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의 대부이며 인권변호사들의 맏형이었던 이돈명 변호사(토마스 모어)가 2011년 1월 11일 오후 7시20분 서울 대치동 자택에서 향년 89세로 선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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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돈명 변호사 | 이돈명 변호사는 1922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 48년 조선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1952년 사법고시 3회에 합격한 뒤 판사를 거쳐 1963년부터 변호사로 개업했다. 그는 1974년 유신독재의 대표적인 조작사건인 ‘민청학련’ 사건을 맡으며 인권변호사의 길에 들어선 뒤 줄곧 민주화 인사의 법적 보루이자 동반자로 살아왔다.
그후 인혁당 사건, 김지하 반공법 위반사건, 청계피복 노조사건, 크리스천아카데미 사건, 광주 민주화운동 등 1970년대 이후 주요 시국 사건에서 변호사로 참여했으며, 와이에이치(YH) 사건, 미국 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 그리고 10·26 사건의 김재규 변호 등을 거치면서 자신도 투옥을 당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돈명 변호사는 황인철, 조준희, 홍성우 변호사와 함께 ‘4인방 인권변호사’로 불렸다.
1986년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전신인 ‘정의실현 법조인회(정법회)’를 결성하고,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인권위원장, 민변 고문, 조선대 총장, 한겨레신문 상임이사,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 상지학원 이사장, 천주교 인권위원회 이사장, 법무법인 덕수 대표변호사 등을 역임했다. 또한 한겨레신문의 창간에도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 변호사는 김수환 추기경과 1922년생 동갑내기로 1970년대 민주화운동 현장에서 늘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누며 동반해왔다. 천주교인권위원회 김덕진 사무국장은 "리영희 선생에 이어 시대의 어른들이 돌아가시는 것에 한 시대가 저무는 것 같아 마음이 시리고 아프다"고 말했다. 이돈명 변호사는 평생 대중교통을 이용하셨던 검소한 분으로 알려져 있으며, 시국사건의 변론을 거절하는 법이 없었으며, 항상 그 특유의 환한 미소로 후배 변호사들과 민주화 관련 유가족들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유족으로 아들 영일ㆍ동헌ㆍ사헌 씨와 딸 영심ㆍ영희 씨가 있다. 빈소는 삼성의료원 장례식장 14호실에 마련되었으며, 발인은 15일 토요일 오전 8시에 치르고, 장지는 경기 남양주시 별내면 천주교 성당묘지로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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