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사도행전 3 : 1 - 10
제목: 경계선의 사람들
일시: 2018. 7. 1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성전 미문에 걸인이 하나 있었다. 그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그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호의는 매일 아침 그를 구걸하기 좋은 미문이라는 성전입구에 데려다 주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딱 거기까지였다. 사람들이 그를 생각하는 것이라고는 바로 성전 미문까지였다. 그는 성전 문 앞에까지는 갔어도 성전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성전이 자기 삶의 중심이었지만 정작 그 걸인은 성전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는 복음의 경계선 밖에 있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경계선의 사람들을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고 지나칠 뿐이다.
II. 베드로와 요한도 늘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그 걸인을 지나쳐 기도 시간에 성전을 드나 들곤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그날은 그를 “주목”하여 말을 건넨 것이다.
4절을 보라.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 Peter, along with John, fixed his gaze upon him”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를 보라. Look at us”라고 했다. 이때 그 걸인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본다. 그들의 눈이 서로 눈이 마주친 것이다. 평상시
같이 그냥 지나쳐 버리면 그에 대해 알 수 없지만 눈을 마주치고 주목하여 보면 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된다. 주목하여 보면 그전에 모르던 것을 알게 된다. 대충 보면 피상적으로 알게 되지만 응시를 하게 되면 구체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관용적 표현 중에 “알고 보면” 이라는 말이 있다. “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신경을 써서 자세히 알아 보았더니” 라는 말이다. 그렇게 알고 보면 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는 것이다. 주목하여 깊이 들어가 보면 실상이 보인다는 것이다.
예)“알고 보면” 문제없는 사람이 없다. 모든 것을 다 소유하고 남부러울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알고 보면 어려움과 고뇌가 있다는 것이다. 오해를 받아도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은 “알고 보면” 말 못할 사정이 다 있는 것이다.“알고 보면” 마음의 상처가 없는 사람이 없다. 나만 위로받아야 할 것 것 같지만 다들 위로 받을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날 때 “힘드시지요?”라고 말을 하고 들어가면 실수가 없다. 다들 신랑 성격이 좋네 아내가 싹싹하네 등 많은 칭찬을 해도 “알고 보면” 속이 터지는 것도 참기도 하고 뚜껑이 열려도 압력밥솥처럼 내리 누르기도 하다. 그래서 “니가 데리고 살아봐”라는 농담도 있지 않는가! “알고 보면” 쉬운 게 하나 없다. 커튼봉 설치하는 것이 쉽지 않다. 나사가 안 박히기도 한다. 교회 건물이 130년 된 건물이어서 그 세월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커튼을 달기 위해 계속 같은 곳에만 뚫어서 헐렁하다. 드릴, 뒤벨, 나사못, 작은 고무망치, 사다리, 드리아버, 진공청소기,... 등등 커튼 달기 위해 많은 장비와 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잠깐 할 것 같지만 말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문제도 알고 실상도 알고 진실을 알게 되지만 사람들은 알고 보기를 원치 않는다. 왜 그런가? 알게 되면 엮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절히 거리를 두고 피하려고 한다. 그래서 주목하여 보기 전에 슬쩍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눈을 감아버린다. 들리는 것을 못들은 채 귀를 막아버린다. 우리는 함께 엮기는 것을 두려워하여 피한다. 괜히 주목하여 보다가 감동받을까 걱정된다. 도전받고 떨칠 수 없는 마음이 생길까봐 두렵다. 이런 마음이 있다면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임을 기억하라. 사실 작은 고백을 하자면 니콜라이교회를 가게 되는 경우에 늘 그 앞에 있는 걸인을 보게 된다. 그때 교회 문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눈을 잘 마주치지 않았다. 내게 실망할 그 걸인을 생각하면 차마 눈길을 주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그런 경우를 위해서 꼭 1유로 짜리를 몇 개 가지고 다닌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내 귀에 들리는 소리가 있는가? 그것은 “내 것”이다. 만일 듣지 않으려 나의 귀를 막는다면 스스로 귀머거리가 되겠다는 것이다. 보려고 하지 않았는데 내 눈에 띄이는가? 그것 역시 “내 것”이다. 보이는데 내 눈을 감아버린다면 나는 스스로 소경이 되고 있는 것이다. 내가 하려고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내 속에 강한 감동과 음성이 들리는가? “내꺼네” 라고 해야 한다. 액션을 취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앉은뱅이인 것이다. 이후 베드로와 요한이 이 선한 일로 말미암아 공회에 끌려가고 골치 아픈 일이 벌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행4:21)이 되었으니 얼마나 축복된 일인가!
III. 주목하여 보면 인격적인 관계(Personal Relationship)가 이루어진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갈 때 만난 사람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였다. 평소라면 그 관계는 익명의 사도와 익명의 걸인이 만남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주목하여 보던 그 날의 만남은 지극히 개인적인 만남이다. 그 만남은 걸인과 행인의 만남 정도가 아니다. 서로를 알게 되는 인격적인 만남이 되는 것이다. 이날 주목하는 제자들과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걸인 사이에 깊은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한 만남은 스쳐 지나가는 만남이 아니요 보고 지나칠 수 없는 엮여진 만남이요, 피상적인 필요가 아닌 더 깊은 근본적인 필요를 알게 되는 만남인 것이다. 평소에는 그냥 앉은뱅이 걸인으로만 알았지만 더 이야기를 나누면 그 걸인의 인생사도 듣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부모님은 누구이며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태어나면서 앉은뱅이가 되었고 누가 그를 성전미문에 매일 데려다 주고 어디서 뭘 먹고 사는지? 걸인의 애로 사항과 그의 인생의 슬픔과 고통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 걸인으로 보이지 않고 참으로 딱한 운명의 인격체로 보인다.
한국에서 부목사로 일하고 있을 때이다. 사무실에 있다 보면 적선을 요청하며 교회문을 여는 걸인들을 종종 마주해야 한다. 그들의 복장은 옛날 같지 않다. 아주 신사는 아니지만, 거리에 지나다녀도 손색은 없다. 그들은 일주일에 보통 한번씩 주기적으로 온다. 마치 맡겨놓은 것이 있는 사람처럼 수금하러 다니는 것이다. 늘 수요일만 오는 걸인, 목요일, 금요일 등등... 나중에 들어보니 그들에게는 수첩이 있어서 한달을 순회하면 얼마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후에 길이 트이면 소위 “떼거지”로 몰려와서는 다들 밖에 있고 대표자만 와서 교회사무실 유리창을 똑똑 두드리면서 몇 명이요라고 한다. 그래서 귀찮기 때문에 아예 500원짜리 동전을 준비하여서 온 사람 수만큼 그냥 준다. 그때는 나와 걸인의 관계이다. 하지만 크리스마스가 가까운 어느 겨울날, 시간도 있고 해서 따뜻한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태어나면서 걸인이 되고 싶어서도 아닐 것이고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구걸할 수 밖에 없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그 인생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침 들어오게 한 걸인은 목에 화상을 입은 사람이었다. 그는 트럭운전사였는데, 차량의 화재로 몸에 화상을 입었고 지금도 화상의 후휴증으로 고생하고 있다고 한다. 다니던 회사에서는 해고당했고 산재보험도 들어있지 않아 제대로 보상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부양해야 할 가족은 아내와 아이들도 둘이 있고 화상을 입은 몸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구걸로 나섰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 시간 동안 그분을 주목하여 눈을 보고 시간을 내어 함께 말하기 시작하니 그가 걸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의 인생 이야기가 나오니 그는 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훌륭한 가장이라는 인격이지 비굴한 걸인이 아니었다. 이야기를 다 마친 다음 저는 500원을 줄 수 없었다. 실컷 인생이야기를 듣고 나서 몇백원 주는 것으로 끝날 수 없다. 얼마를 드린지 아는가? 그 자리에서 대폭 인상하여 20배에 달하는 10000원을 드렸다. 줄때도 적선하여 불쌍하다고 주는 것 아니라 드린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나갈 때 “선생님 살펴가세요”라고 인사를 했다. 물론 걸인에게 어떻게 가라는 인사를 한 적은 없었지만 걸인이 변하여 선생님이 되신 것이다. 개인적인 관계가 되고 더 깊이 알게 되는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되면 달라지는 것이다. 연말이 되어 그는 넥타이를 10 개정도는 가지고 왔다. 아내는 넥타이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년말에 내게 그러한 선물을 준비했던 것 같다. 그 역시 나와의 관계가 몇푼 주는 기부자로 여기는 것보다 감사의 대상이 되는 권전도사로 본 것이다. 아마 그가 자신의 아내와 이야기 하면서 권전도사라는 사람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했었겠다. 그리고 고마워서 그러한 선물을 했겠지. 걸인은 선물하지 아니하지만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는 감사의 선물도 오고가는 것이다. 그는 내게 아주 많은 걸인 들 중의 한 걸인이 아니었다. A man 이 아닌 The man 이었다. 그 역시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만나는 교회의 많은 전도사 목사 사찰집사 혹은 교회사무원과는 다른 권순태전도사였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A pastor 이 아니 The pastor일 것이다.
우리말에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한다. 그러나 풍월 읊는 개는 본적이 없다. 식당 개 3년이면 라면을 끓인다고 한다. 그러나 라면 끓이는 개는 한 마리도 못봤다. 독일 생활 3년이면 독일어 하겠네? 아니다. 저의 독일 생활이 18년 되었는데 독일어 하는 것이 맘에 들지 않는다. 성전거지 3년이면 설교 하겠네? 그냥 성전에 있다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쳐 버린다면 수백 번 본다 해도 익명의 사람일 뿐이다. 주목하여 볼 때 인격적인 만남이 있고 인격적인 변화가 있다. 주목하고 보라. 주목하지 않았을 때 그는 그저 동전 몇푼 필요한 걸인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를 묵상해 보라. 그러면 그가 앉은뱅이라는 신체적인 장애를 가진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더 깊은 교제의 단계로 들어갈 때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이었다. 이제 어떠한 일이 그 앉은뱅이 걸인에게 일어나는가? 다리에 힘을 얻어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8절) 성전 문 앞에 앉아 복음의 소외자로 구걸하는 앉은뱅이 걸인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복음의 수혜자가 된다. 그는 구걸하기 위해 성전 미문에 앉은 경계인이었지만 이제 예배하기 위한 내부인이 되는 것이다.
IV. 무엇인가 간절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경계선상에 선 사람들이 있다. 물론 우리 자신의 일에 코가 석자고 마음의 여력이 없다. 뿐 아니라, 베드로와 요한처럼 엮여 보라. 앉은뱅이걸인을 고친 일로 인해 공회가 소집되고 거기서 심한 위협까지 당하게 되기도 한다. 모르는 게 약인데 알게 되어 골치 아프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기억하라. 얼마나 우리는 이기적인 사랑을 외치고 이기적인 신앙생활을 하는가! 주목하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엮이기 위해 오셨고 우리를 주목하시고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만들어 주셨다. 자연스레 내게 들리는 소리가 있는가? 그것은 “내 것”이다. 눈을 떴더니 내 눈에 띄이는가? 그거 “내 것”이다. 들릴 때 귀 막지 말고 보일 때 고개를 돌려 외면하지 말라. 주목하고 귀를 기울이라. 알면 다친다고 모른 채 하지 말라.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보라. 주목하고 더 깊이 알게 됨으로 성전 안에 있는 성도들을 세우라. 경계선 밖에 선 이들을 주목하라. 성전 미문에 있었던 복음의 소외자에게 함께 성전에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역사를 이루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