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은유를 통해 사물의 어떤 속성은 부각하고 다른 속성은 은폐하거나 축소한다. “논쟁은 전쟁”이라는 은유를 사용하는 문화권에서 논쟁은 충돌과 승리, 패배의 사건으로 부각되는 반면, “논쟁은 여행”이라는 은유를 사용하는 문화권에서는 목표 및 목표 달성 과정이 부각된다. “논쟁은 그릇”이라는 은유를 사용하는 문화권에서는 논쟁의 내용과 모양, 형태가 중요하게 간주된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서로 다른 대상과 경험을 식별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어떤 은유를 받아들이면 그 은유가 부각하는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어 경험하면서 그 은유가 갖는 의미를 참이라고 믿게 된다. 이처럼 어떤 문화권의 특징을 이해하려면 뿌리 은유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살펴보면 된다.
은유는 사람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다. 은유는 개인이 경험했던, 특히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가치부여 방식에서 쉽게 드러난다. 사람마다 어린 시절의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자신의 고유한 감정적, 정신적 상태를 개념화하는 비관습적인 원천영역도 다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행동을 통해 그를 이해하려고 하면 잘 안 될 수 있지만, 그가 어떻게 의미부여를 하고 있는가를 보고 어떤 원천자료와 관계하는가를 알면 쉽게 그를 이해할 수 있다.
-<은유와 마음>에서
[단숨에 쓰는 나의 한마디]
‘품위 있는 그녀’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 일단 대사가 속 시원하다. 감추지 않고 바로 속마음을 말한다. 진실일까, 거짓일까, 이것은 중요하지 않다. 진실도 거짓도 곧바로 민낯을 드러내며 튀어나온다. 은유가 별로 없다. 그래서 재밌다.
현재의 김선아를 알아내기 위해 사람들은 그녀의 과거를 늘 캐들어간다. 현재의 행동을 우려하고, 실제로 그런 모습들을 김선아는 보여준다. 단, 김용건은 현재를 고려할 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다가 한 방 크게 먹었다.
그렇다면 과거의 연장선상에서 우리의 현재는 늘 만들어지는 것일까? 현재에서 과거를 재편집해내는 게 글쓰기이고, 그렇게 되면 좋은 삶으로 갈 수 있다는 게 <은유와 마음>이 말하는 메시지이다. 김선아는 그런 과정을 밟지 않아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 아니 드라마의 모든 배우들에게 해당될까? 그래서 은유의 글쓰기를 말하는 것은 지난 시대의 유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직설 화법이 대세인 시대에 말이다.
사람들은 나를 불편해한다. 직설적으로 묻기 때문이다. 특히 현재 하는 일을 자세히 묻는다. 그의 과거보다도 말이다. 상대를 잘 이해해보려는 마음 때문이다. 현재를 알아야 상대의 생각에 다가갈 수 있다. 현재 진행되는 하루가 그의 인식작용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와 미래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현재의 이야기를 기피한다. 그의 위치가 비교되면서 처참히 무너지는 심정을 갖기 때문이다. 나도 그렇다. 대부분 그렇다. 왜 그럴까? 인간의 본성이다.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
‘품위 있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일상적 은유의 소멸을 생각해본다. 은유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만 보여준다. 품위 없는 그녀의 싹쓸이 쇼핑 등등. 품위 있는 그녀의 쇼핑 충동 만족 등등.
직접 화법이 좋을까, 은유가 좋을까? 시대마다 사람마다 다르니 정답은 없다. 흘러가는 대로 만들어가는 대로 가는 수밖에. 세상은 우연과 무작위의 복잡다단한 유기체이기에.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