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땅 경주에서 초심을 찾다
글 - 창원4 방면 이ㅇㅇ(대진대학교 사학과 4학년)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에 입도를 한지 어느덧 18년이 되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마냥 좋아서 따라다녔던 어린 시절,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였지만 임원분들께서 들려주시는 교화는 무척이나 재미있었고, 도장에 참배를 가는 것은 행복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조금씩 머리가 커지면서 들려오는 주변인의 비난을 들으며, 내 종교에 대한 애정은 어느 순간부터 감춰야만 하는 치부로 바뀌게 되었다.
그럴수록 내 종교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욕구는 커져만 갔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런저런 핑계, 혹은 유혹들로 인해 그 마음은 식어만 갔다. 하늘의 도움일까? 어느 날 지인의 연락으로 대진연합회라는 대학생 모임에 운영진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나는 이제 과거와는 다르게 책임감이라는 든든한 동반자와 함께 나의 호기심을 풀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대진연합회 운영진이 친목 및 답사를 목적으로 떠난 L.T장소는 문화유산의 도시 경주였다. ‘동방에서도 아침 햇살이 가장 먼저 와서 닿는 땅’이라 불리는 경주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손(天孫) 박혁거세(朴赫居世)부터 경순왕(敬順王)에 이르기까지 992년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신라(新羅)의 땅이었다. 또한 경주는 그 지역적 특수성 때문에 신라의 도읍지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덕분에 많은 유물과 유산이 남겨지게 된 경주지역은 그 전체가 노천박물관이라 불릴 정도로 수많은 문화유산이 산재해 있는 곳이다.
우리가 처음으로 발을 디딘 장소는 첨성대였다. 첨성대는 총 27단으로 되어 있는데, 신라 제27대 왕이 선덕여왕(善德女王)인 것으로 미뤄보아 선덕여왕 당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맨 위에 놓인 정(井)자 모양의 돌을 합치면 28단, 즉 기본 별자리수인 28수를 상징한다. 그리고 첨성대를 받치고 있는 맨 밑의 기단석을 합치면 29, 이것은 음력의 한 달에 해당한다. 몸체 중앙에 있는 네모난 창을 기준으로 창 위로 12단, 아래로 12단인데 이것은 일 년 열두 달을 상징하고, 이 둘을 합치면 24절기를 상징한다. 또한 첨성대를 이루는 돌은 365개 내외로 일 년의 날 수가 된다. 이러한 의미들로 인해 첨성대는 별자리를 관측하던 곳이 아닌, 하나의 상징적인 구조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01
첫 장소부터 선조들의 지혜에 취해, 주변 경관에 취해 거닐다 보니 어느덧 반월성(半月城)에 서 있었다. ‘성 모양이 반달 같다’하여 붙여진 반월성은 신라왕이 거주한 성 중 가장 오래된 곳이다. 이 반월성을 걷다보면 석빙고(石氷庫) 하나가 나오는데, 이 석빙고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석빙고보다 그 규모나 기법이 뛰어난 걸작으로 꼽힌다고 한다. 보존차원에서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과연 석빙고라는 이름에 걸맞게 입구에 서자마자 서늘한 바람이 불어 송골송골 맺혔던 땀방울을 씻어 내기에 충분하였다.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함께 사진도 찍으며 안압지(雁鴨池)에 도착하였다. 안압지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문무왕(文武王) 14년(674) 2월에 “궁내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고,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안압지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현재의 모습은 1975년부터 2년간에 걸쳐 실시된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복원한 것이다.안압지는 이미 사학과 답사를 통해 2004년에 다녀갔던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대규모의 인원이 시간에 쫓겨 설명만 듣고, 사진을 찍으며 뒤로 했던 곳이었는데, 소수의 인원으로 조용히 감상하며 돌다 보니 참으로 낭만적인 곳임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복원한 것이라 천년의 숨결을 느낄 수 없었지만 당시 신라인들의 섬세함과 조화미를 엿볼 수 있었다.
다음 목적지는 황룡사지(皇龍寺址)였다. 황룡사지에 다다르자마자 광대한 절터가 눈앞에 펼쳐졌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황룡사는 왕명으로 진흥왕 14년(553)에 창건하기 시작하여 566년에 주요 전당들이 완성되었고, 금당(金堂)은 진평왕 6년(584)에, 신라 삼보(三寶) 중 하나인 9층 목탑은 선덕여왕 12년(643)에 완공되었다고 전해진다. 국가적인 사찰이었던 황룡사는 역대 국왕의 거동이 잦았고, 신라 국찰 중 제일의 자리를 끝까지 지켰다. 신라 멸망 후에도 황룡사는 고려 왕조에 이어져 깊은 숭상과 보호를 받았으며, 목탑 보수를 위해 목재까지 제공받았다. 하지만 알려진 것처럼 고종 25년(1238) 몽골군의 침입으로 탑은 물론 모든 건물이 불타 버렸다. 황룡사의 9층 목탑은 각층마다 신라 변방의 나라를 가리키고 있다. 지금은 비록 그 터만 남았지만, 그 웅장함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잠시 동안 당시의 그 모습을 상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후 선덕여왕과 그의 아버지 진평왕, 그리고 원효의 아들 설총묘를 답사하고, 첫째 날 연합회의 일정을 종료했다. 저녁에는 다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고 재미있는 레크리에이션으로 서로의 친목을 다졌다.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라 친해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았지만, 모두 함께 마음을 여는 시간을 가지면서 그러한 생각은 모두 사라졌다. 조금 더 함께 하고 싶은 밤이었지만 다음날 일정에 차질이 있을까 염려되어 아쉬움을 뒤로 하고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주먹밥 도시락을 가지고 우리가 당도한 곳은 불국사였다. 불국사는 천년 세월 너머 현대의 중생들에게 불국토(佛國土)의 장엄함과 그곳을 사모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사찰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 따르면 경덕왕 10년에 김대성이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김대성이 이 공사를 착공은 하였으나 완공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국가가 공사를 마무리하여 완성을 시켰다고 한다. 당시의 건물들은 대웅전 25칸,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 백운교, 극락전 12칸, 무설전 32칸, 비로전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약 2,000칸)이 있었던 장대한 가람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불국사의 명물은 단연 다보탑과 석가탑이다. 다보탑은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석탑양식과는 다른 특수한 형태를 띠고, 석가탑은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띄고 있다. 이렇게 서로 형태가 완전히 다른 두 탑이 같은 위치에 서 있는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 『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불국사를 여러 차례 방문했었지만 다보탑과 석가탑은 항상 신비함을 갖게 하는 탑이다. 제각기 다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나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나오게 된다.
불국사를 빠져나와 석굴암으로 가기 위해 우리는 짧은 거리를 등산했다. 6년 만에 찾은 이곳 석굴암에서 잠시 동안 대학 새내기였을 때 보았던 일출의 장면을 회상하며 추억에 잠겼다.
토함산 중턱에 자리 잡은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고,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 있다.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원형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비록 보존을 위해 지금은 만질 수도,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어서 아쉬웠지만 본존불의 인상에서부터 퍼져 나오는 고요한 느낌은 나에게 신비함의 깊이를 더해주었다.
석굴암의 답사를 끝으로 1박 2일의 일정을 끝마쳤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동안 답사하고 나왔던 경주와는 조금 다른 느낌을 받았다. 고등학교 당시의 경주 답사는 그저 역사를 좋아하는 풋내기로 딱딱한 교실을 떠나 과거의 의미 있는 것들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설렘이 컸었고, 대학교 1학년 때의 답사는 사학과라는 이름표를 가지고 떠난 첫 답사여서 그런지 고등학교 때와는 다르게 각 명칭들과 유래들을 많이 익히기 위해 노력했었다. 하지만 연합회에서의 답사는 같이 간 사람의 차이 때문이었을까? 그동안의 방문 때와는 다르게 종교와 관련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천년의 세월동안 신라를 지탱하게끔 해준 불교. 하지만 그 불교가 신라에 뿌리내리기까지는 엄청난 고난이 함께 했었다. 그리고 그 시기를 생각하며, 상제님께서 이 땅에 강세하시어 천지공사를 보신 뒤 지금까지의 대순진리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나는 대순사상에 대해서는 무지하지만,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 때문에 많은 누명과 질타를 받아왔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의 대순진리회가 ‘신라의 불교정착기’처럼 과도기를 걷고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교화를 통해 올바른 생각을 가르쳐주시는 선각들, 그리고 젊은 수도인들이 있기에….
이런 말들을 하고 나니 참 쑥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모두 다 아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리고 다시 다짐해 본다. 초심(初心)으로 돌아가자고…. 물론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일들이 많아 어렸을 때처럼 못하겠지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배워 나간다면 언젠가는 다다르지 않을까 생각한다.
01 중앙에 난 창문(혹은 통로)으로 사람이 다니기 불편하다는 점, 별자리를 관측하기에는 산지에 비해 지형상 불리하다는 이유로 첨성대는 천문대가 아니라 천문이나 수학의 원리를 반영한 상징적인 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출처 -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대순회보 10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