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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성탄 제2강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
말씀/사9:1-7
요절/사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메리 크리스마스! 구주 성탄의 은혜와 복이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사야 선지자가 살던 시대 이스라엘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하여 흑암이 깊고 암울했습니다. 이런 시대상은 조금의 차이는 있겠지만 고금을 막론하고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짙은 흑암이 걷히고 눈부시게 빛나는 큰 빛이 비치어 올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어떻게 이런 대반전이 일어나게 되는 것일까요? 그 반전의 주인공으로 이사야는 ‘한 아기’가 태어날 것을 예언하며 소개합니다. 이사야가 소개한 그 ‘한 아기’는 과연 누구일까요?
1절을 보십시오. “전에 고통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이사야는 이스라엘 북쪽의 두 변방 지역인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을 언급합니다. 이 두 지역을 합쳐 갈릴리라고 부르는데 이곳은 사사 시대 이래 주변 국가들의 침략에 끊임없이 시달려온 곳입니다. 숱한 사람들이 가족들과 생이별을 한 채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 땅은 침략꾼들을 따라온 이방인들이 차지하고 남은 백성들을 포로로 삼아 압제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땅에는 수많은 혼혈아가 태어났습니다. 또 주변 이방 국가들의 음란한 우상이 대규모로 유입되었습니다. 스불론과 납달리는 더 이상 동족으로부터 이스라엘 본토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의 갈릴리’라 불리며 멸시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스불론과 납달리 땅이 왜 이렇게 멸시당하게 내버려 두신 것일까요?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더 이상 동트는 희망의 아침 빛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보이는 것은 온통 흑암과 죽음의 그림자와 그로 인한 고통과 무서운 절망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 지역 사람들을 ‘흑암에 행하던 백성’,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가장 어두운 이곳의 흑암이 사라지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b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스불론과 납달리 땅을 영화롭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영화롭게 합니까? 2절을 보십시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그 땅이 ‘큰 빛’을 보게 됩니다. 큰 빛은 단순한 LED 조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태양처럼 큰 빛을 가리킵니다. 이 빛은 각 사람에게 영원토록 비추는 빛이요, 죄와 사망의 세력을 물리쳐주는 구원의 빛, 새 생명의 빛입니다. 이 빛이 비칠 때 사람들이 살아납니다. 절망하는 자들이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빛의 정체가 뭘까요? 지난주일 말씀에서 살펴봤듯 이 빛은 ‘돋는 해’로서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비치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죄로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새 생명을 주는 참 빛이 되십니다. 이 빛 되신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이 있은 지 약 700년 후, 갈릴리 나사렛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자랐습니다. 예수님은 그곳 갈릴리에서부터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각종 병에 걸린 자들을 치료해주시고 귀신 들린 자들에게는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그 소문이 퍼지자, 갈릴리 전역을 넘어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건너 사람들까지 큰 빛 예수님에게 몰려들어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 중, 특히 대다수 갈릴리 청년들을 선별해 그들을 인류를 진리의 말씀으로 밝힐 핵심 제자들로 키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큰 빛 예수님을 갈릴리에 보내 비추심으로 그 땅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흑암에 거하며 사망의 그늘진 땅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국제적으로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전쟁 속에 하루에도 숱한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태원 참사로 자식과 친구를 먼저 떠나보내고 슬픔과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죽음의 고통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세상 욕심과 정욕, 교만이 가져다주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고통당합니다. 지나친 경쟁 시스템 속에 비교의식과 열등감으로 힘들어하며 무기력한 인생을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 안정적인 취업이 쉽지 않아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 속에 염려하고 두려움 속에 불면의 밤을 보내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로 인한 염려, 자녀를 양육하면서 주어지는 염려와 내면의 고통들이 있습니다. 이럴 때 내면이 참 어둡습니다. 그러나 빛 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빛이신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아갈 때 우리 인생들의 영혼에 드리워진 모든 흑암이 사라지게 됩니다. 빛이 비치면 어둠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태양이 동트면 어둔 밤이 물러가는 것과 같습니다. 동트는 아침의 눈 부신 햇살처럼 밝은 생명의 빛이 우리의 내면과 삶을 비추어줍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빛을 받게 되면 영혼이 소생하게 됩니다. 누워있던 어둠과 죽음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세상을 향해 포효하는 빛의 사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빛이신 예수님을 모셔 들이고 바라볼 때 우리 내면은 어둠과 염려와 두려움과 죄의식에서 벗어나 밝고 환한 빛의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예수님의 큰 빛이 임하면 그 나라가 창성하게 됩니다. 창성하게 된다는 것은 인구가 늘어난다는 말로 새 생명이 많이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갈릴리의 산부인과라는 산부인과는 대부분 산모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산후조리원도 제일 좋은 곳을 고르려면 임신이 되자마자 서둘러 인터넷 예약을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새 생명이 있는 곳엔 기쁨이 있습니다.
조안 목자님과 뭇별 목자님의 ‘카톡 프사’에 보면 출산 전 만삭 사진을 예쁘고 행복하게 찍은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저도 하윤이, 하늘이의 태아 사진부터 출생 기록들을 보고 어린아이 때의 사진들을 볼 때마다 흐뭇합니다. 곳곳에서 출산의 기쁨, 돌잔치, 혼인 잔치의 즐거움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명을 낳아 키우는 기쁨에 늦둥이를 낳기도 합니다. 결국 그 나라는 창성하여 큰 민족을 이루게 됩니다. 이런 생명의 역사 속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 그 즐거움은 마치 농부가 여름 내내 땀 흘려 일한 대가로 열매를 얻는 추수의 즐거움과 같습니다. 또 목숨을 걸고 전쟁을 치른 후, 승리하여 얻게 된 탈취물을 나누는 즐거움과도 같습니다. 이 모든 기쁨은 주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주 앞에서’ 즐거워하며 기쁨의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이 일은 실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 그래서 주의 백성이 된 자들에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흑암과 사망의 땅에 큰 빛이 비쳤다고 어떻게 이렇게 창성하게 되고 이토록 큰 즐거움이 더해지는 것일까요? 그 큰 빛은 어둠의 땅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멍에’는 수레나 쟁기를 끌기 위해 소의 목에 얹는 구부러진 막대기를 말합니다.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구속이나 억압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큰 빛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인간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모두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게 하셨습니다.
사사기 6,7장에 보면 미디안 백성들은 틈만 나면 이스라엘에 쳐들어와 사람들을 해치고 곡식을 약탈해 갔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기드온을 큰 용사로 세우시고 그와 그의 삼백 용사들을 통해 13만 5천의 미디안 대군을 물리치게 하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큰 빛 예수님도 우리에게 무거운 죄의 멍에를 메게 하는 것과 사탄의 채찍과 막대를 완전히 꺾어버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통해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와 즐거움을 주십니다. 그리되면 이제는 더 이상 전쟁이 필요 없고 평화가 가득한 세상이 됩니다. 전쟁 때 사용하던 군인들의 군화와 피 묻은 군복도 이제는 불사르고 더 이상은 필요 없게 됩니다. 태평성대를 이루고 사람들은 건강하게 장수하며 집집마다 새 생명의 출산 붐이 불고 자손 대대로 번창하고 윤택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이렇게 죄와 사탄의 세력을 이토록 완벽하게 물리치는 것일까요? 이는 친히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고통의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 인간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탄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시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믿고 구주로 영접하면 하늘을 날아가는 듯한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리며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의 큰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면 이 모든 은혜를 베푸실 큰 빛 예수님은 이 땅에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오시는 것일까요? 6a절을 보십시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이사야는 예수님이 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 예언합니다. 실제 그 예언이 있고 약 700년이 지났을 때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어 ‘한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아기의 신분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습니다. 정사는 ‘통치권’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기’는 우리를 다스려주시는 왕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능력과 권세가 많아도 어떤 성품을 가진 왕이 다스리느냐에 따라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의 인생은 달라집니다. 성군의 통치가 다르고 폭군의 통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월급을 많이 주더라도 직장 상사가 힘들게 하면 그곳은 지옥이 됩니다. 또 왕이 권한만 가지고 있을 뿐, 지혜가 없다면 그 나라는 결코 부강해지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은 어떤 왕입니까? 6b절을 보십시오.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 아기가 가진 네 개의 이름은 이 아기가 어떤 존재인지 어떤 왕인지 알려줍니다.
첫째, 예수님은 기묘한 모사입니다. ‘기묘자라 모사라’ 이 두 단어는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모사의 기묘함’, 즉, ‘조언자의 놀랍고 기적적인 지혜’라는 의미입니다. 이사야서 1장에 보면, 인간의 지혜와 인간적인 꾀가 얼마나 어리석은지에 대해 나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자기 생각을 옳다고 주장하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실은 소나 나귀만도 못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런 어리석은 백성들과는 달리 장차 오실 아기 예수님은 놀라운 지혜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골로새서 2장 3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 예수님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예수님의 머릿속에 지식적, 이론적 차원의 지혜만 가득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서의 예수님의 삶 자체가 매우 놀랍고 기적적인 지혜로 충만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우주의 통치자임에도 불구하고 성육신하셔서 동정녀의 몸에서 연약한 한 아기로 태어났습니다. 그것도 화려한 궁궐이 아니라 마구간 구유에서 나셨습니다. 일생 높은 자리에서 섬김받기보다 낮아져 온유와 겸손으로 섬기는 인생을 사셨습니다. 마침내는 십자가에 달려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자 자신의 목숨을 내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이 예수님은 매우 약해 보이고 어리석어 보였습니다. 손해 보는 짓만 골라 하는 ‘바보 예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통해 죄로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고 그들의 주요, 만왕의 왕이 되셨습니다. 매우 강력하고 우주적인 무력이 아니라 겸손히 십자가를 지고 희생하심으로 오히려 죽음을 정복하시고 우리 인생들을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구원해 내는 바로 그 지혜가 너무도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그 지혜의 깊이가 끝이 없는 경이롭고 기적적인 존재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깊은 고민이 있습니다. 문제는 복잡한데 지혜가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고 문제를 해결 받고 싶은데 지혜로운 모사가 없습니다. 인간은 한계적이기 때문입니다. 간혹 친구나 동료, 선배에게 내 문제를 이해해 줄 것 같아서 있는 소리, 없는 소리 다 쏟아놓아 보지만 오히려 그것이 화근이 되어 상처받고 문제가 더 복잡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가 다 털어놓을 때 어떤 문제도 해결해주실 수 있는, 지혜가 깊은 원더풀 상담자입니다.
니고데모는 당대 최고의 엘리트 지성인이었습니다. 부와 권력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근본 문제는 거듭나지 못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임을 단박에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바람 비유를 통해 사람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는 성령의 역사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거듭남의 길은 자신이 친히 십자가에 높이 달려 인류의 죄를 대속함으로 만드는 것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베드로도 밤새 수고했지만 잡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말씀해주셨습니다(눅5:4). 그러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베드로는 고기가 어디 있는지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닷속까지 속속들이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도울 때 무슨 말씀으로,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몰라 막막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근본 문제를 놀랍도록 정확하게 아십니다.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그들을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기막히게 잘 아십니다. 신적 통찰력으로 그들의 고민과 고통하는 모든 문제의 핵심을 아시고 ‘신의 한수’를 가르쳐주시는 ‘Wonderful Counselor’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다가와 주신 것은 우리와 깊이 교제하고 우리의 문제들을 주님의 깊은 경륜 속에서 해결해주시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 순간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감으로 측량할 수 없는 지혜를 가지신 주님을 조언자로 모시는 복을 누리며 살아가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놀랍게도 이사야는 아기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이 아기는 보통 아기가 아닙니다. 육신만 입고 이 땅에 오게 될 뿐,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영원한 하나님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본체가 같고 창조주의 속성을 다 가지신 분입니다. 그래서 창조 때 성부 하나님과 함께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또 물 위를 걸으시고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중풍병자와 나병환자와 38년 된 병자를 비롯한 각종 환자들을 치료해주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썩어 냄새나는 나사로도 어두운 무덤에서 불러내어 밝은 빛을 다시 보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처참히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지할 때 무력감에서 벗어나 학업과 직장, 더 나아가 세상에서 승리하고, 풍성한 내외적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게 됩니다.
셋째, 예수님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여기, 아버지는 사랑의 대명사입니다. 관계적인 측면에서 가족들을 책임지고 양육하고 보호하고 후원하는 사랑의 존재입니다.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고, 대화해주고, 힘을 주고 격려해 줍니다. 자녀들에게 때로는 인생길을 제시해 주는 등대와 같은 존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런 아버지의 따스한 사랑과 보살핌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은 이 같은 아버지가 되십니다. 물론 세상의 아버지, 부모님도 대개 자녀들의 강력한 후원자들입니다. 저에게도 홀로 계신 어머니가 계시는데 최근에는 뇌종양 수술까지 하시고 다리도 많이 불편하십니다. 그럼에도 늘 자식들 걱정하고, 손주들 잘 자라는지 걱정하고, 당신이 자식들에게 폐를 끼칠까 봐 늘 걱정하고 조심합니다. 편찮으신 중에도 자식들 위해 김장도 손수 담그셔서 보내주셨습니다. 교회 섬기는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늘 배려해주십니다. 철없었을 때 제가 대학 다닐 때까지만 해도 어머니에게 함부로 하고 싫은 태를 많이 냈었는데 든든한 힘과 사랑을 주시는 어머니에게 요즘은 감사함으로 자주 전화도 드리고 합니다. 하지만 이 땅의 부모들은 아무리 훌륭해도 자녀들과 계속해서 함께 하질 못합니다. 죽음의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인간 부모의 섬김과 돌봄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저도 막상 아이들의 아빠가 되어 보니 한계적인 측면들을 많이 느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신자들의 영존하시는 아버지입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은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이 예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이 예수님으로 인해 늘 힘과 격려와 위로를 얻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로서 든든한 백이 되어 주시니 웬만한 일은 겁나지 않습니다. 때로는 탕자처럼 죄악 가운데 헤맬지라도 회개하고 돌아가면 언제나 우리를 안아주시는 사랑 많은 아버지처럼 두 팔 벌리고 받아 주십니다. 언제나 영원토록 우리의 든든한 아버지가 되어 주시는 예수님이야말로 우리 인생길에 있어 최고! 입니다. 우리가 아버지 되시는 예수님의 한없고 영원한 그 사랑을 충만히 누리며 살아가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넷째, 예수님은 평강의 왕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권력자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설령 선한 권력자가 있다 하더라도 한계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로 고통당하는 자기 백성들에게 평화를 주고자 대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서의 수난을 당하신 분입니다. 이 예수님은 백성들의 아픔과 상처들을 자기 몸으로 담당하시므로 백성들에게 나음을 주고 평화를 주는 평화의 왕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제자들을 찾아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20:21).” 또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우리는 믿음으로 이 예수님과 함께할 때 진정한 쉼과 평화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아담의 범죄 이후, 죄의식으로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또 인간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어서 상대가 조금만 맘에 안 들어도 짜증부터 냅니다. 사회생활 하면서 많은 스트레스로 내면에 평안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불화, 이웃과의 불화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의 평강은 노력으로도 돈으로도 살 수 없습니다. 결국 참된 평강은 하나님과의 화목으로부터 주어집니다.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한다고 해서 어려움이나 고난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고난 가운데서도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이 함께 해 주실 때 우리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강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은 사람들의 내면에 자리 잡아 그 사람이 생활하는 전 영역에서 속히 꽉찬 열매로 나타나는 참된 평강입니다. 우리가 평강의 왕 예수님을 모셔 들임으로 이 같은 평강을 누리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이 세우실 나라는 영원무궁합니다. 이 세상의 법은 때로는 불공평하게 적용되기도 합니다. 세상 권력은 대다수 불의하고 부패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공평과 정의로 다스려주십니다.
어떻게 이런 나라가 이루어질까요? 7b절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사랑하셔서 자기 백성들의 삶에 열정적으로 개입하겠다는 것입니다. 실제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직후, 바로 메시아 예수님을 통한 구원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을 통해 주의 백성들을 오랫동안 준비시킨 후, 마침내 예수님을 한 아기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인생들의 연약함을 몸소 경험하게 하신 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구원과 영생의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셨을까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흑암과 죄와 죽음의 그늘에 있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를 구원하고자 열심을 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한 아기로 오시는 성탄이 우리에게 큰 복입니다. 우리가 이 복을 충만히 누리는 가운데 은혜와 감사가 가득한 삶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