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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대웅전 금강계단의 주련 해석
통도사는 한국 제일의 사찰로서 보물이 가장 많은 절이다. 그 보물들 중 하나가 통도사 건물 곳곳에 붙어 있는 국보급의 글씨와 벽화들이다. 필자는 수십년 동안 통도사 대웅전 금강계단의 주련의 내용을 깔끔하게 해독하지 못 해서 볼 때마다 마음이 깝깝했다. 오늘 이 글씨가 완전히 해독되어, 그 내용을 여기에 올린다.
통도사 금강계단 주련 내용의 요지 : 석가부처님의 무아법(無我法)은 아직 매우 깊은 도(道)인 자성자리를 깨닫지 못 하고 설한 법문이다.
통도사 금강계단의 이 주련 내용은 당나라 동안상찰(同安常察, ?~931) 선사가 지은 <십현담(十玄談)> 중 다섯 번째 연교(演敎)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주련 글씨는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 1933)이 쓴 것이다.
初說有空人盡執(초설유공인진집)
처음에는 <유有>라고 했다가 그 뒤에 <공空>이라고 말하니, 사람들이 다 그것에 집착했다.
= 처음에는 <내가 있다>고 말했다가 그 뒤 <“무아(無我)”, 즉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말하니, 사람들이 모두 이 무아(無我)법에 집착했다.
後非空有衆皆捐(후비공유중개연) * 捐(연) : 버릴 연
그래서 그 뒤에는 <공(空)도 아니고, 유(有)도 아니다>고 말하니, 사람들이 그 두 개를 다 버렸다.
= 그래서 <무아(無我)도 아니고, 유아(有我)도 아니다>고 말하니, 사람들이 그 두 개를 다 버렸다.
龍宮滿藏醫方義(용궁만장의방의)
용궁을 가득 채운 대장경은 중생들의 집착하는 병을 고쳐주기 위한 의사의 처방전일 뿐이로다.
= 대장경은 절대적인 진리를 말해 놓은 것이 아니라 중생들의 집착하는 병을 고쳐주기 위해 중생들의 병에 맞추어서 방편으로 설해놓은 것일 뿐이로다.
= 부처님의 무아법은 중생들의 “나”에 대해 집착하는 병을 고쳐주기 위해 임시 방편으로 말해놓은 거짓말이다.
* (필자 해설) 이 주련의 내용이야 말로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럼 당나라 동안상찰 선사는 왜 이러한 거짓말을 했을까? 그는 "유아(有我)불교", 즉 자성자리를 찾는 중국 선(禪)불교의 교의를 확립하기 위해 이러한 거짓말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중국 선불교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목표로 한다. "견성성불"은 '자성자리를 보아서 부처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석가부처님은 무아법을 설하여, <자성자리와 같은 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무아법과 자성자리는 상충되는 개념이다. 왜냐하면 <무아, 즉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말이 진리라면, 나의 자성자리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부처님의 무아의 진리가 있는 한 중국 선불교의 "자성자리"의 개념은 설 자리가 없다. 왜 그런지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보자. "무아(無我, Anātman안아트만)"의 "아(我)"는 산스크리트어 "아트만"을 번역한 것이고, 이것은 '자성'으로 한역(漢譯)되어 있다. 따라서 "무아(無我)"는 "무자성(無自性)", 즉 '자성이 없다'는 말이다. 자성이 없으면, 자성자리를 찾는 중국 선불교는 설 자리가 없다. <견성(見性)해야 한다>, 즉 <자성자리를 봐야 한다>고 말하는 중국 선불교는 <무아의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는 석가부처님의 불교와 상충된다. 그래서 중국 선사들이 이 주련의 구절과 같은 교묘한 말로 부처님의 무아법(無我法)을 거짓 방편설법으로 전락시켜버리고, <자성자리를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는 중국 선불교를 지켜내고 있는 것이다.
鶴樹終談理未玄(학수종담리미현)
석가부처님이 사라쌍수(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들기 전에 설법한 마지막 법문은 그 이치가 아직은 매우 깊은 것이 못 되었다네.
* (필자 해설) 1."鶴樹(학수)"는 '사라쌍수'를 의미하는 말로서 학(鶴) 처럼 나무[樹수] 색깔이 새하얗게 변해버린 것에서 유래한 말이다. 부처님은 돌아가실 때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들었다. 그 곳에는 좌우에 사라나무가 한 쌍씩 있었다고 한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자 그 중 한 쪽의 나무가 너무 슬퍼한 나머지 색깔이 학처럼 새하얗게 변해버렸다고 한다.
2. "終談(종담)"은 '마지막 설법'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전에 하신 마지막 법문이 <유교경遺敎經>이고, 이것은 부처님의 유언법문이다. <유교경>은 '부처님이 열반하여, 이 세상에 없더라도 계율을 스승으로 삼아서 여기에서 말해주는 방법대로 부지런히 수행하여 무아의 진리를 깨달으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내용이다.
3. 동안상찰 선사가 <십현담>을 지어서 위의 주련의 마지막 구절과 같이 말한 것은 <석가부처님의 깨달음은 자성자리를 깨달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 매우 깊은 도를 깨달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중국 선사들이 부처님의 "무아법(無我法)"을 내리쳐버리고, 자신들이 가장 깊은 진리를 깨달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 선불교는 “뻥”을 잘 치는 불교라고 말할 수 있고, 한국불교는 아직도 이러한 중국의 "뻥”불교에 놀아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필자가 문헌들을 면밀히 확인한 결과, 중국 선불교의 역사는 대부분 조작과 허위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4. 통도사 대웅전의 금강계단에 이런 내용의 주련이 붙게 된 것은 만해 한용운(1879-1944) 스님이 통도사 강사로 있을 때(1918년경) 붙여지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한용운 스님은 <십현담>을 좋아해서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를 저술한 인물이다. 매월당 김시습(1435-1493, 58세亡) 스님도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라는 <십현담>의 해설서를 썼다. 한국의 스님들은 중국 선사들이 말해 놓은 것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모두 다 진리로 받아들여서 그것을 앵무새 처럼 노래했다.
5. 이 주련의 글씨는 해강 김규진(1868~ 1933)이 썼다. 그는 당시 조선 제일의 명필로서 궁전 및 전국 사찰에 많은 글씨를 남겼다. 이 주련의 글씨는 장중하고, 원만하고, 조화로운 글씨로서 해강의 글씨 중 잘 쓴 글씨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주련은 2~3년 전에 다시 칠을 했는데, 그 이후 영 글씨의 맛이 나지 않는다. 가능한 한 개칠은 하지 않는 게 좋고, 꼭 해야 할 경우, 글씨 맛을 120% 살려줄 수 있는 최고의 서각전문가에게 작업을 맡겨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글씨의 맛을 다 버리게 된다. 한국사람들은 새 것만 좋아하고, 고색창연한 맛을 잘 모르는 것 같다. 고찰은고찰(古刹)의 맛이 나야 한다.
끝으로 이 주련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다 “나”가 있다고 보아서 유(有)에 집착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무아설로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니 사람들은 다 공(空), 즉 무아(無我)에 집착했다. 그래서 <공, 즉 무아도 아니고, 유(有), 즉 “나”가 있는 것도 아니다> 고 말해주니, 사람들은 공(空)과 유(有)를 다 버렸다. 대장경은 중생들의 집착하는 병을 고쳐주기 위한 의사의 처방전일 뿐이로다. 석가부처님이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들기 전에 한 무아의 법문은 그 이치가 아직은 매우 깊은 것이 못 되었다네.
중국 선불교에서는 이런 주련의 내용과 같은 거짓말을 해서 부처님의 무아법을 죽이고, 자신들의 유아법, 즉 견성성불(見性成佛)법을 최고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통도사 대웅전은 적멸보궁으로서 석가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법당이다. 대웅전의 주련은 석가부처님의 위대성과 부처님 말씀의 진리성을 찬탄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그러나 통도사 대웅전에는 <석가부처님의 깨달음은 아직 매우 깊은 것이 못 되었다>는 내용의 주련이 붙어 있고, <석가부처님의 무아법은 중생들의 "나"에 대한 집착심을 치료하기 위해 거짓 방편으로 설해놓은 것일 뿐, 그것이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다>고 말하는 내용의 주련이 붙어 있다. 한국불교는 하루 빨리 이러한 중국 선불교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부처님의 깨달음의 완전성이 부정당하고, 부처님 말씀의 진리성이 부정당할 뿐만 아니라 대장경이 다 거짓방편 설법이 되어버린다. 이런 내용의 주련이 붙어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한국의 불교인들이 부처님 말씀에 대해 절대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한국 불교인들 중에는 석가부처님 말씀이 담겨 있는 경전의 권위를 부정하거나 훼손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다. 이것은 다 교묘하게 사실을 왜곡해 놓은 중국 선불교의 가르침 때문이라고 본다. 필자는 선문답이나 화두, 목탁, 다라니, 기도, 제사만으로 한국불교가 바로 설 수 없다고 본다. 필자는 중국 선불교의 가르침을 다 걷어내고, 이 땅에 부처님 말씀을 되살려내어야, 한국불교가 바로 설 수 있다고 본다.
* 이 글은 사문 관정이 써서 다음카페 <위빠사나금정선원>에 올린 글입니다. 주변 분들께 많이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관정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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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내용은 법보신문에 실린 법상 스님의 글입니다. 법상 스님은 김해 한림 정암사에 사시는데, 제가 이 글을 보고, 가서 만나보니, 좋은 스님이었습니다. 아래의 법상 스님 글의 도움을 받아서 위의 글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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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통도사 금강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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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통도사 금강계단
• 글쓴이 : 법상 스님
• 승인 2021.01.19 10:06
• 호수 1570
공 진면목 앞세워 반야사상 드러내 당나라 동안상찰 선사 게송 공·유 집착 막고 공으로 이끌어 부처님은 자성 증득하라 가르쳐
통도사 금강계단 / 글씨 해강 김규진(1864~ 1933)
初說有空人盡執 後非空有衆皆捐 龍宮滿藏醫方義 鶴樹終談理未玄초설유공인진집 후비공유중개연 용궁만장의방의 학수종담이미현
처음에는 공을 설하니 모두 집착하더니 / 뒤엔 공도 공유 아니라 하니 모두 버리네 / 용궁에 가득한 경율론 의사의 처방과 / 학수(鶴樹)에 마지막 설법도 현묘한 이치는 아니로다.
이 주련은 당나라 때 수행했던 동안상찰(同安常察, ?~931) 선사가 지은 열수의 게송인 ‘십현담(十玄談)’에 나오는 두 구절을 인용한 문장이다. 동안상찰 선사의 십현담은 ‘경덕전등록’ 권29, ‘연등회요’ 권30, ‘만(卍)’속장에 실려 있는 열수의 게송이다. 통도사 금강계단 주련은 ‘십현담’ 가운데 다섯 번째인 연교(演敎)에서 인용한 것이다.공(空)은 모든 존재는 불변하는 속성과 독립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독립된 실체는 곧 자아(自我)를 말한다. 불교에서 공은 다양한 조건에 의해 상호 작용하기 때문에 조건에 따라 각기 변하고 스스로 독립해 존재할 수 있는 성품이 없음을 말한다. 존재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자성이 없다는 뜻이기에 무자성(無自性)이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공’을 설하자 또 ‘공’에 집착해 공이라는 본질을 어긋나게 받아들이고 있다. 공에 집착하는 것을 공집(空執)이라 하고 유(有)에 집착하는 것을 유집(有執)이라고 하며 이 두 가지의 집착을 공유이집(空有二執)이라고 한다. 여기서 공집은 모든 것이 궁극에 없다고 하는 집착을 말한다. 이에 반해 모든 것은 절대불변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집착하는 것을 ‘유집’이라고 한다.이렇듯 통도사 금강계단의 주련은 공을 앞세워 반야사상을 드러내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은 공, 유 두 가지 견해를 일으키는데 이는 망상분별로 생기는 그릇된 견해이다. 대승불교가 인도에서 성립할 때 크게 두 파로 갈라져 성립하게 된다. 이들은 모든 존재의 본질을 공 또는 유라고 주장해 논쟁의 시발점이 된다. 이를 공유논쟁(空有論爭)이라 한다.주련의 내용을 잘 보면 ‘공’도 ‘유’도 집착 하지 않게끔 해 결국 공으로 이끌고 있다. 이 논리를 공과 유를 모든 버린다는 뜻의 공유쌍견(空有雙遣)이라 한다. 결론적으로 부처님의 말씀은 방편으로 내세운 가설일 뿐이기에 말하고자 하는 요점을 알아들어야 한다. ‘용궁만장’이라고 하는 것은 용궁에 가득한 불교 경전이라는 뜻이다. 이런 표현은 중국불교 특유의 전개 방식으로 신비감을 더해주는 표현일 것으로 필자는 보고 있다. 그러기에 통도사 주련에서 나타내고 싶은 표현은 ‘비록 수많은 대장경이 있더라도 이는 의원의 약방문’이라는 것이다. 방의(方醫)라는 표현은 의원의 약방문이다. 이는 중생의 병을 고치기 위해 제불의 가르침을 비유하는 표현이다. 학수(鶴樹)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장소를 말한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니 더불어 대자연도 모두 슬퍼해 숲이 하얗게 변했다하여 이를 ‘학림’ 또는 ‘학수’라고 표현한다. 종담(終談)은 마지막 말씀이란 뜻이다. 곧 부처님의 최후설법을 표현한 것이다.부처님의 팔만대장경은 의원의 약방문일 뿐이고 학수의 마지막 설법도 현묘한 이치는 아니라는 것은 무슨 말일까?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일러주고자 하는 궁극적 목표는 무엇일까? 바로 자성(自性)을 깨달으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도리를 부처라고 하며 견성(見性)이라고 한다. 스스로 증득해 깨치지 못한다면 숱한 문자의 바다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현묘한 이치를 깨닫기 위해서는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고로 불교는 신을 추종하는 것이 아닌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가르침을 전해주는 종교인 것이다. 법상 스님 김해 정암사 주지 bbs4657@naver.com
[1570호 / 2021년 1월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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