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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리스도와 함께(갈 2:20)
지난 주에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나라’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잊지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나라는 먼 훗날의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소망하는 성도라면 반드시 오늘 여기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나님 나라는 육신의 욕망을 채워주는 나라가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중심에 모신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해야 바로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의 삶이요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길입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의 통치가 내 중심가운데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순종에 가장 거스리는 것이 바로 우리 속에 내 자아입니다. 내자아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순종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에는 반드시 십자가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신앙생활의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이 십자가의 비밀을 깨닫고 체험하고 증거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가 오늘 신앙생활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다, 곧 나는 죽었다.”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내 안에 오직 예수님께서 사신다.”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만 살아가는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나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것을 세례와 연관 지어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세례는 우리가 단순히 교회나 기독교에 가입하는 절차나 의식이 아닙니다.
세례가 상징하는 의미는 아주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간소하게 세례식을 행하지만 원래는 세례를 받을 때 몸을 완전히 물속에 잠기게 합니다. 물에 잠기는 순간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에서 나오는 순간 우리가 다시 새롭게 살게 됩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신 분이 있는데 바로 김익두 목사님이십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일제 강점기 때 대표적인 부흥사로 초창기에 한국교회를 이끌었던 분입니다.
김익두 목사님을 통해 주기철 목사님, 김재준 목사님, 이성봉 목사님과 같은 훌륭한 목회자들이 회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원래 김익두 목사님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 깡패였습니다. 황해도 안악골 호랑이라고 말할 정도로 잘 알려진 유명한 깡패였습니다. 사람들이 김익두만 보면 슬슬 피해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예수님을 믿고 회개를 했습니다. 회개한 이후에 지난 날의 삶이 너무 부끄러워서 자신의 옛사람이 완전히 죽었다는 사실을 공적으로 알리기 위해서 부고장을 돌렸다고 합니다. 내용은 “김익두는 죽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김익두가 죽었다는 말에 사람들이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죽었다는 김익두가 성경책을 들고 나타나서 거리를 활보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정말로 김익두가 죽었는지 시험해보기 위해서 누군가가 실수한 척하면서 구정물을 뒤집어 씌웠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구정물 세례를 받았지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툴툴 털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옛날의 김익두가 죽었다는 사실을 기뻐하시오. 만일 그가 살았다면 당신은 성하지 못했을 것이요. 하지만 지금의 김익두는 옛날과는 다른 새롭게 태어난 사람이라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확실하게 죽었나요?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 죽었다. 라고 말씀할 때 그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먼저는 율법에 대해서 우리가 죽었다는 말씀입니다.갈 2장 19절에 보면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마구 정죄합니다. 죄인취급을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율법의 노예가 되어서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렇게 율법에 매여서 살던 우리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 아예 사망을 선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더라도 그 사람이 죽으면 기소가 중지됩니다. 그것처럼 죽은 사람은 율법의 유무를 가지고 죄를 논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처럼 더 이상 율법에 매이지 않습니다. 율법에 의한 저주도 받지 않습니다. 갈 3:13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율법의 저주뿐만 아니라 우리를 얽어매고 있던 삶의 모든 저주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죄나 사망이나 양심이나 운명에 매여 살던 우리가 완전히 죽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갈 5: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 죄의 몸과 함께 우리의 정욕과 탐심까지도 다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우리가 그렇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정욕과 탐심이 다 없어졌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과연 우리가 얼마나 변했느냐는 것입니다. 가끔씩 우리 마음속에 찾아오는 생각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설교를 듣고, 또 말씀을 그렇게 많이 읽었는데도 과연 나는 얼마나 변했느냐 하는 생각입니다. 신앙생활은 오랫동안 하고 나이도 제법 먹었지만 나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누가 내 감정을 조금만 건드려도 참지를 못하고 화를 냅니다. 누가 나를 알아주지 않고 대접해주지 않으면 금방 섭섭해합니다. 여전히 인색하고 이기적이고 무례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수술을 받기 위해서 수술실에 들어갔습니다. 마취제를 놓고 조금 있다가 뭔가로 꾹 찌르는데 마취가 완전히 되지 않았던지 ‘아야!’하고 소리를 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의사가 하는 말이 ‘아직 안 죽었네.’하더랍니다. 죽은 사람은 아무런 감각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내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내 욕심이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을 보면 나는 아직도 여전히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우리를 보고 종종 수양이 부족해서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가 나를 위한 십자가이며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증표라는 사실을 확실히 믿는다면, 그래서 그 주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했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나 자신을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시대는 이사야 60장 2절 말씀처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죄악의 어둠이 온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는 시대입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직전 시대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갈수록 믿음을 지키기가 어려운 시대가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상이 어둘수록 빛의 사명이 더 커지고 부패할수록 소금의 사명이 더 절실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의 위대한 선진들은 이런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 빛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으면 오히려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시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증거하는 신앙은 세 가지입니다.
1.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신앙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하는 말씀은 나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바울 자신의 모습을 갈 6:17에 보면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흔적, 십자가를 지시고 손과 발, 그리고 머리와 옆구리에 십자가의 흔적이 있었던 것처럼 바울자신도 가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우리가 교회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는 그것이 예수님의 흔적인데 이것을 헬라어로 ‘스티그마타’라고 합니다. 바울이 자신의 몸에 그런 흔적을 가졌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는 삶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밤 11시에 자전거를 타고 교회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목사님이 이 밤에 무슨 일로 교회에 오셨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집사님이 “저는 하루에 한번씩 교회에 와서 기도하고 갑니다”라고 말하는데 그 집사님의 뒷모습을 보고 너무 감사해서 눈물을 흘렸다고 했습니다.
칼빈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고 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자격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고백하기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라고 말했습니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쫓아가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지는 삶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이것이 예수님과 함께 죽는 삶입니다.
우리 속에 여전히 살아있는 자기중심성, 죄성을 날마다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순간순간 나를 부추기고 나를 이끌어 가려고 하는 나의 죄성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나의 죄의 몸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이고 바보처럼 보여도 외적인 면에 속지 마십시오. 십자가가가 있어야 부활의 신비를 체험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도 오늘 바울처럼 예수님과 함께 복음을 위해서 기꺼이 십자가에서 나를 드려 주님이 기뻐하시는 산제물로 드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시다는 신앙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으면 끝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틀을 깨고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부활의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본문에도“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은 바울은 이제부터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죽고 나니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은 내 안에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 고집, 내 습관, 내 자존심, 내 욕심, 내 철학 내 생각으로 살아 왔는데 내가 죽었으니 나는 간데 없고 내 안에 예수가 주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우리는 신앙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이 그렇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 번째 신앙의 문턱을 넘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아직도 내 고집 내 욕심을 내 중심성을 버리지 아니하고 옛 사람의 내가 십자가상에서 죽지 아니함으로 이제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인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 속히 옛 사람의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 나는 죽고 오직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고 나는 종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사도바울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그때까지 그가 그렇게 자랑하고 자부심이라고 내세웠던 지식과 가문과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자 그의 삶이 송두리체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로마서 11장에 접붙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일반적으로 접목의 방법은 돌배나무에 참 배나무에 가지를 접붙이는 것이 일반 원리입니다. 그러나 감람나무는 참 감람나무에 돌감람나무의 가지를 접붙이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는 돌 감람나무로써 일단 돌감람나무에서 절단되어서 죽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인 참 감람나무에 접을 붙힐 때에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21절에서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죽어야 유익이 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산다는 말보다도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말은 깊은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니 우리는 얼마나 든든합니까? 세상에 겁낼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엡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옛 사람의 구습과 악습을 포기하고 벗어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고 못박혔다는 것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내 모든 것을 십자가앞에 다 내려놓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죽는다는 것은 옛 사람의 혈기를 포기하는 것이며 옛사람의 나쁜 습관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또한 옛사람의 정욕과 욕심을 포기하는 것이며 옛사람의 고집과 자존심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중심성을 내려놓고 하나님 중심성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제 내 뜻대로가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앞에 자기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9절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영, 보혜사 성령이 내안에 거하시니 이제부터 나는 육신의 정욕을 좇아서 사는 사람이 아니요 영에 속한 사람으로 경건하고 거룩함이 이르는 길에 들어 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죽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은 박 아무개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요 박 아무개가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걸어가는 것으로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옛 사람이 죽지 않음으로서 그가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다녔지만 그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고, 육에 속한 사람으로 살았기 때문에 큰 죄를 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따른다면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과 죄와 혈기와 이기심과 정욕과 모든 잘못된 성품이 못박혀 있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죄를 못박지 않고 깨끗하고 화려한 십자가를 좋아합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보통 강대상의 십자가는 장식용으로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진열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십자가없이 주님을 따라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제가 요즘 맥성경공부하면서 가장 확실하게 깨닫은 것은 “하나님 나라 회복”이 우리를 향한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 회복의 결정적인 요소는 한 가지입니다. “순종”입니다여러분 순종이 말을 쉬운데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순종하려면 자기 생각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순종에는 자기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은 내가 죽는데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다시 사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은 사람은 내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셔서 나의 주인이 되시고 나의 생명이 되셔서 나의 삶을 주관하신다는 이 신비한 비밀을 체험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신앙입니다.
본문 하반절을 보시면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믿음이라고 하였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온전히 믿을 때에 바로 우리는 믿음 안에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자신의 자녀들을 훈련시킬 때에 특별한 방법을 사용합니다. 어느 정도 아이가 자라면 어느 깊은 밤에 자신의 어린 아이를 데리고 밀림의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사방이 깜깜합니다.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나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아이에게 칼 한 자루만 주고 어린아이를 밀림의 깊은 곳에 혼자 놔두고 어른만 집으로 돌아와 버립니다.
그 어린아이는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사나운 맹수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그 아이는 두려움에 눈물도 말라 버린체 그곳에서 긴긴 밤을 지내는 것입니다. 옆에서 바스락 소리만 깜짝깜짝 놀라면서 원망과 눈물로 한밤을 지내다 보면 어느덧 새벽이 옵니다. 사방이 서서히 밝아져서 좌우를 구분하게 될 때에 이 어린아이는 깜작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멀지 않은 곳에 시커먼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세히 보니 아버지가 완전 무장을 한채로 밤새도록 자기 자식을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원망했던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함으로 밤세워 자기를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에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뼈저리게 느끼는 것입니다. 비록 자기가 밀림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혹독한 고난의 훈련을 시켰지만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에 감격하여 달려와 눈물을 짓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고난이 있다면 지금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좋은 기회입니다. 산에서 케낸 금광석이 용광로의 연단을 통하여 정금으로 나오듯이 우리에게 닥친 험한 고난도 결국 축복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고난이란 연단을 통하여 우리를 강하고 깨끗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고난중에도 하나님께 남겨 주신 것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보아서 고난을 주신 그 깊으신 사랑을 깨달을 때에 비로서 우리는 참다운 믿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오직 믿음으로 산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함께 고백하십시다.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그리스도의 사랑에 확신이 없는 분이라도 이 말씀을 20번만 읽으면 말씀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내가 죽어지는 만큼 우리 안에서 예수님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살고 예수님이 나를 지배하는 만큼 내가 행복해지고 나에게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십자가의 복음을 깊이 마음에 새기고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신비한 은혜를 체험하며 하나님 나라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안에 온전히 이루어지고 체험하고 증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