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성은 우연이며, 수행은 우연에 노출되기 쉽게 만들 뿐이다
견성(見性)은 보상처럼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수행이 옳았다는 확인도 아니며, 개인이 이룩한 하나의 이정표도 아니다. 오랫동안 방석 위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바르게 수행했기 때문에, 혹은 공덕을 충분히 쌓았기 때문에 찾아오는 것도 아니다.
견성은 번개가 치듯 온다.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아무 예고도 없이, 준비가 되었는지조차 묻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무관심함이야말로 연속성과 진보, 그리고 "내 것"이라 부를 수 있는 무엇인가를 원하는 마음에게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수행은 견성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또한 어떤 신뢰할 만한 인과관계에 따라 견성으로 이끌지도 않는다. 수행이 하는 일은 단 하나뿐이다. 생명체를 거듭거듭 그런 상황 속에 놓아두는 것이다. 즉 통제하려는 습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습관, 자아를 유지하려는 습관이 점차 닳아 얇아져, 만약 '봄(seeing)'이 일어난다면 그것을 가로막는 저항이 훨씬 적어지는 상태 말이다.
오직 그런 의미에서만, 그리고 그 의미 외에는 어떤 의미에서도, 수행은 사람을 우연이 일어나기 쉬운 존재(accident-prone)로 만들 뿐이다. 그보다 더 고상한 주장을 정직하게 할 수는 없다.
일어나는 것은 세련된 사유도 아니고, 향상된 이해도 아니며, 마침내 얻어낸 결론도 아니다. 이미 그러한 그대로인 사실을, 아무 매개 없이 갑자기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 속에는 자신이 그 모든 것의 중심이라고 믿어왔던 그 사람 역시 포함되어 있다.
'봄'은 설명보다 먼저 일어난다. 해석보다 먼저 일어난다. 경험을 붙잡을 수 있는 무엇으로 바꾸려는 익숙한 반사작용보다 먼저 일어난다. 거기에는 어떠한 논평도 붙어 있지 않으며, 그 경험 뒤에서 "내가 했다"고 주장하는 어떤 주체도 서 있지 않다.
이를 흔히 공(空)의 눈으로 본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신비한 상태나 형이상학적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어디에도, 어떤 것도, 고정된 자성(自性)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직접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에는 "내가 보고 있다"고 믿던 그 존재 역시 포함된다.
어느 것도 따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것도 홀로 서 있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이루기 위해 제거하거나 고쳐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대부분의 사람을 흔드는 것은 이 봄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이 너무나도 평범하다는 점이다.
이 봄은 희귀하지 않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특별한 조건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미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변하는 것은 봄 자체가 아니다. 변하는 것은 사고하는 마음이 그것을 얼마나 즉각적으로 덮어버리느냐 하는 정도뿐이다. 사고의 주된 기능은 명료함이 아니라 연속성을 유지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생각은 경험 속에 하나의 등장인물을 끼워 넣는다. 지각의 주인이고, 행위의 저자이며, 삶의 전개를 책임지는 미묘한 "나"라는 인물이다.
이 삽입은 자동적이며, 끈질기고, 거의 의심받지 않는다.
기억은 그것을 강화하고, 언어는 그것을 안정시키며, 감정은 그것을 방어하고, 사회는 그것을 확인해 준다.
견성은 이 구조와 논쟁하지 않는다. 또한 그것을 하나하나 해체하지도 않는다.
그저 본다.
그리고 저항도 매혹도 없이 그것이 분명하게 보이는 순간, 그 구조는 스스로 권위를 잃는다.
그것을 대신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더 높은 자아도 나타나지 않는다.
우주적 정체성이 왕좌를 이어받지도 않는다.
남는 것은 주인 없는 삶이다.
행위자 없는 움직임이다.
소유자 없는 경험이다.
이것은 숭고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마음이 마지막까지 숨어 있던 자리마저 사라지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깨달음에 대한 낭만적 환상은 무너진다.
견성이 미치는 충격은 영적인 불꽃놀이나 황홀한 확증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가장 먼저 찾아오는 것은 오히려 방향 감각의 상실이며, 때로는 공황이다.
열리는 공성(空性)은 미리 상상했던 장식된 공허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향 냄새도 없고, 우주적 위안도 없으며, 마음이 은밀히 덧붙여 두었던 온갖 영적 낭만도 거기에는 없다.
갑자기 "나"는 없다.
약해진 것도 아니고, 겸손해진 것도 아니며, 향상된 것도 아니다.
그저 없다.
그리고 다음 순간 찾아오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충격이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삶은 중심인물 없이 어떻게 계속되는가?
걷기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말은 어떻게 나오는가?
운전대에 아무도 없는데 자동차는 어떻게 움직이는가?
이 질문들은 통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갑자기 닻을 잃어버린 정체성의 반사적 기계장치가 던지는 질문이다.
그 순간까지 조용히 경험을 해설하고, 해석하고, 소유하고 있던 익숙한 이야기의 순환고리가 아무 예고 없이 끊어진다.
그리고 우리는 오랫동안 바로 그 순환고리야말로 기능하는 삶의 필수 조건이라고 착각해 왔기 때문에, 그것의 부재를 하나의 위협으로 경험한다.
공황이 밀려온다.
체계는 허둥지둥 움직인다.
생각은 다시 익숙한 중심을 세우려 한다.
누군가가 여전히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는 감각을 회복하려 한다.
삶이 주인 없이도 계속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애초에 시험받도록 허락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재야말로 우리의 본래 자연스러운 상태이지만, 변화가 너무 갑작스럽기 때문에 적응할 시간조차 없다.
몸과 마음은 마치 무엇인가 결정적으로 사라진 것처럼 반응한다.
그러나 실제로 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랫동안 익숙해진 자아는 악의 때문이 아니라, 조건화와 습관, 그리고 관성 때문에 다시 앞줄로 비집고 들어온다.
되돌아오는 것은 예전의 확신이 아니다.
희미하게 재구성된 하나의 기억이다.
다시는 반복될 수 없는 직접성에 대한 기억.
불러낼 수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으며, 그 안에 머물 수도 없는 기억.
기억은 이제, 일어날 당시에는 누구의 것도 아니었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그러나 이미 어떤 것은 돌이킬 수 없이 꿰뚫려 버렸다.
그리고 거의 거칠 정도로 솔직한 한마디가 튀어나온다.
"아, 젠장... 바로 그거였구나."
그러나 이미 늦었다.
이미 지나갔다.
애씀 없이 나타났던 것은 애쓴다고 다시 만들어낼 수 없다.
있는 그대로의 직접성은 이름 붙이는 순간 이미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미끄러져 버린다.
삶은 계속된다.
통제자는 조용히 다시 운전석으로 돌아온다.
다시 결정이 이루어지고, 계획이 세워지고, 하루하루가 흘러가며, 모든 것을 내가 하고 있다는 익숙한 감각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제 역할을 이어간다.
그러나 무언가는 이미 일어났다.
기억은 남는다.
위안으로 남는 것도 아니고, 확신으로 남는 것도 아니다.
그저 희미한 배경음처럼 울린다.
"바로 그것이었는데, 이제는 사라졌다."
하지만 동시에, 무언가는 그것이 완전히 사실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애초에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결코 떠난 적도 없었다.
합장.
R.
『길의 가장자리에서 남긴 노트(Notes from the Edge of the P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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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6.07.08 11:41
첫댓글 본문 내용은 禪을 수행하는 서양불자의 이야기를 페이스북에서 옮겨와 번역한 것입니다. 수행에 참고가 될까하여 소개한 글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접근방식이 서로 다른 두 가지 형태가 불교사적으로, 혹은 지성사적으로 나뉘어 전해집니다. 급작스럽고 직관적인 접근방식=선종, 티베트 족첸, 돈오, 직관 vs 점진적이고 차제적인 방식=위빠사나, 점수, 티베트 보리도차제. 이 두가지 접근법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닌 상보적이라, 인간성의 양측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양쪽면을 다 살펴서 두루 이해한다면 훨씬 넓어지고 자유로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