회심의 일격이자 '一派萬丈' 의 효과를 노린 정치극 이었다.조정은 술렁
거렸다.사실 어떠한 조선이든 퇴계 이황을 개조로 삼는 유교의 嶺南學派,이승훈으로 부터 시작하는 외세
의존성의 천주교도들,동인에서 갈라져 倭와 타협하자면서 항전하자는 남명 조식의 북인과 성격을 달리
한 이순신의 南人들,그리고 정조 16년 이후 6차에 걸쳐 상소를 올린 영남만인소의 영남인들 그 주인공들
은 한묶음의 같은 동네 사람들이다.이들은 모두 역사의 영남이 고향으로 출생지,활동지,죽어 묻힌 墓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실 이들의 묘가 지금껏 있다는 것(후에 만들어진 가묘일지라도) 그 자체가 그들은 당시에 기득권 층이
자 양반사대부 였다는 의미다.천주교인 이었기에 묘가 있는 것이 아니다.물론 이들이 말하는 영남은 일제
때 만들어진 반도의 경상도 영남이 아니다.이들은 서인및 노론의 벽파들과 기호학파나 황해도와 강원을
비롯한 他지역의 유생들과 달리 중앙정부에 불만을 품은 진보적 신지식인 들이 많았다.
2, 이들이 중요하지도 않은 이슈로 상소를 많이 올리게 된 연유는 숙종 20년(1694) 갑술환국(장희빈 퇴출)
이후 영남인이자 남인들이 중앙정계에서 거의 배제되고,더하여 영조 4년(1728)에는 영조의 즉위를 반대하
는 '이인좌의 戊申亂' 이후 영남지방은 반역의 고장으로 낙인 찍혀 있었다.바로 이때 영남에 '平嶺南碑' 가
세웠졌다는 것에서 당시의 영남의 정치적 환경을 잘 알수가 있다.영남에 대한 조정의 감시는 아주 삼엄했
고,영남인들의 동태는 지방관을 통해 일일이 조정에 보고 되었다.이러자 영남사대부들과 유림들은 한성
나들이 조차 쉽지 않았다.그러나 그 반역의 고장 영남도 반도의 경상도가 아니라 대륙의 영남인 들이다.따
라서 역사에서 말하는 '영남,남인,영남학파,영남만인소,남인 천주교도' 등과 함께 거론되는 수많은 역사인
물과 사건들은 장강 유역의 '남경과 楊州,남령산맥과 武夷산맥 이남의 영남' 에서 찾아야 만 만날수 있다.
3, 이러한 남인들은 1792년 상소에 이어 순조 23년(1823)에 '서얼 차별 철폐' 상소,철종 4년(1853)에 장헌
세자(사도세자) 추존 상소,고종 8년(1871) 서원철폐 반대 상소,고종 12년(1875) 남인들을 중용한 대원군의
봉환 상소,고종 18년(1881) 황준헌의 조선책략에 대한 斥邪 상소를 했다고 역사는 전한다.그러나 이러한
것들의 모두는 권력투쟁과 관련이 있는 정치적 게임에 불과한 사안들로 사소한 일이다.당시 사회의 주축
세력들은 유학의 유림 들이다.아무튼 1792년 올라온 상소를 본 정조는 진정한 효도는 先父(사도세자)의
복권이 아니라,착실하게 왕권 강화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정조는 권력구조를 개선해 각파
재상들의 권력을 강화하고 '文體反正' 을 통해 군주를 중심의 학풍을 진작 시켰다.이어 규장각과 장용영를
통한 친위세력의 양성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지방산림(유림) 들의 포섭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모두가 왕권
강화를 위한 구체적 노력이었다.정조 12년(1788) 3당(노론<김치인>,소론<이성원>,남인<채제공>)에 나누
는 3당파 3정승 체제에서 알수 있듯이 탕평을 통한 견제로 왕권은 강화될수 있었다.
그러나 정조가 남인들을 싸고 돌고 천주교도 들의 진산사건(1791)을 사소하게 다루자,1792년 4월 노론 벽
파인 柳星漢이 정조를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상소의 골자는 정조가 토론과 공부의 經筵보다
女樂을 너무 즐긴다는 내용이었다.정치적 환국을 노렸던 유성한의 상소는 정조의 감정을 극도로 자극하기
는 했으나,결국 정조와 남인들의 강경 대응으로 유성한이 항복을 받아낸후 조용해 졌다.
4, 이쯤의 노론 벽파들의 거만함은 극에 달했으며 영남의 남인들도 좌시하지 않았다.이는 남인들의 위축을
만회하고 노론들의 거만함을 규탄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이것의 결과가 바로 영남 유림 1만 57명이 연
명으로 올린 영남만인소인 것이다.일반 유생들의 儒疎(상소)가 국왕에게 전달되기 위해서는 '謹悉(근실)' 이
라는 좁은 문을 통과해야 했다.따라서 지방유생들의 상소문은 승정원에 봉입하기 이전에 성균관 掌議(총무,
사무장)의 동의를 얻어야 했는데,이를 근실이라 한다.그러나 당시 성균관 장의는 모두가 노론들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인들의 상소가 근실을 통과 하기란 하늘의 별따기 였다.승정원은 '근실' 이 없다는 이유로
남인의 유생상소문 접수를 거절했다.근실의 문을 통과할수 있는 유일의 길은 관료를 통한 상소 뿐 이었다.
따라서 수찬(정6품)을 지낸 金翰東이 단독으로 상소를 올렸다.그제서야 영남만인의 상소를 알게된 정조가
상소문의 접수를 명했다.
상소의 내용은 노론들이 '국가의 근본을 흔들려는 계책을 꾸몄다' 는 것이다.정조는 즉각 처단의 조처를 내릴
려 했으나 노론 벽파들의 반발을 우려하고,또 왕권강화에 나뿐 영향력이 미칠 것 같아 신중하게 처신했다.단
사도세자의 복권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그러나 영조이자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야 만 했
던 정조의 입장에서는 노론의 벽파들이 관련되어 있는 일이라 이것도 서두르지 않았다.반면에 남인들과 영남
유생들은 정조의 신중론에 동의할수 없었다.
5, 이때의 영남만인소는 사도세자의 복권에는 실패했지만,임오의리 본질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
가 있었다.노론의 시파였던 '이병모,서유린' 등이 동조를 표명하는 가운데 이조참판 김희는 상소문의 疎頭 이우
를 참봉에 천거하기도 했다.또한 노론의 시파 우의정 박종악은 임오역적 토벌을 주장하며 노론벽파의 거두
김종수를 비난하기에 이르렀다.이건은 정조가 김종수를 비호하여 극단적인 상황을 막을수 있었지만,이를 계기
로 노론의 청명당9(홍국영 지지파)이 서서히 분열해 보수의 벽파들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이점에서 영남인
유생들에 의한 만인소는 노론의 시파와 벽파의 대립을 부추긴 시발점이 되었다.이처럼 퇴계 이황에서 시작해
김성일과 류성룡으로 이어진 유교의 영남학파 남인들,벼슬길이 막혀 서양의 천주교를 일찍 받아들여 외세의
힘으로 중앙정부를 전복시키려 했던 영남의 남인들,바로 이들의 후학들이 뭉쳐서 사도세자를 복원시켜 달라고
했다.이런 영남만인상소의 주인공들은 모두가 조선사의 남인들이자 대륙의 嶺南사람 들이다.
그러나 그 영남은 역사의 경상도로 직결되지는 않는다.반도로 넘어와 억지로 죽령과 조령 이남이 영남이자 경
상도가 된 것은,현실의 전라도가 湖가 없이 호남이된 것 만큼이나 엉성한 이식이다.嶺南이란 지명의 탄생은 동
서를 가로 지르는 산맥의 남쪽을 말하는 것이지 넘나드는 '峴' 의 몇개 정도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반도의 현 경
상도가 영남으로 불리게 된 역사는 대략 100년 남짓된다.
6, 정조 22년(1798),정조의 20년 통치기간은 군주의 권위를 새롭게 다지면서 군주를 정점으로 한 국론 통일에
매진했던 세월이었다.그결과 척신세력들을 제거하고 규장각과 초계문신제등을 통해 강력한 왕의 친위 세력을
형성하는가 하면,권력구조를 개편해 대신들의 권위와 비중을 강화 시켰다.이와 동시에 자신의 지지기반을 전
국적으로 확대하기 위해 지방 사림들 포섭에도 줄기찬 관심을 보였다.그는 禮安(반도 안동의 예안面이 아닌,대
륙 남방의 안전한 곳의 뜻)의 도산서원,광주(남방)의 光山館에서 특별과거를 실시하고 '영남인물고,湖南節義錄'
등을 간행 한것도 지방 사림들을 포섭하는 맥락에서 였다.정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양동작전을 추진해 치세 후
기에 소기의 성과를 어느정도 달성하고 있었다.이것이 바로 정조의 '君主道統論' 이다.인조이래 '山林도통론' 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행위 였으며 산림들의 위상은 현저하게 저하 되었다.영조이후 탕평책이 추진되면서 산림들
의 정치적,학문적 입지는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더 이상 산림은 정국의 주도자도 세도의 주재자도 아니였다.
7, 장용영이 정조의 武班 친위대 였다면,奎章閣은 文班 친위대로 정조의 優文정치와 왕권강화를 위한 전위기관
이었다.이곳에 역대의 전적을 모아 놓고 이를 바탕으로 각종정책을 수립하기 위한 인재양성과 정보를 생성했다.
이는 마치 淸의 건융제가 '四庫全書' 를 편찬하는 등 문치 乾隆 문화의 만개현상을 조선화 재현과 모방인 듯하다.
규장각 설치는 그 목적이 세종대의 집현전 설치 목적과 일맥 상통하는 바가 있다.이처럼 정조의 규장각 설치는
문화적 포부와 정치적 의도가 혼합된 기관이자 정치기구였다.규장각은 정조 개혁정치의 본산이라고 말해도 된
다.규장각에는 '제학(종2품) 2명,부제학(정3품) 2명,直講(정 5품)1명,대교 1명등 4개 직위에 정원은 6명을 두었다.
이들 6명이 바로 규장각의 '閣臣' 이었다.그외에 적자와 서얼에 관계없이 우수한 학자들을 검서관으로 선발했다.
'李德懋(이덕무),柳得恭,朴齊家,徐理修' 등이 이때 발탁된 규장각 최초의 검서관들이다.閣臣들은 학덕을 겸비한
일등 문신들로 정조의 신임이 아주 두터웠다.즉 각신으로의 임명 자체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다.각신에겐
많은 특권이 부여되었다.우선 왕을 朝夕으로 대면할수 있었고,각종 초대및 경연에도 참가할수 있었다고 역사는
기록한다.
8, 규장각의 각신이 되면 百官(모든 벼슬아치)의 죄를 청할수는 있어도 사헌부에서 왕의 허락없이 각신의 죄를
청할수는 없었다.형사상의 특혜도 주어 공무중에는 체포,구금되지도 않았다.閣臣들은 왕의 家人과 같은 우대를
받았다.이에 규장각은 홍문관,승정원 보다 왕과 더 밀착되어 있었고,언론 소통에 있어서도 사헌부와 사간원을
능가했다.각신들에 대한 파격적인 대우는 조정관료 사회에서 충격으로 받아들여 졌다.당시 관료 李澤徵의 불만
을 정조실록(권 33,6년 5월 임술)이 기록하기를,'奎章閣은 전하의 私閣이며,閣臣은 전하의 私臣이다' 로 말할 정
도로 불만이 많았다.정조시대의 각신은 총 38명이 임명 되었다.그중 제학에 임명된 사람은 20명이다.그들 가운
데 '남인의 蔡濟恭과 소론의 이원복,이성원,서명응' 등을 제외하면 모두가 노론들 이었다.노론의 절대적 우세속
에 규장각이 운영되었고 이를 다시 시파와 벽파로 분류하면,시파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따라서 이택징의
불만은 곧 시파 중심적 각신 임용에 대한 벽파의 항변이었던 것이다.따라서 규장각도 노론과 노론의 시파 중심
으로 운영 되었다.근본적으로 정조의 규장각 설치와 운영은 이를 통해 '척신의 타도,군신 명분의 강화,개혁의 추
진,탕평의 실현' 등을 위해 설치했다.이는 실제로 정조의 왕권강화로 이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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