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판기의 생물학적 진화 외 4편
빗살무늬 토기에 밥해 먹던 시절
소년은 생각했다
할 수 있다면 나도 공룡을 뽑고 싶어
곰인형보다는 침을 흘리며 헉헉 질주하는 진짜 회색곰을
호미와 쟁기보다 트랙터
탱크로리를
잘게 부순 꿈들을 질료로 삼아 문명이 가지 뻗어나갈 때
자판기는 지하철 티켓
생리대나 티슈
라면과 포켓몬 카드들을 팔기도 했다
다 자란 소년이 자주 퇴근이 늦을 때도
커피 오백 원 생수 천 원 오란씨 천이백 원 홈런볼 천오백 원… 빗살무늬 토기 빛깔 율곡 권은 다 자란 소년이 좋아하는 지폐 유형 투입구는 삼키는 듯하다가 바로 내뱉는다 모서리 접힌 데를 꼭꼭 눌러 다시 집어넣어도 자판기는 오늘따라 좀 예민하다 다 자란 소년은 할 수 없이 메뉴를 바꾼다 한 장 있는 퇴계 권이 들어가자 생수가 꽈다당 떨어진다 하늘에서 별을 따다 그대 두 손에 담아드린 적이 있는 다 자란 소년은 사실 오란씨를 뽑고 싶었던 것이다
자판기도 다 자란 소년도
도깨비방망이도 촛농도 빙하도
쪼그라드는 기분을 어쩌지 못한다
산소, 쾌감, 졸음의 DIY 한 팩씩 뽑아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싣는 행렬들
당신과 저녁, 하고 싶어요
산발 머리 날리는 모습으로
당신을 만나려 합니다
그래야
저놈이 정말 나한테 미쳤나 보다
할
것인즉
그래도
금방 만나주지는 마셔요
밥 뜸 들이듯 그렇게, 그러니
그럴 수 있는데 그러지 않는 것처럼
르네 프랑수아 길랭 마그리트입니다
풀네임을 말하지 않아도
나는 르네 프랑수아 길랭 마그리트가 아닙니다
오브제에 자신을 뒤섞으며 시침을 떼도
당신은 결정적인 단서를 조금씩은 보여주죠
울컥하면서 두 개의 차원 사이에 난 길을 따라
나는 걷게 되어 있어요
편견 없는 오해와
오해 없는 왜곡을
정말이지, 기차여행은 꿈도 꾸지 않아요
캔버스는 또 어디에서 유리를 깨뜨릴지 모르고
불가능한 것에 대한 시도는 비일비재하지만
당신을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모험이 될 테니
그저 쿨하게 저녁해요
저녁이 새처럼 날아와
우리 곁에서 날개 접을 때
동상이몽은 계속되겠지만
편백나무 향
연구실인가 싶어 건성으로 스쳐지나다
스무 번은 스쳐 지나다
채소 정원 메트로 팜
엘이디 광선에 넋을 절반쯤 빼앗긴 채
착즙 주스 한 잔을 사 마시고
샐러드용 채소 두 팩을 샀다
지하철을 탄다
어느 행성에 불시착한 우주선에서 키운 감자 싹이라도 되는 듯 품에 안고
고독한 우주비행사처럼 눈을 들면
휙휙 지나치는
저 먼 지구의 그리운 불빛들
편백나무 숲속
통나무집 펜션에 두고 온 나와 교신하는 밤
묵은 때를 묻힐까 봐 모로 눕던
까치발로 걷던
온몸에 안테나가 돋던
상의를 벗어
편백나무 향을 턴다
주머니를 뒤집어 무기는커녕 먼지 한 점 없다는 것을 보여주며
어쩐지 나는 또 메트로 팜의 채소 정원에 남겨져
이정표
수락산 입구로 들어선다 샘물처럼 차고 날렵한 발걸음이 사기막길로 접어들어 암릉길을 거쳐 누군가 먹다 버린 사과인지 썩은사과바위를 지난다 홈통바위는 통제 중 우회하니 주봉 아래로 꼭지바위 소리바위 젖소바위 보인다 어느 산이건 정상을 눈앞에 두면 나타나고야 마는 깔딱고개
비껴가는 길에는 덤불이 우거지고
산짐승이 호젓하니 새끼를 낳고 한가로이 먹이를 찾겠지만
누구도 찾아내지 못하는 길은 이제 없다
이정표는 사력을 다했다
이정표가 없어서 바다는 넓고
이정표가 많아 도시는 비좁다
사막이 횡행하고 초원이 출몰하는 정신 지대에서 우리는 여전히 길을 잃는다 버스에 놓고 내린 우산은 정처를 잃고 아무나 따라가곤 했을 것이다 아무려나 모국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지평선 너머를 향해 밴을 모는 몽골 사내가 길을 잃을 확률에 일만 투그릭을 건다고 한들 떠들고 웃자고 하는 내기에도 정처가 없다
인력시장 입문기
돈이 말라서 모인 사람들의 새벽 네 시
운 좋은 이들만 이곳저곳으로 뽑혀가는 인력시장
작업반장은
어이!
좀 대접한다 치면 이 씨!
그래도 이게 어디냐
팔려나갈 만한 인력들이 빠져나간 후 걸려든
원예농장 잡부일
네발로 기며 쇠스랑과 갈퀴로
정원수 아래 떡이 된 낙엽을 긁어낸다
곡괭이, 쇠꼬치로 뽑은 잡목과 잡초도
전지 작업 부산물도
마대에 담아 몇 번이고 한데 모아
쓰레기 하치장으로 달려갈 타이탄에 던져 올린 후
목장갑을 벗어 탁탁 털 때
내일 하루 더 나오라고
작업반장이 모자를 들쳤다 고쳐 쓰며 선심 쓴다
인력시장을 거치지 않은 특채
이게 또 어디냐
꽉 막힌 귀갓길 마음의 스텝은 깃털 같고
마시지 않아도 취하는 막걸리 같다
삭신이 쑤셔 죽다 산 사흘 동안도
통장만 생각하면 웃음 고였다
인력시장 선임은 전화기 너머로
“그 돈, 줄에 말려서 두고두고 보라!”
―《시와문화》 2024년 겨울호