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스형 경차는 일본 경차 규격이 탄생시킨 가장 독특한 차다. 제한된 크기 안에서 최대한 공간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네모반듯한 상자 모양으로 깎았다. 유럽이나 미국의 자동차 마니아들은 “박스형 차는 차도 아니다”고 혹평을 한다. “자동차는 실용성을 추구하는 상자가 아니다”는 비판이다. 혼다 N-박스는 박스형 경차의 정석이다. 전통의 강호들을 무너뜨리고 출시 1년 만에 일본 경차 판매 1위에 등극했다. 실용성은 물론 고급스러움까지 챙긴 결과다.
‘슈퍼 하이트(super height)’라고 불리는 박스형 경차의 실용성은 일본 밖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 전장이 3.4m에 불과하지만 실내공간은 중형 세단보다 넓다. 공간 활용도를 극대화할 기발한 아이디어를 접목해불편함이 없다. 일본의 박스형 경차를 흉내 낸 기아차 레이만 보더라도 압도적인 공간 활용도로 자가용은물론 영업용으로도 사랑받는다.
현재 일본에서 시판하는 50여종의 경차 중 박스형이 절반가량이다.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이 시장에서가장 많은 판매를 기록하는 차가 바로 혼다 N-박스다. 일본 내수 시장에서만 매달 2만 대가 넘게 팔린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경차 시장의 베스트셀러는 다이하쓰 탄토였지만, 2011년 출시된 N-박스는 이듬해 바로 경차 1위에 올랐다. 혼다가 경차 시장에 약하다는 편견을 단숨에 깨버린 셈이다.
혼다가 판매 중인 7종의 경차 중 3종이 N-박스 파생 모델이다. 기본형인 N-박스 외에 휠체어를 싣거나 뒷좌석을 침대로 만드는 등 다양한 공간 활용이 가능한 N-박스+, 쿠페 디자인으로 보다 감각적인 느낌을 주는 N-박스 슬래쉬 등이다. 여기에 N-박스 커스텀이라는 스포츠 디자인 버전도 마련된다. 1가지 차종의 다양한 가지치기를 통해 개발 효율성을 극대화하면서 소비자의 다양한 니즈에 대응했다.
N-박스가 박스형 경차 중에서도 독보적 인기를 끄는 게 디자인이나 성능이 대단히 좋아서는 아니다. 일본경차는 차체 크기와 배기량, 출력 모두에 제한이 있어 성능 차별화는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차체 규격을가득 채워 상자 모양으로 차를 만들다보니 디자인을 색다르게 꾸미기도 어렵다. 그런 상황에서 혼다의 선택은 ‘경차의 고급화’였다.
N-박스의 콘셉트를 처음 구상한 건 2009년 취임한 이토 다카노부 사장이다. 그는 NSX 개발 엔지니어 출신으로 ‘운전이 재미있는 차’를 다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수익성이 떨어지는 스포츠카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판매량을 견인해 줄 수 있는 모델이 필요했고, 그는 일본 내수의 거대한 경차 시장을 그 해법으로 선택했다.
이토 다카노부 사장의 전략은 명료했다. 하나의 경차 플랫폼을 활용해 다양한 스핀-오프 모델을 개발, 여러수요에 대응하는 것. 개발비는 절감되면서 개성 넘치는 다양한 경차 제품을 선보일 수 있었다. 혼다 경차의시조인 N360의 레트로 버전인 N-원, 톨보이 해치백 스타일의 N-WGN 모두 N-박스와 같은 플랫폼을 공유한다. 심지어 미드십 스포츠 경차 S660도 일부 같은 모듈을 공유해 코스트를 낮췄다.
여기에 고급차 못지않은 각종 장비를 탑재했다. 경차 천국 일본에서도 결국 경차는 저렴한 차라는 인식이 있었다. 100만 엔을 조금 넘는 차에 첨단 주행보조장치는 사치였다. 하지만 혼다는 여기서 패러다임 전환을 시도한다. 전방충돌경보 시스템(FCWS)과 능동형 긴급제동(AEB), 차선이탈경고장치(LDWS) 등 당대 중형차 이상에나 탑재되던 안전장치를 속속 N-박스에 탑재했다. 뿐만 아니라 운전석·동승석 듀얼스테이지 에어백을 비롯한 6-에어백, 안전벨트 프리텐셔너 등을 적용해 충돌 안전성도 비약적으로 끌어 올렸다.
상품성도 강화했다. 깔끔한 인상의 기본형 모델은 디스플레이, 2열 열선 등 넉넉한 편의사양을 두루 갖췄다. 좀 더 스포티한 개성을 표현하고 싶은 소비자를 위해 N-박스 커스텀이라는 디자인 옵션을 마련했다. 경차에서는 보기 드문 프로젝션 타입 HID 헤드라이트와 LED 테일램프가 장착되고 전용 블랙 휠로 멋을 부렸다. 실내는 컬러 앰비언트 라이트와 스티치로 멋지게 꾸몄다.
하지만 무엇보다 눈길이 가는 건 압도적인 실내공간이다. 실내 높이는 무려 1.4m로 어린이는 차 안에 설 수 있을 정도다. 1열에는 벤치형 시트를 적용해 일본 경차의 좁은 전폭에도 불편함이 없도록 설계하고 2열은 2개의 독립 시트로 구성했다. 각 시트는 독립적으로 슬라이딩과 리클라이닝 기능을 적용해 성인 2명이 여유 있게 탈 수 있다. 여기까지는 경쟁 모델과 비슷하다.
주목할 부분은 2열의 공간 활용이다. 양쪽 도어를 모두 슬라이딩 타입으로 설계해 타고 내리거나 짐을 싣기에 최적이다. 혼다의 엔지니어링 강점을 살려 연료탱크를 트렁크 하부에서 차량 중앙 하부로 옮겼다. 그 결과 2열과 트렁크 공간을 완전히 평평하게 설계하고 2열 시트를 다양한 형태로 접을 수 있다. 기본적인 플랫 폴딩 외에도 2열 시트 방석을 뒤로 젖혀 밴처럼 사용하는 등 응용 방법이 무궁무진하다. 평평한 바닥의 장점을 살려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싣고도 성인 3명이 탈 수 있다. 트렁크에 파티션을 추가하고 하단 구조를 개선, 알루미늄 슬로프를 장착한 N-박스+는 별도의 장애인 전용 모델이 아님에도 휠체어를 손쉽게 적재할 수 있다. 시트를 모두 접어 침대로 만들면 캠핑까지 가능하다. 이처럼 배려심 가득한 아이디어야말로 성공의 요인이다.
실용성이 강조되는 박스형 경차지만, 동시에 아이코닉한 패션카로 변신한다. 2014년 12월 추가된 N-박스 슬래쉬(/)는 과감히 전고를 110mm 낮추고 쿠페 스타일을 채택했다. 윈도우 끝이 날렵하게 올라간 숄더라인, 윈도우와 일체감을 주는 매립형 도어핸들 등이 기성 박스카와는 완전히 차별화된다. 내·외장에 패셔너블한 그래픽이나 데칼 옵션을 적용, 누구나 개성을 표현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일반 N-박스보다 10만 엔가량 비쌈에도 2015년 1만 5000대 가량 팔려 틈새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N-박스의 절정을 장식하는 건 ‘기술의 혼다’다운 기본기다. 다카노부 사장 체제 이후 F1에 엔진 공급자로 재진출하는 등 혼다는 엔지니어링 기술력의 강점을 극대화했다. F1과 경차가 무슨 관계가 있겠나 싶지만, 극도로 제한된 규격 안에서 최고의 성능을 끌어내야 하는 경차야말로 브랜드의 개발 역량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세그먼트다. 혼다 N-박스의 엔진을 F1 엔진 개발팀에서 전담 설계한 것도 그 때문이다. 최고출력은 58마력, 최대토크는 6.6kg.m에 불과하지만 최소한의 출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CVT 변속기와 맞물려 경쾌한 주행성능을 낸다. 개선형 ISG를 기본 탑재한다. 일반적인 ISG 시스템이 완전 정차 후에만 작동하는 반면, N-박스는 정차를 위해 속도를 줄일 때도 과감히 시동을 꺼 연료 소모를 줄인다. 공인연비는 일본 기준 25.6km/L이나 된다. 공기 역학에서 불리한 박스형 차가 ‘기름 냄새만 맡아도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밖에도 퍼포먼스를 위한 다양한 옵션이 제공된다. 터보 옵션을 선택하면 최고출력은 64마력, 최대토크는 10.6kg.m으로 오른다. 터보 엔진은 2600rpm의 실용 영역대에서 동급 최고 수준의 최대토크를 발휘한다. 눈이 많이 오는 지역에 산다면 리얼타임 4WD 옵션을 더할 수도 있다. 박스형 경차임에도 운전 재미와편의성을 살려주는 패들 시프트와 크루즈 컨트롤을 선택할 수 있는 점도 눈여겨 볼 부분.
N-박스 기본형은 일본에서 119만 8000엔(한화 약 1180만원), N-박스 커스텀은 164만 5000엔(한화 약 1635만원)부터 시작한다. 실속을 챙기는 소비자와 개성을 중시해 기꺼이 추가금을 지불할 수 있는 소비자를 노리는 투-트랙 전략이다. 실제 판매에서도 N-박스와 N-박스 커스텀이 각각 N-박스 전체 판매 중 42% 정도다. N-박스 플러스가 5%, 나머지 10%정도를 N-박스 슬래쉬가 차지한다. 고부가가치를 낼 수 있는 고급 모델의 판매가 절반이 넘는다.
천편일률적인 박스형 차가 쏟아지는 일본 자동차 업계에서 ‘박스형으로는 더 이상 혁신은 없다’는 게 중론이었다. 이미 경차 규격을 꽉 채운 크기에 새로운 설계를 도입할 여지가 없어 보여서다. 그러나 N-박스는 경차의 가능성이 여전히 무궁무진하다는 걸 증명했다. 고객의 니즈를 철저히 분석하고 독자적인 엔지니어링 기술로 이를 현실화했다. N-박스의 성공은 혼다를 일약 경차의 왕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이후 S660, NSX같은 스포츠 모델을 개발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국내 경차 제조사도 벤치마킹할 부분이 있다. 경차가 수익성이 떨어진다는 건 편견이다. 소비자들은 높은완성도만 갖춰지면 작은 차에도 큰돈을 지불할 용의가 얼마든지 있다. 우리 자동차 업계는 몇 대의 차가 잘팔려 회사를 먹여 살리는 현재의 시스템에 안주해 변화와 혁신을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은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