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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센도', 드로 자하비, 2021. (포스터 출처 = 티캐스트)
세계적인 명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은 이스라엘, 아르헨티나, 스페인, 팔레스타인 등 4개의 나라를 국적으로 둔 인물이다. 이렇듯 복잡하게 얽힌 국적에는 사연이 있다. 러시아계 유대인 부모를 둔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고, 2차 대전 후 이스라엘이 건국하자 이스라엘로 이주하였으며, 이탈리아의 음악원에서 수학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탄압을 비판하는 양심적 평화 활동으로 팔레스타인으로부터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그는 이스라엘의 군사적, 정치적 행태에 반대하는 견해를 분명히 하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청소년들을 음악에서라도 화합하게 해 보자는 취지로 팔레스타인 출신의 석학 에드워드 사이드와 공동으로 ‘서동시집 관현악단’을 1999년에 창단했다. 이 서동시집 관현악단의 상주지가 스페인이 되었고, 바렌보임은 스페인으로부터도 시민권을 받았다. 이 팀은 2011년에 임진각 평화누리 공연장에서 공연을 했기에 한국과도 인연이 있다.
출신에서 활동까지 남다른 바렌보임의 이야기는 영화적으로도 매력적인 소재다. 영화 ‘크레센도’는 평화주의자 세계 시민인 음악인의 이런 남다른 행보를 모티프로 만들어졌다. 코로나 상황으로 극장에서는 대작영화 개봉이 연기된 자리에 한국과 외국의 독립영화와 예술영화가 스크린에 걸린다. 자리가 비어서 썰렁한 극장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귀한 영화를 만난다는 기쁨과 감동은 말할 수 없이 컸다.
'크레센도' 스틸이미지. (이미지 출처 = 티캐스트)
‘점점 크게’라는 의미의 제목 크레센도의 진정한 뜻은 엔딩에서 확인된다. 영화는 이스라엘의 십대 소녀와 팔레스타인의 십대 소년이 사랑에 빠졌음을 고백하는 모바일 영상으로 시작한다. 이후 장면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위험한 로맨스에 열렬한 그들이 도주하다 위험에 빠진 듯한 모습으로 이어진다. 플래시백으로 이전 상황으로 돌아가면, 최루탄이 터지고 폭탄 소리가 들리는 환경에서도 바이올린 연주에 집중하는 라일라와 평온하게 연습하는 론의 모습이 극적으로 대비된다. 두 남녀가 속한 곳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바이올린을 든 팔레스타인 젊은이 라일라와 이스라엘 청년 론,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결혼식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하는 팔레스타인 소년 오마르와 오디션에 합격하기 위해 능숙하지는 않은 호른을 연주하는 이스라엘 소녀 쉬라, 이 네 명을 포함하여 젊은 연주자들이 모였다. 세계적인 마에스트로 에두아르트 교수는 평화 콘서트를 위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재능 있는 젊은 연주자들을 뽑기 위한 오디션을 텔아비브에서 실시한다.
'크레센도' 스틸이미지. (이미지 출처 = 티캐스트)
팔레스타인 연주자들은 험난함과 굴욕을 뚫고 검문소를 통과해야 한다. 이스라엘 연주자들은 실력이 한참 떨어지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앞에 놓고 공정성을 외친다. 실력과 숫자, 어떤 것이 공정하고 공평한 것인지 화두를 던지는 가운데 숫자를 동수로 맞춰 단원들을 뽑았지만, 연습과정에서의 반목과 대립은 어쩔 수 없다. 매사에 분노로 가득 차서 조금의 부당함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라일라, 그리고 최고 실력에다 외모까지 훈훈하지만 우월의식으로 무장하여 얄밉게 구는 론이 대비된다. 제1바이올린 자리를 놓고 팽팽하게 대결하는 가운데, 에두아르트는 라일라에게 악장을 맡긴다.
선민사상을 가진 이스라엘 청년들은 악장을 무시하고, 억울한 팔레스타인 청년들은 화를 쏟아낸다. 연습조차 되지 않는 상황에서 알프스 산맥의 절경이 아름다운 남티롤에서 합숙을 하게 되지만, 이들은 서로의 음을 듣지 않고 각자 따로 논다. 에두아르트는 연습이 아니라 심리치료사처럼 나서는 게 우선임을 깨닫는다. 우선 이들이 해야 할 일은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것. 듣기 위해서 먼저 서로를 마주보며 소리치게 하고, 이들은 서로의 얼굴에 대고 자신의 조부모와 부모가, 그리고 자신과 형제자매가 얼마나 고통을 받고 있는지 욕설을 해댄다. 이후 영화의 전개는 억울해서 울고, 슬픔을 토해내고, 서로 욕하고, 그러다 한 덩이로 껴안고 부둥켜 위로하는 지난한 과정을 겪으며 합주단의 소리가 조화를 이루는 과정으로 다가선다.
'크레센도' 스틸이미지. (이미지 출처 = 티캐스트)
독일인 에두아르트는 나치 부역자의 아들이라는 짐을 평생 마주하며 살아야 했던 자신의 삶을 나누고, 청년들은 이들의 합주곡 ‘사계-겨울’처럼 서서히 봄을 향해 나아간다. 10대 소년소녀의 로맨스, 악장을 놓고 겨루는 라일라와 론의 대립과 화해, 모두를 이끌어 가려고 애쓰는 에루아르트의 이야기들이 서로 경합하는 와중에 공연을 앞두고 극적인 사건이 펼쳐진다. 두 나라의 정치적 화합이 결코 부드럽게 전개되지 않는 것처럼 이들의 합주 과정 역시 우여곡절로 점철된다. 바흐의 파르티타,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 캐논, 사계, 볼레로 등 클래식 명작의 선율이 점점 조화롭게 연주되면서 귀가 즐겁고, 알프스 산맥의 절경을 보면서 눈이 맑아진다. 그러나 가슴은 교수와 청년들 하나하나의 사연으로 인해 위안과 안타까움으로 요동친다.
독일과 유대인,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이야기이지만, 우리의 이야기를 대입해 보아도 현실적인 상상이 가능하다. 한국과 일본, 남한과 북한의 현실에서 평화와 공존만이 살 길임을 알고 있기에 영화 속 양국의 젊은 연주자들이 크레센도로 소리를 점점 높여 가며 웅장한 합주를 해내는 모습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눈과 귀, 그리고 가슴을 뛰게 만드는 이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제 맛이다.
정민아(영화평론가, 성결대 연극영화학부 교수)
영화를 통해 인간과 사회를 깊이 이해하며
여러 지구인들과 소통하고 싶어하는 영화 애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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