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빛고을 英陽學스토리]
"인두화의 뿌리 영양에 있었다"
-정부인 장씨의 작품 인두화, 국내최초 희귀 작품으로 평가돼-
[인두화 모습]
[영양군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에 전시된 정부인 장씨의 4백년전 국내 최초 인두화]
국내 최초 희귀 작품으로 평가되는 인두화의 뿌리가 경북 영양인 것으로 알려져 주목을 받고 있다.
3일 영양군과 지역문화계 관계자에 따르면 영양 석보면 원리리 산 7번지(석보면 두들마을 1길 42)연면적 4,438.57㎡ 규모의 한옥으로 웅장하게 조성된 장계향 문화체험교육원 내 전시실 조그만 공간 한편에는 국내 최초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 400년된 정부인 장씨의 인두화(복사본)한 점이 무심한 세월을 견디며 외로이 전시돼 있다.
인두화란 숯불 화로에 인두를 달구어 그 열을 이용해 작가의 혼을 담아내는 예술로서 인두의 길고 뾰족한 면과 달구어진 인두열의 온도 조절과 손놀림에 따라 음률을 타는 듯한 모습으로 마치 선녀가 춤을 추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게 하는 작품이다.
장계향 문화체험교육원에 전시된 인두화에 대한 기록을 보면 17세기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1864~1953)의 '근역서화징'에 정부인 장씨에 대한 내용으로 장씨 부인은 석계 이시명(1590~1674)의 처 장계향(1598~1681)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을 저술한 인물이며 인두화, 서예 등에 능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현재 장계향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낙화(인두화) 산수도 한 점이 전해지고 있다는 설이 있다.
재령이씨 석계 공파 13대 종부(여, 조귀분)에 의하면 "2000년 초반경 정부인 장씨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인두화의 원본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람으로부터 매도하겠다는 연락이 있었지만 부담하기 어려운 금액을 제시해 거절한 적이 있었다"며 "그 이후에는 한국국학진흥원에서 매입해 소장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라고 말했다.
[최초인두화 고증자료]
이와 관련 영양군문화원 관계자는 "국내 인두화의 뿌리가 영양군이었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면서 "예술적, 역사적 가치가 커, 국·내외 미술학회 등의 다양한 연구와 평가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신아일보] 영양/홍성호 기자 hoh3080@naver.com 저작권자 © 신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여중군 장계향 표준 영정]
국내 최초의 한글 조리서 저자인 장계향(1598∼1680) 선생의 표준영정이 발표됐다.
경북도는 15일 도청에서 경북여성 선양인물 1호인 장계향 선생의 정부 표준영정 지정발표회를 열고서 그림을 공개했다.
발표회에는 후손, 장계향선양회, 여성단체, 성균관유도회 등의 관계자 200여명이 참석했다.
도는 2010년 12월 경주에서 활동하는 박대성 화백에게 장 선생의 표준영정 제작을 의뢰했다.
박 화백의 그림은 지난 3월 7일 국가 영정동상심의위원회에서 국가지정 표준영정 91호로 지정받았다.
장계향 선생은 조선시대 신사임당과 함께 대표적 현모양처로 꼽히는 인물로 당대에 인품이 알려져 '여중군자(女中君子)'란 별칭이 붙을 정도였다.
1598년(선조 31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아버지로부터 학문을 배워 글짓기나 글씨쓰기에 능숙했다고 알려졌다.
19세에 석계 이시명 선생과 혼인해 영양에 살면서 슬하에 10남매를 뒀다.
이 가운데 3남인 갈암 이현일 선생이 이조판서에 올라 당시 숙종 임금으로부터 정부인 품계를 받고 정부인 안동장씨로 불렸다.
장 선생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어지러운 상황에서 도토리죽을 쒀 이웃을 구휼했고 1680년(숙종 6년) 숨질 때까지 한시 12수, 맹호도, 인두화, 한글 최초 조리서인 음식디미방 등을 남겼다.
음식디미방은 현재도 그대로 따라할 수 있을 정도로 146가지 음식의 조리과정이 구체적으로 써 있다.
경북도와 영양군은 보존회를 결성해 음식디미방 음식을 복원해 활용하고 있다.
김관용 경북도지사는 "국가 표준영정 지정을 계기로 장계향 선생의 얼을 재조명하기 위해 추모관 건립, 음식디미방 체험지구 조성, 장계향 체험로드 마련 등에 힘쓰겠다"고 밝혔다.
sds123@yna.co.kr
정부인 안동 장씨(貞夫人 安東 張氏, 1598년 - 1680년)는 조선 중기의 문인, 요리 연구가로, 본명은 장계향(張桂香)이다. 조선시대 중기 이후의 요리 방법을 순한글로 기록한 《음식디미방》을 남겼다.
그녀는 1598년 경상도 안동부에서 성리학자 장흥효의 딸로 태어났다. 흔히 정부인 안동 장씨로 알려졌는데 이는 정부인은 그녀의 작위로 사후 아들 이현일이 정2품에 오르면서 정부인에 추증되었던 것이다.
1616년 참봉 이시명과 결혼하여 슬하에 6남 2녀를 두었다.
퇴계학통을 계승한 학자 이휘일과, 숙종 때의 남인의 이론가의 한사람인 갈암 이현일(李玄逸)이 그의 아들들이다.
1680년 사망하였으며 1690년 아들 현일의 영귀로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그녀의 작품으로 《음식디미방》과 《맹호도》 그리고 시 9편이 전해지고 있다.
《음식디미방》은 그의 집안 며느리와 딸들에게만 전해지던 것으로, 종부를 통해서 계속 전해졌으며, 기타 며느리나 딸들은 원본을 물려받을 수 없고 다만 필사본을 베껴갈 수는 있도록 허락하였다.
조선시대 중기의 다양한 요리 방법이 기록된 《음식디미방》은 1910년에 와서 우연히 대중에 공개되었다
[참고자료 = 위키백과]
[여중군자 장계향 표준 영정]
시와 서예와 그림에 능했고 음식과 자녀교육이 탁월하였고, 구빈 및 구휼 등 나눔에도 큰 공적을 남겼다.
장계향 선생을 흔히 ‘정부인 안동장씨’라고 부른다.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 선생이 숙종 18년에 이조판서를 지내면서 ‘정부인’칭호를 받았다.
장계향 선생은 1598년(선조 31년) 경상북도 안동 금계리에서 경당 장흥효 선생(고려 태조 정필의 후예)과 첨지 권사운의 여식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19살에 재령 이씨 운악 이함 선생의 셋째아들 석계 이시명 선생과 혼인했다.
장흥효 선생은 제자인 이시명 선생이 아내와 사별하자 자신의 딸과 혼인을 시켰다.
장계향 선생은 윗동서 두 명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맏며느리 역할을 맡았다.
병자호란 이후 은둔생활을 시작한 남편을 대신해 집안도 지켰다. 일곱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도 훌륭하게 키웠다.
시도 잘 짓고 서예와 그림에도 능했던 장계향 선생은 사람을 아끼는 마음도 넉넉했다고 한다.
“시아버지인 이함 선생의 문집에 할머니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살림이 넉넉하지도 않았는데 할머니는 대문 밖에 큰 솥을 걸고 꿀밤죽을 쒀 하루에 300명이나 되는 걸인들을 먹였다고 해요. 끼니 때 연기가 안 나는 집에는 사람을 보내 양식도 나누어 주었답니다.”
종손의 기억이 자랑스럽다.
장계향 선생은 25살이 되던 해 친정어머니가 죽자 새어머니를 모셨고, 아버지가 어린 이복동생들을 남기고 죽자 친정과 시댁을 오가며 살림을 보살폈다.
지금 고택이 있는 영양군은 장계향 선생이 시아버지가 죽자 남편과 터를 잡은 곳이다.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 선생인 남긴 책 <정부인 안동장씨실기>에 그에 대한 많은 기록이 있다.
詩 한 수를 소개해 본다.
鶴髮詩 / 張桂香
鶴髮臥病 行者萬里
行者萬里 曷月歸矣
鶴髮抱病 西山日迫
祝手于天 天何漠漠
鶴髮扶病 或起或踣
今尙如斯 絶裾何苦
흰 머리로 병들어 누웠는데
아들은 만리 밖으로 행역 나가네
만리 밖으로 행역 나가면
어느 달에나 돌아오려나
흰 머리로 병들었는데
해는 서산에 가까워졌네.
빨리 오라고 손 모아 하늘에 빌건만
하늘은 말없이 아득하기만 하구나.
흰 머리로 병든 몸 끓어안고
일어났다가 다시 쓰러지네
지금까지도 이러하니
옷자락 끊던 옛날 아들과 어찌 같던가.
*자료정리: 英陽學연구소 竹泉 朴元陽 010-8718-95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